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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 천안의 지명유래 ④[천안신문] 본보는 지난 151호부터 천안 각 읍면동의 지명유래에 대한 연재를 진행중이다. 천안이라는 지명에 대한 기록은 고려 태조 13년인 930년 8월 8일 기해 일에 고려태조가 대록에 내려와 동서도솔과 탕정의 일부와 사산의 일부와 대록의 일부를 병합하여 천안이라 하고 도독부를 둔데서 유래한다. 대록은 지금의 목천이요, 사산은 직산이며, 동도솔과 서도솔은 천안의 일부이며, 탕정은 온양 탕정의 일부다. 각 지역에 내려오는 천안의 지명은 1988년부터 이원표 선생이 동부 6개 면을, 1987년도부터 오세창 선생이 천안시를 조사해 1960년경 한글학회에서 발행된 ‘한국 지명총람’을 참고로 가감 수정해 동부 6개면은 1990년 천안군에서 ‘역사의 현장’으로 출간되었으며, 천안시는 1989년 천안문화원에서 ‘천안의 지명’으로 출간하였다. 그 후 1999년 천안시 문화원에서 시와 군에서 발행된 것을 합하여 ‘천안의 땅 이름이야기’로 출간했다. 이번 연재는 이를 바탕으로 했으며, 일부 내용은 천안 향토사학자 김종식 선생이 재조사를 통해 가감하였음을 밝혀둔다. <편집자 주> ▲천흥리(天興里) 직산군 이남면 지역인데 천흥사가 있었으므로 천흥리라 불러진 이름이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당시도 그대로 천흥리라 하여 성거면에 편입되었다. 그 후 면이 읍으로 승격되어 성거읍 천흥리가 되었다. 언양김씨 가승에 의하면 세종 조에 김경번이라는 분이 정산 현감에서 물러나, 부친의 선영이 있는 경기 광주로 또는 서울의 본가로 가던 중에 직산의 송당에서 머물렀는데, 우연히 천흥쪽을 보니 사람이 살기 좋을 것 같아 가서보니 천흥사란 큰 사찰이 무너져 나무들이 우거져 있어 베어내고 개간하여 살았다는 기록이 있다.(彦陽金氏 家乘 定山縣監 金慶蕃 記錄 世傳云 公自定山 遍歸時 路過 稷山 松堂村 望見 天興以 爲可居 仍來見時 天興大刹 毁破後 樹木 參天 未有村居 公命所去 林木土地而拏基之子孫 至今世居焉(언양김씨 가승 정산현감 김경번 기록 세전운 공자정산 편귀시 로과 직산 송당촌 망견 천흥이 위가거 잉내견시 천흥대찰 훼파후 수목참천 미유촌거 공명소거 림목토지이나기지자손 지금세거언). 이 기록으로 보아 천흥은 세종 조까지는 부서진 천흥사란 절터로 있었고, 그 후에 사람들이 살았음을 알 수 있고 마을이 형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천흥리의 역사를 밝히는 귀중한 역사적 사료이다.<언양김씨 가정기문> -산신제 : 천흥부락에서 정월 초사흘 경 지내는데 이장이 생기 복덕을 보아 닫는 사람 두 사람을 선정하여 함께 지내는데 제관 1명, 축관 1명과 보조인 1명이고 삼색 실과 통돼지를 제물로 쓰고 제관으로 선정된 사람은 삼일 간 담배를 금하고 옷 샘에서 목욕하고 부정한 일을 하지 않는다. 각 호마다 소지를 올려 주고 평안을 빈다. -만일고개(晩日) : 만일령 매일고개라고도 하는데 천흥리에서 목천면 산방으로 넘어가는 고개이다. -구랑골,구암동(龜岩洞) : 거북 바위골. 거북바위라고도 하는데 바위 모양이 거북이처럼 생겼으며 천흥리 동남쪽에 있는 마을. 구암사라고 하는 절이 있었다고 한다. 언양김씨 족보에 의하면 이곳 구암사에서 김광석 학연의 부자가 조선 영조 43년 정해년인 서기 1767년에 족보를 판각하여 출판하였고 그 족보가 현존하고 있다. 구암사란 절이 있었다. 성거산하 좌우 양료급 정문피화소 근부 중수 이 정문미급건(龜巖寺 聖居山下 左右 兩寮及 正門被火燒 近復 重修 而 正門 未及建) 구암사는 성거산 아래 있는데, 좌우 집에 이르러 정문에서 불이나 무너졌다 다시 중수하였는데 정문은 아직 세우지 못했다. 이 기록으로 보아 200여 년 전까지는 현존한듯하다. -사리목 고개 : 사리현이라고도 하는데 천흥리에서 북면 납안리 도촌으로 넘어가는 고개. 성거산 줄기가 되며 산이 높고 고개가 험하여 여러 사리를 이루었다. 병인교란 때 천주교인 여러 명이 관원에게 체포된 곳이다. -뱀산 : 사산이라고도 하는데 천흥 서쪽에 있는 산. 산모양이 뱀처럼 생겼다한다. -배랑골 : 천흥사 북쪽에 있는 골짜기. -문수곡(文殊谷) : 문수동 또는 문수골이라고도 하며 예전에 문수보살이 기도하고 떠난 곳이라 한다. 만일사 가는 계곡 저수지 끝나는 지점 왼쪽 고랑이다. 현재는 보안림 세면기둥이 서있다. 원통 골과 연관이 있는 듯하다. 원통(圓通)의 의미는 승님이 도를 통달함을 의미한다. 오얏골 뒤에 있는 골짜기. -물프렛골 : 상암(上岩)골 오른쪽에 있는 골짜기로 날이 아무리 가물어도 물이 솟아난다 한다. 물왕골이라고도 한다. 이곳에 직산의 오충신중 1인인, 선조 때 육진의 명장인 충신 김응상 장군의 묘소가 있다. 장군은 풍전등화의 고려를 구한 명장 위열공 김취려 장군의 후손이다. -삼도바위 : 삼도암(三道岩) 매일절(만일사) 밑에 있는 큰 바위. 길게 가로 누어있어 세 골짜기의 물이 각기 이 바위를 거쳐 흐르게 되는데 얼음이 많이 얼면 경기도가 풍년이 들고 가운데는 충청도, 남쪽은 경상도로 구분한다. -상암골(上岩) : 원통골 위쪽에 있는 골. -원통골(圓通) : 어느 스님이 도를 통달한 곳이라한다. 위쪽으로 올라 산을 넘으면 만일사이다. 언양 김씨 가승에 의하면 세종 조에 이곳에 묘소를 쓰면서 기록한 것에 의하면 원통(圓通 또는 元通)으로 기록하고 있으며, 만일사 올라가는 곳 전부를 원통골내 큰골이라고 기록하고 있다.(山所 稷山 南面 元通 子坐午向 之原 夫人 墓在於 局內 相望處 大谷 乾坐巽向) -매일절(晩日寺) : 만일사 구랑골 동쪽에 있는 절. 오층탑이 있고 만일사 법당(法堂)이 지방문화재 자료 제 250호로 지정되었다. 만일사 성거산 요근부 퇴훼 지유 초막 수삼간(晩日寺 聖居山 腰近復 頹毁 只有 草幕 數三間). 만일사는 성거산 허리부근에 있는데 다시 무너져 훼손되었다. 다만 초막 수삼간이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학을 새기다 날이 저물어 완성하지 못했다는 미륵이 있고, 자연 석굴에는 석가의 머리가 없는 앉은 모습의 부처가 있다. 조선조 초기에 억불정책에 의해 훼손되어 부처의 머리가 없었는데, 근자에 이르러 머리 부분을 만들어 안치를 했는데, 균형이 맞지를 않고 조잡해 보이며 부처로서의 인자함이 보이지 않는다. 예전의 모습은 없고 다만 여기저기 흩어져있던 탑의 부재들을 모아서 탑을 만들었는데 균형이 맞지 않는 5층 석탑이 있다. 절의 터는 성거산 꼭대기에다 대지가 좁고 옹색하여 높이 축대를 쌓고 절을 지었으며, 절이 무너지면서 남은 많은 석재들이 있는 것으로 보아서 절의 규모는 생각보다 큰듯하다. -중앙광산 : 직산광산이라고도 하였다. 1894년에 발견되어 1910년에 영국 사람이 개발하고 1925년에 일본인이 인수하려다가 1945년 한국인이 경영하였었다. -천흥사 당간 지주 : 천흥리 천흥사 터에 있는 당간지주. 높이가 7m나 되고 60척의 구리 장대가 있어서 그 위에 큰 등을 달면, 그 빛이 수백리를 비추었다고 하며, 고종 때 당백전를 만들기 위하여 흥선 대원군이 구리빗장과 장대를 가져갔다 한다. 보물 제 99호로 지정되어 있다. 호서읍지 직산편 불우조에 천흥사 재 성거산하 고려 창건금패 유 당시소수동장 급석탑(天興寺 在 聖居山下 高麗 ?建今廢 有 唐時 所樹銅檣 及石塔). 천흥사는 성거산 아래 있는데 고려 때 처음 만들어졌으며 지금은 없다. 당나라 때 만들어진 당간과 석탑이 있다라고 되어있다. -절의 건축시기와 당간과 석탑의 건축시기가 다르게 기록되어 있어 천흥사에 대하여 혼돈하게 되는 사항이 여기에 있다. 아마도 읍지를 편찬할 시에는 당간에 만든 연간이 기록되어 있었다고 추정된다. -천흥사지 오층석탑 : 천흥 저수지 밑에 있는 천흥사 오층석탑. 보물 제 354호로 지정되었다. -천흥사터 : 천흥에 있는 천흥사 터. 당나라 때 세운 절이라 하며 큰절로 저리까지 연해 있었다고 한다. 세종지리지와 직산현지 불우 조에 의하면 당나라 때 세운 구리기둥과 석탑이 있다한다. 당나라 때는 통일신라 때를 말한다. 고려 말에 만든 종이 국립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언양김씨 족보에 신빙성이 가는 직산 남면 천흥리 천흥사 절터에 대한 세종 조 때의 기록이 있어 기록한다. 언양김씨 가승에 의하면 세종 조에 김경번이라는 분이 정산 현감에서 물러나 부친의 선영이 있는 경기 광주로 가던 중에 직산의 송당에서 머물렀는데 우연히 천흥쪽을 보니 사람이 살기 좋을 것 같아 가서보니 천흥사란 큰 사찰이 무너져 나무들이 우거져 있어 베어네고 개간하여 살았다는 기록이 있다(彦陽金氏 家乘 定山縣監 金慶蕃 記錄 世傳云 公自 定山遍歸時 路過 稷山 松堂村 望見 天興以 爲可居 仍來見時 天興大刹 毁 破後樹木 參天 未有村居 公命所去 林木土地而拏基之子孫 至今世居焉(언양김씨가승 정산현감 김경번 기록 세전운 공자정산 편귀시 로과 직산 송당촌 망견 천흥이 위가거 잉내견시 천흥대찰 훼파후 수목참천 미유촌거 공명소거 림목토지이나기지자손 지금세거언)<언양김씨 가정기문> 이 기록으로 보아 천흥리 일대 마을 전부가 절터로 생각된다. -굴골 : 300여명이 들어갈 수 있는 천연굴이 있다고 한다. 성거산 꼭대기에 있다. 우연한 기회에 이굴을 답사해보니 상당히 크고 우람했다. 가히 50여명이 앉아 있을만하다. 안은 아늑하며 입구는 7~8보정도 되며 높이도 두질이 넘는다. 굴 안의 높이는 상당히 높아 알 수 없고, 7~8보정도 안으로 들어가서는 1보정도 한질이 넘는 아치형으로 사람이 다듬은 흔적이 보이며, 붓으로 쓴 글은 ‘오월 초오일’만 확인할 수 있고, 이름이 있는데 판독이 어렵다.(?? 乙? 五月 初五日 ?性). 연기에 의한 그슬림이 있고 고려 말에서 조선조초의 각종 사기그릇 깨진 것과 기와편이 발견된다. 예전에 작은 암자의 흔적이 있다. 작은 샘 주변 돌에는 음식을 갈은 흔적의 돌이 있다.<천흥리 김웅영 김칠영씨 제보> 호서읍지에서 찾은 굴골의 기록이다. 호서읍지 직산편 불우조에 굴암사 재 성거산제일봉 석굴하근우 퇴훼 천한도우어굴(窟巖寺 在 聖居山第一峯 石窟下近又 頹毁 天旱禱雨 於窟)이라 기록하고 있다. 석굴사는 성거산 제일 봉 석굴아래 가까이 있는데 무너져 퇴락되었다. 굴에서 날이 가물면 빌었다. 굴과 근처에 있는 기와와 자기편들은 고려말과 조선초기의 굴암사의 흔적인 것이다. 천흥 저수지 인근에서 만난 어른의 구전에 의하면 예전에 목천 사람이 이곳에서 나무를 하다가 비를 만나 피하다가 백골이 된 사람의 해골이 있어 묻어주고 갔는데, 그 후로 목천의 부자가 되었다는 전설이 있다. 이곳 사람들은 이곳에서 기도를 하면 잘된다는 소문이 있어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간혹 기도하러 가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길이 험하고 산이 우거져 가는 사람이 없다가 산에 인도가 생기면서 기도하러 다니는 사람이 있고 촛불을 밝혔던 흔적이 있다. -서돌골 : 대원군 섭정시 병인교난 때 리델이 신부, 페롱권 신부, 칼레강 신부 등 프랑스 신부와 내포 교인들이 이곳에 숨어 있다가 신부들은 무사히 중국 천진으로 탈출했으나 교인 다수가 관원에 체포되어 공주 감영에서 사형되었다. -삿갓바위 : 돌이 얹혀 있는 것이 삿갓 같이 생겼다 한다. -아갈바위 : 바위가 입을 벌리고 있는 것 같다고 한다. -승지 김응상 장군묘: 직산 5충신 중 한분인 김응상 장군의 묘소가 천흥 저수지위 물왕골에 있다. 선조 때 6진에서 전사했다. ▲직산 오충신 김응상 사적기(稷山 五忠臣 金應祥 史蹟記) 김응상(金應祥)(?~1583년 2월 13일 선조 16년)은 직산군 천흥에서 태어난 이 고장의 충신이다. 자는 서백(瑞伯)이고 어모장군 삼척진 수군첨절제사 증 통정대부 승정원좌승지 겸 경연참찬관(禦侮將軍 三陟 鎭 水軍 僉節制使 贈 通政大夫 承政院左承旨 兼 經筵參贊官)이다. 선조 16년에 육진에서 북쪽의 오랑캐들과 맞서 싸우다 전장에서 전사한 직산 오충신중 한분이시다. 언양 김씨이며 현감 덕윤의 아들이고 고려조의 명장인 위렬공 김취려 장군의 후손이다. 신도비가 묘소에 있다. 관은 증직으로 좌승지이다. 부인은 숙부인 풍양조씨(淑夫人豊壤趙氏)이며 부친은 진사덕영(進士德齡)이고, 장남은 정 립(挺 立)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이다. 묘소는 천안시 성거읍 천흥리 천흥 저수지 위에 대곡 곤좌(大谷坤坐)이며 공이 전사하자 시신을 가지고 고향으로 돌아온 말의 무덤이 산소아래 있다. 화순공과 천안공께서 석물을 봉행하였고 천흥 종중에서 수호하고 있다. 충신정문이 천흥에 있다고 직산읍지에 전하나 훼손되어 볼 수가 없다. ▲절제사 증 승정원 좌승지공 사적기 공(公)의 휘(諱)는 응상(應祥)이다. 선조무인년(宣祖戊寅年)에 공이 의성군(義城君) 황림(黃琳)의 생질(甥姪)로 종계변무사행(宗系辨誣使行)에 수행(隨行)하였다. 선조기축년(宣祖22년1589) 11월에 주청사(奏請使) 윤근수(尹根壽) 등과 전후의 주청사(奏請使) 황정윽(黃廷彧) 등이 정정(訂正)된 책을 바치고 그 공으로 광국공신(光國功臣)에 올랐다. 공은 오위사정(五衛司正)으로 신묘년(선조24년1591) 윤3월에 광국원종공신삼등(光國原從功臣三等)에 올랐다. 록권(錄卷)의 교문(敎文)에 이르기를, 해와 별같이 빛나게 인륜을 밝히니, 오랜 나라가 새로워지도다. 재조(再造)한 데 대한 공을 보답함에 대소 없이 공을 상 주나니, 어찌 뒷날로 미를 수 있으랴. 이것은 상법(賞法)대로 하는 일이지 사사로운 은혜에서 나옴은 아니로다. 생각해보면 십 팔대에 걸친 지원극통(至?極痛)한 일로서 천만년에 없던 일이라 해동(海東)이 온통 오래도록 금수(禽獸)로 무함(誣陷)되니 내 어지 임금 일을 즐거워하랴. 북극성을 향하여 항상 간절히 하늘에 호소하며 욕심 것 사는 것으로 만족히 여길 수 없었다. 비밀 전적도 남김없이 전질(全帙)을 가볍게 보이며 숨기지 않고 무고한 관계의 정정함을 꾀했다. 그래서 한둘의 신하가 전후로 신명을 다해 힘쓴 충성에 말미암고, 또한 약간 인이 노력한 도움에 힘입어 중국에서 잘못 기록한 종친의 계보를 고치고, 내게 조혼 올림을 감히 받고서 사양함이 없지 않았다. 하늘에 계신 열성(列聖)께 공이 빛나니, 내 이에 이르러 수명(受命)에다 비기노니 은전(恩典)이 또한 타당한 바로이다. 고로 위로는 경사대부(卿士大夫)로부터 아래로는 서리예복(胥吏隸僕)에까지 미력(微力)과 소공(小功)이 있으면 일을 나눠 이룬 바를 빠짐없이 수록했나니, 중(重)하고 경(輕)한 등급이 비록 한결같지는 않으나 신하됨에 있어 귀하고 천함이란 없도다. 힘써 국가와 더불어 아름다움을 같이 할지니 이에 가상(嘉賞)하노라, 그걸 잊을 수 있으랴. 내 공정하게 상세히 알고 있음을 교시하노라. 공(公)은 소년 시부터 문무겸전으로 세상에 알려졌다. 선조 1583년(宣祖 16년) 계미(癸未) 삼월 육진에 오랑캐 니탕개(尼湯介)가 이웃 부락 추장 오을기내(汚乙其乃)와 율보리(栗甫里) 등과 합작하여 노략질하거늘 경원부사(慶源府使) 김수(金?)가 출전했다가 패하였다. 적이 경원 아산 안원(慶源 阿山 安原) 등의 진보(鎭堡)를 연달아 함락하고 종성진(鍾城鎭)을 포위했다. 온성부사(穩城府使) 신립(申砬)이 추격하여 강을 건너 오랑캐 도적의 소굴을 소탕하자 참찬 정언신(鄭彦信)을 보내 육진을 순찰하였다. 임금께서 비변사(備邊司)에 명하여 각각 인재를 천거하게 하니, 곽흘(郭屹)이 공(公)을 천거하였다. 재신(宰臣) 남치근(南致勤)공도 연석에서 진언하기를 “무신중에는 이순신(李舜臣)이 있고 선비 중에는 김모가 있어 다 탁용 할 만합니다”고 하였다. 당시 변방의 보고가 날로 급박한데, 하루는 홀연히 부리는 명령이 내려 공이 백의(白衣)로 대궐에 이르니 궁중편전에서 인견하고 북 변사를 위임하였다. 곧 절제사(節制使)를 특임하고 차고 있던 칼을 하사하는 등 대은(大恩)을 많이 내렸다. 응상은 감격하여 멸사보은(滅死報恩)할 것을 다짐하고 병정을 이끌고 육진(六鎭)에 당도하여 싸우니 사기는 충천하여 싸울 때마다 승전하였다. 얼마가지 않아 소탕하게 될 무렵 진(鎭)에 머물러 잠시 군대를 수습하는 동안 적병이 돌연 급습하여 왔다. 절제사 김응상(金應祥)은 죽음을 각오하고 응전하여 도망가는 적을 한사람도 남기지 말 것을 외치며 도망가는 적을 따라 가던 중 적의 화살이 그에게 박히자 화살을 뽑아 내던지면서 좌우에 명을 내려 “내가 다쳤다 하지 말라 적이 나를 가볍게 볼까 두렵다” 하였다. 그리고 종일혈전(終日血戰)하다가 선조16년(1583) 2월 13일에 전장에서 절명하였다. 조정에서는 애도의 뜻을 표하고 좌승지(左承旨)를 특증(特贈)하고 부상의 편의를 돌보아 주는 한편 3년 상기가 지나자 그 아들에게 관작(官爵)을 제수했다. 후에 순절록에 이순신(李舜臣) 고경명(高敬命) 등 21명이 수록되었는데 여기에 응상(應祥)도 함께 기록되었다. 응상의 후손은 대대로 융성하여 읍중(邑中)에 망족(望族)이며 6세손 경연(景淵) 의연(義淵)이 효(孝)로서 저명하여 의연(義淵)은 교관(敎官)에 증직되었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응상(應祥)이 육진에서 전사하였을 때 그의 애마(愛馬)가 시신의 일부를 물고와 전사하였음을 알려 주었다 전하며, 공의 묘소 밑에는 말 무덤도 있다. 현재 천안시 성거읍(聖居邑) 성거산(聖居山) 아래에 묘소와 묘비가 있다. 김응상이 전사한 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어이없게도 동래, 상주, 충주의 싸움에서 패하여 선조가 의주로 몽진하게 되었을 때 김응상이 살아 있었더라면 이렇게 까지는 되지 않았을 것이라 하며 그의 죽음을 아쉬워하는 사람이 많았다 한다. 당시 남치훈(南致勳)이 지목한 것처럼 김응상과 이순신이 당대 제일의 군략가 이었으므로 아마도 김응상이 전사하지 않았다면 임진전란이 다르게 전개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모두가 국운으로 돌릴 수밖에 없었다. 후일 직산 장보들이 김응상 등 직산 출신으로 전몰한 다섯 분을 모시는 오충사를 지으려고 조정의 윤허까지 얻었으나 사당 건립 자금을 마련하지 못하여 세우지 못하고 말았다. ▲송남리 직산군 이남면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으로 송당리 남창리가 병합하여 송당리의 송자와 남창리의 남자를 따서 송남리라 하고 성거면에 편입되었다. 그후 면이 읍으로 승격되어 성거읍 송남리가 되었다. -선주형(전설) 배가 물위에 떠 있는 형이라 하여 우물을 파면 배의 밑을 뚫는 것과 같아서 배가 가라앉자 부락이 불길하다 하므로 옛날에는 샘을 파는 일을 부락에서 꺼려했다고 한다(송당부락). -통미 : 남창 서쪽에 외따로 있는 산. (전설) 청주에서 큰 홍수 때 떠내려 오다가 이곳에서 걸쳐 더 못가고 머물게 되었다 한다. -소댕이 : 송당리(松堂里) 송남리에서 제일 큰 마을. 지형이 솥뚜껑 같다고 한다. -숲거리 : 소댕이 뒤에 있는 들. 전에 숲이 많아서 벌미 동산까지 연하여 있었다. -붉은언덕 : 남창 뒤에 있는 고개 붉은 흙이 많다. -벌미동산 : 소댕 앞에 있는 작은 산. -남창 : 남창(南倉)리 소댕이 동남쪽에 있는 마을. 조선시대 때 직산현 남창이 있었다. -백잣나무 골 : 지사 골 너머에 있는 골. 잣나무가 있었다고 한다. -가는골 : 서덕재에 있는 골짜기. -깃발 : 백작나무 골 너머에 있는 산. -서덕재 : 소댕이 위쪽에 있는 산. -장살미 : 남창 앞에 있는 들. -지삿골 : 서덕재 위쪽에 있는 들. (전설) 안산이 있는데 뱀머리 형(사두형)이라 하여 걸미 동산은 개구리 형으로 이 뱀이 개구리를 잡아먹기 위하여 활동을 하는데 뱀 머리에 비석을 세워 놓아 뱀 머리를 눌러 놓았으므로 개구리를 먹지 못하고 있어 좋지 않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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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 천안의 지명유래 ③[천안신문] 본보는 지난 151호부터 천안 각 읍면동의 지명유래에 대한 연재를 진행중이다. 