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획특집] 천안의 지명유래 ㉔[천안신문] 본보는 지난 151호부터 천안 각 읍면동의 지명유래에 대한 연재를 진행중이다. 천안이라는 지명에 대한 기록은 고려 태조 13년인 930년 8월 8일 기해 일에 고려태조가 대록에 내려와 동서도솔과 탕정의 일부와 사산의 일부와 대록의 일부를 병합하여 천안이라 하고 도독부를 둔데서 유래한다. 대록은 지금의 목천이요, 사산은 직산이며, 동도솔과 서도솔은 천안의 일부이며, 탕정은 온양 탕정의 일부다. 각 지역에 내려오는 천안의 지명은 1988년부터 이원표 선생이 동부 6개 면을, 1987년도부터 오세창 선생이 천안시를 조사해 1960년경 한글학회에서 발행된 ‘한국 지명총람’을 참고로 가감 수정해 동부 6개면은 1990년 천안군에서 ‘역사의 현장’으로 출간되었으며, 천안시는 1989년 천안문화원에서 ‘천안의 지명’으로 출간하였다. 그 후 1999년 천안시 문화원에서 시와 군에서 발행된 것을 합하여 ‘천안의 땅 이름이야기’로 출간했다. 이번 연재는 이를 바탕으로 했으며, 일부 내용은 천안 향토사학자 김종식 선생이 재조사를 통해 가감하였음을 밝혀둔다. <편집자 주> ▲화성리(花城里) 목천군 세성면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으로 통폐합에 따라 운교리, 화원리, 성양리, 통주동, 일각리, 수신면 신평리, 서면, 일운전리 각 일부가 병합하여 화원리의 화자와 성양리의 성 자를 따서 화성리라고 하고 성남면에 편입되었다. -방아다리 : 일각이라고도 하며 방죽안 동남쪽에 있는 마을 앞 방앗간으로 돌다리를 놓은 것이 있었다고 한다. -방죽안 : 화원이라고도 하는데 공다라니 동쪽에 있는 마을 앞에 방죽이 있다. 조선조 때 길손이 쉬어가던 황신원이 이곳에 있었다. -동진청자 : 동진에서 유입된 것으로 추정되는 이곳 화성리 목관이 토광묘에서 출토되었는데, 백제 중앙 세력과 연관을 맺고 있는 지방의 수장 층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공다라니 : 공촌 성양이라고도 하며 화성리에서 가장 큰 마을 세성산 남쪽 마을이며 곰다라니, 검다라니라고도 한다. -고린장터 : 이곳에서 청자들이 출토되었다. -말 무덤 : 말 무덤이 두 개 있었는데 1개는 조산이라 부르고 1개는 밭으로 변했다. -산신제 : 공달안 사람들이 몇 해 전까지 산신제를 지냈는데 생기 복덕을 보아 탈 없는 자를 제주로 삼았었다. -성밖외 : 운교라고도 하는데 방죽안 북동쪽에 있는 마을. 세성산 앞 바깥쪽이 되며 냇가이다. -통절 : 통주동이라고도 하는데 방죽안 동쪽 마을. -세성산 폭포 : 세성산 서쪽에 있는 폭포. 유두날 머리를 감으면 두풍(頭風)이 없어진다고 한다. -군량골 : 신풍 넘어가는 고개에 있는 골. -강당골 : 회덕 황씨의 강당터. 부근에 가마터가 있다. -시들 : 성남, 북면, 병천의 경계이므로 세들인데 시들이라고 부른다. -김병기 병장: 삼일천하 고균 김옥균(古筠 金玉均)의 양아버지 김병기(金炳基)의 별장이 공달안이(孔村)에 있다. 몇 해 전만해도 말을 탈 때 밟고 올라서는 말 돌이 있었다 한다. 지금은 집을 수리하여 흔적이 없다. 화성리 5-5번지. ▲봉양리(鳳梁里) 목천군 남면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으로 조양리, 봉학리, 봉유리, 대사동, 율리, 수신면의 봉서리 1부를 병합하여 봉자가 드는 마을이 셋이므로 봉자와 조양리의 양자를 따서 봉양리라 하고 성남면에 편입되었다. -대사동(大寺洞) : 한 절루라고도 하며 도랑미 남서쪽에 있는 마을. 큰 절이 있었고 입구에 석탑이 있는데, 옛날에는 중이 만 여명이나 되는 큰 절이었고, 5층 석탑이 있었는데 사람이 비올 때 비를 피할 수 있었다 한다. -도랑미 : 조양리라고도 하는데 봉양리에서 가장 큰 마을이며, 남쪽 도랑 옆에 통미가 있으며 옆에 조양정이 있었다. -김응남묘(金應南) : 호종공신 원성부원군 충정공 김응남묘가 이곳 도랑미에 있다. -조양정터(朝陽亭) : 한 저루 어귀 동쪽 봉황산 밑에 있는 조양정 터. 선조 때 토정 이지함이 봉황산 밑에 정자를 짓고 봉황은 아침 햇볕에 운다는 뜻으로 조양정이라 하였다. -산신제 : 밤실 부락에서 지내는데 시월 초승 길일을 택하여 생기 복덕을 보아 제주를 선정하고 제주가 주관이 되어 지낸다. -토정보들 : 봉양리 앞 들에 물을 대는 보. 토정 이지함이 이곳에 살 때 한 저루 서쪽에 있는 절벽을 막아 봇들을 내어 신덕리 무풍골의 물을 끌어다가 봉양리 앞들의 물을 댔다. -장승제 : 한 저루에서 지내는데 정월 십사일 저녁 7시경 유사가 제주가 되며 유사는 돌려가며 한다. -장승백이 : 한저루 어구에 있는 장승이 서 있으며 부락에서 제를 지내고 있다. -음담말 : 음달 비조재라고도 하는데, 비조재의 음달 쪽에 있는 마을. 양달 비조재는 수신면 해정리에 있다. -밤실 : 율리라고도 하는데 우산이 남쪽 골짜기에 있는 마을. 밤나무가 많았다. -오동산 : 우산이 뒤에 있는 산. 앞에 봉황산이 있다. -우산이 : 봉유리라고도 하며 모산골 남쪽에 있는 마을. 지형이 봉황이 노는 형이라 한다. -시교암터(始敎庵) : 강당터. 강당골에 있는 시교암의 터. 숙종때 학자 절곡(節谷) 김시관(金時觀)이 시교암을 세우고 후진을 교육하였다. -삼층석탑 : 강당골 끝에 있는 삼층의 석탑. -비조재 : 비조티(飛鳥峙)라고도 하며 수신면과의 경계이다. -봉황산 : 매봉산 응봉이라고도 하며 한 저루 앞에 있는 산. 봉우리가 매우 수려하고 봉황 같다고 한다. -밤실고개 : 밤실에서 연기군 전동면으로 넘어가는 고개. -꾀꼬리봉 : 모산골 앞에 있는 산. 앵소 유지형의 명당이 있다고 한다. ▲석곡리(石谷里) 목천군의 남면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폐합으로 정곡리, 석천리, 도모리, 평리, 대양리, 세성면의 용산리, 봉명리 각 일부를 병합하여 석천리의 석자와 정곡의 곡자를 따서 석곡리라고 하고 성남면에 편입되었다. -정곡(正谷)의 노제 : 정월 보름날 저녁 일곱시경에 지냈는데 생기복덕을 보아 닫는 사람을 제주로 정하고 그 집에서 모든 음식과 제를 주관하고 축관과 같이 지냈다. 떡 삼색실과와 술 등으로 제물을 하고 길을 청소하고 황토를 뿌리며, 왼새끼를 꼬아 줄을 매고 각호의 소지를 올리고 제를 지낸 음식을 나누어 먹는다. -도장골 : 질그릇 책임자인 한도장이 살았다. -정골 : 정곡, 방죽안이라고도 하는데 목골 남쪽에 있는 마을. 방죽 안쪽이 되는데 세조때 정낭 조명이 살았다. 정랑봉 밑이다. -목골 : 못골, 지곡이라고도 하는데 목골 위쪽에 있는 마을. 돌이 많다. 위 목골이라기도 한다. -도봉산(道峯山) : 목골 뒤에 있는 산. -석천(石川) : 돌내라고도 하는데 목골 위쪽에 있는 마을. 돌이 많다. 