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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특집] 천안의 숨은 향토유적을 찾아 나서다 ②[천안저널] 천안의 뜻 있는 몇몇 향토연구가들이 숨겨진 천안의 향토문화유적을 답사해 기록으로 남기는 작업을 한창 진행 중이다. 천안향토문화연구회와 천안역사문화연구실, 천안향토사연구소 등의 단체에서 활동하고 있는 김종식, 임명순, 문만주, 김정집, 김선명 등 지역 향토연구가들은 2013년 5월부터 최근까지 천안시 동남구 일원을 11회에 걸쳐 답사해 묻혀 있는 천안 유적을 발굴해왔고, 향후 서북구 지역 유적 찾기에도 나설 계획이다. 이들 향토연구가들은 하루하루 지날수록 훼손돼 가는 유적을 사진과 글로 남겨 천안 시민들에게 널리 알리고자 스스로 여비와 시간을 투자해 유적조사에 발 벗고 나서고 있다. 본보는 창간 3주년을 맞아 이들 향토연구가들의 땀과 열정으로 만들어진 소중한 자료들을 연재한다. 이번호에는 지난해 7월 14일과 8월 11일 다녀온 성남면과 수신면 일대 유적들을 소개한다.<편집자 주> ▣제3차 문화유적 답사(2013년 7월 14일) : 김종식 향토연구가. 답사코스(성남면 일원) : 신사리 칠성바위→대정리 정낭봉의 조선조 충신 조명 추모비→강당골 글씨바위→김수필 정문 1)칠성바위 생성 연원은 알 수 없으나 인근의 선돌 등으로 보아 선사시대의 유물로 보는 견해가 많다. 2)정랑봉 조명 추모비 성남면 석곡리 뒷산은 마을에서 정랑봉이라 하는데 조명(趙銘)은 조선의 개국공신 인옥의 증손이며, 이조참판 순생(順生)의 아들이다. 16세의 어린나이로 문과에 급제하여 관이 정랑(正郞)에 이르렀다. 세조(世祖)가 단종(端宗)을 폐위할 때, 순생이 다른 대신들과 더불어 단종(端宗)을 복위하려다 발각되어, 순생은 고성으로 귀양 가고 아들 명(銘)도 부친을 도와 단종 복위에 참여했는데, 그 죄를 물어 금산으로 귀양 갔다. 어느 날인가 고성(固城)으로 귀양 간 순생에게 사약을 내려 객사했다. 명은 금산(錦山)에 유배중이라 장사(葬事)에 참여하지 못했다. 세조가 온양(溫陽)에 온천 하러 내려 올 때 참석한 대신들이 ‘부자의 죽음은 불가하다’ 간하여, 명의 죄를 풀어주어 명은 정치에 환멸을 느끼고 목천현 신기(木川縣 新基)에 이사 왔다. 그 후 명은 조석으로 관복에 홀을 잡고 뒷산에 올라, 아버지가 돌아가신 고성을 향하여 두 번 절하고 통곡하고, 단종이 유배된 영월을 향하여 네 번 절하고 통곡하기를 죽는 날까지 하였다. 사람들은 이를 일러 ‘전국이 세조의 땅인데 이곳만은 노릉의 땅이다’ 하고, 조명을 일러 송곳 같은 절의를 칭송하며, 그 산을 정랑봉(正郞峯)이라 불렀다. 노릉은 단종의 숙부인 세조가 왕위를 찬탈할 때, 노산군으로 감등하였다 하여 사람들은 단종을 노릉으로 불렀다. 수백 년의 세월이 흐른 후 구한말에 이 고장의 선비이며 참판을 지낸, 안동사람인 김경규가 추모비를 세워 그 충절을 찬양하며 글을 지었다. 그로부터 또 백여 년의 세월이 흐르며 잊혀진 것을 천안 전통문화연구회에서 향토사학자로 활동 중인 김종식이 몇 년의 추적 끝에 찾아내 빛을 보게 되었다. 생각해 보면 천하의 간신이며 역적인 한명회에 의해서 이루어진 왕위 찬탈의 주역인 한명희 묘소와 이웃해서, 조명의 부 순생과 조명의 묘소가 병천면 용두리 조병옥 생가 뒤 야산에 있다. 3)신덕리 강당골 글씨바위 죽암동천/김씨서숙(竹巖洞天/金氏家塾) 강당골에 있는 이 글씨 죽암동천은 참판 김경규가 이곳에 서당을 짓고 후학을 양성하며 죽암동인 이곳이 별천지라 각자 해 놓은 것이 세월이 흐르면서 강당의 흔적은 없어지고 강당 터는 논으로 변하여 글씨가 반쯤 묻혀있다. 김가 서숙이라 각자 되어있는 이곳은 죽암동천 글씨바위 아래로 약 20m정도 아래 있다. 김씨가숙(金氏家塾) 숭정 237년 갑자(崇禎 二百三十七年 甲子(고종 원년인 1864년이다)라 각자 되어있다. 4)김수필 정문 김수필의 자는 찬숙(字 贊叔)이며 1693년(숙종 19년 계유)에 나아서 1754년(영조 30년 갑술) 61세로 세상을 떠난 목천의 효자이다. 1805년에(순조6년 병인) 지역 유현들 300여명으로 연명하여 상소를 하였고, 1825년(순조 25년 을유,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에 순조 25년 을유에 목천의 사인 김수필에게 정려를 하사했다 기록하고 있다. 김수필의 생과 몰은 이를 근거로 산출 한 것임. 족보에 계유에 나서 갑술에 졸했다 기록되어 있다.)에 정려를 하사했다. 부친은 한명(父 漢鳴)이며 모친은 진주강씨(母 晋州姜氏)이다. 조부는 통덕랑 중정(祖父 通德郞 重鼎)이며 증조는 호조좌랑 익(曾祖 戶曹佐郞 ?, 중화족보에는 익으로 당악족보에는 과로 되어있는데 과는 익의 오류 인듯하다.)