천안이라는 지명에 대한 기록은 고려 태조 13년인 930년 8월 8일 기해 일에 고려태조가 대록에 내려와 동서도솔과 탕정의 일부와 사산의 일부와 대록의 일부를 병합하여 천안이라 하고 도독부를 둔데서 유래한다. 대록은 지금의 목천이요, 사산은 직산이며, 동도솔과 서도솔은 천안의 일부이며, 탕정은 온양 탕정의 일부다. 각 지역에 내려오는 천안의 지명은 1988년부터 이원표 선생이 동부 6개 면을, 1987년도부터 오세창 선생이 천안시를 조사해 1960년경 한글학회에서 발행된 ‘한국 지명총람’을 참고로 가감 수정해 동부 6개면은 1990년 천안군에서 ‘역사의 현장’으로 출간되었으며, 천안시는 1989년 천안문화원에서 ‘천안의 지명’으로 출간하였다. 그 후 1999년 천안시 문화원에서 시와 군에서 발행된 것을 합하여 ‘천안의 땅 이름이야기’로 출간했다. 이번 연재는 이를 바탕으로 했으며, 일부 내용은 천안 향토사학자 김종식 선생이 재조사를 통해 가감하였음을 밝혀둔다. <편집자 주> ▣성거읍(聖居邑) 본래 직산군의 남쪽이 되므로 이남면(二南面)이라 하여 천흥(天興), 자동, 정동(貞洞), 오색당(五色堂), 막거리(幕巨里), 신리(新里), 월경(越境), 소조(所造), 명우(鳴牛), 복덕(福德), 문성(文城), 석교(石橋), 요동(料洞), 분방(芬芳), 수월(水越), 송당(松堂), 남창(南倉)의 17개리를 관할하다가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이동면(二東面)의 신전(莘田), 모관(茅串), 삼곡(三谷),오목(五木)의 4개리와 동변면(東邊面)의 남산리(南山) 일부와 천안군 북이면(北二面)의 독주막(獨酒幕)일부를 병합하여 이곳에 있는 명산 성거산의 이름을 따서 성거면이라 하여 천흥, 저리, 점촌, 오색당, 신월, 소우, 문덕, 석교, 요방, 송남, 신전, 삼곡, 오목등 13개리로 편입하여 성거면에 편입되었다가 1985년 10월1일 대통령령 제11772호로 성거면에서 성거읍으로 승격되었다. ▲삼곡리(三谷里) 직산군 이동면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때 삼곡리의 옛 이름을 그대로 사용하고 단일부락이 성거면에 편입되었고 면이 읍으로 승격되어 성거읍 삼곡리가 되었다. -삼곡리 : 삼곡(三谷), 삼곡보(三谷洑), 시구리, 시구리들, 시구리 앞에 있는 들. 예전에는 시구리라 불렀는데 시구리가 삼곡으로 변하여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세골이→시골→시구리로 불리 던 것을 한자화 하는 과정에서 삼곡(三谷)으로 되었다. -막거리 : 시구리 앞 들 가운데 있는 마을. 예전에 주막이 있었다 한다. -서낭당 : 이곳에 상여가 지나가거나 시체가 지나가면 동네가 불길 하다고 하며 재앙이 온다고 하여 절대로 지나가지 못하도록 부락민이 단속을 하고 있다. -긴살미 : 이곳에 몇 호가 살았는데 지금은 없어졌고 구 직산 가는 곳 내 옆이 된다. -건들 : 물이 귀하여 모를 못 심는 해가 많았으며 항상 건천들이라 하였는데 현재는 수리 시설로 물 걱정이 없는 농토가 되었다. -보안 : 삼곡보. 보 안이 되는데 성거읍 경계가 된다. ▲오색당리(五色堂里) 직산군 이남면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으로 오색당리 막거리가 병합하여 오색당리라 하고 성거면에 편입되었다. 그 후 면이 읍으로 승격되어 성거읍 오색당리가 되었다. -오색당(五色堂) : 옛날에 오색구름이 끼어 있을 적이 있었으므로 오색당이라 하였다 한다. -동기샘골 : 양지말 뒤에 있는 골짜기. 옛날에 김동기가 팠다는 방죽이 있다. -김기제(金己堤) : 동지 샘골에 있으며 동지 김가가 파서 만들었다고 한다. -뒷골 : 오색당이 마을 뒤에 있는 골짜기 -마당뿌리 : 오색당이 앞에 있는 들 큰 마당이 있었다고 한다. -막거리(幕巨里) : 오색당이 서쪽에 있는 마을. 옛날에 금점 하는 사람들의 막이 있었다고 한다. (전설) : 옛날에 힘센 장사 여덟 명이 살았는데, 이 동네가 불이나 불난 집의 살림을 꺼내주기 위해, 볏섬을 울 너머로 던진 것이 불을 다 끄고 찾아보아도 없으므로, 사방으로 찾아보니 이 볏섬이 차일봉 너머에 떨어져 땅에 박혀 있었다고 하며, 다시 그곳에서 던진 것이 이곳에 떨어져 동네 터가 잘 닦아졌다고 한다. -차일봉(遮日峯) : 오색당이 뒤에 있는 산. 모양이 차일을 쳐 놓은 것 같아서 차일봉이라고 한다. -솔터 : 오색당이 앞에 있는 골. -양달말 : 양지말이라고도 하며 동네가 있었는데 도둑이 많아 살지 못 하고 이곳으로 이사하였다 한다. -가마골고개 : 오색당이에서 오목리로 넘어가는 고개. -모시울골개 : 오색당이에서 저리 모시울로 넘어가는 고개. -집너머 골짜기 : 방죽으로 가는 길목의 골짜기. ▲저리(苧里) 직산군 이동면 지역으로 저동이라 하다가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으로 저리라하고 성거면에 편입되었다가 면이 읍으로 승격되어 성거읍 저리가 되었다. -모시울 : 저리(苧里). (전설) 옛날 고려시대 불교가 번창하던 시절 천흥사도 대사찰이라 찾아오던 불교신자가 사방에서 모여들므로 이곳까지 연이어 졌으며 사찰도 이곳까지였다고 하며 부처를 모신다 하여 모시울이라 하였다고 전하여 온다. -두들기 : 양달말 뒤에 있는 버텅, 지금은 밭으로 변하였다. -만호들(萬戶坪) : 모시울 앞에 있는 큰 들. 삼한시대 만호가 살았다고 전하여온다. -비렁잇들 : 서당잇들 두둘기 남쪽에 있는 들. 모래가 많아서 벼가 잘 죽고 물이 없어서 농사를 잘 짓지 못하므로 논 한마지기를 찰밥 한 그릇과 바꾸었다 하는데 지금은 옥답으로 바꾸어 졌다. -수청거리 : 주청가(酒廳街). 모시울 남쪽에 있는 마을. 술집이 많이 있었다고 한다. -장승거리 : 모시울 서쪽에 있는 마을. 집 세채가 있고 그 앞에 장승이 서 있다. -바위배미 : 저리 철교 안쪽에 있는 논. 바위가 박혀 있다. -이내보(설시보) : 두 내가 한 내로 합치는 지점이다. 설시(설씨)보라고도 한다. 직산의 5 충신 승지 김응상의 조부인 계공랑(啓功郞)을 지낸 종택(宗澤) 자는 인원(仁源)의 부인 순창 설씨(淳昌薛氏 부 충란)가 모시울에 수로를 만들고 보를 막아 물을 몽리구역에 대어 농사를 짓도록 하였다는 기록이 언양김씨 가정기문에 전한다. 김응상은 선조 때의 인물이다. ▲요방리(料芳里) 직산군 이남면 지역으로 1914년 지방 행정구역 통폐합 때 요동, 분방동, 수월리가 병합하여 요동의 요자와 분방동의 방자를 따서 요방리라 하고 성거면에 편입되었는데 면이 읍으로 승격되어 성거읍 요방리가 되었다. -부엉바위 : 요골 뒤에 있는 바위인데 부엉이가 이 바위에서 가끔 운다고 한다. -요골 : 요동(料洞) 분방리 서쪽에 있는 마을. 좋은 샘이 있고 골이 오목하다고 한다. -멍석바위 : 부엉바위 위에 있는 바위인데 멍석처럼 넓게 펴져 있다. -무너미고개(水越靈) : 무네미고개 분방리에서 천안시 안서동으로 넘어가는 고개. 고개가 낮아서 안서동의 물이 이 고개를 넘어 성거읍으로 흐르게 된다고 한다. -분방리(芬芳里) : 분방이라고도 하며 요방리에서 가장 큰 마을이며 토기의 원료인 점토가 생산되던 곳이라 한다. -정상골 : 무네미 동쪽에 있는 골짜기. -질골 : 정상골 동쪽에 있는 골. 질흙이 있다고 한다. -햇골들 : 무네미 앞에 있는 들. -쟁이골 : 예전에 쟁이(工人)들이 모여 살던 곳. -독막골 : 그릇 만들기 전에 질흙으로 만든 것을 막을 짓고 말리던 장소를 말한다. ▲석교리(石橋里) 직산군 이남면 지역으로 앞 내에 돌다리가 있어 석교라 하다가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당시 석교리라 하고 성거면에 편입되었는데 면이 읍으로 승격되므로 성거읍 석교리가 되었다. -산신제 : 돌다리에서 지내는데 리장, 새마을지도자, 반장 세 사람이 삼색실과 통돼지를 놓고 재내는데 옛 부터 지내오던 예에 의하여 지내는 것이며 비용은 예전에는 호당 성의껏 모금했다. 현재는 부락 비용으로 하고 모자라는 액수만 모금한다. 산신제를 지내고 나서 정제(井祭)를 지내는데 과정은 산신제와 같다. 제사를 지내고 음식은 호당 균등히 나누어 먹는다. -통미 : 돌다리 남쪽에 있는 산. 금광에서 나온 흙더미가 쌓여 산이 되었다고 한다. -조산들 : 돌다리 앞에 있는 들(쇠가 생산된다는 뜻을 가진 들 명임). -어천골 : 돌다리 동쪽에 있는 골짜기. 쇠를 채취하기 위하여 어랭이질 하던 곳. -불무골 : 돌다리 서쪽에 있는 골짜기. 철을 녹이기 위하여 불무질 하던 곳. -베리제 : 돌다리에서 복덕리로 넘어가는 고개. -벌말 평촌(坪村) : 새터. 돌다리 앞 벌판에 새로 된 마을. -돌다리 석교(石橋) : 석교 앞에 있었던 다리. 암반 같은 돌로 다리를 놓았는데 현재는 묻혀 버렸다 한다. -당모랭이 : 모퉁이(중터) 석교 중앙이 되는 마을. 예전에 철을 단범(담금질) 하던 곳. -청말 : 돌다리 북쪽 구석에 있는 마을. -터골 : 예전에 이곳에서 사람이 살았다고 한다. -대장마구리 : 대장간이 있어서 철 일을 했다 한다. ▲문덕리(文德里) 직산군 이남면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할 때 문성리 복덕리를 병합하여 문성리의 문자와 복덕리의 덕자를 따서 문덕리라 하고 성거면에 편입되었는데 면이 읍으로 승격되어 성거읍 문덕리가 되었다. (전설) : 경주김씨 김효인이 종자 천석을 뿌리는 큰 부자였는데 그가 죽자 동네 뒤에 묘를 쓰고 동네 앞에다 연못을 파고 연못 주변에 호랑이상, 원숭이상, 거북이상 등 각종 동물상을 만들어 놓으면 좋다고 하여 그대로 하고 물이 있어야 된다고 연못도 팠는데 동물상은 없어지고 현재는 연못만 남아있다. -엽당터 : 문성리와 복덕리 사이에 있는 골짜기. -복덕리(福德里) : 문성 남쪽에 있는 마을 뒤에 복덕사가 있으며 복덕 방죽이 있다. -바조리고개 : 복덕리에서 소우리의 바조리로 넘어가는 고개. -문성(文城) : 문덕리에서 가장 큰 마을. 문성산 밑이 된다. -매봉재(매봉) : 복덕리 뒤에 있는 산. 전설에 의하면 옛날 큰 장마 때 이 산이 물에 잠기고 매가 앉을 만치 남아 있었다고 한다. (전설) : 문성리는 옛부터 전해오는 말에 의하면 이곳이 길(吉)지라 학문하는 사람이 많이 태어나 문인으로 성을 이루는 동네가 될 것이라고 한다. 이남면의 소재지였다고 하며 큰 느티나무가 있었는데 일본인들이 배를 만든다고 베어가서 없어졌다고 한다. -장수바위 : (전설) 모정뿌리에 있는데 이 뿌리가 길면 부락이 길하고 뿌리가 떨어져 나가면 불길하다고 하는 말이 전해 오는데 고속도로 공사로 갈라져 나갔다. -큰 사낙골(송가집골) : 송씨가 큰 부자로 살았는데 도둑이 심하여 못살고 떠났다 한다. ▲정촌리(貞村里) 직산군 이동면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할 때 정촌동과 변면의 남산리 일부를 병합하여 종촌보라 하고 성거면에 편입되었는데 면이 읍으로 승격되어 성거읍 정촌리가 되었다. -정촌(貞村) : 정자말, 장자리라고도 하는데 북쪽에 느티나무, 팽나무 정자(亭子)있어서 정자말이라고 했다고 하며 정자나무들은 고속도로 공사로 없어졌다고 한다. (전설) : 동구 작산의 산맥이 길어야 하는데 짧아서 부락이 불길하다고하여 소나무, 느티나무, 팽나무 등을 심어 정자를 만들어 능선이 길게 보이게 했다 한다. -가무갯골 : 정자말 위에 있는 골짜기. -사당골 : 사당리라고도 하며 정자말 옆에 있는 마을. 전에 이곳에 사당이 있었다고 한다. -고절 : 옛날에 절이 있었다고 하며 기와 조각이 나온다. ▲소우리(所牛里) 직산군 이남면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할 때 소조리 명우리를 병합하여 소조리의 소자와 명우리의 우자를 따서 소우리라 하고 성거면에 편입되었는데 면이 읍으로 승격되어 성거읍 소우리가 되었다. -소우리(所牛里) : 바조리 북쪽에 있는 마을. 어미 소가 새끼를 부르는 형국이라고 한다. 소울(牛鳴=所牛) -산바죽 : 최윤제(崔允堤) 최윤이 팠다는 방죽. -최산 : 명우리 서쪽에 있는 산. 최씨의 산인데 금광이 있었다. -서낭당 : 명우리 뒤 고개에 있는 서낭당. -방아다리 : 복덕고개 밑에 있는 골짜기. 모양이 방아다리 같이 생겼다고 한다. (전설) 공알바위 부락 뒤에 공같이 생긴 바위가 있었는데 이 바위가 직산 삼은리에서 보이면 삼은리에 재앙이 든다고 하여 삼은리 사람들이 와서 돌을 묻어 놓고 갔다 한다. -바조리 : 소조리(所造里) 소우리에서 제일 큰 마을이며 지형이 바조리(바자)처럼 생겼다고 한다. 이곳에서 솥을 만들기 위한 주물을 녹여 틀을 생산하던 곳이기도 하다. 틀은 흙으로 만들어 말려서 두 쪽을 붙인 후 쇳물을 붓고, 굳으면 흙을 부수어 낸다. 완성된 틀을 바조리 또는 소댕이라 한다. -복덕고개 : 바조리에서 복덕리로 넘어가는 고개. -당재밑 : 집을 짓고 살면 재물이 생기고 자손이 귀하여 이곳으로 이사 하였다고 한다. 철을 담금질 하던 곳이며 철의 재 생산지이다. -건조들(초막골) : 바조리에서 읍사무소 가는 곳에 있는데 바조 뜰은 초(草)을 초막을 짓고 말리던 곳이며 전주(錢主)가 살던 곳이라 하고, 초막은 오래전에 시신을 모셔놓고 초분(初墳. 탈골)하여 장례를 모시던 풍습에서 초막을 지어 놓았던 곳이기도 하다. ▲신월리 직산군 이동면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으로 신리, 월경리, 천안군 북이면 독주막 일부가 병합하여 신리의 신자와 월경리의 월자를 따서 성검변 신월리가 되었다. 그 후 면이 읍으로 승격되어 성거읍 신월리가 되었다. -월경리(越境) : 신월리에서 가장 오래된 마을. 조선시대 직산현과 천안군 경계가 되어 서로 넘나들었다고 한다. -신리 : 새말(新里) 월경 동쪽에 새로 된 마을. -신월 방죽 : 신월리에 있는 방죽. -작은봉 재 : 월경 뒤에 있는 산. -큰봉재 : 작은 봉재 위에 있는 산. -벽새판 : 금을 채취하던 곳으로 금이 생산되었다. -시렁골 : 수렁이 있어 매우 깊으며 찬물이 나는 찬 샘이 있어 찬 샘골이라고도 한다. -마름들 : 예전에 한 사람이 이곳들의 마름을 보았다고 한다. -꽃나무재 : 이곳에 꽃나무가 있는데 메말라서 꽃이 피고는 말라 죽어 열매를 맺지 못하였다고 한다. ▲오목리(五木里) 직산군 이동면인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으로 오목동이 오목리로 변하였다. 지형이 오목하게 되었으므로 오목골 또는 오목동이라 하던 것이 오목리가 되었으며, 성거면에 편입되었는데 면이 읍으로 승격되어 성거읍 오목리가 되었다. -근내제(羅斤乃堤) : 오목리에 있는 나근내 방죽. -점골 : 옹기점이 있었다고 하며 지금도 조각이 나오고 있다. -두멍골 : 둠벙같이 깊숙하고 아늑하게 생겼다. -수리고리 : (전설) 술이 나오는 셈이 있었는데 두 바가지 이상은 나오지 않으므로 어떤 사람이 욕심이 많아 더 나오게 하느라고 셈을 후벼 파서 술이 안 나오게 되었다고 한다. 지금은 없어졌다. ▲모전리(茅田里) 직산군 이동면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으로 모관리, 신전리가 병합하여 모관리의 모자와 신전리의 전자를 따서 모전리라 하고 성거면에 편입 되었다. 그 후 면이 읍으로 승격되어 성거읍 모전리가 되었다. -띠우지 : 모관리라고도 하며 모전리에서 가장 큰 마을. 띠(茅)가 많으며 팽나무 300년생이 있는데 부락에서 보호하고 있다. -밤나무정이 : 구피 말 이라고도 하며 신전리 뒤에 있는 마을. -구피말 : 신전리라고도 하며 띠우지 북쪽에 있는 마을로 큰 굴피나무가 있었다고 한다. -뽕나무정이 : 밤나무정이 아래에 있는 마을. 세종 때 이곳에 뽕나무를 심어서 누에치기를 장려하였다고 한다. -천흥바다 : 천흥평이라고도 하며 대우지 앞의 넓은 들. 천흥리 아래쪽이 된다. -모전방죽 : 불승제(佛承堤). 모전리에 있는 방죽. -대문안 : 산 밑쪽으로 대문 안이란 곳이 있는데 기와 조각이 많이 난다고 한다. (전설) : 이곳에서 배를 띠웠다고 하고 나루터가 이곳이라고 하며 앞들이 바다였다고 한다. -상두뿌리 : 소가 누운 형(와우형)인데 꽁지 부분에 이곳이 해당된다고 한다. -우렁재 : 우렁 같이 생겼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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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 천안의 지명유래 ②[천안신문] 본보는 지난 151호부터 천안 각 읍면동의 지명유래에 대한 연재를 진행중이다. 천안이라는 지명에 대한 기록은 고려 태조 13년인 930년 8월 8일 기해 일에 고려태조가 대록에 내려와 동서도솔과 탕정의 일부와 사산의 일부와 대록의 일부를 병합하여 천안이라 하고 도독부를 둔데서 유래한다. 대록은 지금의 목천이요, 사산은 직산이며, 동도솔과 서도솔은 천안의 일부이며, 탕정은 온양 탕정의 일부다. 각 지역에 내려오는 천안의 지명은 1988년부터 이원표 선생이 동부 6개 면을, 1987년도부터 오세창 선생이 천안시를 조사해 1960년경 한글학회에서 발행된 ‘한국 지명총람’을 참고로 가감 수정해 동부 6개면은 1990년 천안군에서 ‘역사의 현장’으로 출간되었으며, 천안시는 1989년 천안문화원에서 ‘천안의 지명’으로 출간하였다. 그 후 1999년 천안시 문화원에서 시와 군에서 발행된 것을 합하여 ‘천안의 땅 이름이야기’로 출간했다. 이번 연재는 이를 바탕으로 했으며, 일부 내용은 천안 향토사학자 김종식 선생이 재조사를 통해 가감하였음을 밝혀둔다. <편집자 주> ▲와룡리(臥龍里) 직산군 삼서면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으로 농촌 와우리 평택군 동면 와야동 각 일부가 병합하여 와우리의 ‘와’자와 농촌의 ‘농’자를 따서 와농리라 하다가 농자가 좋지 못하다 하여 농자를 룡으로 바꾸어 와룡리라 하고 성환면에 편입되었는데, 면이 읍으로 승격되어 성환읍 와룡리가 되었다. -농촌(農村) : 와우 북쪽에 있는 마을. 농토가 좋아서 농사를 많이 짓고 있다. -기와집 말(瓦宇) : 와우말이라고도 하는데 와룡리에서 가장 큰 마을. 큰 기와집이 있었다고 한다. ▲도하리(都下里) 직산군 이북면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으로 도감리와 삼동면 하리가 병합하여 도감리의 ‘도’자와 하리의 ‘하’자를 따서 도하리라 하고 입장면에 편입되었다가 1989년 1월 1일(천원군 조례 제 1084호 1988. 12. 31)로 입장면에서 성환읍으로 편입되어 성환읍 도하리가 되었다. -보령산 : 산신제, 관양수 마을에서 지냈는데 음력 정월 초사흘 날에 지낸다. 생기복덕과 길한 사람을 가려 제관 축관을 정하고 아주머니 한사람, 떡시루 지고 갈 사람과 같이 가서 지내며, 삼색실과와 떡쌀 세되 세홉을 놓고 하고 밤 10시에서 11시(亥時)사이에 지낸다. 방개울(산제당이 있는 골, 샘이 있는데 항상 물이 있음) 물로 목욕하고 그 물 정수로 지낸다. 제를 지낸 후 동네 각 호마다 소지를 올리고 안녕을 빈다. 제를 지내게 된 유래는 동네 젊은이들이 이유 없이 죽어갔기 때문에 지내게 되었다 하며 언제부터인지는 모른다고 한다. -전설 : 이곳 관양수는 배가 가는 형(선주형)이라 우물을 안파고 샘 하나로 물을 먹었다. 샘을 많이 파게 되면 배의 밑을 뚫는 격이라 배가 가라앉아 동네가 망하므로 샘 하나로 불편해도 살았다고 전해 온다. -춘수골 : 옻샘. 춘수동에 있는 우물물이 몹시 차서 옷 오른대 목욕을 하면 낫는다고 한다. -하리(下里) : 관양수라고도 하며 도하리 아래쪽에 있는 마을. 좋은 우물이 있다. -방아다리 : 예전에 이곳에 물레방아가 있었다. -한식골 : 옛 부터 동네 총각들이 공치던 곳. -도야(都也) : 옛날에 이곳에 쇠를 녹이던 큰 가마가 있었다. -쇠무덤이 : 쇠를 생산하고 남은 것을 쌓았던 더미가 있었는데 현재는 연암축산 원예전문대학 부지로 매립되었다고 한다. -버럭더미 : 광산에서 파낸 자갈과 흙더미가 있다. -골밭 : 기와장이 많이 나오며 부자가 살았다고 전해지며 행인의 편의를 보아주었던 원(院)터가 있었다고도 한다. -도하리 : 지형이 또아리(뙈리) 같이 생겼다고도 하고 마한시대 도읍지라는 설도 있다. 