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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유학생이 바라본 한국문화⑰ - 알제리 ‘쉬리피 나시마’[천안신문] 천안신문에서는 외국인 유학생들이 한국에서의 유학 생활 중 보고 듣고 느끼고 경험한 소소한 이야기를 시민들에게 전달하고자 선문대 한국어교육원(원장 하채수)의 협조를 얻어 연재한다. 나는 한국 정부 초청 장학생으로 선발되어 북아프리카 알제리에서 한국에 왔다. 한국에 온 지 벌써 9개월이 되었다. 그런데 나는 제약 공학 박사 과정 학생일 뿐만 아니라 알제리 태권도 국가 대표 선수이기 때문에 매우 바쁘게 생활하고 있다. 알제리에서도 운동은 물론 공부도 해야 해서 바쁘게 살아왔지만 지금은 한국어도 배워야 하기 때문에 더 바쁘게 살고 있다. 나는 우리나라에서 15년 동안 태권도를 배웠는데 태권도의 종주국인 한국에 와 보지 못했기 때문에 ‘국기원’하고 ‘태권도원’이 있는 한국에 정말정말 오고 싶었다. 그런데 드디어 2017년에 나의 꿈인 한국 방문이 이루어져 얼마나 행복한지 모른다. 한국에 도착했을 때 마음이 진짜 설레고 공감한 것이 많았다. 그래서 먼저 어디에 가야 할지 고민을 많이 했다. 하지만 아무래도 내가 사랑하는 태권도의 본부가 있는 국기원과 태권도원에 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일단 서울 강남에 있는 국기원과 전라도 무주에 있는 태권도원을 방문했다.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정말 크고 재미있었고 얼마나 예뻤는지 모른다. 이렇게 태권도 덕분에 처음으로 한국을 사랑하게 됐지만, 이제는 한국에 와서 다양한 한국 문화를 직접 체험하고 싶으니까 여러 지역을 많이 구경하고 싶었다. 그래서 시간이 날 때마다 서울타워, 에버랜드, 남이섬 그리고 경복궁하고 다른 장소에도 가봤다. 나는 태권도를 하면서 한국 친구들을 사귀었고, 그 친구들과 많은 시간을 보냈으니까 한국 문화 대해 아주아주 많이 배웠다. 예를 들어 한국의 식사 예절, 한국의 결혼과 설날 풍습 등 모두 관심이 많고 우리나라의 문화와 다르지만 재미있어서 너무 좋아한다. 한국에서의 모든 경험들이 기억에 남고 아름답지만 그중에서 평창에서의 경험이 최고였다. 한국에 오기 전부터 나는 동계 올림픽이 한국에서 개최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평창에 갈 수 있을까?’ 라고 생각했다. 다행히 우리 태권도 친구들이 평창 동계 올림픽의 봉사활동에 참여를 해서 나를 초대했다. 평창에서 다른 친구들을 만나고 개막식에 참석할 수 있어서 여간 행복하지 않았다. 잊을 수 없는 또 하나의 추억을 만들어서 정말 기뻤다. 나는 태권도를 배우게 되면서 처음으로 한국을 알게 되었고, 이제는 한국에 와서 한국 문화를 직접 체험하고 나서, 한국의 아름다움과 한국 사람들의 정을 느끼고 한국의 매력에 푹 빠지고 있다. 그리고 태권도를 알게 되어 내 삶이 많이 바뀌었다. 태권도를 통해 인내와 예의와 겸손 등을 배웠고 많은 사람들과 교류하면서 세상을 보는 눈이 넓어졌고, 이렇게 한국에까지 오게 되었다. 앞으로 한국에 있는 동안 우리나라 문화도 소개하면서 더 많은 한국 문화를 경험하고 싶다. 또한 한국을 비롯한 여러 나라의 친구들을 많이 사귀면서 즐겁게 한국생활을 하려고 한다. 그리고 우리나라에 돌아가면 태권도는 물론 한국의 훌륭한 문화도 소개하면서 두 나라의 발전을 위해 노력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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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유학생이 바라본 한국문화⑯ - 우크라이나 ‘레브추크 알리나’[천안신문] 천안신문에서는 외국인 유학생들이 우리나라에서의 유학 생활 중 보고 듣고 느끼고 경험한 소소한 이야기를 시민들에게 전달하고자 선문대 한국어교육원(원장 하채수)의 협조를 얻어 연재한다. 나의 이름은 알리나, 국적은 우크라이나, 한국 나이로 28살이다. 나는 작년 8월에 그토록 오고 싶어 했던 한국 땅을 드디어 밟았다. 선문대에서 외국인 장학생으로 초청을 해 주신 덕분에 현재 한국어교육원 고급반에서 한국어를 공부하고 있다. 꿈속에 그리던 한국에서의 유학생활은 마치 한 편의 ‘드라마’와 같았다고 말하고 싶다. 그 드라마 가운데 잊을 수 없는 일화 몇 가지를 사랑하는 나의 한국 친구들에게 들려드리고자 한다. 내 인생의 드라마에서 한국과의 운명적인 만남은 한국에 오기 훨씬 오래 전부터 시작됐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나는 지금도 여전히 한국 드라마앓이를 하고 있지만 우크라이나에서는 ‘한국 드라마 폐인’이었다. 한국 드라마를 보자마자 나는 한국 문화에 빠져들었고 일찍이 경험하지 못한 문화적인 충격으로 크나큰 감동을 받았다. 그 이유는 무엇보다도 남녀 관계의 순수함에 깊이 매료되었기 때문이었다. 순수하고 이상적인 사랑만큼 우리의 가슴을 설레게 하는 것이 또 어디 있을까? 게다가 한국 드라마 속에서는 나쁜 사람이나 좋은 사람이나 마침내 서로를 이해하고 화해하게 된다. 결국 주인공은 아무리 악인이라 할지라도 처절한 ‘복수’가 아니라 ‘용서’를 통해서 갈등이 해결된다. 이렇게 한국 드라마에는 인간다운 인간관계가 있었고 스스로 내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본받고 싶게 하는 힘이 있었고, 인간성 회복이라는 사회적인 메시지로 인해 큰 감동을 주었다. 마침내 나는 이처럼 정의로운 한국 사람들과 내 평생을 함께 하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했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는 말씀처럼, 그리고 나는 드라마처럼 한국에 유학을 오게 되었다. 한국에서 찍은 내 드라마를 들려 달라면, 나는 가장 따뜻했던 어느 추운 겨울날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유학 초기에 나는 한국말을 연습하기 위해 어떤 한국 아주머니에게 용감하게 말을 건넨 적이 있었다.