이고 고조는 가선대부동지중추부사 진성(高祖 嘉善大夫 僉知中樞府事 振聲)이다. 아들은 홍제이고 손자는 치삼이다.(子 弘濟, 孫子 致三) 후손들의 구전에 의하면 천안시 동남구 성남면 신덕리 2구에 살았다 전하는데 행적과 기록이 실전하여 없으며 가첩의 간략한 기록과 국역 대록지를 상고하여 정리해보면, 김수필의 본관이 중화이다. 모친의 병환에 의원이 말하기를 ‘제비가 약에 들어가야 한다’고 하였다. 시기가 마침 겨울이라 어찌할 바를 모르고 부르짖으며 통곡하며 하늘에 빌었다. 난데없이 제비가 날아 들어와 약에 넣어 드려서 효험을 보았다. 한겨울에 생선 드시기를 원해 냇가에 가니 생선이 스스로 올라와 잡아다 다려드렸는데 효험을 보았으며, 어느 날인가 성묘를 하고 돌아오는 길에 갑작스러운 소낙비를 만나 바위 밑으로 피하였는데, 밖에서 어머니가 부르는 소리가 들려서 얼른 나와 살피는데 바위가 구르며 부서져 내렸다. 모친 상 3년을 예의범절에 벗어남이 없었으며 시종여일 한결같이 행하였고 하루에 세 번씩 성묘하기를 눈비의 폭우와 강설에도 거른 적이 없다. 매일 성묘 다니며 물이 없어 고생하자 어느 날에 홀연히 묘소 아래에서 샘이 솟았다. 또 모친의 기일이 다가오면 석 달을 조심하며 바깥출입을 삼가하고 비린 것과 고기와 술을 먹지 않았다. 3일전에는 목욕재계하고 통곡하며 제물을 손수차려 상례의 법도를 지켰다. 집이 가난하여 친상을 박하게 하였기 때문에 임종이 가까워서는 그 아들에게 상사를 박하게 하고 검소하게 하기를 경계하였다. 그의 아들은 집이 넉넉하였으므로 의금과 관곽을 부친의 유계를 넘어가게 되었다. 홀연히 밤에 불이 나서 의금과 관곽을 모두 태우고 그치었다. 또한 백형인 수태(壽泰)가 돌림병으로 부스럼을 알았는데 형의 병에 구렁이가 약이 된다 하여 한 겨울에 찾아다니며 굴을 파는데, 어느 날 굴에서 구렁이가 스스로 나와 잡아다 다려 먹였는데 효험을 보았으나 백약이 무효라 끝내 회생하지 못했다.(당악김씨 족보에는 절손되어있고, 중화김씨 족보에는 셋째동생 수인(壽仁)의 큰아들 세제(世濟)를 양자하여 대를 이은 것으로 되어 있다.) 향당의 사람들은 효자의 우애와 효성이 미물도 감동하고 하늘도 감동하는 소치라며 하늘아래 둘도 없는 효자라 칭송을 하였다 한다. 효자의 칭송은 백세를 전해져도 근심이 없을 진데 오랜 세월에 향당의 족손들은 모두 떠나 길가의 정려만이 오두적각(烏頭赤脚)으로 전하나 효행의 칭송행장이 유실되고 구전도 없이 목천땅 성남의 외진 곳에 있을 뿐이다. ▣제4차 문화유적 답사(2013년 8월 11일) : 김종식 향토연구가. 답사코스 : 성남면 봉양리 선원사유지비→대사동 석탑→봉양리 장승→수신면 발산리 고인돌(할미바위)→백자리 무명부도→백자리 우모정 1)선원사유지비(仙源祠遺址碑) 성남면 봉양리 대사동 한절우 안동김씨 문중에 있던 사당으로 현재는 비석만 있다. 선원 김상용, 청음 김상헌(仙源 金尙容. 淸陰 金尙憲) 형제가 화(禍)를 피하여 우거 한 후에 수백의 후손들이 현재에 이른다. 뒷면에 숭정 후 무자 월 일(崇禎 後 戊子 月 日)이라 각자되어 있다. 1648년(인조 26년 무자)에 사우를 세워 고종 때 대원군 서원철패 령에 의해 철거되었다 한다. 사우의 초석 일부가 현존하며 청암루라 각자된 편 돌을 옛 사당 앞에 묻었는데 후손인 김문환씨와 수차례 발굴을 시도했으나 위치를 알 수 없다. 2)봉양리 대사동 석탑 통일신라와 고려 초의 양식으로 보이는 이 석탑은 현재 아래 부분만 있으며, 이 석탑으로 인하여 대사동이라는 이름이 생겼다 한다. 한절우라고 하며 큰 절이 있었다고 한다. 입구에 큰 석탑이 있었는데 스님이 만 여명이나 있었으며, 3층 또는 5층 석탑이 있었는데 비가 오면 사람이 피할 수 있었다고 한다. 3)봉양리 장승 성남면 봉양리에 전승하는 이 장승은 현재도 장승제를 지내며 그 연원은 알 수 없다. 지금도 정월 14일 저녁 7시 경에 장승제를 지낸다. 지금은 마을 이장이 제주가 되며, 예전에는 제주가 선정되면 삼일 간 바깥출입을 금하며 마을 입구에 황토를 뿌리고 금줄을 쳐서 부정한 사람들의 출입을 막고 부부 합방도 금했다 한다. 4)수신 발산리 고인돌 발산리(鉢山里) 142-7에 위치한 이 고인돌은 남방식으로 타원형을 하고 있으며, 상당히 큰 편에 속한다. 가로 350cm, 세로 290cm, 두께 30cm 정도이다. 마을 농로 옆 야산에 인접해 있다. 마을에선 할미바위 또는 거북바위라 부른다. 정확한 생성 연대를 알 수 없다. 바위 위에 여러 개의 성혈이 있다. 옛날에 어떤 장수가 이 바위를 짚고 일어나 장수의 손 자욱이 남아있다 한다. 5)수신 백자리 무명부도 구룡사 입구 야산에 있는 이 부도는 생성 연대를 알 수 없으나 고려시대 것으로 추정된다. 6)수신 백자리 우모정 수신면 백자리에 있는 이 정자는 경주이씨 정자로, 성암 이병로께서 돌아가신 부모님을 사모하는 마음에 1948년에 부모님 산소가 바라다 보이는 이곳에 정자를 짓고, 늘 부모님을 그리워하여 우모정이라 했다 한다. 