궁(宮)자와 도(都)자가 붙은 지명이 있기 때문이다. ▲양령리(兩令里) 직산군 이북면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으로 중령리, 하령리와 경기도 양성군 영통면 상리, 일부가 병합하여 중령리, 하령리의 두령이 합치되어 양령리라 하고 성환면에 편입되었는데 면이 읍으로 승격되어 성환읍 양령리가 되었다. -영하동(令下洞) : 하령 대령(大令)이라고도 하는데 영동 아래쪽에 있는 마을. 하령의 하(下)자가 좋지 않다고 하여 대(大)자로 고쳤다고 한다. -상령(上令) : 상리 영상동(令上洞) 염통 위쪽에 있는 마을. -후생촌 : 헌 다리 목. 헌 다리목에 있는 마을. 1955년 큰 장마로 인하여 온 동네가 떠내려갔으므로 그 옆 높은 지대로 옮기고 후생촌(厚生村)이라 했다. -상뚝말 : 뚝이 높아 상뚝말 이라고 한다. -새보들 : 보가 새로 생겼는데 경지정리로 없어졌다. ▲신방리(新防里) 직산군 이서면의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으로 방축리, 신무리가 병합하여 신무리의 ‘신’자와 방축리의 ‘방’자를 따라 신방리라 하고 성환면에 편입되었다가 면이 읍으로 승격되므로 성환읍 신방리가 되었다. -박두개제(朴頭介堤) : 방축 뒤쪽에 있는 방죽인데 박두개(朴頭介)가 만들었다고 한다. -방축(防築) : 방죽리라고도 하며 신무리 서쪽에 있는 마을. 방죽이 있다. -담안밭 : 냇가 쪽에 살다가 도둑이 많아 동쪽으로 이사 왔으며 담을 쌓고 살았다고 한다. -천냥골 : 논이 매우 좋아 천 냥 자리라고 한다. -개조지 : 갓골, 논이 나쁘고 천수답이므로 개X같다 하였으며 매우 나쁜 논을 말한다. -신무리(新茂里) : 지형이 와우형(臥牛形. 소가 누운형)이라 한다. 그래서 이곳의 정자도 와우정이라 이름 하였다고 한다. -영구젓탈 : 논이 젓탈에 있는데 항상 모를 심을 때가 없으므로 영구 답이라고 한다. -한심덕골 : 고개가 얕아 한숨에 넘어간다고 한다. -막내각골 : 옛날 어떤 사람이 이곳의 전답을 막내아들에게 주었다고 한다. -진잠골 : 골이 매우 길다. -깃대골 : 전하는 말에 의하면 전쟁의 승리로 깃대를 꽂았다 한다. -방똥 말랭이 : 소 구수형의 명당이 있다고 한다. ▲왕림리(旺林里) 직산군 이서면의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으로 임리, 각금리, 왕지리와, 아산군 삼복면 중왕리, 일부를 병합하여 왕지리의 ‘왕’자와 임리의 ‘임’자를 따서 왕림리라 하여 성환면에 편입되었다가 읍으로 승격된 후 성환읍 왕림리가 되었다. -각금(各今) : 밤나무정이라고 하는데 왕지 북쪽에 있는 마을. 밤나무정이 사이에 마을이 생겼다 없어지고 또 생겼다 한다. -원정골 : 안산골에 있는데 옛날에 행인의 편의를 제공해 주던 원(院)이 있었다 한다. -하나샘(旺池) : 우물. 왕지 남동쪽 방죽 가운데 있는 샘. 물이 대단히 차고 수량이 많아서 아무리 가뭄이 심해도 물이 줄지 않는다. 인조(仁祖)가 이괄의 난을 피하여 공주로 파천 할 때 왕지산에서 쉬면서 우물을 길어다 마시고 크게 칭찬하였다 한다. -임리(林里) : 예전에 이곳이 수풀이었다고 한다. -밀펀덕 : 예전에 밭이 좋지 않아 밀을 많이 심었으므로 지금까지도 밀펀덕이라 한다. -건방죽 : 하나샘 둘레에 있는 방죽. 아무리 가물어도 물이 마르지 않는다고 한다. -신아궁 : 각금리 뒤에 있는 골짜기. -수령골 : 왕지 뒤에 있는 골짜기. 수렁이 많다. -서원제(徐元堤) : 왕림리에 있는 방죽. 서원(徐元)이 만들었다고 한다. -욱골 : 왕진 남쪽에 있는 골짜기. 왕지산 밑에 된다. -자라목 : 임리 서쪽에 있는 마을. -왕지 : 왕지리 왕주 왕지산 밑에 있는 마을. -성환 종축장 : 신방리, 신가리, 와룡리, 복모리, 우신리, 어룡리 6개리에 걸쳐 있다. 지금은 국립종축원으로 개명하였다. 이곳에 초대 대통령 이승만의 별장이 있다. ▲수향리(水鄕里) 직산군 이북면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으로 지족향리, 수천리를 병합하여 수천리의 ‘수’자와 지족향리의 ‘향’자를 따서 수향리라 하고 성환면에 편입되었는데, 면이 읍으로 승격되어 성환읍 수향리가 되었다. -지질캥이 : 지족향(知足鄕). 지족향리 수향리에서 가장 큰 마을. 백제 때 재상들이 물러나 이곳에 은거하면서 이만하면 족하다는 뜻으로 마을 이름을 지었다고 하며, 또한 백제 때 지족향이 있었다고 한다. 또한 이곳에 예전에 관이 있던 터라고도 한다. 지명에 옥이 있었다는 옥터 자리와 향교가 있었다는 향교자리가 초등학교 남쪽에 있었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관 터였던 것은 분명한 것 같다.(향, 부곡 등은 옛 고을 터 또는 천민 집단 거주지임) -자무실 : 잠실. 지질캥이 동쪽에 있는 마을. 세종 때 잠실을 두고 농민에게 누에치기를 장려하였으며 많이 길렀다고 한다. -점촌 : 무대 위쪽에 있는 마을. 옹기점이 있었다. -무내 : 수천(水川)이라고도 하고 신천(新川) 또는 몰내라 부르며 학정천이 옆이 된다. -성재 : 지질캥이에 있는데 성이 있었다고도 하고 성주가 살던 곳이라고도 한다. -용정골 : 용이 나와 하늘로 올라갔다는 샘이 이 골에 있다. -새우대 : 농사를 지어도 김장 새우젓 값도 못나오는 천수답이었다고 한다. ▲안궁리(安宮里) 직산군 이북면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으로 궁리, 안양리와 경기도 양성군 영통면 궁리, 일부가 병합되어 안양리의 ‘안’자와 궁리의 ‘궁’자를 따서 안궁리라 하고 성환면에 편입되었다가 면이 읍으로 승격되면서 성환읍 안궁리가 되었다. -궁들 : 궁평(宮坪), 망건다리들이라고도 하며 안궁리 둘레에 있는 큰 들. 조선조 말 궁에서 추수해 가는 궁답이 많았다. 망건다리는 신가리 부근에 있다. 본래 이름은 맹간교이다. -가용 : 궁말 서쪽에 있는 마을. -궁리내장보(宮里內腸洑) : 궁말 안쪽에 있는 보. -궁말 : 궁리(宮里) 궁들에 있는 마을. -아교(阿橋) : 애고다리. 궁말에 있는 다리. 다리가 좁고 길어서 처음 건너는 사람은 겁이 나서 저절로 애고 소리가 나온다고 한다. -새터말 : 신촌(新村). 가룡 뒤쪽에 새로 된 마을. -안양(安陽) : 안양리. 궁리 동남쪽에 있는 마을. -청망잇들(淸亡坪) : 청망평, 가룡 앞의 큰 들. 고종 31년(1894) 6월에 청국의 섭지초(葉志超)가 월봉산에 진을 치고 새벽밥을 먹다가 일본군의 기습을 받아 이들에 밀려와서 크게 패하였다. 청군이 망했다 해서 청망(淸亡)이 들이라고 한다. -하단들 : 궁막 앞에 있는 들. ▲송덕리(松德里) 직산군 이서면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으로 송덕리와 금곡리 일부를 병합하여 송덕리라 하고 성환면에 편입되었는데 면이 읍으로 승격되어 성환읍 송덕리라 하였다 한다. -송덕리(松德里) : 이곳에 소나무가 많아 소나무 송자를 따서 송덕리라 하였다 한다. -참샛골 : 고래울 위에 있는 골. 찬 샘이 있다고 한다. -원적골 : 고래울 위에 있는 골. 물이 잘 나는 샘이 있다고 한다. -장천 : 송덕 앞으로 흐르는 내인데 내가 길다. -안양골 : 송덕 서남쪽 골에 있는 마을. -고래울 : 송덕 왼쪽에 있는 긴 골. 좋은 논이 있다. -광산골 : 이곳에서 전에 광산을 하였다 한다. -바깥월이 : 길옆에 있는 마을. 안월의 바깥이 된다 하여 바깥월이라고 한다고 한다. -안양곡 : 6.25 때 피난민들이 모여 마을을 형성했다고 하는데 과수원이 많다. ▲성환리(成歡里) 직산군 삼서면 지역으로 성환외리, 성환 남산리, 이북면 대정리 각 일부가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으로 병합하여 조선시대 성환도 찰방이 이곳에 있었으므로 성환리가 되고 성환면에 편입되었는데 면이 읍으로 승격되어 성환읍 성환리가 되었다. -남산(南山) : 성환 남쪽에 있는 산 너머에 있는 마을. -바깥말 : 외리(外里) 성환 바깥쪽에 있는 마을. -교통(橋洞) : 학교가 있는 마을. -빗거리 : 구 성환 면사무소 앞에 있는 길. 현재 성환 농협이 있는데 구 면사무소 안으로 이전하였다. -연못터(蓮池) : 연지 터. 척수루 앞에 있던 연못 터. 지금은 주택이 들어서고 우물만 남아 있다. -신선동(神仙洞) : 성환리 남쪽에 새로 형성된 마을. -이성환(裡成歡) : 안성환. 성환 안쪽에 있는 마을. -찰방터 : 성환 북동쪽 조금 높은 돈대위에 있는 터. 조선시대 성환도 찰방이 있어 공주의 일신, 경천, 단평, 유구, 연기의 평천 금사, 목천의 연춘(延春), 청주의 장명(長命), 천안의 김제, 신은(金蹄, 新恩) 등의 역을 관할하다가 고종 32년(1895)에 폐지되었다. 현재는 그 터에는 늙은 느티나무 세 그루가 서 있고 주택이 들어섰으며 소규모 공장들이 있다. -한부개제(韓夫介堤) :한부개라는 사람이 방죽을 만들었다고 하며 성환리에 있다. -최옥제(崔玉堤) : 최옥이라는 사람이 만든 방죽이라 전해오며 성환리에 있는 방죽. -척수루(滌愁樓)터 : 찰방터 앞에 있는 척수루터. 앞에 연못이 있고 연못 터 옆에 사정(射亭)의 터가 있다. 이 척수루는 온갖 업무에 시달린 복잡한 머리를 식히고 사람들이 모여 활을 쏘면 서 즐기던 곳이기도 하며 역졸들의 무술 연마장으로 쓰던 곳이다. -막거리 : 이곳에 주막이 있어 지나는 행인이 쉬어가고 술을 마시고 갔다 한다. ▲율금리(栗金里) 직산군 이서면의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으로 금리, 율가리, 금곡리, 일서당곡리, 각 일부를 병합하여 율가리의 ‘율’자와 금곡리의 ‘금’자를 따서 율금리라 하고 성환면에 편입되었는데 면이 읍으로 승격되어 성환읍 율금리가 되었다. -군량(軍糧)골 : 군량들이라고도 하며 밤개울 뒤에 있는 들. 고려 때 군량을 쌓아 두었던 곳이라고 전하여 온다. -쇠일 : 금곡(今谷), 금굴리(今掘里)라고도 하며 밤개울 북쪽에 있는 마을. 고려 때 원나라에서 이곳에 와 금을 많이 캐갔다고 하며 율금 광산이 있었고 금이 많이 나왔다고 한다. -새밤개울 : 금신(金新)이라고도 하며 밤개울 서쪽에 있는 마을. -율가리(栗加里) : 율금리에서 가장 큰 마을. 밤나무가 많이 있었다고 전해온다. -횡갱이들 : 챙갱이들이라고도 하는데 예전에 금을 채취하던 광부들이 거처하고 있던 들. 쟁이에서 와전된 말이다. 챙갱이는 쟁이를 이르는 말이다. -돌다리 : 큰 밤개울 앞에 돌다리가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없어졌다. -건하동 : 건천동. 밤개울 앞들에 있는데 옛날에 금을 채취하여 땅이 뒤집어져 땅이 건답이 되고 건천이 되었다 한다. -서낭제 : 몇 년 전까지 만해도 밤개울에서 서낭제를 지냈는데 새마을 사업으로 없어졌다 한다. ▲학정리(鶴井里) 직산군 이북면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인하여 학신과 신정의 이름을 따서 학정리라 하고 천안군 성환면에 편입되었다가 성환읍 학정리가 되었다. -단고개 : 단현(壇峴)이라 하는데 직산면 군동리로 넘어가는 고개. -단현 : 단고개를 이른다. -당넘어 : 뱀고개 남서쪽 골짜기에 있는 마을 직산현의 여단(?壇)넘어가 된다. -동척골 : 신정 남쪽에 있는 골짜기. -드시리 : 싱정에 있는 들. -뱀골 : 사통. 사곡리를 이르는 말 청상가비 동남쪽에 있는 마을. 지형이 뱀처럼 생겼다 한다. -사곡리 : 뱀골을 말한다. -사동(巳洞): 뱀골이다. -새터 : 학선통 남서쪽에 새로 생긴 마을. -신정 : 청상가비의 원이름. -청상가비 : 학정리에서 가장 큰 마을로 큰 우물이 있다. -최석제(崔石提) : 뱀골에 있는 방죽으로 최석(崔石)이라는 사람이 만들었다. -학선동(鶴仙洞) : 당넘어를 말한다. -학신대(鶴新垈) : 새터에 있다. ▲우신리(牛新里) 본래 직산군 이서면의 지역인대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인하여 우헐리와 신대리를 병합하여 우신리라 하고 천안군 성환면 우신리가 되었다가 천안시 서북구 성환읍에 편입 되었다. -고래실 : 점촌 앞에 있는 들. -새터 : 위리 앞에 새로 형성된 마을. -성환농장 : 우신리 왕림리 와룡리 어룡리에 걸쳐 있는 농장. -신대 : 새터를 말한다. -역들 : 새터뒤에 있는 들. 예전에 역원이 있었다 한다. -용머리 뿌리 : 새터 뒤에 있는 산. 용의 머리처럼 생겨서 마을 사람들이 신성시 했다 한다. -우헐 : 우신리에서 가장 큰 마을. 옛날에 임금님이 지나다 쉬어갔다 한다. -워리 : 우헐을 말한다. -점촌 : 새터에 있는 마을. 예전에 옹기점이 있었고 만들었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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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 천안의 지명유래 ①[천안신문] 본보는 이번호(151호)부터 천안 각 읍면동의 지명유래에 대한 연재를 시작한다. 천안이라는 지명에 대한 기록은 고려 태조 13년인 930년 8월 8일 기해 일에 고려태조가 대록에 내려와 동서도솔과 탕정의 일부와 사산의 일부와 대록의 일부를 병합하여 천안이라 하고 도독부를 둔데서 유래한다. 대록은 지금의 목천이요, 사산은 직산이며, 동도솔과 서도솔은 천안의 일부이며, 탕정은 온양 탕정의 일부다. 각 지역에 내려오는 천안의 지명은 1988년부터 이원표 선생이 동부 6개 면을, 1987년도부터 오세창 선생이 천안시를 조사해 1960년경 한글학회에서 발행된 ‘한국 지명총람’을 참고로 가감 수정해 동부 6개면은 1990년 천안군에서 ‘역사의 현장’으로 출간되었으며, 천안시는 1989년 천안문화원에서 ‘천안의 지명’으로 출간하였다. 그 후 1999년 천안시 문화원에서 시와 군에서 발행된 것을 합하여 ‘천안의 땅 이름이야기’로 출간했다. 이번 연재는 이를 바탕으로 했으며, 일부 내용은 천안 향토사학자 김종식 선생이 재조사를 통해 가감하였음을 밝혀둔다. <편집자 주> ▣성환읍(成歡邑) 성환읍은 본래 직산군의 지역이었으며 직산읍 서쪽의 세 번째 면이 되므로 삼서면(三西面)이라하여 성환내리(成歡內里), 중리(中里), 외리(外里), 남산(南山), 농촌(農村), 와우(臥牛), 가동(佳洞), 신리(薪里), 복모(伏毛), 수포(水浦)의 11개리를 관할하다가 1914년 행정 구역 통․폐합에 따라 이서면(二西面)의 우헐(牛歇), 신대(新垈), 송덕(松德), 금곡(金谷), 매곡(梅谷), 광주(光珠), 방축(防築), 신무(新茂), 임리(林里), 각금(各今), 왕지(王池), 금신(金新), 율가(栗加), 13개리와 일서면(一西面)의 당곡(堂谷), 일부와 이북면(二北面)의 중령(中令), 하령(下令), 궁리(宮里), 안양(安陽), 지족향(知足鄕) 수천(水川), 홍경(弘慶), 대하(大下), 대정(大井), 신정(新井), 사동(巳洞), 학선(鶴仙)의 12개리, 아산군(牙山郡), 삼북면(三北面)의 중왕리(中旺里)와 평택군 동면의 와야리(瓦也里)의 일부와, 경기도 양성군(陽城郡) 영통면(令通面)의 궁리(宮里), 상리(上里)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성환도찰방(成歡道察防)의 이름을 따라 성환면(成歡面)이라 하고 천안군에 편입되면서 우신, 송덕, 매주, 신방, 왕림, 율곡, 와룡, 신가, 복모, 어룡, 성환, 성월, 수포, 양령, 안궁, 수향, 대흥, 학정 18개리로 개편되었으며, 그 후 1973년 7월 1일 대통령령 제 6543호에 의하여 읍으로 승격되었다. 1989년 1월 1일 (천원조례 제 1084호 1988. 12. 31) 도하리가 입장면에서 편입되어 19개리가 되었다. 동쪽은 입장면과 직산면, 남쪽은 직산면, 서쪽은 아산시, 둔포면과 경기도 평택시, 팽성읍, 북쪽은 평택시와 경기도, 안성시, 공도면에 인접해 있다. 1914년 지방행정구역 통폐합 때 수포리(水浦里)가 성환면에 있었는데 그 후 평택으로 편입되어 성환면에서 분리되었다. ▲신가리(新佳里) 직산군 삼서면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으로 가종리, 신리와 경기도 양성군 영통면 궁리 일부를 병합하여 신리의 ‘신’자와 가동리의 ‘가’자를 따서 신가리라 하여 성환면에 편입되었는데 면이 읍으로 승격되어 성환읍 신가리가 되었다. -가동(佳洞)골 : 섭리(燮里) 동쪽에 있는 마을. 신가리에서 가장 큰 마을. 낮은 산이 둘러싸여 있는 속이 된다. 신리(薪里)라고도 한다. -거먹다리 : 흑교(黑橋). 군두보(群頭洑)에 놓인 다리. 소나무로 놓았는데 썩는 것을 막기 위하여 나무를 불로 그슬러 사용했다 한다. -군두보(沒倭洑) :문화촌 서쪽에 있는 보. 평택군 팽성읍 북쪽 평야에 물을 대기 위하여 안성천을 막아서 보를 만들었는데, 그 깊이가 두질이 넘는다고 한다. 1894년(고종 31년)에 일본 마쓰사기(まつさき 송기 松崎)대위가 일개 중대를 이끌고 청나라 군대와 싸우다가 이 보에서 전멸되었다 한다. -문화촌 : 가동 북쪽 큰길가에 있는 마을. 1940년경에 새로 이룩된 마을 성환읍의 문화적 모범촌이 되었다. -망건다리 : 맹간교(盲看橋)다리. 망군(亡軍). 망근다리. 평택과 경계에 있는 큰 다리. 정유재란 때 왜군이 명나라와 우리 군에게 대패한 곳이라 한다. ▲성월리(成月里) 직산군 삼서면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으로 성환내리, 성환중리, 성환남리, 이서면의 광주리 일부가 병합하여 성환과 월봉산의 이름을 따서 성월리라 하여 성환면에 편입되었다. 면이 읍으로 승격되어 성환읍 성월리가 되었다. -중리(中里) : 성환 아래쪽에 있는 마을. -서편말 : 주막거리 중리 서쪽에 있는 마을. -내리(內里) : 송골(松谷) 성환 안쪽에 있는 마을. -성환(成歡) : 성월리에서 으뜸이 되는 마을. 예전에 성환역 터였다. ▲복모리(洑母里) 직산군 삼서면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으로 복모리 이북면에 대정리 일부가 병합하여 복모리라 하고 성환면에 편입되었는데, 면이 읍으로 승격되어 성환면 복모리가 되었다. -복모리 : 문열보, 망전보, 이붓보의 세보머리 쪽이 되므로 보머리라 하던 명칭이 복모리가 되었다고 전해 온다. -이웃보 : 망전보 위쪽에 있는 보. -성재 : 보머리 뒤에 있는 산. 성처럼 둘러 있다. -문열보 : 보머리 앞에 있는 보. -문열들 : 보머리 앞에 있는 들. -망전보(望戰) : 문열보 위쪽에 있는 보. 청일전쟁 때 이 보에서 일본군이 청군에게 망했다 해서 불러진 이름이라 한다. -망전들 : 문열들 위쪽에 있는 들. -돌석재 : 보머리 북쪽에 있는 산. 돌이 많이 있으며 철로가 지나간다. -덤벙골 : 보머리 뒤에 있는 골짜기. ▲어룡리(魚龍里) 직산군 삼서면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때 어룡리 단일부락이 그대로 어룡리의 리명으로 성환면에 편입되었으며, 면이 읍으로 승격되어 성환읍 어룡리가 되었다. 지형이 어랭이 같이 생겨 어랭이, 어룡이 하던 것이 어룡리가 되었다고 전해진다.(어랭이는 댕댕이 넝쿨로 짠 곡식을 담는 도구의 일종. 풍수비보사상에서 나온듯한 말 같기도 하다.) -우물제 : 어랭이 부락에서 지내는데 정월 초사흘날에 지내고 제관은 생기 복덕을 보아 좋은 사람으로 정하고 이장과 같이 지내며 제물은 삼색실과 떡을 놓으며, 앞의 선정된 집에서 제물을 장만하여 비용은 대동회에서 정하고 호당 배분한다. 집집마다 소지를 올려주며 축문을 읽었으나 최근에는 읽지 않는다. 제사 지내기 전에 샘을 청소하고 하루는 샘물을 먹지 않으며, 동네에 들어온 사람은 그 날 하루만은 나가지 않는 것이 예의로 되어 있다. 