위 몰골이기도 한다. -도모(道慕) : 아래목골이라 하기도 하는데 목골 아래에 있는 마을이다. -벌말 : 평리라고도 하며 목골 동쪽 벌판에 있는 마을. -시향골 : 정씨네가 시향을 지내는 골. -왜정초 : 목골에 헌병 주재소가 있었다. -정랑 조명 추모비: 정랑 조명이 매일 올라 단종의 능이 있는 영월쪽으로 망곡하였으므로 정랑봉이 되었다. 참판 김경규가 지은 추모비가 정랑봉 정자 옆에 있다. 정자를 짓기 전에는 잡목 속에 묻혀서 옆으로 지나도 찾을 수가 없었는데, 2010년에 정자를 지으면서 정리되어 정자에서 훤히 보인다. 김종식 선생이 발굴하여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정랑봉 조명 추모비명(正郞峰 趙銘 追慕碑) 우리나라 땅 수 천리에 여러 산들이 줄지어 서있고, 만천봉우리가 있으니 명칭이 얼마나 많을까 마는, 역시 그 처음 심상으로 이름 지어진 것에 불과하되 오직 대륙의 정랑봉(正郞峰)은 그렇지 않다. 봉우리는 현의 남쪽 대양동(縣 南 大陽洞)에 있는데 후에 단종조의 명신(名臣) 정랑 조공(正郞 趙公)의 충효(忠孝)서 이름이 지어지게 되었다. 조공의 휘는 명(銘)이요 호는 인촌(仁村)이며 한양이 세가(漢陽世家)이다. 단종 조 이조참의를 지낸 파서선생 휘 순생(順生)의 아들이다. 어려서 고거에 급제하여 청현(淸顯)을 두루 거치고 계유정란에 일문이 구찬지화(九竄之禍)를 당하였다. 공이 이때 정랑으로 금산에 유배되었다가 상왕(단종)께서 해를 당함과 부공(父公)의 소식을 듣고 애통하고 원통하여 생에 의욕이 없었다. 후에 생의 환멸을 느껴 본 현 세성산 서쪽에 살았는데 지금의 대양동이 이곳이다. 임금과 부친이 비명에 돌아가심을 애통히 여겨 하루 세 번씩 집 뒤 높은 봉우리에 올라가 항상 동으로 절하고 남으로 울부짖음을 일상으로 하였다. 장릉은 영월에 있고, 고성(固城)은 후명(後命)으로 부친이 귀향을 가서 사사된 곳이다. 얼마나 그러했는지 사립문이 달아 없어질 지경이 되었으므로, 마을 사람들이 이 봉우리를 정랑이라 하니 정랑이라는 명칭이 여기서 시작된다. 인에 마음을 둔 선비와 유람하는 나그네로 자연에 임하여 마음을 시로 읊지 않음이 없다. 본 현의 수장이신 안정복(安鼎福)이 '정랑봉' 세자를 써서 걸었고, 암행어사 김이성(金履成)은 '단묘건곤이 다만 이 한 봉우리라는 구절은 진실로 광세의 감흉을 일으킨다.' 그 '첨피고봉 영세청풍(瞻彼高峰 永世淸風)'이라는 것은 강제 송 선생이 축사(지은 글) 한 것이다. 봉우리 동남쪽 십 여리쯤 또 누대(樓臺)가 있는데 망경대(望京臺)라고 한다. 대개 공이 매일 의복을 갖추어 입고 홀기를 들고 서울을 바라보며 절하며 군신(君臣)의 예의를 갖추었기 때문이다. 인조 때에 이르러 공에게 직제학(直提學)을 제수하고 사림들은 충열사를 세워 제사하고 또 후에 숙묘전(肅廟殿)에 제사하였다. 공이 살았던 마을은 공이 산 다음부터 마을 사람들이 인촌(仁村)이라 칭하였으며 이것이 또한 공의 호가 되었다. 후에 대양(大陽)으로 이름을 고치니 현재는 천안군의 치하에 속한다. 봉우리는 지금 유씨들의 사유지가 되었다. 아! 세월이 바뀌어 강산이 여러 번 변했는데 오직 이 우뚝한 봉우리는 마모되지 않고 무너지지 않아 만천봉의 기상을 띠어 우뚝 솟아 있어 부녀자들과 선비들이 전하여 쇠하지 않아 후손이 추모함이 깊도다. 장자께서 이른바 '물은 차마 땅을 폐하지 못하고 차마 황폐하게 하지 못한다'고 하신 뜻으로 곧은 옥돌(비석)을 세워 이를 표하노니 그 논의를 주도한 것은 후손 형원(炯元)이다. '아! 공의 남기신 발자취를 보고자 한다면 이 봉우리에 있을 것이며 그 명칭의 자세함을 알고자 한다면 이 비석을 볼지어다. 천 백세가 지나더라도 이 비석으로 인하여 공의 큰 절개를 알게 될 것이다.' '오호라! 자규(서쪽새)가 우는 그믐날이면, 공의 꽃다운 영혼이 반드시, 봉우리 위를 배회할 것이며, 한스러움이 또한 무궁 할 것이다.' 지금 그 먼 후손 철형(喆衡)이 나에게 와서 기문(記文)을 부탁하거늘 나는 이 봉우리 아래 사람이라 매양 이곳에 올라 탄식한 것이 오래되었다. 나의 조부 제학공(提學公)께서 일찍이 시를 지어 말하기를 '정랑봉이 북쪽에 있으니 조 선생을 추모하노라' 하셨다. 가만히 느낌이 있어 드디어 이렇게 쓰노라 이때는 단묘 이후 아홉 번째 갑술년 중추절이다. 가선대부 전행 규장각 부제학을 지낸 안동 김경규는 삼가 짓고 전 장릉참봉을 지낸 완산 이석영은 삼가 쓰노라. 속에 시은 김이성(市隱 金履成)은 '높은 산 우러르며 충효를 사모하니, 지금사람 자세히 정랑의 발자취를 말 하네, 시험 삼아 당일에 노릉 땅을 찾는다면, 단묘의 하늘과 땅 사이 오직 이 봉우리뿐'이라 하였고, 경연관 어당 이상수(李常秀)는 '매죽루 앞에서 자규가 울고, 망경대 위에 저녁노을이 짙게 지는 구나, 가련한 조각달 정랑봉 위에 애달파 보이나, 외로운 신하 임금을 사랑하는 마음은 길이 빛나리라' 하였다. 을해년(1935년) 봄 세우다. <김종식 정리> ▲대화리(大化里) 목천군 세성면의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으로 화전리, 대초리 일부와 수신면의 현암리, 운곡리, 송정리를 병합하여 대초리의 대자와 화전리의 화자를 따서 대화리라 하고 성남면에 편입되었다. -차돌백이 : (전설) 차돌이 희게 비치면 재실 사람이 죽으므로 재실 사람들이 와서 파묻어 흰빛이 안보이게 해놓았다. -거문들 : (전설) 거문들이 나무가 무성하여 대사동에서 안보이면 홍해 거문들에 부자가 생기고, 나무가 없어 대사동에서 거문들이 보이면 대사동이 길하다고 한다. -위대초리 : 일대초리였으며 대초리 위쪽에 있는 마을. -아래대초리 : 대초리였으며 대초리에서 중심이 되는 마을. 대추나무가 많았다고 한다. -재실 : 송정이라고도 하며 화전 옆에 있는 마을. 박씨의 재실이 있었다. 소나무 정자가 있어 행인이 쉬어 갔다고 한다. -거문들 : 현암이라고도 하며 대초리 남쪽에 있는 마을. 거문들이 있다. 본래 충청도 청주목 수신면의 지역인데 고종 32년(1895)에 목천군에 편입되고 1914년 성남면 대화리에 편입되었다. -운곡 : 내대, 안터, 운곡리라고도 부른다. -꽃밭재 : 화전 뒤에 있는 산. 모양이 매화처럼 생겼다고 한다. -꽃밭 : 화전 아래 대초리라 하며 대초리 아래에 있는 마을. 꽃밭재 밑이 된다. ▲용원리(龍院里) 목천군 세성면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으로 산직리, 노원리, 용산리, 봉명리 각 일부를 병합하여 용산리의 용자와 노원리의 원자를 따서 용원리라고 하여 목천면에 편입되었다가 1917년 목천면에서 분리되어 성남면에 편입되었다. -용산 : 장승제 정월 열나흘 이장이 대표가 되어 탈 없는 자를 생기 복덕을 보아 선정하여 제주로 하고, 떡 삼색실과와 술을 제물로 놓으며 정오에 지내고 황토를 펴고 왼새끼로 줄을 매어 행인을 통제한다. -장승백이 : 용산입구 장승이 있는 곳. 