정자의 현판은 이시영 부통령의 친필(李始榮 副統領 親筆)이다. 조석으로 성묘하기를 풍설에도 죽는 날 까지 그치지 않았다 한다. ※이시영 대한민국의 제1대 부통령 임기 : 1948년 7월 24일 ~ 1951년 5월 9일 출생일 : 1868년 12월 3일 출생지 : 조선 한성부 사망일 : 1953년 4월 19일 사망지 : 대한민국 부산광역시 정당 : 한국국민당(1935)→한국독립당(1940)→독립촉성중앙회(1946)→민주국민당(1952) 별명 : 호는 성재, 시림산인, 자는 성옹, 성흡 종교 : 유교(성리학) 배우자 : 경주김씨(김홍집의 딸), 반남박씨임. 자녀 : 아들 이규열 이시영(李始榮, 문화어 : 리시영, 1868년 12월 3일 한성부 ~ 1953년 4월 19일 부산)은 조선, 대한제국의 관료이자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이며 교육자, 정치인이다. 본관은 경주로, 자(字)는 성흡(城翕), 성옹(聖翁), 호는 성재(省齋)·시림산인(始林山人), 본명은 성흡(聖翕)이다. 총리대신을 지낸 김홍집의 사위이다. 1885년 사마시(司馬試)에 급제하고 여러 벼슬을 거쳐 1891년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부승지, 우승지(右承旨)에 올라 내의원 부제조, 상의원 부제조 등을 지냈다. 한일 병합 조약 체결 이후 독립 운동에 투신, 일가족 40인과 함께 만주로 망명하였다. 1919년 4월 대한민국 임시 정부 수립에 참여하였고, 1919년 9월 통합 임정 수립 이후 김구, 이동녕 등과 함께 임시 정부를 수호하는 역할을 하였다. 광복 이후 귀국, 우익 정치인으로 활동하며 임정 요인이 단정론과 단정반대론으로 나뉘었을 때는 단정론에 참여하였다. 1948년 7월 24일부터 1951년 5월 9일까지 대한민국의 제1대 부통령을 역임하였다. 대한민국 제2대 대통령선거에 민주국민당 후보로 입후보하였으나 낙선했다. 선조 때 영의정을 지낸 이항복의 후손으로, 영조 때의 정승 이종성의 5대손이었다. 이조판서를 지낸 이유승(李裕承)과 동래 정씨(東萊鄭氏)의 아들이며, 이건영(李健榮), 이석영(李石榮), 이철영(李哲榮), 이회영(李會榮)의 동생이자 이소영(李韶榮), 이호영(李護榮)의 이복 형이다. 독립운동가 겸 정치인 신익희와도 인척간이다. 7)아우내 3.1 만세운동 김교선 선생 추모비 독립운동 유공자 김교선 선생추모비(獨立運動 有功者 金敎善 先生追慕碑)라 새겨진 이 비는 수신면 백자리 야산에 있다. 김교선 선생은 1919년 병천 만세운동시 적극적으로 활동한 공적이 인정되어 1968년 3월 1일 대통령 표창을 받았다. 수신면장으로 재직 중에도 청렴 강직하여 칭송이 수십 년이 지난 지금에도 촌로들 사이에 구전한다. 김교선(金敎善, 1892. 6. 6~ 1969. 4. 9)은 충청남도 천안군 수신면 사람이다. 1919년 3월 홍일선(洪鎰善)과 함께 4월 1일의 당시 갈전면(葛田面) 병천 장날을 이용하여 독립만세시위를 일으킬 것을 계획하고, 3월 29일 인근 부락에 살고 있는 한동규(韓東奎)와 이순구(李旬求)에게 독립만세시위 거사의 취지를 역설하여 찬동을 얻었다. 4월 1일 홍일선, 한동규, 이순구와 함께 아우내 장터에 나가 장꾼들에게 독립만세 시위대열에 참가할 것을 권유하였다. 이날 오후 1시경 아우내 장터에서 별도 대열인 조인원(趙仁元), 유관순(柳寬順)이 주동한 시위군중과 합쳐져서 약 3천여 명의 큰 무리가 이루어졌는데, 조인원이 태극기와 『대한독립』이라고 큰 깃발을 세우고,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후 대한독립만세를 선창하자, 시위군중 3000여명이 대한독립만세를 연호하니 아우내 장터는 삽시간에 독립운동의 열기로 가득 차게 되었다. 기승(氣勝)한 시위대열이 태극기를 흔들고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일본 헌병주재소에 접근하자, 일본 헌병은 시위대의 기세에 놀라 기총을 난사하고 또, 천안에서 불러들인 헌병과 수비대들까지 가세하여 총검을 마구 휘둘러대며 발포를 계속하니, 유관순의 아버지 유중권(柳重權) 등 19명이 현장에서 순국하고 30명 이상이 부상하는 일대 찬사가 벌어졌다. 오후 4시경 순국자의 가족과 시위군중이 일본 군경의 발포로 순국한 시체를 헌병주재소에 운반해 놓고 『순국자를 살려내라』고 항의하고 있을 때, 그는 한동규, 이순구, 이백하(李栢夏) 등과 함께 100여명의 시위 군중을 이끌고 일본 헌병주재소로 달려가 주재소 입구에 버티고 서서 태극기를 흔들며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다가 체포되었다. 