용왕제를 지내고 밤, 대추는 우물에 집어 놓는데 먼저 꺼내 먹는 여인은 아들을 낳는다고 하여 먼저 꺼내 먹으려고 아우성이며, 이 동네 남자들은 그 밤과 대추를 자기 어머니가 먼저 꺼내 먹어서 자기를 낳은 줄 알고 있다. -용머리샘(전설) : 마을 옆으로 내룡이 나왔는데 용미리라 하며 샘이 있었는데, 고기가 살다가 용이 되어 하늘로 올라갔다고 전하여 온다. -몽장골 : 옛날에 이곳에 몽장군이 살았다 한다. -덕대 모퉁이 : 옛날에 이곳에 시체를 놓아두던 곳이라 하며 사금을 채취하던 곳이라 한다. -개삼 : 동네 안에 있는 샘인데 온 동네 사람이 이 물을 먹는다고 한다. ▲대홍리(大弘里) 직산군 이북면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으로 홍경리, 대하리, 대정리 일부가 병합되어 대정 대하리에서 ‘대’자를 홍경리에서 ‘홍’자를 따서 대흥리라 하고, 성환면에 편입되었는데 면이 읍으로 승격되어 성환읍 대흥리가 되었다. -개방(開防) : 갯방죽, 한 우물(큰우물) 남서쪽에 있는 마을. 전에 방죽이 있었는데 사금(砂金) 캐느라고 없어졌다. -대정리(大井里) : 한 우물(큰 우물). 이 우물은 길 가던 스님이 영기 있는 우물이라 하여 해마다 음력 2월 2일이면 마을 사람들이 정성을 다하여 제사를 지내던 우물로써 하나밖에 없는 우물이라 한 우물이라 한다. -대동네 : 광해군 때 민폐를 덜기 위하여 소사(素沙)들에 대동법을 실시 한 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홍경사 앞에 세웠다. 이 민구(李敏求)가 비문을 지었다.<현재는 평택시 소사동. 평택시의 기념물> -대하(大下) : 대흥 저수지 아래에 있는 마을. -복병(伏兵)재 : 복병티. 뱃봉재라고도 하는데 홍경리 앞에 있는 낮은 재(고개). 정유재란 때 명나라 장수 참정(參政), 양등산(梁登山), 부총(副總), 해생(解生)이 이곳에서 숨어 있다가 왜군을 크게 쳐부수었다고 한다. -한우물 : 대정리(大井里) 홍경리 동쪽에 있는 마을 우물이 있는데, 청일전쟁 때 일본군이 이곳에 진을 치고 싸웠다고 한다. -홍경원(弘慶院)터 : 홍경사 앞에 있는 원(院)집터. 왕래하는 행인들의 편의를 위하여 고려 제8대 현종 때 함께 원을 두어서 출몰하는 도적의 피해를 막았다. -홍경잇돌(弘慶院坪) : 홍경원 앞에 있는 큰 돌. 조선 제7대 세조 10년(1464) 3월 17일에 세조가 온양온천에서 돌아오는 길에 이곳에서 하룻밤을 자고 갔으며, 제14대 선조 30년 9월8일에 명나라 장수 양등산과 해성이 이곳에서 왜적을 크게 막아 왜적의 서울 진입을 막았다. -홍경사비(弘慶寺碣碑) : 홍경사 터에 있는 비. 높이 214cm 넓이 10cm. 고려8대 현종 17년에 아버지 안종의 뜻을 받들어서 지었다 하여 봉선 홍경사라하고 한림학사 최충(崔沖)이 어명을 받아 글을 짓고 백현례(白玄禮)가 글씨를 썼는데, 홍경사의 사적을 자세히 적었으며 국보 제7호로 지정되었다. ◈봉선 홍경사 갈기(奉先弘慶寺碣記) 신(臣)이 삼가 살펴보니, 내전(內典)에 이르기를, 『「초제(招提)」라 하는 것은 십방(十方)의 영재(英才)와 준재(俊才)를 이끌어 불법(佛法)을 크게 천명(闡明)하고 그곳에 멈추어 거처(居處)하게 하는 곳이다.』라고 하였고, 또 장자(莊子)에는 『여관(旅館)에서 쉬면서 인(仁)과 의(義)를 살펴본다.』고 하였으며, 진서(晉書)에는 『여관(旅館; 逆旅)에서 논의하여 공(公)과 사(私)를 정한다.』고 하였으니, 지금 직산현에서 성환역으로 가는 북로(北路)에, 소 한 마리 울음소리가 들릴 만한 곳에 사원(寺院)과 사옥(舍屋)을 신설한 것이 곧 그러한 종류(種類)이다. 처음에 이 땅은 크고 작은 정자(亭子)하나 없었으며 사람들의 왕래가 끊어지고, 부들 따위 수초(水草)가 자라는 연못이 있을 뿐이어서 도적들의 겁탈이 빈번하게 많았다. 비록 갈림길의 요충지이나 실제 왕래하기가 어려웠으니, 마침내 막힌 채로 태평성대에 붙여 두어서는 아니 도니다. 생각하건대, 우리 성상(聖上)께서 인(仁)으로써 왕위를 지키시고 문(文)의 덕(德)을 잡으시어 모든 전쟁이 사라지고, 예법(禮法)․음악(音樂)․형법(刑法)․행정(行政)을 모두 수행(修行)하셨으니, 만약 이에 희사(喜捨)의 인연으로 추모의 사업을 선대(先代)에서 구하신다면, 지나칠 것이 없으시다. 일찍이, 좌우 양가 도승통 통진광교 원제홍도 대사 신 형긍(左右兩街 都僧統 通眞光敎 圓濟弘道 大師 臣 逈兢)에게 내리신 조서(詔書)에 『옛날에 아버님(皇考) 안종 헌경효의 영문대왕(安宗憲景孝懿英文大王)께서 처음에 몸을 숨기셨다가 대천세계(大千世界)에 귀명(歸命;歸依)하시어 매양 법화경의 오묘한 불설(佛說)을 읽으시고 중도(中道)의 화성(化城)을 깊이 아름답게 여기시어, 힘써 행하고자 하셨으나 훈업(勳業)을 이루지 못하셨다. 짐(朕)은 곧 그 뜻을 잘 계승하여 그 완성을 영원토록 볼 것이니, 하나는 여행하는 사람들을 구제하여 험한 곳에서 근심이 없게 하고, 또 하나는 승려(僧侶)를 불러 이끌어 법륜(法輪)에서 거느리게 하노니, 대사(大師)는 마땅히 힘써 도와서 이룩되는 것을 살피고, 몸소 친히 서로 함께 살면서 내가 글로 굳게 명령한 것에 부응하고, 그 사업을 생각하는 권한을 주재(主宰)하라.』고 하셨다. 형긍(逈兢)이 겨우 임금님의 말씀을 받자옵고 갑자기 경영의 시작을 꾀한 것이 비록 아홉 차례나 되었으나, 게으름이 없이 모름지기 백 개의 발이 되어 쓰러지지 아니하였다. 귀한 것은 마음을 한가지로 하여 장차 후학들과 화합한 것이니, 이에, 광리증현 대사 사자사문 신 득총(廣利證玄 大師 賜紫沙門 臣 得聰)과 정려수진 오리대덕 사자사문 신 장림(靜慮修眞 悟理大德 賜紫沙門 臣 藏琳) 등이 다투어 도와주고, 원곡(願?), 매복(枚卜), 요도(要道) 등이 무리를 지어 이곳에 오니, 실지로 우리 역사(役事)가 흥성하였다. 성상(聖上)께서 계속하여 추성치리 익대공신 금자흥록대부 병부상서 지중추원사 겸 태자태부 상주국 천수현 개국남 식읍 삼백호 신 강민첨(推誠致理 翊戴功臣 金紫興祿大夫 兵部尙書 知中樞院事 兼 太子太傅 上柱國 天水縣 開國男 食邑 三百戶 臣 姜民瞻)과 중추부사 중대부 비서감 겸 태자빈객 주국 의춘현 개국남 식읍 삼백호 사자금어대 신 김맹(中樞副使 中大夫 秘書監 兼 太子賓客 柱國 宜春縣 開國男 食邑 三百戶 賜紫金魚袋 臣 金猛) 등을 별감사(別監使)로 차출하시었다. 이에 일마다 조화(調和)를 이루고 한가지로 다스리며, 비방(誹謗)을 끊고, 교만함을 펴서 무리를 다스렸다. 농사철을 빼앗기지 않게 하고 필요한 물건들은 공금에서 번거로움을 면하게 하였다. 도공(陶工)은 기와를 만들고, 목수는 눈바람 속에 톱질하고 도끼질하여 재목을 제공하였으니, 호탕한 마음을 지닌 장인(匠人)들이 벌떼처럼 모여든 것이었다. 구름처럼 많은 사람들이 가래질하고, 번개처럼 빨리 삽질하였으니, 놀고 있던 사람들의 무리가 준마(駿馬)처럼 달려왔던 것이다. 병진년(1016) 가을에 기공하여 신유년(1021)에 이르러 무릇 당(堂)․전(殿)․문(門)․랑(廊) 등 모두 200여 간을 지었고, 설치한바 소상(塑像)․화상(畵像)․제공덕상(諸功德像) 및 종(鐘)․경(磬)․번(幡)․개(盖)가 현재와 같이 구비하였으니, 그 수효가 이렇게 번화하였다. 이에, 칙명으로 「봉선 홍경사(奉先 弘慶寺)」라 사액(賜額)하시니, 마치 날아오는 듯한 형세로 모여드는 민심(民心)을 얻음으로 인하여 공적을 이룬 것이다. 불상(佛像)을 모신 전각(殿閣)과 불경(佛經)을 보관한 누각(樓閣)은 화려(華麗)하고 경이(驚異)로와, 완연히 도솔천(도率天)과 같았으며, 부종(鳧鐘)과 안탑(雁塔)은 장엄하여 멀리서도 난타(爛陀)임을 알게 되었다. 이미 삼보(三寶)가 발흥(勃興)함을 당하였으니, 진실로 천 개의 등불이 서로 이어질 것이다. 그리고, 사우(寺宇) 서쪽 한 구역(區域)에 합계 80여 간의 객관(客館)을 대립(對立)하여,「광연통화원(廣緣通化院)」이라 이름 하니, 이것 역시 따뜻한 집(溫廬)은 겨울철에 빽빽하게 재우고, 시원한 집(凉屋)은 여름철에 널찍하게 재우며, 식량과 말먹이를 비축하여 긴급할 때에 제공하고, 「옹백(擁伯)의 의장(義漿)」을 설치하여 식수(食水)를 공급하며, 누각(樓閣)에 북을 진열하여 매달아, 도적과 간악한 짓을 방비하였다. 무릇 이와 같이 하니, 가사(袈裟; 方袍)를 입은 승려(僧侶)의 무리가 빈(虛) 마음으로 왔다가 실(實)한 마음으로 돌아가고, 또한 걸어서 먼 길을 여행하는 무리로 하여금 밤에는 잠을 자게하고 낮에는 쉬게 하니, 마침내 진리를 증명하는 경지를 보였으며, 분탕질하는 근심이 들리지 않게 되었다. 지난날에 만약 옛 일을 짐작하여 지금에 계승하고 선황(先皇)의 홍원(弘願)을 치성(致誠)드리며, 기회를 따라 가르침을 베풀고 부처님의 묘문(妙門)에서 입은 것을 숭상하지 아니하였다면, 겸하여 그들을「인(仁)」으로 구제하는 일은 거의 하지 못 했을 것이다. 아! 일의 권여(權輿)에는 조금씩 나아가며 아버님의 뜻을 이어받아 훼손(毁損)함이 없이 상세(詳細)하게 진술(陳述)하시고, 아버님께서 이룩하신 일을 이미 잘 이어받으신 공(功)이 있으시며, 봉행(奉行)하시는 도리(道理)가 또한 넓으시어, 선(善)과 미(美)를 다하시겠다는 생각을 항상 몸에 지니셨다. 이제, 유생(儒生)에게 신칙하여 성대한 사업을 기록하라 명하시니, 신(臣)은 생각이 더디어 입술이 타고, 학문이 얕아서 근육만 씹고 있었다. 비록 사마상여(司馬相如)와 같은 문장으로 능히 할 수 없거늘, 소자(小子)가 비연(斐然)한 작문에서 표절(剽竊)하고 감히 모방(模倣)하여, 일의 처음과 끝을 약술하였으니, 애오라지 실록(實錄)에서 보충한 것이다. 때는 성상(聖上; 高麗顯宗)께서 등극하신지 18년이요, 태평기력(太平記曆) 6년(1026) 여름 4월 일에 삼가 기록하였다. 한림학사 선의랑 내사사인 지제곡 겸 사관 수찬관 사자 금어대 신 최충(翰林學士 宣議郞 內史舍人 知制誥 兼 史館 修撰官 賜紫 金魚袋 臣 崔沖)은 하교를 받들어 글을 짓고(奉敎撰), 봉의랑 국자승 신 백현례(奉議郞 國子丞 臣 白玄禮)는 하교를 받들어 글씨를 쓰고(奉敎書) 아울러 전서하다(幷篆)<김백선. 권선길 번역. 김종식 정리> -전설 : 비의 갓 위에 돌 세 개를 던져 올려놓으면 아들을 낳는다고 하여 아들 없는 여인들이 돌을 던져서 비 갓 위에 올려놓으려고 돌을 많이 던져 비의 갓이 많이 훼손되었다. -홍경사터(봉선홍경사터) : 큰길가의 홍경사 터. 고려 제8대 현종이 그 아버지의 뜻을 받들어 현종 7년(1016)에 이곳에다 큰절을 짓기 시작하여 200여 칸의 절을 완성했으며 봉선홍경사라 하고 승려들을 많이 모아 불법을 수행(修行)하게 하였으며, 행인들을 도적으로부터 보호하였는데 공주 명학소의 천민인 망이 망소이 난 때 불타서 소실되었다고 한다. ▲매주리(梅珠里) 직산군 이서면의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으로 매곡리, 광주리, 일부가 병합하여 매곡리의 ‘매’자와 광주리의 ‘주’자를 따서 매주리라 하고 성환면에 편입되었는데, 면이 읍으로 승격되어 성환읍 매주리가 되었다. -광주(光珠)말 : 매곡 북쪽에 있는 마을. 오룡쟁주(五龍爭珠)형의 명당이 있다고 전해 온다. -가는골(細谷) : 망경사 앞에 있는 골짜기. -돌물뿌리 : 매곡 서북쪽에 있는 산 부리. 물이 돌아 흘러간다고 한다. -대저거리 : 매곡 동남쪽에 있는 골. 절이 있었으며 철 일을 하던 대장간이 있었다. -망경사(望鏡寺) : 성산에 있는 절. 1927년에 건립되었다고 한다. -매곡(梅谷) : 매주리에서 가장 큰 마을. 지형이 매화낙지형(梅花落地形)이라 한다. 철 생산지였다. -박셋들 : 매곡 앞에 있는 들. 논이 별로 좋지 못하다고 한다. -새터말 : 대저 거리 아래쪽에 새로 된 마을. -세프니 : 진중 신촌(新村) 광주리 서쪽 길 등성이에 새로 생긴 마을. 이 일대가 사금이 많이 나온다. -점골 : 매곡 동쪽에 있는 골짜기. 옹기점이 있었다. -오얏골 : 점골 옆에 잇는 골짜기. -탑골 : 망경옆에 있는 골. 옛 탑이 있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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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특집] 천안의 숨은 향토유적을 찾아 나서다 ⑧[천안저널] 천안의 뜻 있는 몇몇 향토연구가들이 숨겨진 천안의 향토문화유적을 답사해 기록으로 남기는 작업을 한창 진행 중이다. 천안향토문화연구회와 천안역사문화연구실, 천안향토사연구소 등의 단체에서 활동하고 있는 김종식, 임명순, 문만주, 김정집, 김선명 등 지역 향토연구가들은 2013년 5월부터 최근까지 천안시 동남구 일원을 12회에 걸쳐 답사해 묻혀 있는 천안 유적을 발굴해왔고, 향후 서북구 지역 유적 찾기에도 나설 계획이다. 이들 향토연구가들은 하루하루 지날수록 훼손돼 가는 유적을 사진과 글로 남겨 천안 시민들에게 널리 알리고자 스스로 여비와 시간을 투자해 유적조사에 발 벗고 나서고 있다. 본보는 창간 3주년을 맞아 이들 향토연구가들의 땀과 열정으로 만들어진 소중한 자료들을 연재한다. 이번호에서는 7월 13일 다녀온 수신면 일원 유적들을 소개한다. 이번호를 끝으로 그간 답사해온 유적들에 대한 연재를 마치며, 향후 추가답사가 이뤄지면 추후 연재를 이어갈 예정이다. <편집자 주> ▣제12차 문화유적 답사(2014년 7월 13일) 삼용동 삼거리공원 일원 : 영남루→독립투쟁기념비→삼거리 노래비→석탑→암행어사 박영민 선정비→2.9의거 기념비→전쟁참전 기념비→홍대용시비→삼거리비→충무공 김시민 동상 1) 영남루(永南樓)(永南樓) 영남루는 천안시 동남구 삼용동 삼거리공원에 있는 조선시대의 누각이다. 1984년 5월 17일 대한민국의 충청남도 제12호로 지정되었다. 천안 화축관의 문 누로 사용되던 것으로 추정되는 이 누각을 영남루라 한다. 이 누각은 천안시 사직동 큰 재빼기와 작은 재빼기의 사이인 예전의 천안극장 자리 쯤에 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1919년에 중앙국민학교 운동장으로 옮겼다가 1959년에 다시 현 삼거리공원 호수가로 옮겨 온 것이다. 전하는 기록에 의하면, 화축관은 1601년(선조 35년)에 군수 노대하가 세웠으나 그 후에 여러 차례 고쳐지었다. 천안이 영·호남의 관문이어서 화축관은 역대 왕의 온양온천 행차 시 임시 거처로 사용하던 곳이다. 처음에는 정청 10칸, 전후퇴주 9칸, 동서랑 각 5칸, 시녀방 3칸, 정분 2칸의 큰 규모였다. 일제강점기에는 경찰서 숙소, 헌병대 사무실로 사용되었고, 해방 후에도 학교 관사로 활용되다가 헐리었다. 현재는 문루인 이 누각만이 남아있다. 유감스럽게도 많은 병화를 겪고 세월이 흐르면서 누각이 훼손되어 여러 번의 보수 끝에 원래 모습은 없고, 누각을 받치는 8자 짜리 사각의 석제 기둥전부와 나무 기둥과 석가래 등 대부분이 교체되어 예전의 누각으로서의 큰 의미는 없어 졌다. 2) 독립투쟁의사 광복회원 기념비(獨立鬪爭義士 光復會員 紀念碑) 소 재 지 : 천안시 삼용동(삼거리공원 내) 시 대 : 1969년 10월 소 유 자 : 독립투쟁의사 광복회원 기념 사업회 수 량 : 석조물 1기 규 모 : 전체 높이 3.5m, 기단 높이 1.4m, 비의 높이 2.1m 내 용 : 1913년 대한광복단을 조직하여 주로 국내에서 독립운동자금을 모금하여 국외지원에도 힘썼던 천안출신 7명의 독립투사(성달영, 유중협, 장두환, 조총열, 김정호, 유창순, 강석주) 활동이 기록되어 있다. 7단의 계단식으로 8각 기단 위에 8각의 기둥으로 비를 세웠다. 자리를 옮겨 다니는 과정에서 많은 부문이 훼손되었다. *독립투쟁의사 광복회원 기념비문 신명도 두려 울사 백의민의 죄를 말리고 살을 에어가든 귀축(鬼畜)의 무리를 쫓고, 민족의 내일을 위하여 횃불을 높이 들어 겨레의 자유와 조국의 독립을 소리높이 위치시다 쓰러진, 천안출신 항일독립투사 일곱 분을 이에 남긴다. 서기 1913년 일제의 속박에서 암담한 국운의 미래를 구하시려, 혼연히 큰 뜻을 품으시고 대한광복단을 조직하시여, 국내로는 독립운동자금을 모으시고, 밖으로는 만주 중국에 계신 독립군과 손을 잡으시고, 바람 속에서 밥 짖고, 이슬 속에서 잠자며, 국권회복을 방해하는 친일분자들과 싸워 독립의 의분을 터트리시고, 왜헌의 간담을 서늘케 하셨으며, 나아가 불굴의 인류정의와 불굴의 민족기계를 선양하여 3.1운동의 효시(嚆矢)가 되었으니 님들 의 공 청사에 빛나리라. 왜헌의 매서운 손길에 묶이시어 법정투쟁하시다가 그 옥고가 옥사에 이르시니, 님들! 이 피를 남기신 임의 나라 이제는 시들던 무궁화 다시 살아나, 혈고(血苦)를 뿌리신 씨 다시 싹트고 정의를 복 돋우어주신 그 가지가지마다 새 삭에 새 꽃이 되었나이다. 서기 1969년 10월 일 독립투쟁의사 광복기념사업회 건립 #다만 의사의 숭고한 넋을 기릴 뿐, 글 지은이와 쓴 이가 없으며 기념사업회의 명단도 없고 헌신하신 분의 이름도 없다. 3) 2. 9의거 기념탑 6.25 사변직후 흑성산에 출몰한 북괴군 토벌에 참여하여 천안의 안전과 치안을 위해 장렬히 희생한 의용소방대원의 넋을 위로하고, 호국정신을 함양하고자 천안여자상업고등학교 이사장인 문성규(文性珪)씨가 추진위원장이 되어 1992년 6월 23일 세웠다. 천안 삼거리공원에 있다. 규모 : 높이 8m 장소 : 동남구 삼용동 삼거리공원 동쪽 구조 : 철근 콘크리트에 대리석을 붙임 *취지문 그날의 함성 2. 9의거는 조국의 자유를 위해 밤하늘의 불기둥으로 일어섰던 날이다. 오직 구국의 일념으로 목숨을 초개와 같이 내 던진 결사보국의 날이다. 1946년 2월 9일! 아직은 흑성산 잔설위로 북풍이 몰아치던 그날, 공공기관 파괴와 양민과 요인을 암살하려는 공산분자들의 음모를 사전에 분쇄하기 위해 의용소방대원과 광복청년회 회원이 피로서 일어섰던 그날은 하늘아래 가장 편안하다는 우리고장에 유혈난동을 방지한 평화적 의거의 승리가 전국 방방곡곡에 자유의 함성으로 퍼진 천안의 날 이었다. 그러나 목숨으로 자유를 지킨 의거가 포고령위반 죄명으로 대전 형무소에 투옥되었으며 6.25사변 때는 7명의 의거 애국인사가 처참히 생명을 잃는 수난을 당했다. 아! 아! 장하도다! 2.9의거 애국인사들이여 애국애족과 자유 수호를 위해 몸 바쳐 피로써 내 향토 내 조국을 지키신 그 불굴의 호국정신은 영원토록 꺼지지 않는 정의의 불꽃이 되리라. 청사에 길이 빛날 자유의 함성을 여기에 담아 탑을 세우 로라. 1992년 6월 23일 4) 담헌 홍대용의 시(湛軒 洪大容의 詩) 無競免積毁(무경면적훼) 不才絶虛與(불재절허여) 好又時叩門(호우시고문) 壺酒友嘉疏(호주우가소) 淸琴嚮危欄(청금향위란) 中曲且悲噓(중곡차비허) 다툼이 없으니 온갖 비방 면하겠고 재주스럽지 못하니 헛 명예 있을 소냐 수시로 좋은 친구 찾아오면 아름다움 산나물 술안주가 일미라오 높은 헌함에 비켜서서 거문고 타노니 곡조 속의 슬픈 감회 그 뉘가 알겠는가 천안시 삼룡동 삼거리공원에는 1983년 4월 13일 전국시가비건립위원회에서 세운 홍대용시비가 있다. 전국시가비건립동호회가 담헌 ‘서거 200주년’을 기념해 세웠다. 앞면에는 ‘건곤일초정주인’ 시와 초상화를, 뒷면에는 김태준 동국대 명예교수가 글을 지어 새겼다. <뒷면> 홍대용(1731~1783) 담헌 홍대용 선생은 조선후기의 뛰어난 학자이시다. 일찍이 실학에 뜻하신 선생은 수학과 자연과학에 힘썼으며 20대에 혼천의와 자명종을 만드셨다. 고향 천원군 수신면 장산리 선생의 옛 집터는 흔적이 지금껏 남아 있고 중국을 여행하고 돌아와 쓴 한글 본 을병 연행록과 따로 담헌 문집이 있다. 선생은 이때 지구는 돌며 우주는 무한하다는 생각을 의산문답 속에서 확실히 하셨고 선생의 실학사상과 선비정신은 박지원 등 북학파로 이어졌다. 선생의 서거 200주년을 맞이하여 뜻있는 후학들이 그 뜻을 기리는 시비를 이곳 천안삼거리에 세운다. 이 일을 주관한 문학박사 김태준은 삼가 글을 짓고 학술위원 김동욱은 글씨를 쓰다. 1983년 4월 13일 전국 시가 비 건립동호회 세우다. *홍대용 1731년∼1783년(영조 7년∼정조 7년) 북학파(北學派) 실학자의 한 사람이며, 지전설(地轉說)을 주장하는 등 조선 후기 과학사상의 발전에 선구적인 역할을 했다. 본관은 남양(南陽). 자는 덕보(德保), 호는 담헌(湛軒)·홍지(弘之). 할아버지는 대사간 용조(龍祚)이며, 아버지는 목사 역(櫟)이다. 일찍이 당대의 석학이자 노론학파의 중심적 인물인 김원행(金元行)에게서 주자학을 배웠다. 여러 번 과거에 실패하여 중앙정계에 진출하지 못한 가운데 박학다식한 학문적 소양을 쌓아나갔다. 1765년(영조 41) 서장관으로 청나라에 가는 숙부 억(檍)을 자제군관(子弟軍官)으로 따라가 3개월 동안 베이징[北京]에 체류했다. 