장승제를 지낸다. 핑잇골에 장승백이가 또 있는데 장소가 다르다. 통미 : 핑잇골 뒤에 있는 산. 큰 봉우리가 우뚝 솟아 있어서 외따로 서 있는 것 같이 보인다. -용산 : 용산리라고도 하며 늘우리라고도 한다. 산직 말 동쪽 골에 있고 백은산 밑이 되는데 용의 형국이라고 한다. -조기진(趙基晋) 참판의 묘 : 목천에 살던 정승 조병호(趙秉鎬)와 부친 조기진(趙基晋)의 묘가 이곳 용산에 있었다. 2005년 이곳에 위락시설이 생기면서 후손들이 화장하여 없애 버렸다 한다. 정승이 나올 천하의 명당이라 한다. (전설) 조병호의 부 조기진 묘를 홍승목(洪承穆)이 승지로 있을 적에 묘 자리를 잡아 주었는데, 이 자리가 대지인데 자손 중 정승이 나오면 묘를 다른 곳으로 이전하라고 부탁하면서 자리를 알려 주었다. 그 후 정승이 둘이나 나왔는데도 옮기지 않고 욕심을 더 부리다가 집안이 망했다고 한다. 이 말은 이곳의 노인들이 하는 이야기이다. 조기진은 대원군과 사돈 간이며 아들, 손자들이 목천에 살았다. 경호, 병호 두 아들이 정승의 반열에 올랐다. -오릿골 : 줄바위 동쪽에 있는 골짜기. -정상골 : 살티 남쪽에 있는 골. -돌고개 : 석현이라고도 하며, 돌고개 밑의 마을고개도 돌고개라 하는데 살티 서쪽에 있고 목천면 도장리로 넘어가는 고개. 고개 부근에 돌이 많이 있다. -살티 : 봉명이라고도 하며 옛날에는 거대리(居垈里)라 하였다. 고려 때 이곳이 목주(목천)시절 읍치(邑治)지라고 한다. 기와 조각과 주춧돌이 밭에서 출토되고 있다. -산직말 : 살티 동쪽에 있는 마을. 산직집이 있었다고 한다. -안사당골 : 고려 때 이곳이 읍터였을 당시 사직단이 있었다고 하며, 살티 남쪽 골 도장리 경계 지점에 있다. -삼티 : 도리티, 석티, 한티, 이 세 곳이 피난처라고 예전부터 이곳에 전해오는 말이다. -괭이골 : 쟁이골이라고도 하는데 공인(工人)쟁이 들이 살던 곳. -고 정승골 : 노 판서 골이라고도 하는데, 고 정승이 살았다고도 하고 노 판서가 살았다고도 한다. -선녀골 : 선녀가 내려와 놀다 올라갔다 한다. -장박골 : 목천읍이 이곳에 있었을 당시 장이 섰던 골이라 하는데 언덕이 평평하다. -봉명 : 봉황이 춤추는 형국이라 하며 살티라 부르고, 마을 북쪽이 목천읍 터 자리이다. ▲신덕리(新德里) 목천군 남면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으로 중곡리, 가덕리, 산양리, 신촌리를 병합하여 신촌의 신자와 가덕리의 덕자를 따서 신덕리라 하고 성남면에 편입되었다. -중실 앞 : 장승재 길 한쪽에 장승이 나란히 서 있는데, 정월 열나흘 날 오후 4시경 부락민 중에서 생기 복덕을 보아 닫는 사람 셋을 선정하여 제관 주당 축관 보조인이 지내는데 삼색실과와 소 간류, 술 등을 제물로 놓고 지낸다. 선택된 사람은 목욕 재개하고 탈 없이 있다가 제를 지내야 한다고 하며 부락 평온의 소지를 올린다. -효자정문 : 효자 이유의 정문인데 순조 때 사람이다. (전설) 부모의 병간호를 잘하였으며 하루는 잉어를 드시고 싶다고 하여 해드리고 싶었으나 잡을 길이 없으므로 얼음 위에서 무릎을 꿇고 하늘에 빌었더니 하늘에서 잉어가 떨어졌으며, 약 시중을 잘 하였는데 약을 지으러 다닐 때 범이 항상 보호를 하며 따라 다녔다 한다. -가다리 : 제월촌(薺月村) 가덕리라고도 하며 신덕리에서 가장 큰 마을이다. 원 이름은 가덕이다. -옻샘 : 서당골에 있는 샘. 계룡산(溪龍山) 밑이 되는데, 물이 아주 차서 옻 오른 데에 좋다고 한다. -훗고개 : 중실 서쪽에 있는 고개. -탑고개 : 탑현이라고도 하며 가다리 남서쪽에 있는 골. 산제 당 골이다. -수청거리 : 공펀덕이라고도 하며 중실에서 연기군 전의면 거리실로 넘어가는 고개. 돌탑이 있었다. -중실 : 중곡이라고도 하며 쉴터이고 옛날 산에 나무하러 다닐 때 이곳에서 쉬며 공을 치고 놀았다고 한다. -인중고개 : 사람의 콧등 같이 생겨 인중고개라고 부른다. -어리밋재 : 빙항령이라고도 하는데 전의면으로 넘어가는 고개. 산이 높고 험하여 도적이 많으므로 혼자는 못 넘고 여러 사람이 어울려 넘어 다녔다고 한다. -송벌 : 송평, 산양리라고도 하는데 신덕리와 대흥리에 걸쳐있는 마을. 큰 들의 안쪽이 되는데 산이 낮고 양지바른 곳이다. -안무풍골 : 무풍골 안쪽에 있는 골짜기. -무풍골 : 가다리 동남쪽에 있는 골. 물이 많은데 이골의 물을 토정 이지함이 보를 막아 봉양리로 끌어 내렸는데, 이 보의 명칭이 토정보(土亭洑)라고 불렸다. -노적봉 : 중실 동남쪽에 있는 산. 노적가리처럼 생겼다. -그뭇골 : 한샘골 옆에 있는 골. 영월 신씨 묘가 있다. -고렵리 : 중실 동쪽에 있는 골짜기. 전에 집이 있었다. -강당골 : 서당골, 탑골이라고도 부르는데 중실 남서쪽 위에 있는 골짜기. 탑과 강당이 있었다고 한다. -회고개 : 이 고개에서 석회가 나온다.
-
[기획특집] 천안의 지명유래 ㉓[천안신문] 본보는 지난 151호부터 천안 각 읍면동의 지명유래에 대한 연재를 진행중이다. 천안이라는 지명에 대한 기록은 고려 태조 13년인 930년 8월 8일 기해 일에 고려태조가 대록에 내려와 동서도솔과 탕정의 일부와 사산의 일부와 대록의 일부를 병합하여 천안이라 하고 도독부를 둔데서 유래한다. 대록은 지금의 목천이요, 사산은 직산이며, 동도솔과 서도솔은 천안의 일부이며, 탕정은 온양 탕정의 일부다. 각 지역에 내려오는 천안의 지명은 1988년부터 이원표 선생이 동부 6개 면을, 1987년도부터 오세창 선생이 천안시를 조사해 1960년경 한글학회에서 발행된 ‘한국 지명총람’을 참고로 가감 수정해 동부 6개면은 1990년 천안군에서 ‘역사의 현장’으로 출간되었으며, 천안시는 1989년 천안문화원에서 ‘천안의 지명’으로 출간하였다. 그 후 1999년 천안시 문화원에서 시와 군에서 발행된 것을 합하여 ‘천안의 땅 이름이야기’로 출간했다. 이번 연재는 이를 바탕으로 했으며, 일부 내용은 천안 향토사학자 김종식 선생이 재조사를 통해 가감하였음을 밝혀둔다. <편집자 주> ▲운용리(雲用里) 목천군 북면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으로 삼용리, 군단리, 심곡리, 납안리 일부를 병합하여 운용리라 하고 천안군 북면에 편입되었다. 1963년 1월 1일 천안읍과 환성면이 통합하여 천안시로 승격됨에 따라 천원군 북면 운용리가 되었다. -깊은 골 : 심곡이라고도 하는데 부소문이 고개 동북 깊은 골이다. 옛날에는 마을이 있었으며 골이 깊고 물이 좋아서 전염병과 어린이 복학(複虐)이 없었다 한다. 온조왕이 처음 이곳에 있었다고 전한다. -부소문이고개, 부소문령(扶蘇門領) : 부소문이라고도 하는데 운영리에서 입장면 양대리로 넘어가는 높은 고개. 백제 때 온조왕이 위례성에서 도읍하였을 때, 이곳에 문을 세웠다 하며 소나무 산 고개라고 하는 뜻도 된다고 한다. -삼용리(三龍) : 군단이 남쪽에 있는 마을로 지형이 용처럼 생겼다 한다. -장생이 : 새 절터라고도 하며 군단이 서쪽 골 위에 있는데 백제 때, 온조왕이 위례성에 도읍할 당시 시장이 섰다 한다. 