그는 같은해 9월 11일 고등법원에서 2년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을 기리어 1968년에 대통령표창을 수여하였다. 또 1990년 애족장을 추서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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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특집] 천안의 숨은 향토유적을 찾아 나서다 ①[천안저널] 천안의 뜻 있는 몇몇 향토연구가들이 숨겨진 천안의 향토문화유적을 답사해 기록으로 남기는 작업을 한창 진행 중이다. 천안향토문화연구회와 천안역사문화연구실, 천안향토사연구소 등의 단체에서 활동하고 있는 김종식, 임명순, 문만주, 김정집, 김선명 등 지역 향토연구가들은 2013년 5월부터 최근까지 천안시 동남구 일원을 11회에 걸쳐 답사해 묻혀 있는 천안 유적을 발굴해왔고, 향후 서북구 지역 유적 찾기에도 나설 계획이다. 이들 향토연구가들은 하루하루 지날수록 훼손돼 가는 유적을 사진과 글로 남겨 천안 시민들에게 널리 알리고자 스스로 여비와 시간을 투자해 유적조사에 발 벗고 나서고 있다. 본보는 창간 3주년을 맞아 이들 향토연구가들의 땀과 열정으로 만들어진 소중한 자료들을 연재한다. 이번호(133호)에는 지난해 5월 12일과 6월 9일 다녀온 광덕면과 성남면 일대 유적들을 소개한다.<편집자 주> ▣제1차 문화유적 답사(2013년 5월 12일) : 참석자 - 황서규 해설사, 김종식 임명순 문만주 향토연구가. ▲답사코스 : 운초 김부용 추모제 참석-연천 봉조하 김이양 대감묘소 참배-광덕사 부도-삼층석탑-석사자상-보물지장 호두나무-김부용시비-댓거리 향토유적비 1)운초 김부용 김운초(金雲楚, 1800 -1857) 평안도 성천 출신의 기녀, 호는 부용(芙蓉), 또는 추수(秋水) 추낭이다. 양반인 선고(先考)는 당호가 추당(秋堂)인데 일찍 죽음. 중부(仲父)밑에서 가르침을 받음. 생몰연대 미상이며 초당마마라고도 불리 움. 작품으로는 憶家兄(억가형) 五江樓小集(오강루소집) 待黃岡老人(대황강노인) 등이 전함. 송도의 황진이(黃眞伊)와 부안의 이매창(李梅窓)과 함께 조선시대 3대 詩妓(시기)로 불리 운다. 평양감사 김이양과 시(詩)로 사모하다 소실됨. 2)연천 김이양(金履陽) 1755(영조 31)∼1845(헌종 11).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안동, 자는 명여(命汝), 아버지는 헌행(憲行)이다. 초명은 이영(履永)이었으나 예종과 이름이 비슷하여 피휘(避諱)하기 위해 이양이라 개명할 것을 청해 왕의 허락을 받았다. 1795년(정조 19) 생원으로 정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으며, 1812년(순조 12) 함경도관찰사, 1815년 함경감사, 예조판서와 이조판서, 1816년 호조판서, 1819년 홍문관제학, 1820년 판의금부사, 좌참찬, 1844년(헌종 10)에는 만 90세 궤장(?杖)을 하사받았으며, 그 이듬해 봉조하(奉朝賀)제수 후 죽었다.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로 추증. 3)광덕사 부도 광덕사 뒤편의 작은 봉우리에 5기의 부도가 있는데, 이중 4기가 지정문화재이다. 하나는 무명부도이다. ①진산화상 부도는 652년(진덕여왕 6) 신라의 고승으로 탑신에는 ‘진산화상(珍山和尙)’ 이라고 각자되어 있다. 상륜부에는 탑신과 한 돌로 이루어진 복련과 앙련이 있다. 부도가 세워진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통일신라 후기의 작품일 것으로 추정된다. ②청소당 부도는 기본적으로는 8각 원당형 부도이나 탑신석이 원구형이다. 기단은 상.중.하대로 이루어지고 옥개석 위에는 상륜부가 화려하게 장식되었다. 청소당이라 각자되어 있다. ③적조당 부도도 8각 원당형이나 탑신석이 원구형이다. 상.하대는 연화문이 조각되고 중대석에는 연주문으로 장식한 기둥이 있다. 적조당이라 각자되어 있다. ④우암당부도도 같은 형태이다. 방형의 지대석 위에 앙연화를 조각하고, 그 위에 8각형의 간주석을 놓았는데 8각형의 1면마다 신장상을 조각하였다. 4)삼층석탑 통일 신라 후기의 작품으로 추정되며 문화재 자료 제 252호 지정됨. 5)석사자상 문화재 자료 제 251호 석 사자 2기는 신라 말이나 고려 초의 것으로 추정됨. 6)호두나무 광덕사는 637년 신라 선덕여왕 당시에 자장율사가 중국으로부터 전래한 부처님 사리, 치아, 가사, 화엄경 등을 봉안 창건하였고 흥덕왕시(836년) 진산조사가 대 가람으로 증건 하였다 한다. 