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던 도중에 그 아주머니께서는 친엄마처럼 다정하게 내 손을 꼬옥 잡고서 "한국의 겨울 날씨가 춥지 않으냐, 유학생활 힘들지 않으냐, 나이는 몇이나 됐냐? ······" 이것저것 물어보시더니 나에게 갑자기 자기를 ‘엄마’라고 부르라고 말씀하셨다. ‘아니, 엄마라니!! 당신이 내 엄마라고요?’ 나는 마치 드라마 속의 주인공처럼 갑자기 말문이 막혀버렸다. 그러나 만난 지 겨우 몇 분밖에 안 되었을 뿐인데 처음 본 낯선 외국인에게 엄마라고 부르라는 다정다감한 사람들, 그게 바로 한국인이었다. 멀리 유학을 와서 외로울 까봐 기꺼이 엄마가 되어주겠다고 곁을 내어주신 아줌마, 그 분이야말로 내가 알고 있는 나의 진짜 엄마였다. 그래서 나에게는 지금 엄마가 두 명이다. 만날 날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는 우크라이나 엄마도 사랑하지만 추운 겨울날 내 손을 꼭 잡아주셨던 한국 엄마도 나는 정말 사랑한다. 내가 주인공으로 나오는 드라마 속에서 한국의 자연과 경치는 또 어떠한가? 방학 때 바다가 보고 싶어서 한국 친구들을 졸라서 함께 여행했던 외도라는 섬을 결코 잊을 수는 없으리라! 내가 처음 만났던 바다는 텔레비전이나 영화에서 파도가 넘실대는 그런 바다가 아니었다. 놀랍게도 물이 거의 없이 검은흙만이 끝없이 펼쳐진 바다였다. 바다에는 썰물 때문에 하루에 두 번씩 이렇게 된다면서 한국어로 '갯벌'이라고 친구들이 알려주었다. 하루에 두 번씩 바다가 육지로 변했다가 육지가 바다로도 변한다는 사실이 내게는 마냥 신기했다. 그것은 마치 ‘하늘이 땅이 되었다가 땅이 하늘로 바뀌었다.’는 말처럼 믿기지 않았다. 그런데 거기에서 나는 중요한 사실을 깨달았다. 낮과 밤이 바뀌어야 새로운 날도 가능하고, 봄여름과 가을겨울이 계속 바뀌어야 새로운 계절도 가능하다는 것이다. 어쩌면 나의 인생도 우크라이나에서 한국으로 완전히 바꾸었기 때문에 새로운 삶을 살 수 있게 되었던 것은 아닐까? 아무튼 물이 없는 한국의 바다와 갯벌덕분에 나는 한층 더 성장할 수 있었다. 그런데 거기! 밀물과 썰물의 기적이 일어나고 있는 그 바닷가에서 나는 또 한편의 드라마를 찍을 수 있었다. 길거리에서 팔고 있는 ‘번데기’가 바로 그것이었다. 미래에는 모든 사람들이 곤충들을 먹게 되고 기아 문제를 이런 식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들은 적이 있었지만, 내 마음 한 구석에서는 ‘세상에!! 어떻게 징그러운 곤충을 먹을 수 있지?’라고 생각하면서 도저히 먹을 수 없었다. 여러 번의 망설임과 고민 끝에 '그냥 도전해 보자! 설마 죽지는 않겠지'라는 심정으로 눈 딱 감고 한번 먹어 봤다. 그런데 첫 냄새는 고약했지만 겉보기와는 달리 맛도 고소하고 괜찮았다. 게다가 실제로 먹어본 후에, '뚝배기보다는 장맛'이라는 한국 속담의 뜻도 더 잘 알게 되었다. 그러고 보니 징그럽게 보이던 번데기의 겉모습도 더 귀엽게 보였다. 이렇게 한국인들은 벌써 옛날부터 먹고 있었던 미래의 음식을 나는 먹어 보게 되었고, 내가 가지고 있었던 고정관념 하나를 버릴 수 있게 되었다. 이처럼 드라마 같은 나의 인생에서 한국 드라마를 좋아하는 나는 한국 오기 전에 한번만이라도 드라마 촬영하는 모습을 보는 게 소원이었다. 우리가 살고 있는 21세기에서 영화나 TV는 각종 정보는 물론 사람의 마음을 전달할 수 있는 가장 유용한 도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국 대중문화도 경험할 겸 해서 드라마를 촬영하는 것을 너무나 보고 싶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나의 하나님께서는 그 소원을 너무나 빨리 들어주셨다. 마침 우리 선문대에서 '로봇이 아니야'라는 드라마를 촬영한다는 것이었다. 무조건 달려간 그곳에서 나는 드라마에서 자주 보았고 너무나 좋아하던 한 분을 만날 수 있었다. 한국어를 좀 말할 수 있었지만 긴장한 나머지 “저는 알리나라고 합니다.”라는 말밖에 아무 말도 하지 못 했다. 그래도 다행히 사인 하나를 받아서 나의 소중한 추억으로 간직할 수 있게 되었다. 나는 오늘도 그토록 꿈꾸었던 한국에 와서 이처럼 놀라운 경험들을 하면서 날마다 행복한 드라마를 찍고 있다. 아직도 한국어와 한국 문화를 더 열심히 공부해야 하지만 드라마 같은 나의 인생에 대하여 한국 드라마 속의 그 아름다운 주인공들처럼 앞으로 ‘알리나의 행복한 드라마’를 더 많은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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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유학생이 바라본 한국문화⑮ - 인도 ‘얄이니 베누고팔’[천안신문] 천안신문에서는 외국인 유학생들이 우리나라에서의 유학 생활 중 보고 듣고 느끼고 경험한 소소한 이야기를 시민들에게 전달하고자 선문대 한국어교육원(원장 하채수)의 협조를 얻어 연재한다. 내가 한국에 온 지 이제 8개월 지났다. 처음에는 유학생활이 어려웠지만 지금은 좀 익숙해졌다. 한국에 왔을 때 한국어도 모르고 인도하고 문화가 달라서 아주 힘들었다. 예를 들면, 인도에서 24년 동안 숟가락과 손을 사용해서 음식을 먹었는데 한국에서 젓가락으로 음식을 먹는 것을 보고 놀랐다. 지금은 젓가락을 사용할 수 있지만 한국에 오기 전에 "어떻게 이 스틱으로 음식을 먹을 수 있을까?" 라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천안에 온 후 처음으로 한국 식당에 가서 국수를 주문했는데 식당 아줌마가 숟가락과 젓가락을 주셨다. 내가 외국인이라서 포크를 달라고 부탁했는데 식당 아줌마는 포크를 준비해 놓지 않았다고 했다. 그때 젓가락 사용법을 전혀 몰라서 어쩔 수 없이 국수 한 그릇을 40분 정도 걸려서 먹어야 했다. 이런 일 때문에 창피해서 기숙사로 돌아가는 길에 젓가락을 사서 일주일 동안 젓가락으로 먹는 연습을 했다. 어려웠지만 계속 노력하니까 젓가락을 자연스럽게 쓸 수 있게 되었다. 그러고 나서 그 식당에 다시 가서 같은 국수를 주문했는데 이번에는 식당 아줌마가 나를 보더니 수저를 주시면서 포크도 같이 주셨다. 그런데 내가 포크를 쓰지 않고 젓가락으로 먹는 것을 보시던 식당 아줌마가 깜짝 놀라시면서 칭찬을 해 주셨다. 