절이 있었고 장승이 있었다는 설도 있다. -마당재 : 깊은골 뒤에 있는 산. 마당처럼 평평하여 군사가 훈련하였다 한다. -군단이(軍丹) : 운용리에서 가장 큰 마을 백제 때 군대가 주둔하였다고 한다. -산신제 : 군단이에서 정월 중 택일하여 지내며, 생기 복덕을 보아 닫는 사람으로 제관 축관 외 5인 정도가 참석한다. 소머리 삼색실과 쌀 3되 3홉을 제물로 놓고 각호의 소지를 올려주는데, 저녁 7시경 지내며 제 지낸 음식은 나누어 먹고 제관들은 며칠간 몸을 정결히 한다. -위례성우물 : (전설) 위례성 안에 있는데 백제시조 온조왕이 밤이면 용이 되어 우물로 들어가서 부여 백마강에서 가서 업무를 보고, 날이 밝으면 이 우물로 나와서 왕 노릇하다가 처남의 꼬임에 빠져 죽었다 한다. -구수바위 : 위례성안 산등성이에 있는데 돌을 다듬어 만든 것이 구유처럼 되었는데, 백제 온조왕이 이곳에 도읍할 적에 사용하던 것이라 하며 비 받침이라고도 한다. 반쪽밖에 없고, 반쪽은 굴러 내려 성터 밑 산 고랑에 묻혀있는 것을 향토사학자 백승명씨가 1995년에 찾아 놓았다. -독갓바위 : 바위가 삿갓을 쓴 것 같이 생겼다. -대궐터 : 위례성안 동북쪽 말랭이 펀펀한 곳을 대궐이 있었다는 대궐 터라고 전한다. -올림이골 : (전설) 옥녀봉 밑이 되는데 옥녀들이 하늘에서 내려와 놀다 목욕하고 놀다 올라가곤 하였다고 전해진다. ▲대평리(大坪里) 목천군 북면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으로 대산리, 소평리, 대야리, 곡간리가 통합하여 대산리, 대야리에서 대자를 따고 소평리에서 평자를 따서 대평리라 했다. 천안군 북면에 편입되었다가 1963년 1월 1일 천안읍과 환성면을 통합하여 천안시로 승격되므로 천원군 북면 대평리가 되었다. -가다골 : 가덕동 소평리 가더기라 부르며 평전 말 옆에 있는데, 장사 지내기 전 이곳에 시체를 놓았다고 장사 지냈다 한다. -밤나무골 : 밤나무가 많이 있어 밤나무골이다. -두루봉 : 산제당골이 있는데, 예전에 곡간이 사람들이 산제를 모시던 곳이다. -쇠죽곡 : 예전에 이곳에서 철일을 하였다. -개천골 : 산이 둘러있고 하늘만 보이는 골이다. -조비장골 : 비장을 지내던 조비장의 무덤이 있다. -곡간리(曲干) : 마을이 산속 깊이 있어서 개울을 따라 꼬불꼬불 올라가는데, 온조왕이 위례성에서 도읍할 당시 이곳에 곡식을 쌓아 두었다 하여 곡간이라 한다고 한다. -중방박골 : 남응중(南應中) 터. 곡간 동쪽 뒤에 있는 곳인데, 철종 때 척신들의 횡포를 막고 종실 중에서 어진 분을 왕으로 추대하려고 하는 혁명을 일으키려는 일을 주선하다가 붙잡혀 죽었다. 그 집터가 이곳에 있었는데 파서 헤쳐 버렸다고 하며, 그 당시 화약을 빻았던 절구통이 지금도 남아서 뒹굴어 다닌다. (전설) 혁명을 거사하려고 무기를 운반하는데 남의 눈을 피하기 위하여 상여로 연춘리 쪽에서 와서 며칠마다 장사를 지내며 무기를 묘로 위장하여 보관하였다 한다. 이곳에 사는 안 씨들과 한 씨가 가담했고, 윤 씨가 살았는데 일부는 가담했고 가담 안한 윤 씨의 고발로 붙잡혔다고 전해진다. 남응중의 누이가 있었는데 응중에게 벼 한말 방아를 찧어서 쌀 한말 나오거든 거사를 시작하고, 만약 한말에서 조금이라도 빠지면 기다리라고 했다. 벼 한말을 방아 찧으니 아홉 되가 나왔는데, 한 되 더 나올 시기를 참지 못하고 거사를 시작하려다 실패했다고 한다. -대산 : 싸리재, 싸리재 밑의 마을. -싸리재 고개 : 대평리에서 충청북도 진천군 백곡면으로 넘어가는 고개. 산이 높고 깊어서 싸리가 고복같이 즐비하게 있다 한다. -안각골 : 안갓골. 안강골이라 부르고 평전 말 남쪽에 있다. 안 씨의 강당 터가 있었다. -대야촌(大冶) : 댓골, 대야동이라 부르며 옛날에 철의 일을 하던 큰 대장간이 있었다. -장자골(장자터) : 옛날에 큰 부자가 살았는데 입장으로 이사했다고 한다. -노적골 : 옛날에 이곳에서 놋그릇을 만들고 특히 놋젓가락을 많이 만들었다고 한다. -조고리골 : 조골이라고도 하며 도적골이라 부르기도 하는데, 도적들이 많이 있었다 하고 쇠를 채취했다고도 한다. -갈월넘이 : 진천군 갈월로 넘어 다니는 고개. -지장골 : 지장을 심었던 골이라 하며 궐터가 있다. -불부골 : 철을 생산하기 위하여 불무하던 골. -점말 : 질그릇과 옹기를 생산하였다. -챙경이골 : 공인(工人)들이 살던 곳. 철을 생산하는 철공인, 그릇을 생산하는 공인, 쟁이들이 이곳에 모여 집단으로 거주했다. -용어물 : (전설) 물맛이 좋고 물이 잘 나오는 샘인데, 어떤 사람이 이 우물가에서 개를 잡아 물에 씻으므로 샘물이 나오지 않았는데 지금은 조금씩 나온다. ▲전곡리(典谷里) 목천군 북면의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전곡리 단일리가 그대로 존속되어 전곡리라 하였다. -어대보(漁臺洑) : 김성(金姓) 어대라고도 하며 부락 동북쪽 내가에 있는데, 큰 바위가 냇가에 솟아 있어 예전에 김씨 성을 가진 사람이 이 바위에 앉아서 고기를 낚았다고 한다. 영조 때 학자 유철한씨가 자신의 호를 이 바위에 어은(漁隱)이란 두자를 크게 새기여 놓았다 한다. 2000년 장마에 개울둑이 무너져 보수 공사 할 적에 부숴 축대를 쌓는데 사용하려고 없애버려 김종식 선생이 떠 놓은 탁본만 전하게 되었다. -범 바위 : 바위에 조그만 굴이 있고 험상하며 범같이 생겼다. -주암 : 술바위라고도 하는데, 길옆에 있었으며 주막이 있고 부락이 있었다. -깊은골 : 전곡 뒤에 있는 깊은 골짜기. -바이들 : 물레방아가 있었으며 길마재 서쪽에 있다. -길마재 : 안현이라고도 하며 찬샘골 동쪽에 있고 모양이 소의 길마같이 생겼다. 전곡에서 양곡리로 넘어가는 고개. -산방이 골짜기 : 전곡에서 목천면 산방으로 넘어가는 골짜기인데 마루턱은 산방고개이다. -시거리 : 세거리라고도 하는데 전곡에도 도촌으로 가는 세 갈래가 있는 골. -안전곡 : 내전곡이라 하며 전곡 안쪽 골에 있는 마을. -찬샘골 : 한천동이라고도 부르며 전곡 북쪽에 있는데 찬 샘이 있다. -통미 : 통메라고도 부르는데 전곡 동쪽에 외따로 있는 작은 산. ▣성남면(城南面) 본래 목천군 지역으로 세성산 이들을 따서 세성면(細城面)이라 하고운교(云橋), 화원(花院), 성양(城陽), 통주(通注), 일각(一角), 강당(講堂),일신기(一新基), 이신기(二新基), 일검사(一儉沙), 이검사(二儉沙), 화전(花田), 일대초(一大招), 이대초(二大招), 용산(龍山), 봉명(鳳鳴)의 관할구역과, 목천군의 남쪽에 위치해 있다고 하여 남면(南面)이라 부르던 중곡(中谷), 가덕(加德), 산양(山陽), 신촌(新村), 송평(宋坪), 신흥(新興),대양(大陽), 대티(大峙), 초정(초井), 마산(馬山), 하대티(下大峙), 조양(朝陽), 봉학(鳳鶴), 봉유(鳳游), 