그 규모는 3층 법당, 구범각, 팔금당, 80칸 장경각 등과 산내에 89암자가 있었다. 임진왜란 때 큰 절은 물론 산내 암자까지 모두 타버렸으나, 이조 선조대왕 때 희묵 스님이 증건하고 그 후 석심 스님이 보수하였다. 현재의 대웅전.천불전.명부전.범종각.적선당.자광당.보화루.일주문.화장교는 수년간(1974년~1985년)에 걸쳐 증건 하였다. - 보물 : 제390호 고려사경(묘법연화경) 10책 - 문화재 자료 : 246호 대웅전, 247호 천불전, 253호 부도 등이 있다. <천안광덕사 호두나무> 천연기념물 제398호 지정. 광덕사 호두나무는 높이 약 18.2m의 거목으로 수령은 약 400년 정도로 추정된다. 고려 충렬왕 16년(1290년)영밀공 류청신이 원나라로부터 가져왔다는 설이 있다. 7)김부용 시비 광덕사 입구에 있다. 연천과의 애끓는 사랑을 볼 수 있다. 8)댓거리 향토 유적비 동학군에게 밥을 해준 죄로 관군(일본군)들이 와서 사람들을 목 부분까지 매장해 놓은 것을 밤에 마을 사람들이 구해 주었다 한다. 댓거리 마을은 불살라 없애버림. 마을의 이러 저러한 사실을 기록함. ▣제2차 문화유적 답사(2013년 6월 9일) : 참석자 -김종식 임명순 김정집 김선명 문만주 향토연구가, 주세응 목천향교 전교. ▲답사코스(성남면 일원) : 신사리 선돌-덕암산 강당골-유진의 시비-청류동글씨-유축글씨바위-줄 바위-세성산 동학격전지. 1)신사리 2구 산직말의 선돌 건립 년대는 알 수 없고 5m정도의 거대한 바위인데, 세운 방법이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다. 2)덕암산 강당골 신사리 1구의 강당골은 덕암산 아래에 있다. 예전에는 우암의 제자인 유축과 유진, 유운서 등의 강당을 세우고 후학을 양성하자 우암이 들려보고는 청류강사라 이름을 지어줬고, 참판 안중필이 바위에 곡수유상이라 큰 글을 새겼다고 전해지는데 확인되지 않고 있다. 아마도 새마을 사업으로 농로를 만들면서 훼손된 듯하다. 3)유진의 시비 제시석이라는 제목으로 지은 시비가 강당골 대숲에 가려 있다. 4)청류동 글씨바위 제시석 옆에 글씨의 주인은 알 수 없으나 청류동이라 각자되어 있다. 5)유운서 시비 농금대 유운서가 지은 농금대란 시석이 1985년 발견 후에 1996년 탁본하러 들려보니 훼손되어 행방을 알 수 없다. 6)유축의 글씨바위 유축이라는 사람이 지은 글이 큰 바위에 각자되어 있으며, 붉은 색으로 글이 써져 있어 붉은 시라고도 부른다. 만신들이 위하고 있다. 8)검새울의 줄 바위 또는 칠성바위 줄 바위 또는 칠성바위라 부르는 이 바위는 운파산 장수와 줄 바위 장수가 서로를 죽이려 돌을 던지다가 줄 바위 장수가 맞아죽었는데 운파산 장수가 모르고 계속 던져서 한 줄로 되었다 한다. 9)동학의 격전지 세성산 목천의 동면 죽계리에서 2차로 발행된 동경대전이 시발이 된 동학농민봉기는 이 세성산 전투에서 크게 패전하게 되어 사실상 동학농민봉기는 막을 내리게 되는데, 패한 일부 병력이 공주 우금치로 가서 치열한 최후를 맞고, 작성산과 흑성산, 성거산, 주변으로 흩어졌다. 치열한 피의 현장을 둘러본다. ◆성남면의 시석 천안시 성남면 신사리 강당골에 새겨진 시 2편 . 천안시 성남면 신사리 덕암산 강당골이라 하는 곳은 경치가 수려하고 아름다워 시인 묵객들이 즐겨 찾던 곳으로, 이 고장 선비 유운서, 유축, 유진(柳雲瑞 柳軸 柳軫) 등이 이곳에 강당을 짓고 청류강사라 이름하고 후진양성에 힘썼으며, 참판 안중필이 곡수유상(曲水流觴)이란 큰 글을 바위에 새겼다고 전하나 아직 발견되지 않고 있으며, 3수의 시와 청류동 연암(淸流洞 燕岩) 등의 글씨가 있다. 세성산 서쪽의 작은 산을 백운산이라 하는데, 이곳 성남면에서는 덕암산이라 부른다. 강당 동서로 행랑이 있고 앞에는 누각이 있었으며 사시사철 학문에 전념하였다. 백록동서원의 규모에 의거 증축 되었으며 목천의 많은 선비들이 성취하는 바가 많았다 한다. 배록동 서원에 의거한 서원으로, 소수서원이 현존해 당시 서원의 규모를 가늠할 수 있다 하겠다. ①유 축(柳 軸)의 시 이 시는 덕암산 중턱의 큰 바위에 새겨져 있으며 붉은색으로 써져있어 덕암산 붉은 시라 부르기도 한다. 토정성석 석성산(土精成石 石成山) 흙의 정기는 돌을 이루고 돌은 산을 이루었고. 천탁기형 출세간(天琢奇形 出世間) 하늘이 다듬은 기이한 현상은 출세간이라네. 긍향평천 멱성주(肯向平泉 覓醒酒) 즐거이 고요한 샘을 향해 모란(성주화)을 찾으니 령인대차 세진안(令人對此 洗塵顔) 사람이 이를 대하고 속된 얼굴 씻게 하네. *유축(柳軸):1629-1689 인조 때 사람으로 자는 군석(君碩)이다. 생원진사를 지냈으며 본관은 문화(文化)이다. 효능참봉(孝陵參奉)으로 나가서 금부랑(禁府郞)을 거쳐 형조정랑(刑曹正郞)을 지냈으며, 홍산현감(鴻山縣監)재직 중 관찰사의 미움을 사 파직 되었다가 사복시정(司僕寺正)에 증직 되었다. 