이때 중국인 학자 엄성(嚴誠)·반정균(潘庭均)·육비(陸飛) 등과 친교를 맺고, 독일계 선교사로 흠천감정(欽天監正)인 폰 할러슈타인(중국식 이름 劉松齡)과 부정(副正)인 고가이슬(鮑友管) 등과 면담하면서 청나라 고증학과 서양의 문물을 접하고 사상체계에 큰 변화를 겪게 되었다. 그의 베이징행은 북학파 가운데 가장 이른 것으로 당시 교우관계에 있던 박지원(朴趾源)·이덕무(李德懋)·박제가(朴齊家) 등에게 영향을 주어 북학파를 형성하게 되었다. 베이징에서 돌아와 3년간 중병을 앓은 후, 1774년 음보(蔭補)로 선공감감역(繕工監監役)이 되고 곧 세손익위사시직(世孫翊衛司侍直)이 되었다. 1777년(정조 1) 사헌부감찰이 되었으며 1778년 태인현감(泰仁縣監), 1780년 영천군수(榮川郡守)가 되었다. 1783년 모친이 연로하다는 이유로 사직하고 서울로 돌아온 후 중풍에 걸려 세상을 떠났다.<백과사전> 5) 삼용동 3층 석탑 삼용동 3층 석탑-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11호. 천안시 삼거리공원 안에 자리하고 있는 고려시대의 화강암으로 만든 3층 석탑이다. 이 석탑은 1984년 5월 17일 충청남도 문화재자료로 제11호로 지정되었다. 천안시에서 대전과 진천으로 갈라지는 삼거리에 있다가 1985년 국도 21호선 확포장 공사 시에 삼룡동에 있는 삼거리공원으로 옮겨졌다. 이 탑은 1961년 안서동에 사는 주민이 밭을 갈다가 탑의 부재들이 나와 당시 환성면사무소에 신고하여 이곳으로 갖다 놓았다 한다. 지금은 상명여자대학교 부근으로, 많은 학자들이 추정하기를 유려왕사(留麗王寺) 터일 것이라는 설이 있다. 일부 학자들은 유려왕사탑으로 부르기도 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유려왕사는 고려 태조가 머물렀기 때문에 이러한 이름이 지어졌다고 한다. 전체 높이는 270㎝이고 지대석(地臺石)의 크기는 127cm×127㎝이다. 탑의 형태는 전체 무게를 지탱하는 기단(基壇)을 2층으로 쌓고,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모습이다. 아래층 기단에는 한 면에 안상(眼象)을 2개씩 옅게 새겨 놓았고, 각 층의 옥개석 받침은 2단(段)으로 만들었다. 옥개석의 처마에는 반전이 있으나 파손이 심하고, 상륜부는 완전히 없어졌다. 전체적으로 기단부가 큰 데 반하여 탑신 부는 너무 가늘고 길어서 균형감이 없는데, 이는 2층 이상의 탑신은 원래의 것이 아니라 후대에 새로 만들어 올린 것이기 때문이다. 원래의 탑은 고려시대에 세워진 것으로 보이나, 유실된 부재가 많아 문화재로서의 가치는 떨어진다. 6) 암행어사 박영민 권학비 삼거리공원에 있는 이 암행어사 선정비에는 어사 박공영민 애휼청덕 권학비 을해 2월(御使 朴公永民 愛恤淸德 勸學碑 乙亥 二月)이라 각자되어 있다. 이 비는 봉명동 20번지 차돌고개 아래에 있었는데, 1981년 신유 10월에 온양선 도로 확장으로 인하여 이곳 삼거리공원으로 옮겨 보존하고 있다. 7) 하숙생 노래비 2001년 7월 7일에 세워진 하숙생 노래비는 ‘하숙생’의 노랫말이 천안시 입장면 출신 故김석야 선생이 천안 삼거리를 배경으로 작사했음이 밝혀지면서, 이것을 기념하고자 천안문화원 개원 47주년 기념으로 천안문화원(원장 민병달)이 세운 기념물이다. 인기 가수 고 최희준이 불러 많은 사람들이 향수를 달래며 애창되고 있는 하숙생 노래를 천안 사람들의 자긍심을 고취하고자 천안 삼거리공원에 비를 세웠다. <제막식> 일 시 : 2001년 7월 7일 오전 10시30분 장 소 : 천안 삼거리공원 내 용 : 천안문화원 47주년 기념식 및 ‘하숙생’ 천안노래비 제막식 주 최 : 천안문화원 8) 전쟁 참전 기념비 2004년 9월 23일 세워진 전쟁참전 기념비는 6.25 자유 수호전쟁 및 해외파병 전쟁인 월남전에 참가한 참전용사의 위상을 기리고, 전후 세대들에게 확고한 국가관과 나라사랑 정신을 함양시키기 위하여 세운 기념비이다. 9) 충무공 김시민 장군 동상 2014년 5월 30일에 세워진 충무공 김시민 장군의 동상은 충무공의 애국애족정신을 함양하고자 천안시에서 세웠다. *김시민 1554년~1592년(명종 9~선조 25) 천안시 병천면 가전리 잣밭에서 출생한 이 고장의 명장이다. 임진왜란 당시 3대첩 중 하나인 진주싸움을 승리로 이끈 장군으로 본관은 안동, 자는 면오(勉吾), 아버지는 지평 충갑(忠甲)이다. 1578년(선조 11) 무과에 급제하여 군기시(軍器寺)에 들어갔다. 1583년 귀화한 여진인 니탕개(尼湯介)가 회령(會寧)지방에서 난을 일으키자 정언신(鄭彦信)의 부장으로 출정하여 공을 세웠다. 1591년 진주판관에 임명되었고,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난 뒤 목사 이경(李璥)이 병사하자 그 직을 대리하면서, 민심을 안정시키고 성을 수축하고 무기와 기재를 정비하는 한편, 군사를 편성하였다. 이때 일본군이 사천(泗川)에 집결하여 진주로 향하려 하자, 곤양군수 이광악(李光岳), 의병장 이달(李達)·곽재우(郭再祐) 등과 합세하여 적을 격파하고 고성·창원 등을 회복했다. 이어 의병장 김면(金沔)과 함께 거창 사랑암(沙郞巖)에서 일본군을 크게 무찔렀다. 그 뒤 여러 차례 전공을 세워 그해 8월 진주목사로 승진되었다. 9월에는 진해에서 적을 물리치고 적장을 사로잡아 행재소(行在所)로 보냈다. 그해 10월 적 2만여 명이 진주성을 포위하자, 성 안의 노약자와 부녀자까지 남장을 하게 하여 군사의 위용을 보이게 하는 등 불과 3800여 명의 병력으로 7일간의 치열한 공방전을 벌여 적을 물리쳤으나 이 싸움에서 이마에 적탄을 맞고 며칠 뒤 전사했다. 1604년 선무공신(宣武功臣) 2등에 추록되고, 그 뒤 영의정에 추증되고 상락부원군(上洛府院君)에 추봉되었다. 진주의 충민사(忠愍祠)산성 정충당(旌忠堂)에 제향 되었다. 시호는 충무(忠武)이다.<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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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특집] 천안의 숨은 향토유적을 찾아 나서다 ⑦[천안저널] 천안의 뜻 있는 몇몇 향토연구가들이 숨겨진 천안의 향토문화유적을 답사해 기록으로 남기는 작업을 한창 진행 중이다.천안의 뜻 있는 몇몇 향토연구가들이 숨겨진 천안의 향토문화유적을 답사해 기록으로 남기는 작업을 한창 진행 중이다. 천안향토문화연구회와 천안역사문화연구실, 천안향토사연구소 등의 단체에서 활동하고 있는 김종식, 임명순, 문만주, 김정집, 김선명 등 지역 향토연구가들은 2013년 5월부터 최근까지 천안시 동남구 일원을 12회에 걸쳐 답사해 묻혀 있는 천안 유적을 발굴해왔고, 향후 서북구 지역 유적 찾기에도 나설 계획이다. 이들 향토연구가들은 하루하루 지날수록 훼손돼 가는 유적을 사진과 글로 남겨 천안 시민들에게 널리 알리고자 스스로 여비와 시간을 투자해 유적조사에 발 벗고 나서고 있다. 본보는 창간 3주년을 맞아 이들 향토연구가들의 땀과 열정으로 만들어진 소중한 자료들을 연재한다. 이번호에서는 지난호에 이어 6월 15일 다녀온 수신면 일원 유적들을 소개한다. ▣제11차 문화유적 답사(2014년 6월 15일) 수신면 일원 : 속창리 한명회 묘소→한동규 독립유공자 비→홍대용생가지→장산리 석탑→석불→홍대용 기념관→홍대용 묘소 5)장산리 석불 고려 때의 불상으로 추정되는 이 미륵은 수신면 장산리의 수호신으로써 해마다 당제를 지내며 모셔오는 석불이다. 아들을 낳는다는 속설에 의해 코 부분은 마을 아낙들이 떼어다 다려 먹어 없어져서, 시멘트로 복원한다고 덧칠을 하여 흉물이 되어 있다. 문화재자료 제356호로 수신면 장산리 643-26번지에 있다. 석불입상은 수신면 장산리 장명부락 앞에 3평정도 건물 내에 안치되어 있다. 이 석불은 조각선이 뚜렷한 고려시대의 불상으로 추정되는데, 나발로 표현된 머리에는 유계가 오뚝하게 표현되어 있으며 풍만한 안상은 직사각형으로 양 볼이 나와 있어 자비스런 불성을 나타내고 있다. 두 귀는 길게 목 가까이 내려와 있고 목에는 3도가 분명하게 두 눈과 입은 완전히 보전되어 있으나 코 부분은 파손되었다. 불신 또한 알맞은 비례를 보이고 있으나 어깨가 약간 좁은 듯하다. 양손은 배에서 두 엄지를 맞대어 손가락을 합하여 내향하고 있으며, 발과 발가락은 뚜렷하게 조각되어 있고 법의는 속옷의 끈을 묶은 고름자락이 수인위에 나타내고 있다. 기단은 원형에 가까운 4각형으로 가운데 부분을 파서 세웠다. 이 사각의 판형 가운데를 오목하게 파내고 석불을 세웠는데, 오른쪽에는 송내리 향도(松內里 香徒)라 각자 되어 있고 가운데는 목주(또는 목천) 미타 향도 O미 9월 초 1일(木州(又 木川) ?陀 香徒 O未 九月 初 一日)라는 각자가 있고 왼쪽에는 장명리 향도(長命里 香徒)라 각자 되어 있어, 목천과 수신의 송내와 장명마을의 향도들이 모여 불상을 세운 것을 기록한 것인지, 아니면 세 동네 연합 계를 기념하기 위하여 기록한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귀중한 사료임에는 분명하다. 보수 과정에서 시멘트를 흘린 것이 굳어서 그나마 판독이 안 된다. 6)장산리 화주비 수신면 장산리에는 미륵을 모시고 정월에 마을에서 제를 지낼 정도로 모시는 미륵이 있다. 조그마한 집을 지어 보호되고 있으며, 그 앞에 자그마한 비석이 있는데 탁본 해보니 화주 기념비였다. 절이 있었던 것인지 아니면 미륵을 세우며 시주 비를 세운 것 인지는 전하는 것이 없다. 전면에 강희 55년(숙종 42년인 서기 1716년) 10월 18일 화주 거사 명O, 뒷면에 대시주 추OO, 강O선, 오선남, 강선봉, 오득오, 박대선, 백차련, 강득O, 석천하지, 오득선이라 되어 있다. 7) 장산리 효자 이춘영 정려(孝子 李春榮 旌閭) 충남 천안시 동남구 수신면 장산리 646-9. 장산리 1구의 장명마을 홍대용선생 생가지 동쪽 미륵댕이 쪽으로 가다보면 마을 어귀에 미륵을 모시는 작은 정자가 있고 미륵위의 야산에 동향을 하여 세워져 있다. 정려는 정 측면 1칸의 건물로 맞배지붕에 홑처마를 하고 있으며 4면은 홍살을 시설하였다. 원형 초석에 원주를 놓았는데 내부의 중앙 상단에는 현액을 걸었다. 현액에는 효자 교수 경주 이춘영 지문 공부자 탄강 2478년 정유 3월 일 경성 선성 묘건(孝子 敎授 慶州 李春榮 之門 孔夫子 誕降 2478年 丁酉 三月 日 京城 先聖 廟建...1927년)라고 쓰여져 있다. 이춘영(李春英)은 경주(慶州)인이며 선조 때 사람으로 어머니에 대한 효성이 지극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왜적이 이 고장을 침입해 들어옴에 동네 사람들은 모두 피난을 하였으나 이춘영은 유일하게 마을에 홀로 남아 어머니의 병환을 극진히 보살폈다. 왜적이 당도하자 어머니와 가족을 가까운 산중에 숨겨 놓고 왜적을 상대하여 싸우다 장렬하게 순국하였다. 이 사실이 조정에 알려져 그의 충정과 효를 기리기 위해 효자문을 세웠다 한다. 이 정려는 2010년에 홍대용 기념관이 생기면서 미륵댕에서 장산리 1구 천안농업고등학교의 실습장이 있는 광터골로 이전하여 보존하고 있다. 8)홍대용 묘소 *홍대용 신도비(洪大容) 수신면 대홍리 상록리조트 가는 도로변 묘소 앞에 있다. 천문 지리에 밝아 지전설을 주장했으며 여러 저서와 문집이 있다. *담헌 홍대용 생애(湛軒 洪大容) 홍대용은 서기 1731년 (영조 7) ~ 1783년 (정조 7) 충청도 청주군 수신면 장산리(현재 충청남도 천안시 수신면 장산리)에서 태어난 조선 후기의 실학자·과학사상가. 북학파(北學派) 실학자의 한 사람이며, 지전설(地轉說)을 주장하는 등 조선 후기 과학사상의 발전에 선구적인 역할을 했다. 본관은 남양(南陽), 자는 덕보(德保), 호는 담헌(湛軒) 또는 홍지(弘之)이다. 할아버지는 대사간 용조(龍祚)이며, 아버지는 목사 역(?)이다. 일찍이 당대의 석학이자 노론학파의 중심적 인물인 김원행(金元行)에게서 주자학을 배웠다. 여러 번 과거에 실패하여 중앙정계에 진출하지 못한 가운데 박학다식한 학문적 소양을 쌓아나갔다. 1765년(영조 41) 서장관으로 청나라에 가는 숙부 억(檍)을 자제군관(子弟軍官)으로 따라가 3개월 동안 베이징[北京]에 체류했다. 이때 중국인 학자 엄성(嚴誠)·반정균(潘庭均)·육비(陸飛) 등과 친교를 맺고, 독일계 선교사로 흠천감정(欽天監正)인 폰 할러슈타인(중국식 이름 劉松齡)과 부정(副正)인 고가이슬(鮑友管) 등과 면담하면서 청나라 고증학과 서양의 문물을 접하고 사상체계에 큰 변화를 겪게 되었다. 그의 베이징 행은 북학파 가운데 가장 이른 것으로, 당시 교우관계에 있던 박지원(朴趾源)·이덕무(李德懋)·박제가(朴齊家) 등에게 영향을 주어 북학파를 형성하게 되었다. 베이징에서 돌아와 3년간 중병을 앓은 후, 1774년 음보(蔭補)로 선공감감역(繕工監監役)이 되고 곧 세손익위 사시직(世孫翊衛 司侍直)이 되었다. 1777년(정조 1) 사헌부감찰이 되었으며 1778년 태인현감(泰仁縣監), 1780년 영천군수(榮川郡守)가 되었다. 1783년 모친이 연로하다는 이유로 사직하고 서울로 돌아온 후 곧바로 중풍에 걸려 죽었다. -담헌 홍대용 묘비문(湛軒 洪大容 墓碑文) -담헌 홍공 대용지묘 (湛軒 洪公 大容之墓) -숙인 한산 이씨 부좌 淑人 韓山 李氏 ?左) 공의 자는 덕보(德保)요, 담헌(湛軒)은 그의 호니, 남양(南陽)인이다. 고려 금오위(高麗 金吾衛) 휘 선행(先幸)으로 시조(始祖)를 삼고, 본조에(本朝) 들어와 휘 동(洞)은 부제학(副提學)이었는데 연산 조 갑자에 사화(燕山祖 甲子士禍)를 가장 혹독하게 입었고, 휘 담(曇)은 이조판관(吏曹判官)으로 효행정려(孝行旌閭)가 있었고, 휘 진도(振道)는 판중추부사로 정사공신(判中樞府事 靖社功臣)에 책록되고 증조 휘 숙(潚)은 참판(參判)이요, 조 휘 용조(龍祚)는 감사요, 고 휘 역(?)은 목사요, 비 청풍김씨(淸風金氏)는 군수 휘 방(枋)의 따님이다. 처음에 공의 여러 부형과 형제들이 과거 공부를 해서 많이 문장으로써 이름이 드러났는데 공은 홀로 과거를 폐하고 마음을 잠겨 힘써 배워 본원을 북돋웠고, 또한 주자의 말을 외워 가로되 ‘돈․곡식․병기와 병사에 자기를 위한 학이 아님이 없다’라 하고 사물을 경영하고 처리함에 때에 소임을 힘썼다. 싸움진법의 기와 정과 음악(바른 음악과 음란한 음악) 같은데 이르러서는 널리 통해서 이해하지 못함이 없었고, 상수(象數)와 율력(律曆)에 밝아서 기지가 창출하여 하늘을 관찰하고, 해 그림자를 재는 기구를 만들어서 이르기를 우순의 옥형(玉衡 : 천체의 와 같은 것)과, 주비의 삿갓은 더 말할 것이 없고, 한공 렴과 장행간의 측후와 전루는 대대로 새로운 법이 있었으나, 만든 것을 고증하기 어려워서 이에 통천․혼상․측관․구고 등 여러 의도설(儀圖說)을 지었다. 어렸을 때 숙부가 사신으로 행함에 따라가 엄성(嚴誠) 육비(陸飛) 번정균을 연나라 관아에서 만났는데, 세 사람은 전당에 살면서 모두 학술문장으로 교유하여 많은 해내의 명사가 다 공을 추대하여 대유가 되었다. 필담에 부여한 여러 만언은 모두 경전의 뜻을 고찰해 의거한 것이다. 육상산과 왕양명을 통렬히 변론해서 하늘과 사람의 성명으로부터 널리 고금출처를 의논하고 질이 어렵고 성실함을 분석함에 더욱 합하니 곧 은미함이 있었다. 군자가 때를 좇아 나타나고 숨음을 풍자함에 진실로 크게 깨닫고 돌아왔다. 후에 여러 번 편지해서 그치지 않고 또한 공의 작은 모양을 그려서 붙여 왔는데 초상이 거의 七분이었다. 때에 이르기를 공이 과화지묘를 얻었다고 하였다. 공은 영종 신해 三월 一일에 낳아서 역임한 벼슬로 내직인 즉 선공감감역, 돈녕부참봉, 익위사지직, 사헌부감찰, 의빈부도사와 외직인 즉 태인현감, 영천군수인데 혹은 벼슬을 하고 혹은 벼슬을 하지 않았다. 정종 계묘 十월 二十二일에 졸하여 청주 구미평 신좌의 언덕에 장사지냈다. 한산 이홍중의 따님과 장가들었는데 온화하고 지혜롭고 삼가고 도타와서 시부모 섬김에 효로써 하고 군자를 받듬에 예로써 하고 아래를 어거함에 은혜와 의릐가 있고 집을 다스림에 법도가 있었다. 영종 경술 二월 二十九일에 태어나 순종 기사 八월 十五일에 졸하니 수가 八十이었고, 산소를 같이 하였다. 一남 원은 진사요, 三녀는 조우철․군수 민치겸․수 유춘수에게 시집갔다. 원의 두 아들 명후(明厚)․양후(良厚)는 모두 군수이고, 군수인 진수(鎭壽)는 조씨가 낳았고, 직장 운환(雲煥)은 유씨가 낳았다. 공은 자품이 늠름하고 고명하여 배움에 평실을 힘써서 마음을 간직하고, 이치를 밝힘으로 근본을 삼고 몸에 돌이켜 힘써 실천하는 것에서 돌아가서 믿음과 의리가 족히 써 생사를 기탁할 수 있고, 재주와 지혜는 족히 써 세상의 일을 경영할 수가 있었다. 그 계방에 있음에 매양 문과 의를 따라서 치도를 펴고 베풀어 무릇 사사로움을 떨쳐 버리고 선을 쫓고 힘써 검소하고 절약하여 사용하고, 권권이 여러 차례 자기의 뜻을 이루었다. 정종의 동궁시 일찍이 교에 가로되 홍시직은 경학한 선비로 다문박식하여 마땅히 자품을 열어 높이게 하고, 또 말하기를 재주가 시작과 같다면 어찌 한번 과거를 얻지 못하리오. 분명히 이것은 즐겨하지 않은 것이라 하고 필선 이보행이 가로되 게방으로써 대과를 폐한다는 것은 이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옛 사람이 일을 방해하고 뜻을 빼앗는다는 경계가 있었는데 이것은 곧 아무개가 오로지 실을 향해 나간 계고라고 하였다. 흥근(興根)은 후배로서 비록 공의 상하에서 뵙지는 못했으나 우리 종모는 곧 공의 자부니 어려서부터 익히 공의 지행을 들었고 사이에 선배를 좇아 놓을 적에 자주 공의 행의와 재기를 일컬어서 가히 하나의 재주로 이름 할 수 없다하니 더욱 공을 근세에서 구함에 높이 짝하기 드문 것을 알았고, 오직 우리 정묘는 성스럽고 밝은지라. 임금님의 말씀이 괴이고 포상하야 빛나는 곤룡포보다 지나침이 있었으니 이는 가히 백세에 믿음을 증거할 수 있다. 익종․헌종 양조에 미쳐서 유서를 두루 구하고 자손에게 묻는 데에까지 이르렀으니, 그 금자(金紫 : 금도장과 자주 빛인 끈. 곧 귀현)가 달린 것을 볼 적에 부하고 후한 것을 지나니, 다만 잠시의 영화로운 세상만을 통해 보더라도 스스로 높이 논할 것이 있거니와, 특히 하늘이 나이를 더하지 아니해서 쌓인 것을 베풀지 못했으니 명이로다. 어찌 유감이 아니리오? 이제 양후가 비석의 글을 부탁하고 또한 말하기를 ‘공은 남들이 가장에서 덕을 형상한 것이 지나치다 하니 이것이 병이다’라고 하고 일찍이 이천(伊川) 선생의 화상의 말씀에 훈이 있는 것을 들면서 반복하면서 돌려보냈는데 삼가 그 대개를 우와 같이 역었으니 오히려 공의 평소의 뜻에 부응할 수 있는 것이 있다 할 것이다. 숭록기원후 四정사 맹춘 대광보국 숭록대부 판중추부사 안동 김흥근은 삼가 쓰다.(崇禎紀元後 四 丁巳 孟春 大匡輔國 崇祿大夫 判中樞府事 安東 金興根 謹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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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특집] 천안의 숨은 향토유적을 찾아 나서다 ⑥[천안저널] 천안의 뜻 있는 몇몇 향토연구가들이 숨겨진 천안의 향토문화유적을 답사해 기록으로 남기는 작업을 한창 진행 중이다. 천안향토문화연구회와 천안역사문화연구실, 천안향토사연구소 등의 단체에서 활동하고 있는 김종식, 임명순, 문만주, 김정집, 김선명 등 지역 향토연구가들은 2013년 5월부터 최근까지 천안시 동남구 일원을 12회에 걸쳐 답사해 묻혀 있는 천안 유적을 발굴해왔고, 향후 서북구 지역 유적 찾기에도 나설 계획이다. 이들 향토연구가들은 하루하루 지날수록 훼손돼 가는 유적을 사진과 글로 남겨 천안 시민들에게 널리 알리고자 스스로 여비와 시간을 투자해 유적조사에 발 벗고 나서고 있다. 본보는 창간 3주년을 맞아 이들 향토연구가들의 땀과 열정으로 만들어진 소중한 자료들을 연재한다. 이번호에는 지난 5월 11일과 6월 15일 답사한 병천면과 수신면 일원 유적을 소개한다.