그때 내가 얼마나 자랑스럽고 기뻤는지 모른다. 한국에 비하면 인도 사람들은 고기를 잘 먹지 않는 편이다. 특히 종교적인 이유 때문에 소고기를 절대 안 먹고, 돼지고기 먹는 사람도 별로 많지 않다. 반면에 염소 고기와 치킨을 즐겨 먹는다. 인도에는 채식주의자들도 많다. 나는 인도에 있었을 때 일주일에 한 번만 고기를 먹었기 때문에 한국에서 매일매일 고기와 생선 먹는 것을 꺼려했다. 그리고 어느 식당이든 대부분 소고기와 돼지고기가 들어가는 음식이 많아서 친구들과 같이 외식을 할 때 아주 불편했다. 왜냐하면 한국어 말하기가 부족해서 정확하게 주문을 할 줄 몰랐기 때문이다. 이제는 한국어를 어느 정도 할 수 있으니까 식당에서 주문할 때 고기를 빼 달라고 이야기를 할 수 있어서 괜찮다. 인도와 달리 한국에는 사계절이 있다. 내가 한국에서 사계절을 다 보니까 각 계절마다 아름답고 흥미로운 풍경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내가 개인적으로 가을과 봄을 아주 좋아한다. 그 계절에는 날씨가 좋을 뿐만 아니라 경치가 매우 아름답다. 그런데 작년 겨울에는 날씨가 아주 추웠지만 나는 친구들과 눈사람을 만들고 눈싸움도 하면서 즐겁게 놀았다. 그리고 한국에서 봤던 첫눈은 내가 평생 잊지 못할 추억 중의 하나가 되었다. 나는 구경하는 것을 좋아하니까 시간이 있을 때마다 여행을 하는 편이다. 그렇게 다양한 곳을 여행하면서 그곳의 문화도 배우고 추억도 많이 쌓고 싶다. 인도에 있었을 때 한국 영화 '부산행'을 본 적이 있었는데 한국에 가면 부산에 꼭 가 보고 싶었다. 때마침 지난번 봄 방학 때 부산으로 이사한 내 한국 친구한테 초대를 받아서 부산으로 2박 3일 동안 여행을 떠났다. 원래 그 영화에서 본 것처럼 KTX를 타고 싶었는데 표 값이 너무 비싸서 고속버스로 부산에 갔다. 그런데 좀비를 보지 못해서 좀 안타까웠다. 부산에 도착하기가 무섭게 친구 집에 짐을 놓고 바로 자갈치 시장을 구경하러 갔다. 자갈치 시장은 해산물을 판매하는 유명한 곳이다. 내 인생에서 이렇게 다양한 해산물을 본 것은 처음이었다. 그리고 그곳 사람들이 살아 있는 낙지를 너무 즐겁게 먹는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다. ‘산낙지’를 파는 아저씨가 나에게 산낙지를 맛보라고 했는데 진짜 무서워서 먹을 수 없었다. 그 다음에 친구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음식을 사려고 식당으로 들어갔는데 식당 사장님이 말씀하시는 사투리를 하나도 이해하지 못했다. 결국 한국 친구 덕분에 음식을 주문할 수 있었지만 부산 사투리가 한국말이 아닌 다른 언어처럼 느껴졌다. 다음 날에는 해운대와 용궁사에 가기로 했다. 바다 구경도 할 겸 부산 아쿠아리움도 볼 겸 해운대에 갔다. 거기에서 사진을 많이 찍고 친구들과 아름다운 추억을 만들었다. 나는 내 한국 친구에게 인도 음식의 맛을 알려주고 싶어서 점심을 먹으려고 해운대 근처에 있는 인도 식당에 데리고 갔다. 그런데 거기서 일하는 인도 사람의 모국어와 내 모국어가 달라서 어쩔 수 없이 한국어로 대화해야 했다. 같은 나라 사람인데도 서로 말이 통하지 않아 한국말로 이야기하던 그 상황을 보고 내 친구들은 배가 아플 정도로 많이 웃었다. 보통 한국에 사찰이 산에 있지만 용궁사는 바닷가에 있으니까 관광객들에게 인기가 많은 것 같았다. 그래서 나도 거기에 가서 구경을 했다. 마지막 날에 태종대를 관광하고 오후 4시에 천안으로 오는 버스표를 예매하기로 했다. 태종대까지는 걸어가고 싶었지만 시간이 부족해서 배로 갔다. 나는 전에 배를 타 본 적이 없어서 배표를 사기 전에 많은 생각을 했다. 하지만 다른 방법이 없어서 표를 살 수밖에 없었다. 근데 매표소 직원이 나한테 한국어 실력을 확인한다고 하면서 한국말로 대화를 시도했다. 내가 그 직원의 질문에 다 대답하자 그 직원 분은 나를 칭찬하면서 표 값도 할인해 줬다. 처음으로 배를 타 봤는데 정말 재미있었다. 그 40분 동안 시원한 공기도 느끼고 아름다운 바다도 볼 수 있어서 마음이 편안해졌다. 그 다음에 한국 친구 집에 들렀는데 친구의 어머니께서 나를 위해 특별하게 떡국을 준비해 주셨다. 고향에 계신 우리 엄마가 음식을 만들어 주신 것 같아 큰 감동을 받았다. 그리고 인사를 드리고 천안행 고속버스에 올랐다. 내가 제일 하고 싶었던 부산 여행은 여간 좋지 않았다. 기회가 있으면 다시 부산에 갈 것이다. 사실 한국에 오기 전에 한국에서 '인종 차별' 문제가 있다고 들어서 너무 걱정이 되었다. 그런데 이 8개월 동안 내가 만난 대부분의 한국 사람들은 다 친절한데다가 외국인들을 따뜻하게 대해 주는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요즘은 외국인들과 사귀거나 도움을 주는 한국 사람들도 많아진 것 같다. 그래서 한국에서 사는 동안 한국 친구들을 많이 사귀고 즐거운 유학생활을 하면서 재미있는 추억을 계속 만들고 싶다. 또한 나도 한국 사람들한테 받은 사랑을 언젠가는 되돌려 줘야겠다는 생각을 마음 깊이 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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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유학생이 바라본 한국문화⑭ - 불가리아 ‘네바다 미랴나’[천안신문] 천안신문에서는 외국인 유학생들이 우리나라에서의 유학 생활 중 보고 듣고 느끼고 경험한 소소한 이야기를 시민들에게 전달하고자 선문대 한국어교육원(원장 하채수)의 협조를 얻어 연재한다. 나는 한국의 역사와 문화에 관심이 많아서 시간이 날 때마다 한국의 유명한 곳에 가고 있다. 작년 11월 19일에는 비빔밥으로 유명한 전주에 다녀왔다. 외국인 학생이라면 한국어 책에서 ‘전주비빔밥’을 배우기 때문에 호기심을 가질 수밖에 없다. 사실 한국 친구가 전주에 가보자고 제안했던 순간에 한국사와 문화에 관심이 많은 나는 바로 언제 출발하냐고 재촉을 할 정도였다. 전주에 가기 전에 인터넷으로 전주에 대해 찾아보니까 “전주시는 전라북도의 중앙부에 위치한 도시로 조선시대에는 전라도 감영 소재지로서 호남 지방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고 한다. 