그가 지은 붉은 시가 현재 큰 바위에 전하고 있다. {해제} 신사리: 천안시 성남면 신사리의 지명 기 형: 기이한 모양 보통과 달리 뛰어난 모양 출세간: 속세에 벗어난 해탈의 경계에 들어간 모양 평 천: 고요한 샘 성 주: 성주화 모란꽃으로 담은 술 진 안: 속세에 시달린 얼굴 모양 *기구에서는 돌로 이루어진 덕암산을 노래하고, 승구에선 천형의 선경임을 예찬하며. 절구에서는 속세의 사람이 이곳에 이르면 덧없는 욕망을 떨칠 수 있음을 노래한 시이다. ②유진(柳軫)의 시 제시석이라는 제목의 이 시석은 성남면 신사리 강당골 저수지위 대나무 숲에 쌓여 있으며 작은 비석 형태를 하고 있다. 렴염징담 활수류(??澄潭 活水流) 잔잔한 맑은 연못 반짝이며 흐르고, 천광운영 공유유(天光雲影 共悠悠) 햇빛과 구름 그림자 함께 한가롭네. 출산정피 천청완(出山定被 川淸?) 산을 나서면 반드시 맑게 굽이지는 내에 이를 터, 분부거승 막방류(分付居僧 莫放流) 부탁하네, 승려여! 흘려보내지 말아다오. *유 진(柳軫): 1626-1704 자는 헌연(軒然)이며 호는 양한당(養閑堂)이다. 통덕랑을 지냈으며 유축의형이다. 문장은 화려하였으나 과장에는 나가지 않았으며 후진교육에 정성을 다하였다. 우암 송시열의 문하생이다. 제시석이란 이름으로 지은 시이다. 지금은 시석이 대나무 숲에 묻혀 잊혀지고 있다. {해제} 염령: 잔잔한 물결이 해 볕에 비치는 모양 담지: 물이 고여 있는 못 활수: 흘러 움직이는 물 천광: 햇빛에 빛나는 영묘한 광체 운영: 구름의 그림자 유우: 여유로운 모습 출산: 산속에서 나옴. 벗어남 정피: 반드시 목척에 이르겠다. 피: 한정한 곳에 이르다 분부: 많은 사람에게 나누워 시킴 방류: 귀양을 보냄. 추방함 *산과 물이 어우러진 자연경관을 노래함. 기구에서 역동적인 물의 흐름과 승구에서 하늘의 햇볕과 구름, 땅의 그림자가 유유자적함을 노래하며 서로 대비 시키고 있다. 전구에서는 산을 벗어나더라도 맑은 내가 흐름을 드러내고 ,결구에서는 이를 해학적으로 노래하고 있다. ③유운서의 시 농금대란 제목의 이 시는 1985년경 등산도중 처음 발견 후에 1996년 탁본을 뜨러 답사 길에 들렸더니 없어져서, 1985년 발견당시 적어온 내용을 정리하였다. 수기로 옮겼기에 오자가 있을 수 있음을 밝힌다. 미우 과창벽(微雨 過蒼壁) 이슬비는 푸른 암벽에 비끼고 소담 첨록홍(小潭 添綠泓) 작은 못은 깊어 푸르름을 더하네, 독휴 소금지(獨携 素琴至) 홀로 거문고(소금)를 들고 올라 탄화 간송성(彈和 澗松聲) 계곡물 솔바람소리에 화답하네. *유운서(柳雲瑞) : 1549-1630 자는 운향(雲鄕) 진사로 문장이 화려했으나 과거에는 나가지 않고 향리에 강당을 지어 후학을 양성 하는데 뜻이 있었다. 농금대란 3자와 그 곳에 시를 새겨 현존하다가 근자에 와서 훼손되어 영원히 볼 수가 없게 되었다. {해제} * 미우(微雨) : 가랑비. 이슬비 = 세우(細雨) * 소금(素琴) : 장식을 하지 아니한 거문고 * 송성(松聲) : 솔바람소리. *봄날의 자연과 동화된 심정을 읊음. 이슬비가 내려 푸르러 가는 수풀과 함께 웅덩이의 깊이가 더해지는 봄날의 자연에 동화되어 거문고를 들고 풀 소리를 바람소리에 화답하며 즐기는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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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토뉴스]6.4 전국동시지방선거 현장을 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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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우암소만 고집, 생삼겹전문 문성정육점·생고기김치찌개로 입소문 타며 한우, 생삼겹 맛집 등극단체회식장소로 인기 [천안신문]품질 좋은 한우를 직접 발골 작업을 통해 유통마진을 줄이고, 경기불황 속에서도 양을 줄이지 않고 정량으로 6년째 그 맛을 유지해와 고객들로부터 꾸준히 사랑받고 있는 맛 집이 있다. 성정동 전자랜드 21 뒤편에 위치한 문성정육점 생고기집이 화제의 맛 집. 2007년 김종범, 이춘이 부부가 개업해 한우 암소만을 고집해오면서 고객들로부터 꾸준한 인기를 얻고 있으며, 경기침체에도 단체예약은 물론 가족외식으로 소문난 정육점식 생고기 전문점이다. 김종범 대표는 식당을 개업하기전 중장비 20년 경력을 자랑하며 업계에서 인정받는 중장비사업을 운영했었다. 그러던 중 건설경기 침체로 20여 년간 운영해온 중장비 사업을 접게 된다. 이후 대형차 타이어점을 오픈했지만 경험미숙과 미수금 누적으로 실패를 보게 된다. 