<편집자 주> ▣제10차 문화유적 답사(2014년 5월 11일) 병천면 일원 : 노은정→백석탄→도원동리 대명천하비→봉래선경→구미산 독립만세기념비→선정비→아우네 만세 성지 ▲ 노은정 바위에 각자된 글씨. 1) 노은정(老隱亭) -글씨크기 : 대략 40×50cm, 글자 폭 약 5cm -소 재 지 : 천안시 병천면 도원리 검개울 하천변 -규 모 : 정자 1동(약 2평) -시 대 : 조선영조 15년(1739) -유래 및 특징 : 도원 8경의 하나이며, 노은정기(老隱亭記) 현판이 남아있다. 조선시대에 김상기가 말년에 지은 정자. 노은정기는 손자 김석범이 지었다. 24회나 시 대회에서 합격하여 ‘시(詩) 장군’이라는 칭호가 있는 안동후인 노은 김상기(安東後人 老隱 金相器)가 만년(숙종 때)에 이곳에 암자를 짓고 노년을 보내던 곳으로, 도원리 광기냇가 정자의 암벽에 가로로 새겨져 있다.(원래 새로로 쓴 것은 오래되어 훼손되어 갈아내고 새로 쓴 듯 한 흔적이 보인다. 현재 노은정이라 암각 된 글 옆의 바위에 세로로 흔적이 있다.) 1km정도 남쪽 도원정 아래에 우암 송시열 선생의 글 백석탄(白石灘)이라는 글씨가 있으며, 도원팔경중 하나이다. 정자는 1997년에 도 문화재자료 제 335호 지정되었다. 2013년 가을에 새로이 중축하는 과정에서 일제강점기에 시멘트로 덧쌓아 흉물이 되어 내려오던 축대를 헐어내고 기둥과 석가래 일부를 교체하였으며, 원래의 모습으로 복원하였다. ▲ 송시열의 글씨 '백석탄' 2) 병천면 동원동의 백석탄 글씨 -소 재 지 : 천안시 병천면 도원리 검개울 도원정 앞 느티나무 아래 -글씨크기 : 대략 45×50cm, 글자 폭 약5cm -규 모 : 정자아래 큰 바위 -시 대 : 조선 중기 -유래 및 특징 : 냇가의 물이 회 돌아 나가는 모습이 너무 아름다워 모든 사람들이 넋을 잃었다 하는 이곳은 우암도 만동묘 터를 구하러 다니던 중에 이곳에 들려, 그 멋스러움에 반하여 백석탄(白石灘)이라 글을 남겼다 한다. 이 글씨는 우암 송시열 선생의 글씨라 전한다. 현재 도원정 정자아래 있다. 도원 8경중 하나이다. 이 글은 하천의 지류가 바뀌면서 묻혀있는 것을 향토사학자 김종식 씨가 2002년도에 병천면에 건의하여 병천면장 김덕환, 도원리이장 김영천, 노인회장 김남섭, 강능 김씨종중 회장 김남권씨 등과 상의하여 하천을 정비해 도원정 부근을 쉼터로 조성하면서 발굴해 20여년 만에 모습을 보게 되었는데, 관리 부실과 사람들의 무관심으로 다시 토사에 묻혀있다. 3) 봉래선경(蓬萊仙境) -글씨크기 : 대략 60×90cm, 글자 폭 약 5cm -소 재 지 : 천안시 병천면 도원리 구암산 중턱 입 바위 옆 -시 대 : 조선 중기 -유래 및 특징 : 구암산 아래 암벽에 새겨진 이 글은 글의 크기가 60×90cm 정도의 큰 글씨로, 도원 김만중(桃源 金萬重)이 이곳이 무릉도원이라 하며 썼다는 문중의 구전이 있다. 이곳은 5회 이상 답사하여 찾았으며 수많은 학자와 서예가를 동반하여 10여회 이상 답사하였으나, 봉래로 보는 학자들이 많아서 봉래로 정리하였다. 일부 학자들은 구암(龜巖)선경(仙境)이라고도 하는데 아무래도 봉래(蓬萊)인 듯 하다. 후학의 발의를 기다린다. 4) 병천면 도원리 도원동리 대명천하비 -소 재 지 : 천안시 병천면 도원리 검개울 도원정 앞 느티나무 아래 -글씨크기 : 대략 20×20cm, 글자 폭 약 1.5cm -규 모 : 비석 1기 -유래 및 특징 : 도원동리 대명천하(桃源洞裡 大明天下)라 각자 되어있는 이 비는 ‘도원동은 대 명나라의 하늘아래 속해있다’고 하였다. 우리네 조상들이 명나라 속국에서 벗어나지 못한 주체성을 이곳에서도 볼 수 있다. 반드시 없애 버려야할 비석인데, 동네 입구에 아직도 버젓이 서 있다. 강릉김씨 한림공파 대동보 문헌록에 이 글씨는 도원 김만중(桃源 金萬重)이라는 사람이 명나라가 망한 후에 벼슬을 버리고 이곳에 와서 살면서 썼다는 기록이 있다. 도원동 입구 느티나무 아래 작은 비석으로 되어 있는데, 오래 되어 나무가 자라면서 비석이 부러진 것을 탁본하여 지금의 것을 세웠다 하는데, 옛 것과 사진으로 확인한 결과 글씨의 형태가 완전히 달라 아무런 의미 없어 보이며, 우리 조상들의 뼈에 사무친 한의 흔적이다. 5) 병천면 병천리 구미산 선정비 -종 류 : 선정비 -내 용 : 병천면 병천리 구미산 입구에 5기의 선정비가 정리되어 있음. -시 대 : 조선 말기와 근대 1기 군수 남계석 시혜선정비(郡守 南啓錫 施惠不忘碑) 군수 남계석 무휼불망비(郡守 南啓錫 撫恤善政碑) 현감 이유헌 애민선정비(縣監 李裕憲 愛民善政碑) 현감 이단상 애민선정비(縣監 李?祥 愛民善政碑) 청암 한상욱 선생 청덕비(淸庵 韓相彧 先生 淸德碑) 6) 병천 아우내 기미독립운동 기념비(己未獨立運動 紀念碑) -소 재 지 : 천안시 병천면 병천리 산 73-2외(구미산 정상부) -시 대 : 현대 -소 유 자 : 유관순 열사 기념사업회 -수 량 : 석조물 1기(화강암) -규 모 : 토지 20평 -내 용 : 기미년 아우내 3.1만세 운동지역에 있는 구미산 정상 위에 세워진 기념물(높이 80cm)로서 1947년 10월 유관순 열사 기념사업회에서 건립. 1991년 구미산 사적공원 조성을 위해 토지매입과 운동장, 잔디광장, 진입로 등을 정비하고 조경등을 실시함. 네모난 기단석 위에 장대석으로 6계단을 만든 후 맨 위에는 오석으로 비위 받침을 한 4각형의 사다리꼴형의 탑. 비문은 의당 정인보가 글을 짓고 일중 김충현이 글을 씀. ※병천 기미독립만세 기념비문 기미독립운동 때 아내서 일어난 장열한 자취라. 기미 삼월삼일, 독립선언이 나며 국내 국외 만세소리 서로 연하였다. 그 가운데에도 충남 목천 안내 장터일은 가장 장열한 운동의 하나이다. 그 날 적의 총칼에 넘어진 이만 노소남여 스무분이요. 옥에서 궂긴이(죽은이) 한분이니 이 한분이 곧 어린 여학생 유관순, 열일곱에 이 일을 일으켰다. 음력삼월일일은 아내장이다. 어린 여학생의 높은 목소리로 대한독립만세를 부르자 온 장터가 만세 속에 들었다. 독립정신 내미는 앞에 총칼이 보이지 아니하니 마침내 많은 피가 흘렀다. 유관순은 잡히었다. 묶여드는 어려 사람을 보더니 소리를 높여 오늘 일은 다 내다. 적이 보니 어린 여학생이다. 일은 크다. 나는 적다. 온갖 악형을 다하며, 누가 한 것을 대라고 하였으나 오즉 내다 라고 할뿐이었다. 그 아버지 유중권과 어머니 이씨, 그 자리에서 총살을 당하고, 유관순은 끝끝내 굴하지 아니 하야, 증역 삼년이 다시 칠년이 되더니, 얼마 아니 하야 궂기니, 잡히던 이듬해 십월이다. 처음 일어나던 날, 유씨 집 부부보다 먼저 김구응은 그 어머니 최씨와 모자 함께요, 조인원, 김상헌, 서병순, 박상규, 전치관, 한상필, 윤희천, 유중오, 윤태영, 이성하, 박병호, 신을우, 박유복, 박영학, 방치석, 박준규다. 한날 적의 총칼에 넘어진 분들이니, 응해서 일어난 이, 일으킨 사람과 둘이 아니요. 이듬해 옥사가 그 날의 죽음과 다름이 없다. 형제야, 자매야, 선렬들의 피 빛이 이즉 것 새롭다. 이 자최를 돌에도 사기거니와 서로들 마음에 사기라. 대한민국 이십구년 십월 일 뎡인보(정인보)는 짓고 김충현을 쓰다. 유관순 기념 사업회 세움. 7) 아우내 기미독립만세현장과 헌병대 자리 이번 답사를 통하여 기미 독립만세의 현장과 헌병대 자리를 돌아보며 그동안 잘못 전해진 독립만세의 현장과 헌병대자리 등 격정의 현장을 돌아보며 독립만세의 의의를 되새겨 본다. ▣제11차 문화유적 답사(2014년 6월 15일) 수신면 일원 : 한동규 독립유공자 비→속창리 한명회 묘소→홍대용 생가지→장산리 석탑 1) 한명회 묘소 수신면 속창리 야산에 있으며 흰 돌에 새긴 비석은 오랜 비바람으로 훼손되어 글을 알아 볼 수 없고, 탁본을 해보아도 많은 부분이 훼손되어 해독이 안 된다. 한명회(韓明澮)의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자준(子濬), 호는 압구정(狎鷗亭)·사우당(四友堂)이다. 할아버지는 예문관제학 상질(尙質)이고, 아버지는 증 영의정(贈領議政)기(起)이며, 어머니는 예문관대제학 이적(李?)의 딸이다. 딸이 예종비 장순왕후(章順王后)와 성종비 공혜왕후(恭惠王后)이다. 일찍 부모를 여의고 어린 시절을 불우하게 보냈다. 여러 번 과거를 보았으나 합격하지 못하고 권람(權擥)과 더불어 산천을 주유했다. 1452년(문종 2) 문음으로 경덕궁직(敬德宮直)이 되었다. 문종이 죽고 단종이 즉위하자 수양대군(首陽大君)과 의기투합하여 무사 홍달손(洪達孫) 등 30여 명을 추천했다. 1453년(단종 1) 10월 수양대군이 김종서(金宗瑞) 등을 죽이고 정권을 장악한 계유정난 때 심복 참모로서 큰 공을 세워 군기녹사(軍器錄事)에 임명되고 수충위사협책정난공신(輸忠衛社協策靖難功臣)의 호를 받았다. 곧이어 사복시소윤(司僕寺少尹)이 되었다가 1454년에 승정원 동부승지가 되었다. 1455년 세조가 왕위에 오르자 좌부승지로 승진했으며, 그해 가을 동덕좌익공신(同德佐翼功臣)의 호를 받고 우승지가 되었다. 1456년(세조 2) 단종복위운동을 좌절시켰으며, 사육신의 주살(誅殺)에 적극 협조했다. 이어 좌승지·도승지를 거쳐 1457년 이조판서·병조판서가 되었고 상당군(上黨君)에 봉해졌다. 1459년 황해·평안·함길·강원 4도의 체찰사(體察使)가 되었으며, 1461년 상당부원군(上黨府院君)에 봉해지고 판병조사(判兵曹事)를 겸했다. 그 뒤 우의정·좌의정을 역임하고 1466년 영의정에 올랐으나 곧 병으로 사임했다. 1467년 이시애(李施愛)가 반란을 일으켰을 때 모함을 받아 투옥되었으나 곧 석방되었다. 1468년 세조가 죽자 유교명(遺敎命)을 받들어 다른 대신들과 함께 승정원에서 숙직하며 서정(庶政)을 결재했다. 같은 해 남이(南怡)가 제거된 후 추충보사 병기정난 익대공신(推忠保社炳幾定難翊戴功臣)의 호를 받았다. 1469년(예종 1) 영의정에 제수되었으나 곧 사임했다. 성종 즉위 후 병조판서가 되었고, 1471년(성종 2) 순성명량 경제홍화 좌리공신(純誠明亮經濟弘化佐理功臣)의 호를 받았다. 같은 해 대궐의 동·서쪽에 군영을 설치할 것을 청하고 직접 서영(西營)을 거느렸으며, 흥학(興學)의 중요함을 역설하면서 성균관을 정비·확충하게 했다. 1484년 나이가 많아 벼슬을 그만두고자 했으나 허락받지 못하고 성종으로부터 궤장(?杖)을 받았다. 세조의 충신으로 성종 때까지 고위관직을 역임하면서 조선 초기의 군국대사에 많이 참여했으며, 부와 영화를 한 몸에 누렸다. 세조의 묘정(廟庭)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충성(忠成)이다. 경덕궁 문직기로 있을 때 수양대군(首陽大君)으로 하여금 조카의 왕위를 찬탈하는 난식적자(亂臣賊者)로 만들어, 성삼문, 하위지, 이개, 백팽년, 유성원, 유응부 등 사육신을 죽이고, 그도 모자라 나이 어리 임금 단종(端宗)을 추살(追殺)하면서 수양을 임금으로 만든 일등공신이다. 수양이 나이 어린 조카를 죽이고 임금이 된 후에 1등공신이 네 번, 다섯 차례의 영의정, 두 딸을 황후(皇后)로 만들고 30여년을 무소불위(無所不爲)의 궐력(闕力)으로,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인물을 죽이면서 궐력을 유지하려 하다가, 죽은 후에 1504년 연산군 10년에 갑자사화 때 연산군의 모친 윤비(尹妃)의 폐사(廢死)사건에 연루되어 부관참시(剖棺斬屍 시신을 들어내어 목을 자르는 일) 되었다. 한명회는 왕위를 찬탈하는데 공을 세운 시대의 난신적자(亂臣賊者)이며 기회주의자요, 일인지하 만인지상(一人之下 萬人之上)의 갈림길에서 논쟁의 인물임에는 틀림없으나, 많은 사람들을 죽이는데 앞장선 당시의 인물로서, 한 시대를 풍미한 정쟁(政爭)에서 승자 인듯하나 조선의 많은 사람들이 난신적자(亂臣賊者)로 기억하는 인물이다. 2) 한동규 선생 추모비 속창리 마을입구에는 아주 오래된 은행나무가 수호신이 되어 마을을 지키고 있다. 그 아래에 병천 만세운동에 참여하여 옥고를 치르고, 그 후유증으로 평생을 고생하다 세상을 떠난 선생은 후에 그 공적이 밝혀져 새워진 편 돌에는 ‘독립유공 한동규 선생추모비(獨立有功 韓東圭 先生追慕碑)’라 새겨져 있다. 혼탁한 세월과 더러워진 환경에 대한민국 독립에 몸 바친 분의 공적 비를 보호하는 녹슬은 철책은 흉물이 되어 있다. 1984년 8월에 세웠다. 3)홍대용 생가지 1731(영조 7)~1783(정조 7). 1970년대 중엽까지 있었던 홍대용의 생가는 집이 팔리면서 철거된 것을 1990년대 말에 시에서 매입하여 생가지를 조성하였다. 4) 장산리 석탑 장산리에 있는 이 석탑은 고려 때의 것으로 추정되나 생성 년대를 알 수 없다. 마을 입구에 흩어져 있던 부재들을 모아 세운 것으로 마을회관 옆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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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특집] 천안의 숨은 향토유적을 찾아 나서다 ⑤[천안저널] 천안의 뜻 있는 몇몇 향토연구가들이 숨겨진 천안의 향토문화유적을 답사해 기록으로 남기는 작업을 한창 진행 중이다. 천안향토문화연구회와 천안역사문화연구실, 천안향토사연구소 등의 단체에서 활동하고 있는 김종식, 임명순, 문만주, 김정집, 김선명 등 지역 향토연구가들은 2013년 5월부터 최근까지 천안시 동남구 일원을 11회에 걸쳐 답사해 묻혀 있는 천안 유적을 발굴해왔고, 향후 서북구 지역 유적 찾기에도 나설 계획이다. 이들 향토연구가들은 하루하루 지날수록 훼손돼 가는 유적을 사진과 글로 남겨 천안 시민들에게 널리 알리고자 스스로 여비와 시간을 투자해 유적조사에 발 벗고 나서고 있다. 본보는 창간 3주년을 맞아 이들 향토연구가들의 땀과 열정으로 만들어진 소중한 자료들을 연재한다. 이번호에는 지난 4월 13일 다녀온 천안시 목천읍에 위치한 세성산을 소개한다.<편집자 주> ▣제9차 문화유적 답사(2014년 4월 13일) : 세성산 ▲갑오년 이전의 목천 상황 목천 현지인 대록지에 이르길 세성산(歲城山)은 현의 남쪽 8리에 있으며 운파산으로부터 이어져 들 가운데 우뚝서있다. 산정에는 성지(山頂 城址)가 있다. 전해오기를 삼국시대의 농성(三國時 農城)이라 하는데, 동쪽에 두 바위 사이에 절구가 있어 거민들이 산성에서 생활 할 적에 방아를 찧던 곳이라 하고, 서쪽의 벼랑엔 폭포가 있어 유두일에 머리를 감으면 두통(頭痛)이 없어진다 하였다. 황곡립(黃鵠立)의 시 細城山(세성산)에 이르길 岩巒危險 小函開(암만위험 소함개) : 암반의 위험은 작은 함관이요 雉堞쟁嶸 衆鵲問(치첩쟁영 중작문) : 치첩은 높고 가파른데 地屬溫王 爲保障(지속온왕 위보장) : 지세는 온조왕의 보장이라 至今人道 細城山(지금인도 세성산) : 이제 사람의 도가 세성산에 이르네 [해제] 암만 : 큰 바위, 산봉우리 치첩 : 성에 쌓은 담. 이곳에 몸을 숨기고 적과 싸우다 보장 : 보루 이렇듯 세성산은 오랜 역사를 목천의 중심에서 농민들과 함께해온 산임엔 부언의 여지가 없다. 삼한시대에 축성되어 많은 세월이 흘렀으면서도 아직 그 산성의 흔적이 확연히 전해지고 있으며, 구한말에 이곳에 동학 교인들이 머물며 전투를 치루는 과정에서, 수백 수천의 농민들과 동학 인들이 죽음으로써 역사에 중요한 산으로 전해지고 있다. 동학을 믿은 것이 무슨 죄는 아닐진대 그 대가가 너무 혹독하고 무섭고, 많은 대가를 치른 것이다. 목천은 예로부터 올곧은 선비들이 찾아들어 노년을 보내는 동경의 향 저인 곳으로, 유명 인사들이 모여 사는 곳으로 유명한 목천이다. 그리하여 목천 사람들의 성품은 곧고 바르며, 불의와는 타협하지 않는 강직한 성품으로 살아, 조정에서도 멀리는 고려 왕건조차 무서워하는 사람들이 목천 사람들이다. 이 세성산이 백성들과 함께 살아와, 조선의 말기에 이르러 이 고장의 선비들이 동학에 심취하게 되어서, 심지어는 고종 임금의 누이인 전주이씨는 당시 궁내부 대신인 임천 조경호와 결혼을 했는데, 이 부인이 동학을 믿었다고 한다. 관군들이 목천 사람들을 마구 죽일 적에 그래도 많은 사람들을 살려 주었고, 후에 자결했다는 풍문이고 보면 목천의 대부분 사람들이 동학을 믿었다고 말해도 과언은 아닌듯하다. ▲조경호(1839년 헌종 5년 기해 9월 23일~1914년 갑인 9월 8일졸 76세) : 흥선대원군의 사위. 자는 회경. 호는 구당(字 會慶 號 鷗堂) 묘소는 목천군 서면 용산 동록에 있었는데(현재 천안시 동남구 성남면 용원리 용산) 2000년도에 유락시설이 생기면서 화장을 했다. 부인 이씨는 1638년 헌종 4년 무술 5월 14일생으로 졸년과 묘소는 미상이며 임천조씨 대동보에 전함. 조대감은 북면 양곡리에서 살다가(그래서 일본 헌병대가 양곡리 못가서 가까운 사담리에 있었다. 근처 오곡리엔 대감 신기선이 살았다.) 활빈당들의 위험이 커지자, 목천의 동리로 이사와 살다가(이동녕 아버지가 귀인이 난다는 풍수설을 믿고 이집을 사서 이곳에서 이동녕 선생이 살았다.) 활빈당들을 피하여 직산의 군서리로 이사를 간 후에는 행적을 알 수 없다. 최제우가 1860년 철종 11년에 창건한 종교가 동학인데, 조선말기의 무능한 조정의 정치력에 환멸을 느껴오던 백성들과 양반들이 동학의 교리를 믿게 되면서 빠른 속도로 백성들에게 전파되어 조선 말기에는 백성의 절반 이상이 동학에 심취하게 되는 지경에 이르는 데는 천주교인 서양을 배척하고, 탐관오리를 처단하며 유불선의 신념으로 백성들을 구원하려는 목표로 생긴 것이다. 유불선(儒彿仙)의 교리를 선봉한 분이 이운규(李雲圭)인데, 동학의 창시자인 최제우가 제자이다. 이운규는 목천읍 교촌리 사람으로 그분이 과거에 합격 했을 때, 동네 어귀에 솟대를 세운 것이 지명이 되어 현재 쇳대배기라는 지명으로 전하는 곳의 출신이다. 이운규는 동학의 창시자인 최제우의 스승이다. 이운규로부터 학문을 연마하여 동학을 창시하는데는 이운규의 공이 크다고 할 수 있다. 당시의 관료들이라는 게 너나 할 것 없이 자신의 재산 불리기만 고민을 했지 백성들의 안위는 안중에 없었다. 그 중 가장 심한 사람이 고부 군수인 조병갑이었다. 부정과 탈세와 탐학과 탐욕으로 일관하며 부임해 가는 곳 마다 스스로 송덕비를 세웠고, 자신의 아버지의 송덕비를 세운다고 돈을 강제로 걷고 본인의 어머니가 죽자 모든 현에 부고장을 발부하는 등 백성들을 괴롭혔다. 이에 어떻게 대응할 수 없는 상황이었는데, 당시 고부향교의 장의인 전창혁(全彰赫)이 포악행정을 진정 했다가 조병갑의 미움을 사 곤장을 맞아 장독으로 죽음에 이르자, 당시 동학의 교주였던 전봉준이 불의에 일어난 것이 시발이 되어 동학농민항쟁이 시작되었다.<동학사 오지영, 갑오동학혁명사 최현식, 동학혁명100년사, 동학혁명 100주년 기념사업회> 이러한 와중에 포교 활동에 굶주린 백성을 도탄에서 구휼한다 하였는데도 불구하고, 조정에서는 동학을 포함하여 최제우를 ‘백성을 현혹한 죄’를 적용하여 잡아 가두었다가 처형시켰다. 이에 제자인 최시형이 스승인 최제우의 유훈과 경전인 동경대전과 용담유사를 간행하여 교리를 확립하고 넓혀나갔다. 전국각처에 작은 단위의 교단을 설치하고 접주로 하여금 통솔하며 동학이 발전하게 된다. 조병갑이 고부농민항쟁으로 인하여 고금도로 귀향 갔다가, 얼마나 조정에 돈을 뿌렸는지 돌아와, 동학을 한 교인들과 백성들을 죽이는 데 앞장을 서는 재판관이 돼 최시형이 그의 손에 판결을 받고 처형되는 일이 있었다.<승정원 일기> 충남 천안시 목천 세성산 전투(1894년<조선 고종 31> 10월 18일)에서 목천은 동학의 지도자급의 인물들이 많이 배출된 것으로 보아, 동학이 발전하여 경전인 동경대전이 발간된 곳이기도 하다. 목천의 세성산과 작성산에는 동학군들이 관군이나 일본군들과의 전쟁에 대비하여 양식과 무기를 갖추고, 작성산에는 구들을 놓고 관군들과의 일전을 대비했으며, 9월에는 연기 전의 천안 목천의 관아를 털어 무기류와 양식들을 세성산으로 옮기기도 했다. 이때는 목천군의 아전과 방속들이 대부분 동학교도들이었다 한다. 이러한 상황으로 볼 때 동학 교인들은 ‘희망이 보인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는데, 문제는 일본군의 신식조총이었다. 동학농민군들의 무기는 관아에서 탈취해온 구식 무기와 칼, 화살, 화포 등이어서 관군들의 무기와 일본군의 신식 조총 앞에서 대적이 안 되었다. 수 십 배의 병력과 화력에서 한나절의 싸움으로 성을 내주고 도주하는 많은 수의 동학농민군들은 이유도 모른 채 죽어 이름도 없이 세성산에 묻혔고, 관할 관청의 무지함 속에 잊혀지고 있다. ▲이운규(1808년 순조 8년 무진 11월~1869년 고종 6년 기사 5월 5일 61세) : 본관은 전주(全州). 