전주는 문화 도시니까 내가 한국에 오기 전부터 가보고 싶은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KTX를 타고 전주로 갈 때 한국 친구와 함께 맛있는 고구마를 먹으면서 흥겨운 이야기를 했다. 전주에 도착하자마자 배가 고파 바로 콩나물 국밥을 먹으러 갔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한국어 책에서 배운 속담이 떠올랐다. 아침 9시였는데 신기하게도 식당에는 빈자리가 거의 없었다. 전주에는 원래 맛있는 음식이 많아서 어딜 가나 식당이 꽉 차나 하는 생각을 잠시 하였다. 아침을 맛있게 먹은 후 먼저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의 어진(임금의 사진)을 모셔 놓은 ‘경기전’에 가기로 했다. 근데 어떤 특별한 행사를 하는 날인 것 같았다. 왜냐하면 경기전 앞에는 태조의 복제 어진이 아닌 진짜 어진이 전시되고 있다는 안내판이 붙어 있었기 때문이다. 태조의 어진을 보니 600년 역사를 가진 어진의 기운이 느껴졌다. 그 다음엔 ‘전주사고 실록각’으로 들어가는데 "머리 조심하세요."라는 흥미 있는 문구가 붙어 있는 표지판을 보았다. 그런데도 그만 머리를 부칮치고 말았다. 바보처럼... 하지만 나갈 때도 머리를 또 부딪쳐서 친구가 웃음을 참지 못했다. 경기전을 둘러보면서 친구에게서 한국 역사에 대해 많은 것들을 배웠다. 그러고 나서 친구가 나에게 빼어난 경치를 보려면 ‘오목대’에 올라가야 한다고 했다. 오목대는 언덕 높은 곳에 있기 때문에 전주 한옥마을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좋은 곳이다. 오목대는 ‘태조가 잠시 머무른 장소’라는 뜻이라고 한다. 고려말 이성계가 전라북도 남원시 황산에서 왜구를 물리치고 돌아가는 길에 일가친지를 불러 모아 놓고 잔치를 벌인 곳이라고 한다. 오목대에 올라가서 한참 경치를 보노라면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그 다음에는 전주 향교를 구경하러 갔다. 전주 향교는 옛날 건축물로 그 모습이 환상적이었다. 전주 향교 뜰에 있는 은행나무의 노란 잎들이 절경이었다. 지금도 아름다운데 "옛날에 이 뜰에서 혼자 거닐었다면 분위기가 얼마나 평화로웠을까?"라고 생각했다. 전주에 가면 꼭 가보라는 하는 한옥마을로 들어갔다. 한옥마을에는 오래된 한옥들이 많은데 골목을 걸어가고 있는 사람들은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한복을 멋지게 입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면서 깊은 정취를 느낄 수 있었다. 한옥마을을 돌아다니면서 길거리 음식을 많이 먹었는데 특히 문어꼬치 맛을 아직도 잊을 수 없다.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있다가 저녁 먹을 시간이 되었다. 전통 한식당에서 그 유명한 비빔밥을 먹었는데 둘이 먹다 하나가 죽어도 모를 정도로 맛있게 먹었다. 저녁을 먹은 후에 한참 한옥마을 골목에서 다양한 볼거리를 구경하다가 전주역으로 가는 택시를 탔다. 이렇게 전주 여행을 마치고 KTX 열차에서 친구와 함께 한국의 매혹적인 역사와 문화에 대해 이야기를 하면서 다음에 다시 함께 할 한국여행 계획을 세웠다. 전주에서 본 많은 문화 유적이 인상적이어서 내 마음을 사로잡은 전주에 언젠가 또 다시 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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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유학생이 바라본 한국문화⑬ - 중국 ‘마 친후이’[천안신문] 천안신문에서는 외국인 유학생들이 우리나라에서의 유학 생활 중 보고 듣고 느끼고 경험한 소소한 이야기를 시민들에게 전달하고자 선문대 한국어교육원(원장 하채수)의 협조를 얻어 연재한다. [천안신문] 중국을 떠나 한국에 온 지 벌써 8개월이 되었다. 지금까지 쌓인 많은 추억들과 앞으로의 한국 생활이 내 인생의 한 큰 걸음이 될 것이다. 한국에 처음 왔을 때 늦여름이었는데 좀 쌀쌀해진 날씨였다. 토픽(한국어능력시험) 3급이 이미 있었는데도 곳곳의 한글이 왠지 낯설어 이해할 수 없었고 말하기도 유창하지 못했다. 밖에 나가면 항상 걱정이 돼서 마음이 조마조마했다. 당연히 실수를 많이 했다. 물건을 사고 계산을 할 때 점원이 2천 원이라고 말하면 천 원만 건네준 경우도 있었다. 왜냐하면 한국어로 ‘2천 원’이 중국어로 ‘천 원’의 뜻이 된다. 한국말 ‘일, 이, 삼, 사’가 중국말로 ‘이, 얼, 산, 쓰’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과 ‘이’가 아직도 가끔 헷갈린다. 그리고 어느 날 화장품 가게에서 ‘아이섀도’를 사고 싶어서 색을 고르고 점원에게 “이새끼 주세요”라고 말했는데 친구와 종업원이 막 웃었다. “이 색을 주세요”라고 말하고 싶었는데 그만 그렇게 말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때 이후로 대화하는 것을 기피하게 되었다. 하지만 선문대 한국어교육원에서 세계 각국에서 온 따뜻한 친구들을 많이 만났다. 그 친구들과 계속 교류하고 다른 나라의 다양한 문화를 접하면서 시야도 크게 트였다. 그 친구들과 같이 중국에서 유행하는 한국 ‘치맥’을 즐겨 먹었다. 한국의 치맥 가게는 친구들과 모여서 서로 이야기를 나누는 좋은 곳이다. 독특한 분위기라서 친근감이 들고 인간미가 철철 넘친다. 이런 계기를 통해서 국적과 생각과 문화가 다른 사람들을 이해하게 되었고 나의 내성적인 성격은 활발하게 바뀌어 가고 있었다. 그러면서 서로 같이 열심히 한국어를 배우려고 노력하고 한국 유학 생활을 공유하면서 누리고 있다. 서늘한 가을이 찾아오면서 나는 이제 혼자서 장을 잘 볼 수 있게 됐다. 또한 노란 가을에 더 다채로운 한국을 봤다. 11월에 어학원 선생님과 학우들과 한국 민속촌에 갔다. 전통적인 한옥을 돌아봤으며 한국의 전통 결혼식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감상하면서 한국의 옛날 모습을 알게 됐다. 나중에 한복 입기 체험을 한번 해 보기도 했다. 드디어 내가 제일 동경하는 겨울을 만났다. 