대사(大寺), 정곡(正谷), 석천(石川), 도모(道慕), 평리(坪里)와 수신면(修身面)의 현암(玄岩), 운곡(雲谷), 송정(松亭), 신평(新坪), 봉서(鳳栖)리와 서면(西面)의 일운전리(一云田里) 일부를 병합하여 세성면 성자와 남면의 남자를 따서 성남면이라 하고 천안군에 편입되어 대정리, 대화리, 대흥리, 봉양리, 석곡리,신덕리, 신사리, 화성리 8개리를 관할하여 오다가 1917년에 목천면의 용원리를 편입하여 9개리가 되었으며, 남쪽으로는 연기군 전의면, 전동면, 서쪽은 목천면, 북쪽은 목천면, 북면, 병천면 동쪽은 수신면과 접하고 있다. 1963년 1월 1일 천안읍과 환성면이 통합하여 천안시로 승격되므로 천안군이 천원군으로 개칭되여 천원군 성남면이 되었다. ▲신사리(薪沙里) 목천군 세성면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폐합으로 일신기리, 이신기리, 일금사리, 이금사리, 강당리, 일각리, 남면의 평리의각 일부를 병합하여 신기리의 신자와 금사리의 사자를 따서 신사리라 하고 성남면에 편입되었다. -줄바위 : 신사리와 용원리 경계에 있는 바위인데 바위가 줄지어져 있다. (전설) 운파산 장수와 줄 바위 장수가 싸움이 붙었는데, 운파산 장수가 운파산에 있는 돌을 던져 서로 죽이려고, 싸움이 한참 계속되다가 운파산의 장수가 던진 돌에 줄 바위 장사가 맞아 죽었다. 운파산 장수는 줄 바위 장수가 죽은 줄도 모르고 자꾸 던져서 돌이 한 줄로 쌓이게 되었다고 한다. -위새터 : 이신기라고도 하며 새터 위쪽 마을. -검새울 : 검사리 일검사리라고도 하며 새터 북쪽에 있는 마을이며, 운파산 밑이 되는데 산제당이 있었다. -강당골 : 새터 서북쪽 골에 있는데 청류강사가 있었다. 숙종 때 학자 류진(柳軫), 류운서(柳雲瑞), 유축(柳軸) 등이 수석이 좋고 수려한 이곳에 청류강사를 짓고 후진들을 교육하였다. 지금 이곳엔 묘소가 들어서고 깨어진 기와 편과 사기 편들이 수습 될 뿐이다. -덕암산 : 강당골 옆에 있는 산. 큰 바위가 많고 수석이 아름다우며 참판 안중필(安重弼)이 바위에 곡수유상(曲水流觴)이라고 새겼으며 아래는 청류강사터가 있다. 아직 이글의 위치를 모른다. -농금대 : 청류강사터 옆에 있는 바위. 유운서가 시를 새겼는데 지금은 농금대란 3자만 현존하며 시는 훼손되어 볼 수가 없다. *국봉 김종식 선생이 수회 답사하여 흔적을 찾으려 노력하였으나 곡수유상이란 글을 찾지 못하였고, 산중턱에 유축의 붉은 시와 강당골의 청류동이란 글, 그리고 시가 새겨진 제시석이란 글이 새겨진 작은 비석 돌을 발견했다. 농금대라 새겨진 이 비석 돌은 어느 몰지각한 사람이 가져다가 농금대란 글만 남겨두고 시는 갈아 없애고, 그곳에 다른 글을 새겨 집의 정원석으로 이용하고 있다. 이 시들을 탁본하여 번역해서 천안 향토지에 발표하였다. -능안 : 선녀골 안쪽에 있는 골짜기인데 큰 무덤이 있었다. 야산개발로 없어졌다. -선녀골 : 이검리라고도 하는데 검새울 아래에 있는 마을. 옛날에 선녀가 살았다고 한다. -노루목골 : 범 사냥골 위쪽에 있는 골인데, 이 곳에서 노루를 잘 잡았다고 한다. -범사냥골 : 부수골 옆에 있는 골. 이곳에서 범을 산채로 잡았었다고 한다. -말무덤고개 : 옛날 세성산 싸움에서 죽은 장수의 무덤이라고 한다. -소철구덩이 : 검사부락 뒤 운파산 중턱 쇠 철광이 있었다. -미륵댕이 : 선돌로써 매년 정월 보름에 올린다고 한다. 제관은 일주일 전 생기 복덕을 보아 닫는 사람으로 정하고 제를 지내며 부락민 전체가 참가하지는 않는다고 한다. -여우고개 : 검새울에서 목천면 운전리로 넘어가는 고개. 옛날에는 여우가 많아서 이 고개 넘기가 무서웠다고 한다. ▲대정리(大井里) 목천군 남면의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으로 대티리, 초정리, 마산리, 하대티리를 병합하여 대티리의 대자와 초정리의 정자를 따서 대정리라 하고 성남면에 편입되었다. -중샘 : 위초정이라고도 하며 우물인데 약물이다. (전설) 초정마을에 살던 한 처녀가 산밭에서 목화를 따다가 목이 말라 이 우물에 와서 물을 마시고 있는데, 그때 마침 길을 지나가던 젊은 중이 고개를 넘다보니 목이 말라 물을 먹으려 하다가 처녀를 보고 갑자기 여자의 미색에 반해 중의 신분도 잊은 채 겁탈하려고 처녀에게 달려들었다. 당황한 처녀는 어떻게 피할 길이 없어 우물에 뛰어들어 빠져 죽고 말았다. 중은 처녀가 죽은 것을 보고 양심의 가책을 받아 자기도 그 우물에 뛰어들어 죽고 말았다. 그 후론 부락민들이 이 샘에 가서 “색시가 불쌍하게 죽었다. 고약한 중놈이다” 하면 물에서 거품이 많이 올라온다고 한다. -위점터 : 절골 입구에 절터 둘이 있는데 안쪽절터, 바깥절터가 있다. -서창골 : 중샘 서쪽에 있는 골짜기. 세종 27년 1444년 초정에 거동을 하기 위하여 창고를 지었다가 민폐를 염려하여 거동을 중지하였다 한다. -여근바위 : (전설) 위말미 안산 기슭에 있었는데 모양이 여자의 음부 같이 생겼고, 그 구멍에 막대기나 회초리 등을 꽂으면 말미동네 처녀들이 바람이 난다 하여 음부를 깨어 냈으나 도로 확장할 때 없어졌다. -굴머리고개 : 대정리에서 목천면 소사리로 넘어가는 고개. -대정저수지 : 대정리에 있는 성남 저수지. -마산 : 말미라고도 하는데 대정리에서 제일 큰 마을이며, 세종대왕이 이 물을 가져다 마실 때 이곳에 말을 매어두었던 곳이라 하며, 뒷산이 말 같이 생겼다고도 한다. -길안골 : 중샘 남쪽 길 위에 있는 골짜기. -말티고개 : 타우고개. 학자 우봉 이씨 타우 이상과 도암 이재(打愚 李翔. 陶庵 李縡)가 이 고개 밑에 살았다 한다. 유적으로 사관정이 남아 전한다. 전의 관정리로 넘어가는 고개. 고개가 하도 험하여 말이 이 고개를 넘으면 말 발바닥에 티눈이 생긴다고 하여 말티재 또는 말티고개라 한다. -한티 : 대티. 한티고개 밑에 있는 마을. -대티고개 : 한티고개라고도 하는데 한티에서 목천면 도장리로 넘어가는 고개. -초정(椒井) : 위말미 추정마을 동남쪽 말티고개 넘어가는 길가 논 가운데 있는데, 길가의 것은 돌로 쌓았고 논 가운데의 것은 굴참나무 널판으로 짰다. 세종대왕이 한글을 연구하다가 과로로 안질이 생겨 그 병을 치료를 하기 위하여 각 지방 약수를 물색하는데, 이 초정과 전의 초정 청주 초정이 물색에 올라와 세종 26년(1444년) 3월 청주 초정에 거동하여 치료했고, 이 초정을 수축하여 다음해 거동하기로 했다. 그해 날이 가물어 모를 못 심고 인심이 흉흉한 때라 민폐를 걱정하여 신하들의 권고를 사양하고 물을 병에 넣어가지고 말을 이용하여 실어다 마셨다고 실록에 기록되어 있다. (전설) 대록지에 의하면 어떤 신통한 중이 약물을 구해 깊은 산중에 들어가 마시려고 병에 넣어 가다 이 고개를 넘다가 잠깐 쉬어 가는데, 놓았던 병이 쓰러져 흘린 것이 약물이 나오게 된 기원이라고 한다. -장산이 : 위초정 위쪽에 있는 골. 