본명은 수증(守曾). 호는 연담(蓮潭). 운규는 별칭이다. 일찍이 관로(官路)에 올라 문참판(文參判)의 벼슬을 했으나 국운이 쇠약해지자 충청도 논산군 양촌면 모촌(茅村:또는 띠울)에 은거했다. 그는 조선 후기의 유학자 이서구(李書九)의 학통을 이어 천문(天文)·역산(曆算)·역학(易學)·시문(詩文)에 능통했다고 한다. 특히 사람을 판별하는 능력이 뛰어나 세상을 구할 사람으로 최제우(崔濟愚)· 김광화(金光華)· 김일부(金一夫)를 선택하여 각각에게 가르침을 베풀었다. 그리하여 1861년에는 세 사람을 불러 최제우에게는 선도(仙道)를 계승할 자라 하여 ‘시천주조화정(侍天主造化定)’이라는 주문을 주어 열심히 독송하여 심신을 연마하라 했고, 김광화에게는 불교를 계승할 자라 하여 ‘남문을 열고 바라를 치니 계명산천(鷄鳴山川)이 밝아온다’라는 주문을 주었다. 또 김일부에게는 ‘영동천심월(影動天心月)’의 시를 주고는 표홀히 사라져 전라도 무주 용담(龍潭)으로 갔다고 한다. 나중에 최제우는 동학을 일으켰고, 김광화는 남학(南學)을 세웠다. 또 김일부는 이후 19년 동안 이운규가 남긴 시구의 뜻을 구명하기 위해 노력하다가 1879년 조선 후기 후천개벽(後天開闢) 사상의 체계적 논술인 ‘정역(正易)’을 저술했다. 이운규는 무주에 은거하다가 고향인 천안 목천으로 돌아와 후학들을 가르치다 세상을 떠 취암산 남쪽자락인 현재 동우 아파트 뒤로 올라가 편평한 능선에 산소를 모시다가 후손들의 결의로 이장하여 2000년도에 천안시 목천읍 덕전리 유왕골에 있다.<백과사전 자료와 김종식 향토사학자 조사> ▲동경대전 발행 동경대전은 동학의 경전으로 최제우가 도를 깨달아 1880년에 교인들을 위하여 발간된 책이다. 현재 전해지고 있는 동학의 경전들은 최제우가 사형될 때 동경대전도 모두 회수해 없애버렸는데, 2대 교주인 최시형이 동학의 재건을 위해 암송하고 있는 것을 비밀리에 발행한 것들이 이 경전 들이다. 동경대전 2차 발행을 고심하던 당시 동학 교인들이 많았던 목천군에서 행하였는데, 1883년 계미년에 북접 중춘판(癸未仲春 北接重判)이 그것이다. 이 동경대전은 당시 목천군 원이면 구내리, 현재의 천안시 동남구 동면 죽계리(추정)에서 발간되었다. 지금도 책 1,000부 찍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닌데, 당시의 상황으로는 책 100부 발행도 실로 역사에 기록되는 대단한 일이었다. 그런데 이곳 천안시 동남구 동면 죽계리의 김은경 댁에서 1,000부가 발간되었다는 것은 실로 대단한 일이다. 김은경은 강릉김씨로 삼괴당 목천파(江陵金氏 翰林公 三愧堂 木川波)이며, 산소도 천안시 동면 덕성리에 있다. 1855년 철종 6년 을묘 ~1930년 경오 11월 24일 75세를 살다간 인물로, 목천 지역의 토착세력으로 상당한 부호를 누리던 강릉김씨의 호족이다. 부사과(副司果)를 지냈다. 부친은 연규(演奎)로 무과에 급제해서 현감을 지냈고, 조부는 선전관을 지낸 정양(祖父 宣傳官 鼎養)이며, 증조는 부사관을 지낸 시필(曾祖 府使官 時弼)이고, 고조 역시 부사관을 지낸 도환(高祖 府使官 道煥)이다. 모친은 덕수이씨로 수사를 지낸 이의수(水使 李宣秀)의 손녀이다. 대를 이을 자식이 없어 진방(振邦)을 양자하여 입보(立譜)했다. 가계로 보아 이 지역 목천에서 행세하던 세력가임엔 틀림없다. 이러한 토호들이 동학에 가담하여 경전인 동경대전을 간행함은, 목천엔 동학교가 만연해 있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해월신사 최시형(海月神師 崔時亨)은 최제우가 사형될 때 동경대전(東經大全)도 회수되어 소각되었는데, 최시형이 암송되는 것을 책자화 한 것으로, 1883년 계미년 봄에 이곳 목천에서 최시형, 성우용, 황재민, 김은경, 김시봉, 유시헌, 김현경, 장춘보, 윤상오, 김세인 등 여러 사람의 도움으로 동경대전 1,000부가 간행되었다. 목천에서 동경대전이 발간되었다는 기록과 필사본 몇 종만 있어 전설로만 내려오다가, 2000년에 천안시 목천에서 향토사학자 김종식씨의 노력으로 발굴돼 사진을 찍고 복사를 해서 세상에 드러나게 되었고, 기록과 일치하는 전설이 입증되었다. 또한 동학난의 이두황의 기록에 의하면 목천의 동학 3노인들인 김화성, 김성지, 김용희(金和成 金成之 金鏞熙)는 목천군 북면 연춘리의 복구정에 모여 동서포를 조직하고 동경대전 발간을 위한 후원금을 6천냥 모금해 동경대전 경전을 동면의 김은경댁에서 사용한 목판을 이용해 100부을 찍어 이중 30권을 최시형에게 보내고 나머지는 나누어 배포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동학혁명사 기록에 의하면 ‘1894년 10월 21일 동학 농민군이 목천의 세성산에서 일본군과 이두황의 관군에 참패를 했다’고 하였으나, 이두황의 기록에 의하면 이두황의 단독 전투임을 알 수 있다. “청주 송정리에서 20일 밤을 지낸 관군은 21일 새벽 행군하여 세성산 10리에 있는 장명동에 도착했다. 세성산의 지형은 10리가량 되는데, 산 정상에는 토성이 있으며 토성을 쌓을 때 흙을 판 넓은 구덩이가 있으며, 동학군의 깃발이 무수히 걸려있었고 동학군이 성을 둘러있어 고성을 지르면 산야가 진동을 해 마치 범이 우는 듯 하여 그 위세가 대단했다. 산의 형세가 3면이 급경사로 되어있고 1면은 좀 평평하다. 그리하여 1개 소대는 산의 동남쪽인 병천면 가전리 방면에서 공격을 해 올라가고, 2개 소대는 세성산 북쪽 기슭에 배치시키고, 1개 소대는 동북쪽 방향인 북면 연춘리에서 공격을 해갔다. 서로간의 접전으로 인하여 오전 10시부터 오후 4시까지 한나절의 치열한 전투에서 동학군은 성을 버리고 서쪽 방면인 성남면 신사리 방면으로 도주할 때, 북쪽의 매복 군들이 수 십리를 추격하여 동학군을 살해했다.” 세성산 전투에서 동학농민군들은 출중한 지도자와 수많은 농민군, 그리고 무기를 잃었다. 세성산에서 끝까지 항전하던 북접군의 용장으로 알려진 목천 사람 김복용이 부하인 동학군의 중군인 김영우와 화포대장 원전옥과 함께 관군에 잡혔다. 관군들이 세성산에서 노획했다는 무기는 다음과 같다. 조총 140정, 나팔 2개, 창 288자루, 거마철(拒馬鐵) 32건, 징(鉦) 5좌, 긴 화살(長箭) 3,300개, 청국탄환 36궤 2만6,500개, 크고 작은 깃발 30면, 동로구(銅爐口, 구리화로) 3좌, 철환(鐵丸) 36만6000개, 북(鼓) 3좌, 큰 삽 5자루, 작은 삽 5자루, 소철로(小鐵爐) 1좌, 월도(月刀) 1좌, 곡괭이 1자루, 철촉롱(鐵燭籠촛대) 2쌍, 잡색대소기(雜色大召旗) 30면, 철질려(날카로운 가시가 네다섯 달린 쇠못) 1,500개, 화살촉전 2,000개. 곡식으로는 백미 266석, 벼 367석, 콩 12석, 보리 8석, 소금 3석 등이다. 세성산 전투의 전사농민군은 370명이었으며, 포로 17명, 중경상자도 400명이 넘었다. 그리고 유화군, 소모군, 관군, 의병에 의해 사살된 동학농민군 추산 1,000여명이나 된다. 목천의 어지러운 형국을 바로 잡기위해 새로운 현감은 동훈대부 행 기호소모관인 정기봉(通訓大夫 行 畿湖召募官 鄭基鳳)이다. 현의 수장은 6품관인데, 동학란 이후에 3품관의 현감을 보낸 것으로 보아 당시 어지러운 사회 실상을 짐작할 수 있다. ▲목천의 오가작통법 이 오가작통법은 동학교도들을 감시하기 위하여 5가구를 한데 묶어 서로를 감시하면서 동학 교인들이 발견되면 다섯 가구에 모두 책임을 묻는 것으로 기록으로만 전해왔는데, 1995년 목천에서 향토사학자 김종식씨에 의해 오가작통성책이 발굴되면서 세상에 알려졌다. 조정의 치졸한 정치수단이 이곳 목천에서 자행된 것이다. 이 성책을 살펴보면 책의 오른쪽에 갑오 10월이라 써져있고, 제목을 읍 용연작통성책이라 하였고, 말 한 마리의 마패가 찍혀있다. 다음 장에는 읍 용연, 동장 유학 이장헌, 연장 오위장 박성옥 통장, 일통장 이재헌, 양인 박명덕, 임춘수, 임만석 통수, 김태석이고, 이동장엔 유학 곽응종, 정수창, 허집, 양인 김학교 통수, 임일용이다. 다음 장에 초모관의 수결이 있다. 동학 궐기 시에 오가작통법을 썼다는 기록은 없으나, 이번에 목천에서 이러한 책이 발굴됨으로서 구전되어 오던 것들이 사실로 드러난 것이다. 백성들을 감시하면서 못살게 굴었어도 목천 지역 대다수의 백성들은 동학에 심취하여 별반 효과는 못 본 듯하며, 오히려 서로가 정보를 주고받는데 역으로 이용된 듯하다. ◆의문점 1. 2천여 명이 이 산에 주둔해 있었으면 반드시 우물이 있어야 하는데, 아무리 산을 둘러봐도 우물의 흔적과 전설이 없다. 2. 죽산 부사 이두황이란 자가 자랑삼아 기록한 우봉선 일기에 350명을 죽이고, 몇 십리를 추격해서 400여명을 죽이거나 포살 또는 훈방했다 하는데, 그 많은 사람들의 무덤이 세성산 어느 곳에도 없고 지역 어디에도 없으며 구전도 없다. [답사후기] 동학 농민항쟁이 일어난지 올해로 꼭 120년이 됐다. 그러나 세성산은 그동안 변변한 조형물 하나 없이 잊혀져 가고 있다. 지금이라도 기본적이 지표조사를 해 잊혀진 동학농민항쟁의 정신을 밝혀내고 백성들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정부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반드시 세성산을 지표조사 해서 새로이 동학농민항쟁 역사의 실체와 진실이 밝혀지기를 간절히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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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특집] 천안의 숨은 향토유적을 찾아 나서다 ④[천안저널] 천안의 뜻 있는 몇몇 향토연구가들이 숨겨진 천안의 향토문화유적을 답사해 기록으로 남기는 작업을 한창 진행 중이다. 천안향토문화연구회와 천안역사문화연구실, 천안향토사연구소 등의 단체에서 활동하고 있는 김종식, 임명순, 문만주, 김정집, 김선명 등 지역 향토연구가들은 2013년 5월부터 최근까지 천안시 동남구 일원을 11회에 걸쳐 답사해 묻혀 있는 천안 유적을 발굴해왔고, 향후 서북구 지역 유적 찾기에도 나설 계획이다. 이들 향토연구가들은 하루하루 지날수록 훼손돼 가는 유적을 사진과 글로 남겨 천안 시민들에게 널리 알리고자 스스로 여비와 시간을 투자해 유적조사에 발 벗고 나서고 있다. 본보는 창간 3주년을 맞아 이들 향토연구가들의 땀과 열정으로 만들어진 소중한 자료들을 연재한다. 이번호에는 지난해 11월 10일과 올해 3월 9일 다녀온 천안시 북면?동면 일대 유적들을 소개한다.<편집자 주> ▣제7차 문화유적 답사(2013년 11월 10일) 답사코스(북면 일원) : 전곡리 어대보 어은 글씨바위→사담리 고둔 글씨바위→사담팔경→북면 면사무소선정비→연춘리 복구정→복구정 시석→상동리 비석거리 1)전곡리 어대보 어은 글씨바위 전곡리 하천변에 있는 이 글씨는 어은 유철한(통덕랑 숙종 기해 1719~정조 갑인 1794, 문학과 덕행으로 이름이 있다.)이 새겼다 전한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김씨 성을 가진 사람이 이곳에 앉아 낚시로 소일했다 한다. 2)사담리 고둔 글씨바위 사담리 전원마을을 지나며 도로변에 있는 이 바위는 장수바위라고도 전한다. 이 글을 알아보는 사람은 재수가 있다 전한다. 고둔(古芚)이라 각자되어 있다. 3)사담리 서만 정려지 천안시 북면 사담리 개울가에는 서만의 정려문의 흔적이 현존하며, 잉어담의 전설이 구전한다. 많은 세월이 흐르면서 정문은 퇴락되어 흔적이 없고, 서만의 잉어 이야기만이 성거산의 바람 따라 구전될 뿐이다. 1950년대 초까지는 서만의 효행비석이 있었는데 없어지고 관향도 알 수 없는 지경이지만 마을에서 행적을 표시해 놓은 표석이 서만의 효행을 대신할 뿐이다. 4)사담팔경 천안시 동남구 북면 사담리에 전하는 사담 8경은 마을사람들조차 알지 못하는 것을 우연히 대록지 증보판에서 발견하여 몇 번의 답사로 잊혀진 것을 밝혀 본다. 고암락폭 (鼓岩落瀑) 고암에 떨어지는 물 부봉귀운 (浮峰歸雲) 뜬 봉우리로 돌아가는 구름 효자정각 (孝子旌閣) 사담의 효자 정려 각 열려비문 (烈女碑文) 사담의 열녀의 비문 사담유어 (沙潭遊魚) 사담에서 노니는 물고기 통산야우 (通山夜雨) 통산에 내리는 밤비 옥토남묘 (沃土南묘) 기름진 남쪽의 들녘 노괴동정 (老槐東亭) 동쪽의 오래된 정자나무 사담리는 천안에서 병천 쪽으로 가다가 목천 나들목을 지나 북면의 연춘리 긴 다리를 건너기 전에, 북면 쪽으로 10여분 달려가다 북면사무소를 지나면 사담리가 나온다. 마을 초입에 마을비가 있어 초행길을 안내해주고 있다. 이 마을에 사는 김의식, 임성빈(金義式 任成彬)씨가 지어 대록지 증보판(1968년 단기 4301년 무신 5월 30일판)에 전하는데, 마을 사람들에게 물어보아도 아는 분들이 없었다. 다만 효자 정문은 이미 오래전에 훼손되어 흔적조차 없어진 서만의 효자정문을 말한다고 하는데, 구전으로만 내려오다가 어느 노인의 열의로 정문이 있던 자리에 시멘트로 표석을 세우고 후세에 전해지고 있으며, 열녀비는 마을 북쪽의 도로변 느티나무나무 아래 전해오다가 몇 해 전에 없어졌다. 마을 노인들의 말에 의하면 산소 옆으로 옮겼다고 한다. 동쪽 논 가운데 있던 느티나무는 오래전에 없어졌다고 한다. 5)면사무소내 선정비 ①관찰사 배공동혁 시혜송덕비 : 연춘리 입구도로변에서 옮겨옴. ②북면장 박공진양20주년 기념비송덕비 : 오동촌 종점에서 옮겨옴. ③북면장 정인서 청간기념비 : 느러리 입구에 있던 것을 옮겨옴. 6)연춘리 복구정 북면 연춘리 삼거리에서 북면 면사무소 쪽으로 좌회전하여 500여m를 가면 길옆에 세상의 어지러움 속에 의연히 자리한 자그마한 이 정자를 일러 복구정(伏龜亭)이라 한다. 강릉 김씨 김구연(金九淵)이 선조 때 정자를 세웠으며, 이곳은 수석이 매우 아름다워 영조 때 문장 석북 신광수, 죽동 이인실, 만화 유전한, 구정 이세희 등이 모여서 시를 지어 읊으며 지냈다. 그 후 큰 장맛비로 없어진 것을 1964년에 강릉 김씨 종중에서 다시 세웠으며, 바위 옆면에는 숙종 때 학자로 추앙받던 도암 이재(陶庵 李縡) 선생의 시가 새겨져 있고 삼백종조부(셋째 큰할아버지 4형제 중 셋째) 되는 타우 이상(打愚 李翔)은 복구정기(伏龜亭記)를 지었으며, 우암 송시열(尤庵 宋時烈 1607-1689)도 시를 지어 현판하였고 대곡 성운도 주상에 시를 부치어 그 경치를 칭찬하였는데 장마에 유실되었다. 옛 선비들이 풍유를 즐기던 이곳은 선조께서 그림을 그려서 보낼 정도로 시인 묵객들이 즐겨 찾던 곳이라 한다. ※도암 이재(陶庵 李縡)의 시 노목 유고의(老木 有古意) 노목은 옛스러운 정취를 지녔고 청천 류불정(淸川 流不停) 맑은 냇물은 쉼 없이 흐르네 추양 무한사(秋陽 無限思) 가을 볏 아래 끝없는 생각에 독상 복귀정(獨上 伏龜亭) 홀로 복구정에 오르노라 도암 이재(陶庵 李縡 숙종6년 1680~영조22년 1746) 자는 희경(熙卿) 호는 도암(陶庵) 또는 한천(寒泉) 본관은 우봉(牛峰) 시호는 문정(文正). 진사 만창(晩昌)의 아들로 조선후기 성리학의 대가다. 한성판윤, 함경도관찰사 등을 거쳐서 경종1년에 예조참판이 되었다. 특히 글과 그림에 능했으며 용인의 한천서원에 배향되었다. [해제] 연춘리: 충남 천안시 북면 연춘리의 지명. 예전에 연춘원이 있었음. 내 용 : 복구정에 올라서 가을의 정취를 읊음 기구에서는 옛 풍취를 지닌 노목과 풍취를 노래하였고 승구에선 끊임없이 변화하는 자연현상을 물로 비유하였다. 전, 결구에선 늦가을 저문 햇볕아래 펼쳐진 아름다운 자연을 보며 무한한 감흥을 복구정에 올라 노래한 내용이다. 6)상동리 비석거리 6)상동리 비석거리 ①현감 조장교 불망비 상동리 돌대미 현감 조장교 영세불망비(縣監 趙章敎 永世不忘碑). 이 비는 상동리 노인정 앞에 있는데 자동차가 후진하다 받아서 쓰러진 후 세우는 사람이 없어서 그대로 건축자재가 쌓여 있다. 치적을 알 수 없다. 2009년 6월에 다시 가보니 이 비의 행방을 알 수 없었다. 몇 시간을 추적하여 찾아보니 누군가 가져다가 하우스 입구의 디딤돌로 사용하고 있었다. 이러한 무지의 행동을 관할 관청에 몇 번을 알려줘도 들은 척도 안하는 것이 작금의 현실이다. ②현감 권준 불망비 상동리 비석거리 현감 권준 청덕불망비(縣監 權晙 淸德不忘碑). 골목 정화를 하다 땅속에서 나온 이 비는 민가 대문 앞에 비스듬히 누워있다. 예전에 많은 비석이 즐비했다 하는데 6.25 사변직후 현재 목천읍 사무소로 이전해 갔다 한다. 비석거리의 지명이 여기서 유래한다 한다. ▣제8차 문화유적 답사(2014년 3월 9일) 답사코스(동면 일원) : 목천16의사충혼비→화계리 뒷골 폭포→면사무소 선정비→행암리 낙수암→광덕리 절골 청주이씨 사당(전사래의 전설) 1)목천16의사 충혼비 소재지: 천안시 동면 화계리 부 재: 조선 이인좌난의 평정 16인에 대한 공적비 년 도: 1988년 무진 10월 내용: 목천 16의사 충의비(木川 16義士 忠義碑)는 1758년 영조 4년 이인좌가 난을 일으켜, 전국이 반도의 무리로 인하여 어지러울 때 안후기가 청주에서 진격해옴으로, 이 고장의 선비 16명이 홀연히 일어나 가솔들과 의병 수백명을 모아 매복하고 있다가, 토적들을 무찌르고 두목인 안후기의 목을 베었다. 조정에서 이 사실을 알고서 그 공을 치하하며 양무원종공신(揚武原從功臣)에 책훈 되었다. 많은 세월이 흐른 후에 천안 향토사학자 이원표 선생의 주선으로 1987년 정묘 1월 4일 16의사 충의비 건립추진위원회가 구성되고 1988년 무진 10월에 충혼비가 동면 화계리에 세워졌다. 2)동면 화계리 뒷골 봉암 채지홍, 반계 윤취갑 시석 동면 화계리 뒷골 물탕바위에 새겨진 두 편의 한시는 눈발이 날리는 추운 겨울날 여러 번의 답사 끝에 뒷골의 글씨바위를 물었더니, 이름 모를 화계리 아주머니가 안내해줘 김종식이 찾아낸 것이다. 이 고장의 선비인 봉암 채지홍과 반계 윤취갑 두 선비의 글로서, 이곳의 경치가 좋아 여러 선비들이 모여 시를 짓고 글공부에 정진하며 풍류를 즐겼다 한다. ①봉암 채지홍 (鳳岩 蔡之洪)의 시 우유예법지 (優游禮法地): 유유히 땅의 이치를 정히 본받아 비폭수형회 (飛瀑遂??): 날 듯 지는 폭포수 돌아 흐르네 자유연원대 (自有淵源大): 본래 큰 연원이 있어 용용일야래 (溶溶日夜來): 질펀하게 밤낮으로 쉬지 않네 승정재경신3월일 봉암선생영(崇禎再庚申三月日 鳳岩先生?) ▲채지홍(蔡之洪) : 숙종9년 1683~영조17년 1741 자는 군범(君範)이고 호는 봉암(鳳岩) 또는 삼환재(三患齋)이다. 본관은 인천이다. 첨지중추부사 영용(領用)의 아들이며 부여현감, 형조좌랑, 공홍도 도사를 지냈다. [해제] 우유(優遊) : 한가로이 지내는 모양. 유유자적 하는 모양. 만족해하는 모양. 세정(世情)이나 운(運)에 맡겨 따름. 형회 : 물이 돌아 흐르는 모양 용용(溶溶) : 큰물이 흐르는 모양. 마음이 넓고 느긋한 모양 숭정재경신 : 숭정원년이 1629년이니 재경신은 1680년 숙종 6년이다. ②반계 윤취갑(磻溪 尹就甲)의 시 창암흘입하 (倉岩吃立下): 우뚝 솟은 푸른 암벽 아래 필피폭연회 (泌彼瀑沿?): 흐르는 저 폭포 돌아 흐르네 차일반유락 (此日攀遊樂): 이 날 즐거이 노니는데 춘풍장구래 (春風杖?來): 봄바람은 발자국 따라 불어오네 ▲윤취갑(尹就甲) : 1625년~ 1622년 진사를 지냈으며 호는 반계(磻溪)이고 취부(醉夫) 결(潔)의 종증손(從曾孫)이다. 일찍이 사마시에 올랐으며 효성이 지극하였다. 우암 송시열(尤岩 宋時烈)의 제자이고 서실을 반계에 세워 후진을 양성하였으며, 우암이 지나는 길에 기실기(記室記)를 지어 주었다. 효행으로 벼슬이 직장(直長)에 천거되었다. [해제] 화계리: 천안시 동면 화계리 마을 지명. 반 계: 천자문 반계이윤에서 따온 것으로 우암이 지어주었다 한다. 반 유: 즐거이 놂. 세상의 이치를 물과 바위에 비유하며 선비의 곳은 절개를 친우들과 술 한 잔의 여유로 세상을 살아가는 이치를 노래함. 3)동면 면사무소 앞 송덕비 2기 ①일동면장 조세증 기송비(一洞面長 趙世增 記頌碑) 일동면장 조세증 기송비라 각자된 이 기송비는 근년에 세운 것으로, 동면의 면장을 하면서 면민들의 어려움을 물심양면으로 도와 그 고마움을 영원히 기억하고자 기송비를 세웠다. 뒷면에는 명치 44년 6월 동면 주민들에 의하여 기송비로 건립되었으나 풍마우세로 파손되어 1994년 10월 23일에 원본과 같이 건립함. 