그리고 이제는 한국어로 유창하게 대화하게 됐다. 그런데 한국의 겨울이 이렇게 추운 줄 몰랐다. 친구들과 롯데월드에 갔을 때 아쉽지만 너무 추워서 그냥 실내 놀이기구만 타야 했다. 그래서 그런지 추위에 떨었던 몸이 상상속의 동화 랜드에서 따뜻해졌다. 그리고 겨울방학에는 강원도 강릉과 주문진 해변을 여행했다. 드라마 ‘도깨비’에서 나왔던 한 장면처럼 하고 싶었으나 빨간 목도리와 메밀꽃이 없어서 머리카락이 쌀쌀한 바람에 흐트러지고 굳은 미소를 지으며 사진을 찍어야 했다. 완벽해지는 것은 원래 어렵다. 그렇지만 아름다운 바다를 보면서 마음이 차분해지는 것으로 충분히 행복했다. 지금은 온 세상이 꽃으로 가득한 봄이다. 한국어 선생님을 따라 요리 수업을 하면서 입맛이 당긴다. 부모님과 영상통화를 할 때 집에 돌아가서 한국 요리를 해 드리겠다고 자랑을 했다. 비록 매일 매일 졸리는 계절이지만, 맛있는 음식과 공부의 목표를 포기할 수 없다.(사진⑥, ⑦) 나는 이렇게 한국에서 한 걸음 한 걸음 걸으면서 한국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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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유학생이 바라본 한국문화⑫ - 중국 ‘비시아오징’[천안신문] 천안신문에서는 외국인 유학생들이 우리나라에서의 유학 생활 중 보고 듣고 느끼고 경험한 소소한 이야기를 시민들에게 전달하고자 선문대 한국어교육원(원장 하채수)의 협조를 얻어 연재한다. 저는 중국 산동에서 온 비시아오징입니다. 다른 유학생보다 조금 나이가 많고 중국에서 중·고등학교 다닐 때부터 반장을 한 경험이 있어서 선문대에 다니면서도 중국유학생회 회장을 맡기도 했습니다. 선문대 한국어교육원에서 한국어와 한국문화를 배웠던 저는 광고기획에 대해 관심이 많아 언론광고학과에 입학했습니다. 미래시대는 상품은 차고 넘치는데 이것을 어떻게 마케팅하고 판매하느냐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사실 중국에 비해 한국이 광고, 마케팅 분야에 있어서 더 발달되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래서 저는 광고기획 분야를 공부하기위해 직장을 다니다가 그만두고 한국유학을 택하게 되었습니다. 그런 면에서 대한민국과 선문대는 나를 실망시키지 않았습니다. 특히 부족한 나에게 중국유학생회 회장직을 맡기면서 늘 14억 명의 중국을 대표하고 100여 명의 중국유학생의 대표자라고 추켜세우면서 띄워주었습니다. 국내 대학 중 유학생 출신국이 가장 많기도 한 선문대에서 나는 전 세계에서 온 유학생들을 친구로 사귈 수 있었습니다. 선문대는 마치 국제유엔과도 같습니다. 이미 180여개 국가에서 유학생이 다녀갔으니까요. 선문대에서 2015년도 11월에 대학생국제통일심포지엄을 개최했는데 그때 저는 중국대표로 국제심포지엄의 토론자로 참가했었습니다. 한국친구가 독일통일에 대해 발표하였고 이에 대해 미국, 중국, 러시아, 일본, 베트남, 독일에서 온 친구들이 자기나라 입장에서 대한민국의 통일과 아시아 평화에 대하여 토론을 했습니다. 한국어, 영어, 일본어 그리고 중국어로 동시통역을 해가며 진행한 수순높은 심포지엄에 참가하면서 한국사람들이 얼마나 통일을 열망하며 아시아 나아가 세계평화를 위해 기도하는가에 대해 알게 되었습니다. 지난해 졸업 후 저는 중국 산동성에 있는 세계적인 화학공장의 홍보 Director로 일하고 있습니다. 이 회사의 홍보관련 기획업무는 저의 소관입니다. 지난 1월에는 회사 창립 25주년을 기념하기 위하여 회사의 회장님이나 임원들이 참가하여 성대한 행사를 치렀는데 이 행사도 제가 기획하고 메인MC를 진행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선문대 언론광고학부에서 마케팅에 대해 공부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생각합니다. 마지막으로,저는 선문대 재학시절 중국유학생회 회장을 맡은 경험을 살려 졸업한 지금도 중국유학생 동문회를 구성하고 운영하는데 관심을 갖고 추진해 보려는 포부를 갖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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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자치특집] 충남지역신문연합회 자치현장을 가다(청양군 편)"청양군의 모든 정책을 요람에서 무덤까지 포커스를 맞춰 추진하고 있습니다" [로컬충남] 충남지역신문연합회(회장 전순환. 당진투데이 대표이사)는 청양군수로 취임한 이래 지역에 고착화 돼있던 비정상적인 관행, 통념들을 정상화시키기 위해 행정의 기준과 원칙을 정하고 정도를 걷는 신뢰 행정구현에 노력해 왔다"는 이석화 청양군수의 서면 인터뷰를 가졌다. 이석화 군수는 "권위적이고 낡은 행태와 편법을 차단했고 주민들의 합리적이고 건설적인 제안이나 요구는 경청하고 반영하되 일부 억지성 민원에는 엄격한 원칙의 잣대를 적용했다"며 체계적인 지역개발 방향 제시를 통해 앞으로 성장할 수 있는 탄탄한 기본기를 준비했다고 자부하고 있다. 이런 이석화 청양군수에게 살기좋은 부자농촌건설 등 청양군정의 궁금한 내용 몇 가지를 들어봤다. <편집자 주> ◈ 청양군에 대해 자랑을 한다면 충남의 지리적 중심이고 전국 제일의 청양지역으로 무한한 가능성이 있는 곳이며 현재 차근차근 이를 실현해 나가고 있습니다. 지난 2012년을 기점으로 감소되는 인구를 5년 연속 증가하고 있고, 도내에서 농가평균소득(41,016천원/2016년말)이 가장 높으며 귀농귀촌의 도시로 뿌리내리고 있습니다. 특히 장학금 200억 조성으로 전국에서 가장 으뜸가는 교육지원 사업 및 장학사업 추진하고 있으며 스포츠마케팅 충남의 선두 주자로 지역경제 활성화(전국 및 도단위 대회 40개/165억 경제유발효과) ◈ 민선6기 마무리 어떻게 하고 있나? 민선5기부터 일관되게 추진하고 있는 사업은 “인구를 증가시키고 부자농촌을 실현 하겠다”고 약속드렸습니다. ※ 2020년까지 인구증가 ⇒ 35,000명 달성, 부자농촌 ⇒ 농가평균소득 5,000만원/억대농부 500호, 그 결과 5년 연속 인구가 증가되었고 - 농업소득 도내 1위(2016년) ⇒ 도내평균보다 600만원높음 - 농어촌 군 단위 자치단체 경쟁력 도내 1위(2016) - 고충민원처리 전국 최우수군(2년 연속) - 전국최초 인재육성장학금 200억 모금(2016완료) - 억대농부 지속증가(418농가/2017년말 기준) - 채무 전액상환으로 건전재정 기반 달성을 하였습니다. 