사업실패를 거듭한 김좀범 대표는 어느 날 알고 지내던 후배의 권유로 문이 닫혀있는 현 식당을 인수하게 된다. 식당경험도 없고 고기유통경로도 모르는 김종범 대표는 중장비 시절 자신감과 뚝심으로 밀어붙이는 성격 탓에 돼지 다섯 마리를 주문해 발골 작업을 독학하게 된다. 해보고 싶은 데로 맘대로 이리저리 발골 작업을 진행하면서 하나씩 하나씩 자연스럽게 발골 기술을 터득해 나가기 시작한 김종범 대표. 어느 정도 발골 기술이 익혀지기까지는 많은 시련과 고통의 시간이었다고 한다. 돼지 다섯 마리를 맘껏 발골하던 중에 상품가치가 없이 발골된 고기를 처리하기가 곤란해 김치찌개에 넣고 푸짐하게 점심 메뉴로 공략하게 되었던 김 대표. 양 많고 고기도 많고 푸짐해 먹어본 사람이 입과 입으로 소문내 문성정육점·생고기집은 김치찌개 전문점이 되었다고 한다. 지금도 점심시간에 가면 100여 평이 넘는 홀에 손님이 가득하다. 김 대표는 “우연히 발골 하는 과정에서 생긴 고기를 김치찌개에 넣어 힘들여 일하는 노동자에게 듬뿍듬뿍 주었던 김치찌개가 모체가 되어 소문이 났고 지금은 암소 한우, 생삼겹살로도 유명한 고기집이 됐다”며 환하게 웃어가며 지난날을 회상하며 말했다. 올여름에는 특히 다른 해와 비해 운영이 힘들었다고 한다. 김 대표는 “기죽지 말고, 찌그러지지 말아라, 월급 올려 줄께”라고 전하면서 직원들을 격려하고 직원과 똑같이 출근해서 함께 일하고 퇴근한다고 밝혔다. 김 대표가 중장비사업을 하면서 얻은 뚝심과 자신감의 경영철학을 엿볼 수 있는 대목. 김 대표의 자신감 있는 경영과 양과 품질을 속이지 않는 양심, 늘 찾는 고객들에게 항상 일정한 맛을 제공해 지난 7월에는 천안시가 지정하는 ‘착한업소’로 선정되기도 했다. 단체 회식과 가족모임이 많고 고객들이 맛으로 느낀 식감을 구전으로 전달되면서 소문난 맛 집으로 등극한 문성정육점 생고기식당. 변함없는 맛과 정성이 손님들의 발길을 끌어 모으고 있다. 김치찌개, 된장찌개 5000원, 한우암소 스페샬 200g 3만원, 생삼겹살 200g 1만1000원, 뚝배기불고기 8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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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안, 전통의 맛 고집하는 ‘큰댁’ 한정식25년 전통, 입에서 입으로 소문난 맛집 한국관광공사 지정 깨끗하고 맛있는 집올해 충남도 인증 외국인 편의음식점 선정 2대에 걸쳐 25년간 전통 한정식의 맛을 이어온 ‘큰택’은 간장과 소금을 사용해 전통의 맛을 지키고 있는 소문난 한정식 음식점이다. 천안시 서북구 성정동 4길 여성회관 앞에 위치한 큰댁(대표 현흥주, 57)은 1989년 어머니의 사업을 이어 장군식당으로 출발, 현재의 자리에 대지 400여평을 마련해 ‘큰댁’으로 상호를 변경, 간장과 된장 김치를 직접 담아 우리 옛 방식의 음식 맛을 내고 있다. 지난 2003년 5월 한국관광공사로부터 ‘깨끗하고 맛있는 집’으로 선정됐고, 2012년 10월에는 충청남도가 인증하는 ‘외국인 편의 음식점’으로 인증을 받았다. 현흥주 대표는 “고객이 맛보고 그 맛을 구두로 전파하고 맛을 보기 위해 찾는 이가 또다시 맛을 보는 등 맛으로 인정받아 왔어요”라고 음식 맛에 대한 자부심을 전한다. 큰댁은 좋은 재료만을 선별해 매일매일 조금씩 장을 본다. 많은 재료를 다량으로 사다 보면 신선한 재료를 사용하지 못하게 된다. 그런 이유로 조금씩 장을 보고 요리할 때마다 신선한 야채를 썰어 쓰라고 직원들에게 강조한다. “양파를 사용함에 있어서도 껍질을 벗겨 써는데, 많은 양을 썰어 저장하게 되면 양파 고유의 색깔과 향을 낼 수가 없고 금방 썰어 내지 않으면 재료가 산화돼요” 현 대표는 양파사용 방법까지 세심하게 관리할 정도로 식자재를 꼼꼼히 활용하고, 매일 만들어 내는 음식 맛을 보며 일정한 맛을 유지하고 있다. 특히 현 대표는 요즘 한정식이 퓨전화 되다보니 달달해서 우리가 먹던 한국 전통의 고유한 맛을 잃어가는 것이 안타깝고 잃어버릴 것만 같다고 전한다. 우리 어머니가 해왔던 것처럼 그대로 한다는 현 대표는 간장과 된장, 김치를 직접 담아 사용한다. 또한 인공조미료를 사용하지 않고 간장과 소금을 이용해 재료가 가지고 있는 고유의 향과 맛을 유지하도록 한다. 김치를 담는 방법에서도 우리 지역 전통 방법인 6젖의 새우젓만을 넣어 담가내어 칼칼하고, 깔끔하고, 아삭거리는 김치 맛을 선보여 유럽, 일본, 중국인에 이르기까지 김치를 추가해 먹을 정도로 우리 전통의 맛을 느끼고 간다고 한다. 큰댁의 김치는 외국인이 많이 찾아오는 이유로 맛은 대중적인 중간의 맛으로 어린아이부터 외국인까지 먹을 수 있는 맛이라고 했다. 음식맛의 한결같이 유지하기 위해 현 대표는 직원들을 가족처럼 대한다. 