고손 조동환 이라 각자되어 있다. 아직도 일본 년 호를 쓰는 이러한 한심한 비석들이 버젓이 관공서 앞뜰에 서 있음은 참으로 한심한 일이다(명치 44년은 서기 1911년이다). ②군수 남계석 선정비 행군수 남후계석 청덕선정비(行郡守 南侯啓錫 淸德善政碑)라 각자된 선정비가 있다. 목천읍 사무소 앞에 2기와 병천 구미산 앞에 2기의 송덕비가 있다. 4)동면 행암리 낙수암의 주석영의 시 동면 행암리는 물이 좋고 경치가 아름다워 우암 송시열 선생이 명나라 임금들의 사당인 만동묘터를 구하러 다니던 중에 제자들과 이곳을 둘러보고는 ‘만인활인지지(萬人活人之地)이나, 물이 모자라서 많은 사람이 살 곳은 못 된다’ 하고는 괴산의 화양리에 정했다 전하며, 그때 남긴 글씨 낙수암(洛水岩) 석자는 300여년이 지난 지금도 선명히 전한다. 이 마을에 사는 주석영이라는 선비가 글을 지어 낙수암이라는 글씨 옆에다 오언시를 각자 하였다. 일설에는 이 글을 새긴 후로 목천의 선비들로부터 감히 우암 선생님 글 옆에 낙서를 했다하여 죽는 날까지 혼이 낫다는 설이 구전하기도 한다. 현재 이 글이 새겨진 바위에 큰 느티나무가 자라면서 바위가 쪼개져 있으며, 1998년경에 낙수암이란 글이 새겨진 곳에서 어느 몰지각한 인사가 불을 피우고 고기를 구워먹어 낙수암 세 글자 중 가운데 수(水)자가 훼손됐다. 천안고적답사회 회원들과 답사과정에서 발견하여 관계당국에 신고를 했는데 문화재도 아니고 해서 별다른 조치가 없었다. 암간 류낙수 (岩間 流落水) 바위틈에 흘러 떨어지는 물은 행하 자성촌 (杏下 自成村) 살구꽃 아래에 절로 마을을 이루었네 지령 균우장 (地靈 龜又仗) 대지는 영묘하여 갈라져서 호위하니 지시 별건곤 (知是 別乾坤) 알겠노라! 이곳이 별천지임을 [해제] 행암리: 천안시 동면 행암리의 마을 이름 거 사: 재덕을 겸비하고 벼슬에 나가지 않은 선비 낙 수: 추녀 끝에 떨어지는 물. 몸이 물속에 빠지다 지 령: 신령스러운 대지의 모양 건 곤: 별천지를 말함 *행암리의 빼어난 자연경관을 노래한 시로 바위와 물과 살구꽃과 어우러지고, 빼어난 산세와 조화를 이루고 있는 행암 마을을 별천지라 자화자찬한 시이다. ■낙수암(落水岩) 장 소 : 동면 행암리 입구 하천변 바위 글씨크기 : 대략 45×65cm 유 래 : 조선 중기 학자, 명신인 우암 송시열 선생이 만동묘(萬東廟)터를 구하러 다니던 중 이곳에 들려 머물면서 낙수암(洛水岩)이란 큰 글을(대략 45×65cm 정도) 썼다고 구전하며 바위에 새겨져 있음(1990년 주변정비를 했다). ■행암바위 낙수암을 600m 지나서 논두렁 가운데 있다. 장 소 : 동면 행암리 입구 글씨크기 : 대략 45×65cm 유 래 : 행암리에는 행암(杏岩)이라고 새긴 글씨 7개가 숨겨져 있는데 이것이 모두 발견되면 동네가 없어지고, 동네에 변괴가 생긴다는 이야기가 구전되어 내려오고 있다. 또한 일설에는 7개의 행암 글씨가 드러나면 나라가 부강하고 통일이 되며, 마을이 부자 마을이 된다는 설도 있다. 현재 5개가 드러났다는 설과 6개가 드러났다고 하는 설도 있다. ①낙수암 옆 하천변에 없어진 것은 비석처럼 생긴 작은 바위인데, 장마 때 어떤 사람이 내를 건너다 이 비를 붙들었는데 손을 놓쳐 떠내려가 죽게 되자 자식들이 부숴버렸다 한다. ②행암리 들판에 있는 행암바위는 낙수암에서 600m정도 가면 논두렁에 있는데, 글씨가 크다. 글 폭은 5cm정도에 45×65cm정도 된다. ③하천변의 또 한곳은 낙수암 글씨에서 100m 정도 마을 쪽 하천변에 있는데, 행암 바위에서와의 중간쯤 조금아래 합죽선 부채처럼 생긴 바위에 각자되어 있다. 글씨 크기는 20cm정도다. ④낙수암 옆 논두렁에 있던 것은 논 경리정지 작업 때 사람 두질을 파고 묻어버렸다 한다. ⑤또 다른 하나는 동네 가운데 다리 옆에 묻혀 있다. ⑥또 하나는 낙수암이라는 큰 글이 있는 바위 옆에 이 고을의 선비인 주석영이라는 분이 오언절구 시를 지여 각자를 해놓았는데, 말미에 행암거사(杏岩居士)주석영이라 했는데 이 행암을 포함하는 사람이 있고, 포함시키지 않는 사람도 있다. [답사후기] 3~4년만에 다시 돌아본 이번 답사를 통해 많은 유적들이 소실됐음을 확인했다. ▲북면 전곡리 어대보의 글씨 바위에 새겨진 ‘어은’이라는 글씨 바위는 3~4년 전 홍수로 개울뚝이 유실되어 복구하는 과정에서 부숴서 사용했고 ▲북면 상동리의 현감 조장교 영세불망비는 쓰러진 것을 세우는 사람이 없더니 어느 몰지각한 인사가 가져다가 하우스 발판으로 사용하고 있어서 관할 관청과 박물관 등에 알려줘도 수년째 그대로 있으며 ▲동면 화계리 뒷골에 반계 윤취갑, 봉암 채지홍의 시가 새겨진 바위는 땅의 소유주가 바뀌면서 밭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없애버렸다. 300 여년 전 유적들이 관할관청과 주민들의 무지 속에 후손에 물려주지 못하고 훼손되는 상황이 이어지고 있어 안타깝기 그지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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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특집] 천안의 숨은 향토유적을 찾아 나서다 ③[천안저널] 천안의 뜻 있는 몇몇 향토연구가들이 숨겨진 천안의 향토문화유적을 답사해 기록으로 남기는 작업을 한창 진행 중이다. 천안향토문화연구회와 천안역사문화연구실, 천안향토사연구소 등의 단체에서 활동하고 있는 김종식, 임명순, 문만주, 김정집, 김선명 등 지역 향토연구가들은 2013년 5월부터 최근까지 천안시 동남구 일원을 11회에 걸쳐 답사해 묻혀 있는 천안 유적을 발굴해왔고, 향후 서북구 지역 유적 찾기에도 나설 계획이다. 이들 향토연구가들은 하루하루 지날수록 훼손돼 가는 유적을 사진과 글로 남겨 천안 시민들에게 널리 알리고자 스스로 여비와 시간을 투자해 유적조사에 발 벗고 나서고 있다. 본보는 창간 3주년을 맞아 이들 향토연구가들의 땀과 열정으로 만들어진 소중한 자료들을 연재한다. 이번호에는 지난해 9월 22일과 10월 13일 다녀온 목천읍 일대 유적들을 소개한다.<편집자 주> ▣제5차 문화유적 답사(2013년 9월 22일) : 김종식, 임명순, 김선명, 문만주, 주세응 향토연구가 답사코스(성남면 일원) : 목천읍 유왕골→산신당→마을유래비→송전리 전주이씨 효부비→파평윤씨 효부비→덕전리 언양 김의연 정문→서흥리 석답→동리 영락정 1)유왕골 유왕골은 세종실록 지리지와 목천 현지인 대록지에 의하면 오래전 백제 시조 온조대왕이 위례성에 도읍할 적에 봄과 여름엔 이곳에 머물며 농사를 장려했다고 기록되어 전한다. 성거산과 흑성산의 중간 지점으로 아늑하고 조용한 시골 마을이다. 사신당과 마을 유래비와 마을 입구에 느티나무가 있다. 2)유불선의 선구자 이운규 묘소(1808년 11월 29일~1869년 5월 5일) 조선 후기의 사상가로 본관은 전주 본명은 수증이고 호는 연담이며 운규는 별칭이다. 목천군 읍내면 쇳대배기에서 출생했다. 후에 과거에 급제하여 솟대를 세웠는데 이것이 지명이 되어 쇳대배기라 부른다 한다. 벼슬에 잠시 나가 참판에 이르렀으나 사직하고 논산 양촌면 모촌리 띠올 마을에서 최제우, 김광하, 김항 등을 가르쳤다. 이서구의 사상을 이은 학자로 1861년 철종 12년에 최제우 김광화 김항 등에게 “최제우에게 선도의 전통을 계승하라” 이르고, 김광에게는 “불교전통을 계승하라” 이르고, 김항에게는 “유교적 전통을 계승하라” 일렀다. 최제우는 동학을 창시했고 김광화는 남학을 창시했으며 김항은 정역을 창시했다. 3)전주이씨 은주여사 정 효부 기적비 언양김씨 정식의 부인인 전주이씨 은주여사의 효부 기적비(1894년 갑오 고종 31 ~ 1983년 89세)는 부군이 일찍 돌아가시자 부군을 따라 자결하려고 마음먹었다가 시부모와 자식을 잘 기르기로 마음먹고 시부모 봉양을 지극정성으로 하여 목천 향교에서 세 번의 표창의 상신이 있었으나 거절했다 한다. 4)파평윤씨 정 효부 기적비 이 효부비는 언양김씨 지항의 아들 세현(世鉉 1849~1870)의 부인 효부비인데(1846년 병오 헌종 12년~1870년 경오 고종 7년 24세를 삶) 부군이 불행하게도 병에 걸려 일직 세상을 떠나자, 자식도 없이 청상의 몸으로 대청에 고연을 모시고 조석으로 따듯한 상식을 올리며 통곡하기를 여러 날 이었는데, 어느 날 홀연히 약을 먹고 자진하여 남편 곁으로 갔다. 목천의 선비들이 대록 삼강실록을 편찬하면서 하늘아래 둘도 없는 효부라 칭송하며 기록하여 잊혀진 것을 김종식이 발굴하여 비를 세웠다. 5)언양김씨 효열정려 목천읍 덕전리 중니마을에서 삼방선 옆에 있는 이 정려는 부친의 병에 손가락을 잘라 피를 드려 소생시키고, 돌아가시자 유언에 의해 초하루 보름으로 성묘하고 사서를 암송하기를 죽는 날까지 하였다. 시묘살적에 절하던 자리는 활처럼 움푹하여 이곳에 물이 고이면, 이것으로 목을 축이며 시묘 살적에 어느 날인가부터 호랑이가 와서 호위해주었다 한다. 또한 현감이 와서 보고는 목비를 세워 칭송하였다 한다. 어머니 병환엔 한 겨울에 영남까지 걸어가 약을 구해와 효험을 보았고, 위독하자 손가락을 잘라 피를 드려 소생하여 서울에서 관직에 있는 형이 돌아와서 임종을 볼 수 있도록 했다. 어머니 돌아가시고 16일후에 부인께서 부군이 손가락 자른 것이 잘못되어 죽게 될 것을 알고는 식음을 전패하여 돌아가시고, 부인이 세상을 뜬 5일후에 공께서도 돌아가시니, 21일 상간에 벌어진 일이다. 목천의 선비들이 상소하여 순조 22년 윤 3월 13일 홍살문과 함께 정문을 내렸다. 6)서흥리 석탑 밭 가운데 흩어져있던 것을 밭주인 공석조씨가 이곳으로 옮겨와 쌓아 놓은 것으로 탑으로써의 의미는 없다. 고려 때의 것으로 추정된다. 7)동리 영락정 이 정자는 영락정기에 의하면 김현제가 지은 것으로 1920년에 지었다. 경기도 이천에서 출생하여 말년에 이동녕이 살던 집에서 내부대신 조경호 뒤를 이어 살면서 이곳에서 문사들과 교류하면서 낚시를 즐겼다. ※열락정기 내 성품이 본디 자연을 좋아하여 금강산 속리산 지리산 한라산을 두루 유람했지만은, 이들 산은 씩씩하고 뛰어나며 진기하고 특이하며 깊고 조용하며 기이하고 험하여, 이에 소부 허유 신선 부처가 진을 수양하고 성을 기르고 세상을 피해서 높은 행동을 하는 사람들이 거처하는 곳이요, 선비가 도에 통달하지 않으면 은거하는 곳은 못된다. 호서의 동쪽 목천 운봉산이 빼어나고, 서쪽으로 흑성산이 자리하고, 남으로 운주산이 우뚝 솟아 있고, 북으로는 성거산이 자리 잡아 기름진 땅과 백성이 성하여 부르기를 승지라고 칭하나, 삼한 이래로 충신과 열사와 어진사람과 재주 있는 이들이 많이 배출되었으니, 이곳이 어찌 사람이 걸출하고 땅이 영험하여 사람을 드러내는 곳이 아니겠는가? 내가 풍속의 순후함을 좋게 여기고, 서로간의 밝고 화려함을 사랑하여, 매양 집을 짓고 살려고 하다가 실행하지 못하고, 병진년 겨울에 비로써 고을 동쪽 율리에 거하니, 쌍봉산이 있어 모양이 빼어나고 우아함이 깊고, 앞에는 이룡천이 흘러 무이구곡의 물이 돌아 흐르는 것과 같다. 마을 북쪽에는 화살 몇이 날아 갈만하고, 화려한 계곡의 곁에 천길의 비취 절벽과 백 척의 깊은 못이 있어, 연못가에 작은 정자를 지어 영락이라 하였다. 매양 사시의 아름다운 계절에 이 정자에 올라 꽃을 보고 고기를 잡고, 단풍을 구경하고 눈을 감상하며 자연을 소요하여 시를 읊으니, 돌아 갈 것을 잊고 말년의 즐거움으로 삼로라. 또 시에 이르길 비단으로 둘러있는 산수 높은 경관이 앞뒤로 펼쳐있고 정자 밖 맑은 시냇물은 돌은 않고 돌아 흐르네, 정원에 가득한 아름다운 나무와 기이한 꽃과 풀들은 이것들 모두가 내가 손수 심고 가꾼 것이로다. 8)려주교 선적동 비 대략 15×15cm 글자 폭 약 1cm 정도에 각자된 이 비는 자는 사홍(士弘)이고 호는 율계(栗溪)인 김현재가 지은 영락정 옆에 1935년에 세운 려주교 선적동(麗州橋 善積洞)이라고 각자된 비석과 하천 변에 율계가 낚시질하며 풍유를 즐기던 곳에 이용담 율계조대(二龍潭 栗溪釣臺)가 쓴 작은 비가 있다. 원래 하천이 두 줄기로 흘렀는데 저수지 공사 후 하천 정비하면서 없어졌다. 정자 앞으로 물이 돌아나가 운치가 있다. 청주곽씨 족보엔 전적동(典籍洞) 안동권씨 족보엔 전적동(錢績洞)으로 기록되어 있다. 천안의 지명유래에 돈과 책을 만들던 곳이라 기록되어 전한다. ▣제6차 문화유적 답사(2013년 10월 13일) : 김종식, 임명순, 김선명, 문만주, 주세응, 황서규 향토연구가 답사코스 : 목천향교→철기 이범석장군 생가터→목천현청자리→목천독립만세 기념비→임시정부 주석 석오 이동녕 생가→용와사→김진회장군 묘소→목천읍 사무소 선정비 비석군 1)목천향교 목천읍 교촌리에 있다. 조선 초기에 세워진 것으로 보이며, 1523년(조선 중종 18)에 유현(儒賢)의 위패를 봉안, 배향하고 지방민의 교육을 위하여 창건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진 것을 전란 후에 참봉 한혁(韓赫)이 지금의 자리로 옮겨 세웠다고 전한다. 이후 기록이 남아 전해지는 중수 사실은 1642년 명륜당상량문, 1867년 목천현학중수기 등이 있다. 일제 강점기인 1937년 명륜당이 중수되었고, 광복 후에는 1956년, 1970년, 1985년, 1992년에 중수공사가 이루어졌다. 지금 남아 있는 향교의 건물은 제사지내는 대성전 3칸과 동무, 서무, 교육 기능을 수행하는 강당인 명륜당 5칸, 학생들의 기숙사인 동재?서재 각각 3칸, 그리고 내삼문 2칸 등이다. 배치는 동향으로, 전면에 명륜당(明倫堂)과 내삼문(內三門)·대성전(大成殿)을 일직선상에 놓고 대성전 좌우에는 동·서재(東西齋)를 배치하였다. 앞쪽으로는 명륜당 북쪽으로 출입구가 있으며, 출입구 가까이에 하마비(下馬碑)와 홍살문이 있다. 대성전은 임진왜란 직후에, 명륜당은 1642년에 건축되었으며, 현재 대성전에는 오성(五聖: 공자·맹자·자사·안자·증자), 공문 10철, 송조 6현, 동국 18현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1997년 12월 23일 충청남도 기념물 제108호로 지정되었으며, 현재 충남향교재단에서 소유하고 있다. 2)철기 이범석 성장지 이범석(李範奭, 1900년 10월 20일~1972년 5월 11일)은 한국의 독립운동가, 정치가이다. 고등학교 재학 당시 중국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에 참여했다. 1919년 만주에서 신흥무관학교와 북로군정서 등지에서 항일독립활동을 하였으며, 북로군정서 연성대장으로 청산리 전투에 참전하기도 했다. 그 뒤 소련과 만주에서 활동하던 중 중국으로 건너가 대한민국임시정부 한국 광복군의 중장으로 광복군 참모장과 제2지대장 등을 지냈다. 1945년 귀국을 시도했다가 강제로 상해로 되돌려 보내졌고 1946년 귀국하였다. 귀국 후 안호상과 함께 조선민족청년단을 결성하여 활동하였고 반공주의 정치 활동을 하였다. 김구의 남북협상에 반대하여 이승만에 협력, 단정 수립에 동참하여 1948년 7월 31일부터 1950년 4월 20일까지 제1대 대한민국 국무총리를 역임하였고 8월 15일부터는 국방부 장관도 겸임하였다. 이후 주중국 대사와 내무부 장관을 거쳐 1952년 제2대 부통령 후보에 출마했고, 1956년 제3대 부통령 후보로 출마하였으나 이승만의 견제로 낙선하였다. 1960년 이후에는 야당 정치인으로 활동하다가 탈당, 국토통일원 고문 등을 역임했다. 한국의 초기 나치스 연구자의 한 사람이기도 했다. 세종대왕의 5남 광평대군의 17대손이며 이문하의 아들이다. 아호는 철기(鐵驥)이며 다른 이름으로는 왕운산(王雲山), 인남(麟男), 철기(哲琦), 이국근(李國根), 이국진(李國鎭) 등이 있다. 본관은 전주(全州)이며 경성부에서 1900년 10월 20일(음력) 서울 용동(현재의 명동 중국대사관 터)에서 출생했다고 전한다. 전주이씨 광평대군(조선왕조 세종임금 5남)의 17대손 정안부정공파 문중에서 출생했으니 이른 바 조선왕조의 후예이다. 이천에서 소년시절을 보냈으며 우등생 추천으로 경성고보(현재의 경기중학)에 입학했다. 1963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받았다. 1972년 72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영결식은 서울 남산 야외음악당에서 엄수됐다. 3)목천 현청자리 예전의 목천 현청은 일인들에 의해 학교와 일인들 헌병대로 사용되다가 헐리고 현재 목천초등학교가 들어서 있다. 4)목천만세 기념비 1919년 3월 14일 오후 4시 목천 공립보통학교 전교생 169명 전원이 학교운동장에 모여 독립만세를 부른 사건으로, 4명이 체포되고 해산되었다 하며 이들은 운전리와 쇳대배기의 동굴에서, 일인들의 감시를 피하기 위하여 밤에 태극기를 그렸다 한다. 이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1989년 3월14일에 김영기가 글을 쓰고 김재홍이 추진하여 기념비를 세웠다. 소 재 지 : 천안시 목천읍 서리(목천초등학교 교정) 건립년도 : 1989. 5. 30 규 모 : 높이 4.2m, 폭 1.0m, 두께 0.8m 소유 및 관리자 : 천안시교육청, 목천초등학교 5)이동녕 선생생가 임시정부 주석 석오 이동녕(1869∼1940) 선생이 태어난 곳이다. ㄷ자형 안채는 3칸 대청마루를 중심으로 양쪽에 한 칸씩 방이 있다. 안채 동서로 3칸씩 꺾어 달아내어 방과 부엌으로 사용하고 있다. 서쪽을 향하고 있는 문간채는 5칸 가운데 2칸은 마루를 깔았고 양쪽으로 한 칸씩 방을 두었다. 안채와 一자형 문간채가 어우러져 ㅁ자형을 이루고 있다. 오래된 은행나무는 수령은 알 수 없으나 동리의 전설인 배의 형국에서 돛대가 없어서 심었다는 전설이 있다. 6)용화사 미륵불 목천읍 소재지에서 북면 연춘리방향 왼쪽 야산기슭에 석조여래입상(목천읍 동리 178번지 충남 유형문화재 제58호), 여래입상과 3층 석탑이 있다. 복스러운 얼굴에 감은 듯한 눈, 오똑한 콧날, 작고 단정한 입 등이 단아하고 자비로운 인상을 준다. 양 어깨를 감싼 옷은 가슴에서부터 무릎 아래까지 U자형의 옷 주름을 표현하고 있다. 오른손은 손바닥을 정면으로 하여 손가락이 위로 향하고, 왼손은 손바닥을 정면으로 하여 손가락이 아래로 향한 손 모양을 하고 있다. 삼층석탑은 부재가 맞지 않으며 기단부가 특이하고 1층 지붕돌 아래 파손된 불상이 있다. 7)김진희 장군묘역 김진희 충효 정비(金晉凞 忠孝 旌碑) 목천중학교 정문 옆에 있는 이 비는 원래 목천면 교촌리의 목천 향교 명륜당 정문 옆에 있었는데, 1960년대 중반쯤에 묘소가 있는 서리로 이전하여 현존하고 있다. 조선시대 충신으로 1728년(영조 4) 이인좌의 난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켜 반도를 소탕하는 데 공을 세웠다. 본관은 김해(金海)이며 자는 겸숙(兼叔)이다. 아버지는 공조참판 김이환(金李桓)이다. 효성이 지극하여 어머니가 위독해지자 손가락을 끊어 피를 흘려 넣었으며, 끝내 돌아가시자 삼 년 동안 시묘살이를 했다. 1728년(영조 4) 이인좌의 난으로 인해 우후(虞候) 박종원(朴宗元)이 성을 내주고 투항하는 등 민심이 소란스러워지자 이진우(李震遇), 조중염(趙重廉) 등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반도를 소탕하는 데 공을 세웠다. 이때 청주 상당성 아래 살았는데 의병을 일으켜 난을 진압한 공을 인정받았다. 1788년(정조 12) 도백(道伯) 홍억(洪檍)의 장계로 증작(贈爵)되고 ‘충헌(忠憲)’이라는 시호와 ‘충효양전(忠孝兩全)’의 정려를 받았다. 비문에 ‘충신 효자 증 숭록대부 판중추부사 겸 판의금부사 오위도총부 도총관 행 숭록대부지 중추부사 김진희 지비 상지 팔년 무진 삼월 십팔일 충효 양전 명정’이라 되어 있어 충신 효자 정문이었음을 알 수 있다. 8)목천읍사무소 앞 선정비 목천읍 사무소에 있는 이 선정비들은 6.25사변 후에 북면 상동리의 비석거리에서 옮겨와 진입로 변에 있던 것을 독립기념관이 건립되면서 읍사무소를 신축한 후에 다시 옮겨 정비한 것이다. 몇 기는 동네 개울가에서 빨래판과 돌다리로 사용되던 것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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