세종 26년 초정을 수축할 당시 시장이 섰었다 하며, 댕골에 다인현이었을 당시에도 시장이 섰다 한다. ▲대흥리(大興里) 목천군 남면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으로 송평리, 신흥리, 대양리, 세성면 화전리 일부를 병합하여 대양리의 대자와 신흥리의 흥자를 따서 대흥리라 하고 성남면에 편입되었다. -내외정문 : 정골 위에 있는 정문. 효자 이규호와 그의 아내 경주김씨 열녀 정문. -서당골 : 거칠미 서남쪽에 있는 골. 서당이 있었으며 선인 독서형의 명당이 있다고 한다. -댕골 : 대양이라고도 하며 삼한때 다인현이 있었던 터라 한다. 세조 때 정랑 조명이 이곳에 살았다고 한다. -명라동(明羅洞) : 송벌 북쪽에 있는 골짜기. -삼밭재 : 거칠미 동쪽의 낮은 고개 삼밭이 있었다. -삼박골 : 터골이라 하며 예전에 사람이 살았다. -능골 : 산양리라고도 하며 댕골 남쪽에 있는데 이조 중엽에 왕과 약혼한 낭자의 묘가 산 능선에 있다고 한다. -능고개 : 능골에서 전의면 관정리로 가는 고개. -거칠미 : 황산 신흥리 황산리라 하며 대흥리에서 가장 큰 마을. -가마골 : 도로봉 남쪽에 있는 골. -도로봉 : 댕골 남서쪽에 있는 산 모퉁이가 된다. -마룻들 : 거칠미 동쪽에 있는 큰 들. -점골 : 정골이라고도 하며 댕골 위에 있는 골인데, 예전에 그릇점이 있었다. -탑골 : 도로봉 위에 있는 골. 탑이 있었다. -용수봉 : 허씨 촌인데 허 장군 묘와 말 무덤이 있다. (전설) 거칠미 말 바위. 이 바위가 거북이 비슷한데 머리 쪽의 부락은 먹어치우므로 불길하고, 궁둥이 쪽의 부락은 걸쭉한 똥을 눔으로 거름이 되어 좋다고 한다. 이에 이웃동네 사람들이 밤에 몰래 와서 돌려놓으면 머리 쪽 되는 부락민이 또 몰래와 돌려놓고 하므로 이웃 부락간의 불화가 잦았다. 부녀회에서 이 바위가 골칫덩어리라고 하여 땅을 파고 묻었다.
-
[기획특집] 천안의 지명유래 ㉒[천안신문] 본보는 지난 151호부터 천안 각 읍면동의 지명유래에 대한 연재를 진행중이다. 천안이라는 지명에 대한 기록은 고려 태조 13년인 930년 8월 8일 기해 일에 고려태조가 대록에 내려와 동서도솔과 탕정의 일부와 사산의 일부와 대록의 일부를 병합하여 천안이라 하고 도독부를 둔데서 유래한다. 대록은 지금의 목천이요, 사산은 직산이며, 동도솔과 서도솔은 천안의 일부이며, 탕정은 온양 탕정의 일부다. 각 지역에 내려오는 천안의 지명은 1988년부터 이원표 선생이 동부 6개 면을, 1987년도부터 오세창 선생이 천안시를 조사해 1960년경 한글학회에서 발행된 ‘한국 지명총람’을 참고로 가감 수정해 동부 6개면은 1990년 천안군에서 ‘역사의 현장’으로 출간되었으며, 천안시는 1989년 천안문화원에서 ‘천안의 지명’으로 출간하였다. 그 후 1999년 천안시 문화원에서 시와 군에서 발행된 것을 합하여 ‘천안의 땅 이름이야기’로 출간했다. 이번 연재는 이를 바탕으로 했으며, 일부 내용은 천안 향토사학자 김종식 선생이 재조사를 통해 가감하였음을 밝혀둔다. <편집자 주> ▲매송리(梅松里) 목천군 북면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으로 매당리, 송정리, 송현리, 운계리, 구항리가 병합하여 매당리의 매자와 송정리, 송현리의 송자를 따서 매송리라고 하고 북면에 편입되었다. -쇠죽이들 : 철을 생산하기 위하여 쇠부리 한 곳. -개목기 : 구항 대항이라고도 부르며 개목기 밑에 있는 마을. 세종실록지리지에 이곳에 도기소가 있었다고 하였다. -개목고개 : (전설) 옛날 어떤 선비가 술에 만취되어 이 고개를 넘게 되었는데, 그때 집에서 기르던 개도 항상 따라 다녔다고 한다. 때는 가물던 따뜻한 봄날인데 술에 취한 이 선비는 고개 마루턱까지 오르더니 숨이 가쁘고 술은 더욱 취해 올라 봄철이라 몸이 노곤한지라 잠깐 쉰다고 한 것이 잠이 들어 정신 모르고 자는데, 그때 마침 산불이나 이 근처까지 타오르는데 술 취한 주인은 일어날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그대로 두면 타죽게 되었다. 이 때 개가 도랑에 가서 몸에 물을 적시어 가지고 와서 불에 뒹굴기를 몇 번을 계속하여 다행히 불이 꺼져 주인을 살렸으나 개는 불에 타 죽고 말았다. 선비가 한참 자다가 서늘하여 일어나 보니 해는 서산에 걸치었고 인근에는 나무와 잔디가 모두 시커멓게 타 벼렸는데, 자기가 산 것이 이상하여 옆을 두루 살펴보았다. 개가 자기를 살리고 죽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선비는 자기의 실수를 후회하고 개를 정중히 장사 지내주고, 그 후로는 술을 끊고 돌을 세워 미물인 개라도 장하다고 충견의 시를 새겨 충견비를 세워주었다 한다. -귀이골 : 한경골 북쪽에 있는 골. 귀하고 높은 분이 이곳에서 살았다고 한다. -날근터 : 느러니 옆에 있는 터. 전에는 큰 마을이었는데 현재는 마을이 없어졌다. -매당이 : 오송정 동쪽 내 건너에 있는 마을. 모양이 매화낙지형의 명당이라 하여 매당이라고 했다 한다. -당골 : 매당골 뒤에 있는데, 이곳에서 철을 담금질하였고 토둑(쇠를 녹이는 가마)자리가 있다. -무진바위 : 무진암 느러니 앞에 있는 바위. 산등이 높고 길게 바위가 한없이 쌓여 있다. (전설) 무진암 전설이 있는데, 무진암은 바위가 무지하게 많다는 뜻에서 나온 말이다. 어떤 과부가 남매를 키웠는데 남매가 모두 힘이 장사였다. 둘을 그대로 키우면 앞날에 불길한 징조가 보이므로, 딸을 없애기 위하여 남매에게 힘자랑을 시키고 만약 지는 사람은 자결하여 죽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하루는 어머니가 남매를 불러놓고 아들 보고는 쇠로 만든 신을 신고 서울을 갔다 오고, 딸에게는 무진암 바위를 가지런히 쌓아 놓으라고 하였다. 시합이 시작된 지 얼마 후 보니까 딸이 이기게 되었으므로 어머니는 박씨를 까다가 딸에게 주면서 먹고 쌓으라고 권고하였다. 그래도 아들이 오는 기색은 보이지 않으므로 어머니는 계속하여 딸에게 박씨를 권했는데, 딸이 박씨를 먹고 병이 나서 몇 개만 올려놓으면 끝낼 수 있는 것을 못 올려놓고 남동생에게 지고 자결했다고 전하여 오고 있다. 이와 비슷한 흑성산 남매성 이야기가 흑성산 전설로 전한다. -느러니 : 널안, 운계, 판음이라고도 하며 너럭바위가 있어 이름이 생겼고, 질그릇점이 이곳에 조선조 초기에 있었다. <세종실록지리지> -송현보 : 오송정 위에 있는 보. 송현들에 물을 댔다. -여기바위 : 여기암 너럭바위라고 부르며, 누러니 앞 모퉁이 큰길가에 있는 바위, 큰 반석이 깊은 냇가에 있다. 놀이하기에 좋고 옛날에 관가나 부자들이 기녀들을 데리고 와서 많이 놀았다고 한다. -여기소 : 여기바위 아래에 있는 소. 물이 깊고 그 근처에 여기바위가 있는데, 전에 관가에서 봄가을에 기녀를 데리고 와서 놀았다고 한다. -오송정 : 매송리 길가에 큰 소나무가 모여 있어 정자를 이루었는데, 행인들이 쉬어 갔다. -장이골 : 오송정 뒤에 있는 골. 