또한, 자치단체장 주민만족도 평가에서 5위를 차지했고 - 2017.11.20. 국무총리표창(2017년 행정·제도 개선 우수사례 경진대회) - 2017.12.29. 대통령표창(비상대비 훈련 유공) - 2017.12.29. 부총리겸 교육부 장관상표창(중학교 자유학기제 지원 유공) - 2017.12.29. 열린혁신정부 3년 연속 선정되었으며 저 또한 부총리겸 교육부 장관상과 경영혁신 대상을 받는 등 15회 표창을 받은바 있습니다. 모두 군민의 전폭적인 지원과 600여 공직자의 마음을 모아 추진한 노력이 실적과 성과로 나타나게 된 것이라 생각하면서 민선6기 빈틈없는 마무리에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 최근 3선 도전을 선언했다. 출마의 변? 우리군의 지상목표는 인구증가와 부자농촌을 만드는 사업 즉, 2020 프로제트 목표지점에 도달하기까지는 멈출 수 없는 사업입니다. 하지만, 완전히 정착된 것은 아니고 초기단계에 진입했을 뿐입니다. 그동안 해온 것처럼 청양군정의 모든 부문별 발전과 목표한 계획을 차질 없이 완성할 자신이 있고, 마무리 하고 싶어 출마를 결심하게 되었습니다. ◈ 고령의 나이와 3선 도전 피로감에 대한 우려가 높다. 이에 대한 입장은? 누군가가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는 70세라고 하면 나이가 많다고 했던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오늘날 70세는 경험과 경륜이 깊게 쌓여 어떤 일을 하더라고 시행착오 없이 원숙하게 일을 처리 할 수 있는 나이에 해당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특히 군수라고 하는 자리는 쉬운 자리가 아닙니다. 우선 600여 공직자의 마음을 움직여야 하고, 이어 3만 군민이 무엇을 요구하고 있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중앙부처 어느 곳(인맥 형성)을 움직여야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소위 말해서 일머리를 알아야 합니다. 때문에 군수는 나이로 하는 것이 아니고 능력으로 일을 하는 자리입니다. 그래서 지난날 우리는 76세였던 김대중 후보를 대통령으로 뽑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청양에서는 3선은 안 된다는 말이 있다고 하지만 일을 잘하면 3선이던 4선이던 따질 필요가 없다는 사실 하나를 소개하고 넘어가겠습니다. 문재인 대통령께서는 박근혜 정부에서부터 일해오던 이주열 한국은행총재를 다시 재임용(44년만에 처음 있는 일)했다는 언론보도(2018.3.2.저녁 9시뉴스)가 있었습니다. 재임용한 이유는 금융통화전문가로서 통화정책의 연속성을 위해 연임시켰다고 발표하고 있는 것을 보면 무조건 “3선은 안 된다.”는 말은 청양 발전을 저해하는 구시대적 발상이라는 것을 말씀 드립니다. 또한 김관용(1942년생) 경북지사는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구미시장을 3선을 거쳐 도지사도 3번째 역임하고 있습니다. ◈ 청양의 고령인구가 32%에 달하며 ‘젊은청양’에 대한 요구가 높다. 방안이 있나? 청양은 65세이상 고령인구의 비율이 높은 것이 사실입니다. 따라서 그분들이 원하는 정책을 우선적으로 펼침으로서 주민의 기대에 부응해야 할 것입니다. 이와 더불어 지역사회에 활력을 불어넣기 위해서는 젊은 사람들이 청양에 살 수 있도록 하는 한편 청양의 젊은이들이 타지역으로 나가는 것을 막아야 하겠습니다. 이를 위해서는 청양군의 모든 정책을 요람에서 무덤까지 포커스를 맞춰 추진하고 있습니다. 아울러, 젊은 인구 유입을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직장이기에 농공단지 조성 등으로 일자리를 늘려갈 계획입니다. ◈ 정국 현안에 대해 묻겠다. 탄핵정국이후 보수 위기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높다. 어떻게 보나? 군수로서 진보와 보수를 논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우리가 당면한 최대의 과제는 먹고사는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이를 위해 노력하는 것이 위정자들이 우선적으로 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 지방분권 개헌에 대한 입장은? 지방분권 반드시 이루어져야 하며 완전한 지방자치를 위해 꼭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모든 국민의 공감대가 형성된 가운데 합리적인 개헌이 이루어 져야 한다는 입장입니다. ◈ 끝으로 군민들에게 하고 싶은 말씀은? 새정부 출범 후 많은 변화와 개혁이 이뤄지고 있습니다. 또한, 오는 6. 13 지방선거에 따른 선거 정국으로 국민모두 어수선한 느낌입니다. 이럴 때 일수록 차분한 가운데 중심을 잡고 청양발전을 위해서 힘을 모아야 할 것 입니다. 아울러, 그동안 모든 분야에 관행처럼 해오던 적폐청산 또한 슬기롭게 극복하자는 말씀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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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유학생이 바라본 한국문화⑪ - 독일 ‘옌슨 베네딕트 권민’[천안신문] 천안신문에서는 외국인 유학생들이 우리나라에서의 유학 생활 중 보고 듣고 느끼고 경험한 소소한 이야기를 시민들에게 전달하고자 선문대 한국어교육원(원장 하채수)의 협조를 얻어 연재한다. 저는 독일에서 온 23살 옌슨 권민입니다. 여러분, 한국어를 배우는 것이 어렵습니까? 쉽습니까? 저는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작년 9월에 한국에 처음 왔을 때 한국어를 조금도 못했습니다. 