[김성열 칼럼] 직산(옛) 위례성 백제초도는 부정할 수 없다

기사입력 2019.09.16 14:13 댓글수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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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성열실장.png▲ 김성열 소장 / 천안역사문화연구소.
    [천안신문] 천안시로부터 용역받은 충남역사문화연구원은 2009년부터 2011년까지 3차에 걸친 위례성 지표 발굴 학술 조사를 갈무리했다.

    천안향토사학회와 폭 넓은 합동조사는 천안향토역사 정신이 충분하게 전달되고 위례성권역 지표 확대 발굴 조사의 의미와 필요성을 확인 제기 하였다.

    직산(옛) 위례성은 문헌 사료에 전하는 바로는 고려시대부터 삼국유사, 삼국사기를 시작으로 백제 첫 도읍 위례성을 비정하는 기록이 전하고 있고, 주변지역에서 백제와 관련한 전설과 민속 지명 이 확인 되었다. 따라서 직산 위례성이 백제 초도라는 문헌 자료가 남아 전하는 까닭에 구체적이고 객관적인 연구가 꾸준히 요구되어 왔다.

    직산(옛) 위례성 발굴 조사는 1988.5.1. 천안향토문화연구회(회장 김성열) 주관으로 위례성 산행 토론회를 계기로 시작되었다. 서울대박물관장 임효재 박사를 초청한 토론회는 학계와 시민들에게 직산 위례성 연구에 관심을 높였다.

    1989년 5월 13일 KBS한국방송공사의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약 1주일 정도의 기간에 걸쳐 서울대학교인문과학연구소가 고고학적 조사를 담당했다. 1989년 5월 23일 그 결과를 KBS 9시 뉴스 직산위례성에 관한 보도, 그리고 6월 10일 르뽀 60시간 직산위례성을 집중 보도하여 직산위례성 백제 초도설이 국민들에게 널리 홍보 되었다.

    당시 정하용 천안시장은 위례성 발굴 조사연구 법인체 설립을, 송석상 천안군수는 유물유적 보존 대책을 약속 했었다. 서울대학교인문과학연구소가 주관한 1995년 5월/7월 1차, 1996 년 9월/11월 2차에 걸친 발굴 조사 결과는 대략 통일 신라시기 성벽 축성으로 학인 되고, 성내에서는 통일신라시대 유물 외에 백제 유물이 발굴 되었다.

    이어서 충남도역사문화연구원이 2009.11.5./2010.5.20 1차 지표 조사, 2010.9.13/2011.1.9 2차 발굴 조사 그리고 2011년 6월 15일부터 3차 학술조사를 시작하여 2011년 말로 위례성 발굴 지표 학술조사를 갈무리 했다. 성무용 천안시장 공약사업으로 도비, 시비로 추진되었다.

    발굴 결과 보고는 현재에도 성내에서는 삼족토기를 비롯한 백제유물이 출토되고 있어 백제시대에 어떠한 용도로든 활용되었던 지역인 것을 분명하게 알 수 있었으며 산성의 명칭이 백제초도지의 지명인 것과도 전혀 무관할 수 없어 아직까지 위례성의 성격에 대한 정확한 성격 파악이 요구되는 상황이다.

    성벽은 고려시대이전부터 석성과 토성으로 조성 및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높은 것을 파악 됐다. 우물 지역은 고려시대부터 축조된 것으로 보인다. 우물하부 조사 과정에서 백제 시대 토기와 삼족기편 등 고려시대 유물과 함께 출토되었다. 일설에 비류와 온조의 어머니 소서노의 무덤으로 추정되던 적석 유구는 적석묘를 포함하는 묘제에 해당하는 유구는 아닌 것으로 판단되었다.

    직산 위례성의 고고학적 증거를 찾는 과정에서 사학계에 보고되지 않은 성거읍의 문성(文城)과 직산읍의 도토성(都土城)에 대한 정밀 조사가 제기 됐다. 그리고 산성인 사산성(蛇山城)의 추가 조사 의견을 제시했다. 또한 직산 위례성 백제 초도 설과 위례성 권역 안에 각종 설화 전설은 역사성을 반영하는 문화 상품 소재로 개발 노력도 필요하다는 제안이다.