공인(工人)들이 살았다.(도공이나 철공 대장장이들) -장승백이 : 날근터 옆에 있는 들. 옛날에 이곳에 장승이 있었다고 한다. -점말 : 질그릇을 생산하던 곳. 질그릇 조각이 많이 있었다. -말달리던 터 : 오송정 내 건너에 길을 닫은 것 같이 산이 되어 있는데, 옛날에 말 달리던 터라고 전해오고 있는 곳이다. -당귀열 : 매송리 부근인데 옛날에 광산을 했던 곳이며, 언제 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판 흔 적이 있고, 나무판 같은 장비가 나온다고 한다. ▲명덕리(命德里) 목천군 북면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으로 내명덕리, 외명덕리, 구동, 사창리를 통합하여 동네앞에 명덕바위가 있으므로 명덕리라 하고 북면에 편입되었다. -명암 : 명덕암, 명학암이라 부르는데, 이 바위 위에 학이 자주와 앉아 울었다 하며 부락에서 소중히 여기고 보호했다고 한다. -범안골 : 옛날 이곳에 철을 재련하는 가마가 있었다 한다. -명덕리 : 안고사라고도 하는데, 이곳에 안고사라고 하는 절이 있었다고 한다. -구동 : 배나무골이라 하며 조선조 때 배의 명산지가 목천에 있다고 세종실록에 있다. 이곳에 거북바위가 있어 구동이라 한다. -사창(社創) : 명덕리에 있는 마을. 예전에 이곳에 사창이라고 하는 양곡 창고가 있었다. -후령군사당(厚寧君祠) : 사창에 있다. 태종의 일곱째 아들 간(干)의 사당이 모셔있는데, 이분의 현손 이길남(李吉男)이 이곳에 낙향하여 살면서 사당을 짓고 후손이 대대로 살고 있다. -쟁이골 : 공인들이 이곳에 모여 집단으로 살던 터다. ▲용암리(龍岩里) 목천군 북면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으로 회촌, 운암리, 호덕리, 비룡리를 통합하여 비룡리의 용자와 운암리의 암자를 따서 용암리라 하고 북면에 편입되었다. -사기점골 : 음달전지 동쪽에 있는 골짜기. 조선조 때 사기점이 있었다는 흔적이 남아 있다. -비룡고개 : 비룡현이라고도 하며 목천면 동리로 넘어가는 고개. 비룡산천의 명당이 있었다고 하며, 이곳이 구상지지(아홉 재상이 날터) 명당이라 한다. -병풍바위 : 평풍암, 양달전지 뒤에 있는 바위 모양이 병풍 같다. -물탕골 : 음달전지 뒤에 있는 골. 동네사람 들이 목욕하는 물탕이 있다. -물똘굴 : 구름다리 호덕 뒤에 있는 굴. 북면들에 물을 대기 위하여 호덕 뒷산에 굴을 뚫고, 목천 용연저수지의 물을 끌어와 북면들의 농사를 짓고 있다. 목천 저수지 물이 넘어오는 굴을 물똘굴이라 한다. -매봉 : 응봉 양달전지 서쪽에 있는 산. -노고석 : 병풍바위 뒤에 있는 바위. 늙은 할머니처럼 생겼다. -구름바위 : 양달전지 앞에 있는 바위. 바위가 줄로 비켜 서있는데 마치 구름 뜨는 것 같다고 한다. -강당터 : 강당골. 양달전지 뒤에 있는 골. 한산 이 씨가 강당을 짓고 후진을 양성했다 한다. -호덕고개 : 호덕에서 목천면 동리로 넘어가는 고개. 이곳에 철을 다루던 곳이 있다. -구절골 : 구절은 옛 은석사가 이곳에 있었다 한다. -왕대골 : 사기점 동쪽에 있는 골. -음달전지 : 전지 음달쪽에 있는 마을. 은석산 밑이 된다. -전지 : 호덕 동북쪽에 있는 마을. 전나무가 많이 있었다 한다. 종이를 생산했다는 설도 있다. -비룡 : 용암리에서 제일 아래에 있는 마을. -호덕 : 초등학교가 있는 마을로 조선 초기 목천 향교가 있었던 곳이다. 향교 말이라고도 하며 내(川)쪽으로는 읍 서울 거리라 부르는데, 조선조 초 읍치지(邑置地)이다. 호덕과 비룡사이 옥밭이란 곳이 있는데 목천현의 옥(木川縣 獄)터 자리라 한다. -개미골 : 호덕골 위에 있는데 불개미가 많다. ▲오곡리(梧谷里) 목천군 북면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으로 와곡리와 오동리가 병합하여 오동리의 오자와 와곡리의 곡자를 병합하여 오곡리라 하고 북면에 편입되었다. -신자경묘 : 오곡리 산 58번지 신자경묘. 도문화재 기념물 69호로 지정되었다. -상가마골 : 가마를 타고 행차하는 형국의 명당이 있다고 한다. -죽실골 : 봉황이 대나무 열매를 먹고 이곳에서 살았다고 한다. -신기선 집터 : 문헌공 신기선(申箕善) 대감이 살던 집터가 오동촌 중간에 있는데, 집은 헐고 열호(十戶)를 지었다 한다. 마을회관 서북쪽 언덕 파란 지붕을 한집 자리. -고담골 : 오동촌 동쪽에 있는 골짜기. -물탕골 : 오동촌 북쪽에 있는 골. 봉황산 밑이 되는데 높이 3m로 폭포의 물탕이 있다. -봉황산 : 오동촌 뒤에 있는 산. 매우 수려하고 모양이 봉황새와 같다고 한다. -쇠로릿들 : 왜골 서쪽 고개 넘어 있는 큰 들. -서근배미 고개 : 오동촌에서 병천면 봉황리 서근배미로 넘어가는 고개. -오동촌 : 오얏골 위 동쪽에 있는 마을. 뒤에 봉황산이 있는데 봉황새는 오동나무가 아니면 앉지 않는다는 뜻에서 오동촌이라 하였다. -오얏골 : 와곡, 왜골, 와골이라고도 하며 오곡리에서 가장 큰 마을 기와점이 있었다. -먹으넘이 : 오동촌에 있는데 먹다 남은 터라 한다. ▲사담리(沙潭里) 목천군 북면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으로 상사리 사담리가 병합하여 사담리라 하고 북면에 편입되었다. -동학군 사형처 : 동학군을 관군이 붙잡아 죽인 후 사담리 북쪽 냇가 큰 느티나무 밑에 웅덩이를 파고 묻었다 한다. 현재는 논으로 되어 있다. -이어담(鯉魚潭) : (전설) 잉어못이라고도 하는데 냇물이 깊어서 못과 같다. 성종 때 효자 서만(徐萬)의 아버지가 병이 들어 잉어를 먹고 싶다 하므로 효자 서만이 이 못에 와서 얼음위에 무릎을 꿇고 하늘을 보며 비는데, 얼음이 깨지면서 잉어 네 마리가 솟아 나와서 아버지께 두 마리를 고아 드렸다. 아버지가 그 잉어를 먹고 병이 완치되었으므로 두 마리는 다시 이 못에 넣어 살려주었다 한다. -벌사고시 : 하사. 사담이라 하고 사고시 아래쪽 벌판에 있는 마을. -골사구지 : 상사. 상사리라고도 하며 사고시 안쪽에 있는 골. -글씨바위 : 효자 서만 정문자리 위에 둥글고 큰 바위에 고둔(古芚) 글자가 새겨져 있는데, 이 글자를 알아보는 사람은 큰 재수가 있다 한다. 장수가 이 바위를 무릎에 올려놓고 글을 새겼다는 전설이 있다. -사담 : 벌사고시이며 마을 이름이기도 한데 세종 때 사기소가 있었고, 이어 담이 있었으므로 사기소의 사자와 이어담의 담자를 택하여 사담리라고 한다. -양천허씨 효자묘 : 벌사구시 북쪽 내룡에 양천 허씨 효자 허적, 허조 묘가 있다. -열녀 조씨 정려 비 : 동네 앞 길가에 있는데, 이춘의 처로 풍양 조씨이며 부군의 묘에서 풀을 뜯다 죽었다고 전한다. 200여년 이곳을 지키다가 2010년경에 묘소로 옮겼다 한다. -통미 : 사고시 서쪽 내 건너 외따로 있는 산. -장군봉 : 사고시 동쪽에 있는 산. 