그런데 한국어가 아름답기 때문에 항상 즐겁게 공부하고 있습니다. 저는 한국어와 정말로 사랑에 빠졌습니다. 존댓말을 배웠을 때 감동을 받았습니다. 어른들에게서 많은 것을 배우는 것에 경의를 표하는 것이 아주 좋았습니다. 또, 저보다 나이가 어린 사람이 저를 ‘형’이나 ‘오빠’라고 불렀을 때 제 가슴이 정말로 따뜻해졌습니다. 이 말은 저에게 아주 소중합니다. “당신을 존중해요. 당신에게서 배우고 싶어요. 제발 잘 돌봐 주세요.”와 같은 깊은 의미가 느껴졌습니다. 그리고 “내가 형이야? 오빠야?… 알았어. 잘 돌봐 줄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한국에서는 명절 때 조상님께 감사를 드리기 위해서 차례를 지냅니다. 우리는 조상님께로부터 삶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문화는 정말 좋은 것입니다. 독일 사람에게는 개인이 소중한데, 한국 사람은 개인보다 전체가 소중합니다. “우리 가족과 나라를 어떻게 도울 수 있을까?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열심히 일해야겠다.”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전 세계 사람들이 이렇게 생각한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우리 선생님들께서는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면서 한국어를 가르쳐 주시고, 우리의 학습과 생활에 관심을 갖고 우리에게 매일 시간을 많이 내 주십니다. 우리 선생님들께 정말 감사드립니다. 마지막으로 여러분, 고향과 가족이 그립습니까? 저도 고향 생각이 많이 납니다. 저희 가족을 위해서 한국에서 사는 동안 열심히 공부하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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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유학생이 바라본 한국문화⑩ - 일본교포 ‘최수인’[천안신문] 천안신문에서는 외국인 유학생들이 우리나라에서의 유학 생활 중 보고 듣고 느끼고 경험한 소소한 이야기를 시민들에게 전달하고자 선문대 한국어교육원(원장 하채수)의 협조를 얻어 연재한다. 저는 일본에서 온 최수인이라고 합니다. 이름만 들으면 ‘한국사람?’이라고 생각하시는 분도 있을 겁니다. 저희 아버지는 한국 분이고 어머니는 일본 분입니다. 그러니까 저는 이른바 한국인과 일본인의 혼혈입니다. 하지만, 일본에서 태어나서 자랐기 때문에 일본인으로 자랐습니다. 제 아버지께서는 제가 초등학교 5학년때 뇌출혈로 쓰러지셨습니다. 그 후유증으로 일본어를 사용하실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께서 도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로 인해 아버지를 위해서 한국말 공부를 해야 되겠다는 마음을 먹고 독학으로 한국말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처음엔 한글도 못 읽었기 때문에 기초부터 시작했습니다. 아울러 듣기 연습으로 여러분도 좋아하는 한류드라마를 많이 봤습니다. ‘대장금’이나 ‘이산’같은 사극을 좋아했기 때문에, 제가 가장 먼저 외웠던 한국말은 “대비마마! 주상전하께서 납시셨사옵니다!” “오, 어서 듭시라 해라!”였습니다. 하지만 그런 말로 아버지와 대화를 할 수는 없었기 때문에 교재를 구입해서 외운 문법이나 단어를 사용해서 어설픈 한국말로 아버지랑 대화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문법뿐만 아니라 발음도 그리 좋지는 않아서 아버지께 “네 한국말은 이상해!”라는 말을 들은 적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제 마음속 한편에서는 ‘한국 사람처럼 이야기해서 아버지께 반드시 인정받자!’라고 다짐했습니다. 이것은 한국유학을 선택하는 계기로 이어지게 되었습니다. 저는 선문대 한국어교육원에 오자마자 중급2반에 배정되었습니다. 그때 같은 반에서 ‘어떤 사람’을 만났습니다. 그 사람은 제게 아픈 상처도 주었지만 결과적으로 저를 성장시켜 준 사람이었습니다. 말하자면, 그는 저한테 일종의 편견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제가 한국인과 일본인의 혼혈이라고 말하니까, “아니, 한국 사람이 왜 한국말을 공부해?” “왜 집에서 부모님이랑 한국말로 얘기 안 했어?“ 라고 직설적으로 말했고 모르는 단어가 있을 때마다 ”너는 한국 사람인데 이런 단어도 몰라?“ 라고 하기도 했습니다. 그 때문에 저는 ‘나는 왜 한국에 왔을까? 나는 왜 혼혈인가? 나는 왜 한국말을 공부하고 있지?’ 이런 회의감마저 들었습니다.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서 오히려 혼란을 겪게 되었습니다. 그것을 고민, 고민하다가 마침내 저는 제 고민을 제 부모님과 방 친구들에게 얘기했습니다. 결과적으로 부모님이나 방 친구들은 저한테 “수인이는 자기 꿈을 향해 공부하면 되지” “수인이는 열심히 공부하고 있으니까 괜찮아” 라고 말해 줬습니다. 그런 말들은 제게 큰 위로와 격려가 되었습니다. 그걸 듣고 ‘나는 너무나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었구나, 너무 신경 쓰고 있었구나!’ 하고 말입니다. 그리고 그런 고민을 나뿐만 아니라 나와 비슷한 상황의 친구들도 똑같이 경험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후, 저는 저한테 폭언을 하는 사람을 ‘폭언을 하는 사람’이라고 눈치로 보는 것보다도 “이런 사람도 있다”고 생각하며 오히려 적극적인 마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중급반 내내 그 사람과 지내면서 그 사람과 이야기를 하면서 관심을 가졌습니다. 