    위례성 영역은 위례산성에서 내려다보이는 전 권역 안으로 비정되어야 한다. 위례산성 대체적인 발굴을 시작으로 위례 백제권역을 넓게 유적이 있는 지역은 부분적으로 세밀하게 발굴 조사해야 한다는 의견이 제시 되었다.

    수차에 걸쳐 이루어진 직산(옛) 위례성 지표 발굴조사 결과 보고는 직산 위례성 백제 초도설을 고증할 수는 없었다. 2천년 전에 단 13년 동안의 위례 백제의 유물유적을 발굴하여 고증하려는 것은 처음부터 불가능한 것이었다. 온조가 BC 18년에 위례 백제국을 세우고 BC 5년에 한성 백제로 천도한 사실을 기록한 문헌을 부정할 수는 없다. 다만 고고학적으로 유물유적을 고증하고 판단 할 수 없을 뿐이다.

    백제초기 위례성 유물유적은 직산(옛) 위례산성이나 서울 풍납토성 어디에서도 발굴되지 않았다. 학계에서는 한성 백제설 만을 일방적으로 주장하며 공주 유적지 안내문이나 교과서 내용에 기록되고 있다. 위례백제시대가 없는 한성 백제만을 제시하는 역사 오류가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고증되지 못한 학설은 개연성을 인정하고 비정은 계속되어야 한다. 유적 안내문이나 교과서 내용에 한성 백제만을 표기하지 말고 개연성이나 비정 가능성 있는 백제 초도 위례성으로 표기 되어야 한다.

    2010세계대백제전을 밝혀 줄 백제 혼불이 지난 9월 16일 위례산성에서 고천제(告天祭) 의식을 대체한 온조왕 제향에 이어 혼불을 채화했다. 위례산성에서 채화된 백제혼불은 한성백제와 풍납토성에서 채화된 백제 혼불과 부여에서 합화된 것은 역사적인 쾌거였다.

    직산(옛)위례성 백제 초도설은 고문헌, 고지도와 성씨 설화에 전승되어 오고 있을 뿐 아니라 백제시대 초도 국성(國城)이 울례성(옛 몽고어)을 한문 표기하여 慰禮城이고, 통일신라시대에는 國(국)에 가까운 발음 위라(터키어)를 蛇山이라 漢文 표기하고, 고려시대에는 국(國)에 가까운 위리(터키어)를 한문 稷山으로 표기한 지명 변화 과정이 천안지방에만 공존해 온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 천안시에서는 문헌으로 확인된 직산에 온조전 복원을 추진하고 있으며, 온조왕 숭모회에서는 온조전 옛터에서 매년 제향을 거행해 오고 있다.

    고집스러운 학계 주장에 망서 릴 필요 없다. 한성백제전에 버금가는 위례백제전(慰禮百濟典)을 자랑스럽게 개최하는 방안도 검토해 보자. 백제 초도 직산(옛) 위례성설은 고문헌, 고지고 성씨 설화로 전승된 근거를 계속 연구하여 우리 시대에 백제 역사정신을 역사문화 관광자원으로 개발 창조해야 한다.

    천안시가 광역도시로 발전하면 현재 동남구, 서북구명을 북부지역은 위례구(慰禮區)로 서부지역은 영성구(寧城區)로 동부지역은 大木區(대록, 목주)로 역사성 있는 지명으로 정립해야 한다. 위례성로나 위례성 가는 길 지명은 역사지명 정신을 우리시대에 살아나게 한다.

    1951년에 역사성 있는 지명 위례초등학교로 개교하였는데 폐교 위기 과정에서 천북초등학교와 통합하고 위례초등학교 이름을 유지한 사실이 있다. 서울에 위례초등학교 위례성 가는 길 안내판이 역사 근거 없이 세워져 있다. 송파구에서 위례신도시 개발로 위례지명을 차용하고 있어 천안시에서 강력하게 대응해 온 사실도 있다.

    끝내 3차 위례성 지표 발굴 학술 조사에서도 백제 초도설을 확인할 수는 없었다. 역사는 역사의식과 시대정신이 투철한 집단만이 유지 소유 할 수 있다. 역사문화는 창조할 수 있는 능력 있는 집단만이 소유 할 수 있고 누릴 수 있다. 백제초도 직산위례성 학설을 백제역사 정신으로 전승하고, 천안의 시대정신으로 발흥하여, 천안정신으로 선양하여야 한다.

    역사는 숨겨 놓을 수 없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는 미래는 없다. 역사는 창조하는 자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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