오후 3시쯤 찾아간 큰댁은 점심 식사를 마친 시간인 탓에 조용했다. 취재하던 중 직원 수를 물었더니 20명이 있다고 답했다. 그런데 직원들이 보이지 않았다. 현 대표는 “지금 쉬는 시간입니다. 근무시간이 오전 10시부터 오후 10시까지인데 휴식을 하지 않으면 아무리 맛있는 음식이 있더라도 좋게 내지 못할 수도 있고요. 퇴근 후 집에 가서 하는 일도 있기 때문에 점심이 끝난 오후 2시 반부터 4시 반까지 휴식시간을 제공하고 있어요”라고 말한다. 직원들이 최상의 컨디션을 유지해 항상 친절하게 손님을 맞이하고, 좋은 음식으로 사람의 건강을 돌보는 환경을 만들어가는 현 대표의 경영철학이 담겨있는 것. 현 대표는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젊은이들의 식생활이 걱정된다. 인스턴트 음식으로 식사를 대신해 마음이 매우 안타까워요. 3년 정도만 하고 서울 대학가에 가서 우리 아이들한테 밥을 해주고 싶어요.”라고 밝혔다. 우리 전통의 음식 맛을 직접 전해주고 싶은 현흥주 대표의 고집스런 장인정신이 담겨있는 포부였다. 한편, 큰댁은 오전 12시~오후2시30분, 오후 5시~8시까지 음식을 내는 시간이고 메뉴는 점심특선A 한상차림 1만5000원, 점심특선B 한상차림 2만원, 점심진지상 2만5000원으로 월~금일까지 준비되고, 큰댁 한정식 3만5000원, 수라정식 5만원, 주안상 7만원이다. 이용시설로는 빔프로젝터를 이용할 수 있는 세미나실이 있고, 돌, 백일 회갑, 상견례가 모두 가능하며 4인, 10인, 20인, 40인, 60인 이용이 가능한 룸이 있으며 주차시설은 40대 규모이다. 큰댁 한정식 041-555-8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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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면 연춘리 두부전문 맛집 ‘시골손두부’우리콩으로 만든 두부로 어머니 손맛나는 한상차림 일품북면 신선야채로 만든 밑반찬 정갈, 입소문타고 손님 줄이어 목천IC 앞 독립기념관 사거리에서 병천 방면으로 가다 보면 북면 가는 이정표가 보이는 연춘리 마을에 위치한 ‘시골손두부’는 오래전부터 직접 만드는 두부음식점으로 유명한 맛집이다. 주 메뉴는 순두부 전골과 두부전골이 있다. 가격은 7000원. 한상차림은 먹음직스럽게 차려져 입맛을 돋우기에 충분하며 맛집의 명성을 입증해주고 있다. 특히 10여 가지의 밑반찬이 정갈하게 나오는 시골 어머니의 상차림이다. 가지무침, 자르지 않은 긴 열무김치, 녹색이 살아있는 깻잎 장, 고사리무침, 비지장, 얼갈이 겉절이 등과 같이 차려지며 가운데는 순두부전골의 자리로 풍성하다. ‘시골손두부’ 집은 박상배 대표가 직접 아침마다 만드는 두부를 넣어서 두부전골, 김치찌개, 청국장 등을 끊여낸다. 이같은 이유로 21번 국도를 지나는 운전기사들이 자주 찾는 기사식당 역할도 하는 곳이다. ‘시골손두부’의 맛은 꼭 한번 들려 맛봐야 알 수 있는 맛이고 후회하지 않을 맛이다. 순두부전골에는 버섯과 순두부, 호박, 새우젓 등이 들어간다. 새우젓갈이 들어가 짭조름한 맛과 어우러진 개운한 순두부의 맛이다. 순두부전골을 맛있게 먹는 방법은 건더기를 다 먹고, 된장처럼 보이지만 된장은 아니고, 콩을 갈아 양념해 만든 비지장을 전골에 넣어 같이 풀어서 끓여 먹으면 또 다른 맛으로 탄생한다. 이 비지장은 밑반찬으로 나오는 깻잎에 싸서 먹으면 그야말로 별미다. 식사 후 콩비지는 무료로 포장해서 가져 갈 수 있고, 신김치 넣고 비지찌개 끓여서 먹으면 추운 가을의 청취를 더욱 느낄 수가 있을 것이다. 또한 우리 콩으로 만든 두부는 우리 그릇과 연춘리와 북면 지역에서 생산된 신선 채소로 만들어져 맛이 더 하다. 지역에서 생산된 순수두부콩으로만 만들어진 연두부에서 비지까지 콩으로 메주를 쑨 청국장 들을 만들었다. 이런 맛을 보기 위해 단골들이 많아 점심때면 줄을 서야 맛을 볼 수 있다. 두부전골의 맛은 두부만 넣고 별다른 것을 넣은 것 같지도 않은데 깔끔하면서도 시원한 맛이다. 두부전골만을 먹는 다라기 보다 계절마다 지역에서 생산되는 밑반찬을 다양하게 먹을 수 있어 더욱 풍요롭다. 특히 밥이 차지고 맛있으며, 가마솥에서 끓은 숭늉이 구수하고 운이 좋으면 누룽지도 얻어먹을 수 있는데 날이 추워지는 겨울부터 시작한다. 또 다른 메뉴로는 청국장, 뜬 비지장, 순두부김치, 돼지더덕 주물럭 등의 다양한 두부의 메뉴로 구성돼 있다. ‘시골손두부’ 북면연춘리 107번지 041-556-9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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