제가 운이 없는 것인지, 운명의 장난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자리를 바꿀 때마다 제 옆자리에는 항상 그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렇게 ‘미운정, 고운 정’ 다 들면서 친구처럼 지내니, 언젠가부터 저한테 "너는 100% 완전 한국 사람이야" "너 진짜 재미있어!"라는 말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로 인해 제가 마음먹기에 따라 이토록 미운 상대방도 바꿀 수 있다는 사실에 너무나 놀랐고 기적 같은 일이라고 느꼈습니다. 이러한 일들을 겪으면서 지금은 소심한 최수인에서 대범하고 털털한 최수인으로 거듭 났습니다. 이렇게 달라지기까지, 제 곁을 지켜준 중급반 과 고급반 친구들, 그리고 제가 한국말을 처음 배울 수 있는 동기를 제공해주신 아버지께도 감사드립니다. 무엇보다도 중급반, 고급반에서 제게 한국말을 친절하게 열정적으로 가르쳐주신 선생님들께도 다시한번 감사를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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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유학생이 바라본 한국문화⑨ - 가나 ‘나나 와이트’[천안신문] 천안신문에서는 외국인 유학생들이 우리나라에서의 유학 생활 중 보고 듣고 느끼고 경험한 소소한 이야기를 시민들에게 전달하고자 선문대 한국어교육원(원장 하채수)의 협조를 얻어 연재한다. 저는 가나 출신의 19세 나나 와이트입니다. 제가 한국에 온 지 일년이 지났습니다. 저는 그동안 많은 재미있고, 슬프고, 이상하고, 무서운 일들을 경험해 왔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서부 아프리카의 가나에서 한국까지 비행기로 20시간이 걸렸습니다. 2017년 3월 1일 인천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저는 이미 많은 차이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가나의 가장 추운 날씨는 23도 정도이기 때문에 그때 저는 여름옷을 입은 채 3월 1일에 한국에 있었습니다. 저는 날씨가 그렇게 춥다는 것에 대해 너무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저는 선문대학교의 학생이기 때문에 여기서 대부분의 경험을 했습니다. 제가 수업에서 알아차렸던 흥미로운 점은 이름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윤진영’, ‘문가영’ 등은 매우 짧고 아름다운 한국식 이름입니다. 반면에 제 이름은 나나 와이트입니다. 제 이름도 짧다고요? 원래 가나에서 제 이름은 ‘마뉴에라 나나 에쿠아 쿠쿠아 명희’였습니다. 간단하게 만들어서 다행이지요? 또한 한 가지 우스운 일은 유명한 ‘가나 초콜릿’을 발견한 것입니다. 제가 사람들에게 제 소개를 했을 때 사람들은 보통 초콜릿에 대해 물어보았습니다. 진실로 이것은 가나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저는 한국에서 처음으로 그 ‘가나 초콜릿’을 보았고 먹었습니다. 기쁘게도 가나 초콜릿은 맛있었습니다. 한국의 생활 방식과 습관을 배우는 것이 처음에는 상당히 어려웠습니다. 고향에서 한국 드라마를 보면 사람들이 젓가락을 사용했는데, 그것은 정말 매혹적인 기술이었습니다. 그리고 저도 할 수 있을 거라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한국에 와서 처음 3개월 동안 저는 식사를 할 때 보통 한 시간 동안 고생했습니다. 또 한국에서 배운 이상한 일은 해산물을 먹는 방법이었습니다. 저는 대부분의 해산물을 아주 약간 익히거나, 그렇지 않으면 날 것으로 먹는 이유를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가장 이상한 것은 살아 움직이는 낙지를 먹는 것이었습니다. 놀랍게도 맛은 좋았지만 살아 움직이는 음식을 입에 넣는다는 생각을 하면 여전히 두렵습니다. 제가 가장 좋아하는 한 가지는 여기에서 사계절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봄의 아름다운 벚꽃, 여름의 밝은 날, 가을의 아름다운 단풍, 겨울의 하얀 눈. 그것은 그저 아름답습니다. 한국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밖에서 만나는 한국 사람들과 아름다운 경험을 했습니다. 거의 항상 영어를 연습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저에게 와서 어디에서 왔는지 물어보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또 무조건 저에게 손을 흔들며 인사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저와 함께 사진을 찍자고 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가장 흥미로운 것은 제가 시장에 가면 아주머니들이 부탁하지도 않았는데 덤을 준다는 점입니다. 가끔 고향에 돌아가고 싶지만, 이런 경험들은 제가 고향에 와 있다는 느낌을 갖게 합니다. 반면에 어떤 사람들은 저를 계속 응시하면서 속삭입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버스나 기차에서 제 가까이 앉지 않고 계속 서서 쳐다보곤 합니다. 저는 이런 일들 때문에 처음에는 매우 슬프고 불안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일이 거의 매일 일어났기 때문에 나중에는 그것에 익숙해지고 그냥 웃을 수 있었습니다. 결론적으로 한국에 10개월 동안 머물면서 저는 한국인의 문화와 음식에 대해, 그리고 얼마나 한국인이 예의바른 사람들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앞으로도 아름다운 한국을 더 많이 배우고 경험하기를 고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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