장군대좌의 명당이 있다고 전하여 내려오고 있다. -정문거리 : 잉어 못 위쪽에 있는 길. 효자 서만의 정문이 있었는데 없어지고 부락에서 시멘트로 효자 서만 정문지라는 표식을 해놓았다. -일인헌병 : 병참기지. 일인의 헌병 병참기지가 이곳 벌사구시에 있었으며, 그 후 헌병 분견대가 있었고 북면 면사무소가 있었다. 앞산에서 일인 헌병들이 의병을 여러 명 죽였다고 한다. -백토재 : 사기의 원료인 백토가 있는 재. ▲양곡리(陽谷里) 목천군 북면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으로 변정리, 양곡리가 병합하여 양곡리라 하여 북면에 편입되었다. -북박골 : 골에 바위가 북처럼 생겨 북바위라 하고, 이 골에 북바위가 있다 하여 북박골이라 하였다. -신잠(申岑) : 양곡리에 있으며 그 안에 화랭이 펀덕이라는 곳이 있다. 화랭이 댕묘가 있는 곳이라고 하며, 부처 댕이가 있고 공을 차던 공 펀덕이 있다. 예전에 신라 화랑들의 묘인 듯 싶다. -꾀고리봉 : 베장골 남쪽에 있는 산. 매우 수려하다. -양곡리 : 베장골이라고도 하는데 비록 산중이나 넓게 퍼져서 양지 바른 곳이므로 베장골 변정이라 한다. 순종 때 학자 류영무(柳榮茂), 보국 조경호(趙慶鎬), 고종 때 효자 류봉석(柳鳳錫)이 나서 유명하다. -어두암(漁頭岩) : 어두머리라하며 고기 머리 같다. -삼성고개 : 웃말에서 병천면 봉황리의 삼성으로 넘어가는 고개. 일명 성현이라고도 한다. -돌목이고개 : 베장골에서 병천면 봉항리의 돌목으로 넘어가는 고개. 일명 석항 현(峴)이라고도 한다. -얹힌 바위 : 호랑이 바위라고도 하는데 돌목고개 남쪽에 있는 고개. 큰 바위 위에 또 큰 바위가 얹혀있고, 그 밑에 굴이 있는데 호랑이가 새끼를 쳤었다고 한다. -어댕이골 : 이 골 안에 거먹바위 청중박골 벌안 꽤자 고양이 재가 있다. -장승백이 : (전설) 큰 기와집이 백여 채가 있었다고 하는데, 큰 구렁이가 이 모퉁이에 살면서 장마 때 마다 나타나 냇물에서 구렁이가 몸으로 한 쪽을 막으면 다른 한쪽으로 내가 생겼다. 또 다른 한쪽을 막으면 그 반대쪽으로 내가 생겨서 내가 이쪽으로 났다가 저쪽으로 났다가 하므로 동네가 없어졌다고 한다. -점골 : 사기를 굽던 가마터가 이곳에 있었다고 한다. ▲납안리(納安里) 목천군 북면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으로 도촌, 납안리 일부를 병합하여 납안리라 하여 북면에 편입되었다. -부등이들 : 도촌 아래에 있는 들로 부등넝쿨이 많이 있다고 한다. -씨앗골 : 도촌 뒤에 있는데 모양이 씨앗처럼 생겼다 하며 큰 골 뒤 작은골이다. -사리목 고개 : 도촌에서 성거읍 천흥리로 넘어가는 고개. 길의 모양이 꾸불꾸불 하여 새끼를 사리어 놓은 것 같이 생겼는데, 속설에 사리목과 통한다하여 혼행길은 일체 다니지 아니했다. 대원군 섭정 시 천주교인들 박해 할 적에 이곳에서 은신한 사람이 많으며, 경상 전라도의 사람도 이곳에서 피난했다. 교인들의 연락처로 이용됐으며, 불란서 신부도 세 명이나 있었다 한다. -수촌(秀村) : 뺄 터. 납안리 아래쪽에 있는 마을로 산수가 수려하고 빼어났다고 하여 뺄 터라고 했다 전한다. -우물 목 고개 : 도촌에서 입장으로 넘어가는 고개. -산신제 : 도촌, 시월중 택일하여 생기 복덕을 보아 닫는 사람으로 제관, 축관, 고양주(제물 및 제를 주관하는 집)가 부락민 다수와 통돼지 삼색실과 메를 제물로 놓고 지냈다. 각각 가가호의 소지를 올려주고 밤 10시~11시 사이에 지내며, 제를 지낸 음식은 나누어 먹는다. 제관들은 몸을 정결히 하고 며칠을 지내야 하며 목욕하고 지낸다. -도촌(道村) : 소학동(巢鶴洞)이라고도 하며 납안리 서쪽에 있는 마을로, 사리목과 가깝고 옛날에는 상북에서 제일 큰 부락이었다고 한다. 대원군 섭정 시 병인박해 때 경상도 내포방면 천주교 교우들이 많이 살았고, 불란서 페롱권신부, 리델이신부, 칼레강신부 등이 이 근천에서 피신해 있었다고 한다. 이때 천주교인 중 5인이 체포되어 공주 영문에서 사형되었다 한다. 사형자는 최 베드루 천여, 최 라자로 종여, 배문호, 고요셉, 체서방 며느리로 목천군 북면 소학동에 살다가 본 읍 포교에서 잡혀 공주로 옮겨 11월 8일 사형이 집행되었다. -납안이(納安) : 도촌 아래에 있는 마을로 위례성 전투에서 전사한 무덤이 수 백기 있는데 돌무더기로 되어 있다. -산신제 : 납안 부락에서 10월 또는 정월에 택일하여 지내며 생기 복덕을 보아 닫는 사람으로 제 지낼 사람을 선정하며, 돼지머리 삼색 실과 등을 제물로 하고 각호의 소지를 올려 주며 밤 10시경 제를 올린다. 제를 지낸 음식은 나누어 먹는다. 선정된 제관들은 탈 없이 지내야 하며 몸가짐을 삼가 한다.
-
[기획특집] 천안의 지명유래 ㉑[천안신문] 본보는 지난 151호부터 천안 각 읍면동의 지명유래에 대한 연재를 진행중이다. 천안이라는 지명에 대한 기록은 고려 태조 13년인 930년 8월 8일 기해 일에 고려태조가 대록에 내려와 동서도솔과 탕정의 일부와 사산의 일부와 대록의 일부를 병합하여 천안이라 하고 도독부를 둔데서 유래한다. 대록은 지금의 목천이요, 사산은 직산이며, 동도솔과 서도솔은 천안의 일부이며, 탕정은 온양 탕정의 일부다. 각 지역에 내려오는 천안의 지명은 1988년부터 이원표 선생이 동부 6개 면을, 1987년도부터 오세창 선생이 천안시를 조사해 1960년경 한글학회에서 발행된 ‘한국 지명총람’을 참고로 가감 수정해 동부 6개면은 1990년 천안군에서 ‘역사의 현장’으로 출간되었으며, 천안시는 1989년 천안문화원에서 ‘천안의 지명’으로 출간하였다. 그 후 1999년 천안시 문화원에서 시와 군에서 발행된 것을 합하여 ‘천안의 땅 이름이야기’로 출간했다. 이번 연재는 이를 바탕으로 했으며, 일부 내용은 천안 향토사학자 김종식 선생이 재조사를 통해 가감하였음을 밝혀둔다. <편집자 주> ▲소사리(所仕里) -고려성(高麗城) : 연기군 전의, 천안시 성남, 목천의 경계인 고려산에 작은 성과 고려 왕건의 사당이 있었는데 지금은 모두 없어지고 그 흔적만 남아 있다. -당골 : 예전에 당집이 있었다고 한다. -우골 : 와우형의 명당이 있다고 전한다. -삽절 : 예전에 절이 있었다고 한다. -작두나무골 : 약으로 쓰는 큰 작두나무가 있는데 신경통에 좋다고 한다. -큰덕골 : 동네 위 큰골을 말한다. -각골 : 소뿔처럼 뾰족하다. -마당골 : 동네 위의 마당같이 넓은 골을 말하는데, 예전에 군인들이 모여 훈련하던 곳으로 전국에 마당재 또는 마당골 등으로 불리우는 지명이 많이 있다. -애미기고개(아야목) : 옛날 고려성에서 군인들이 물이 없어 목이 말라 ‘아이고 목이야, 아이고 목이야’ 하다가 죽었다고 하여 아야목인데 애미기고개로 변음되었다고 한다. -송골 : 소나무가 많아서 생긴 이름이라고 한다. -문석골 : 문지방 형상을 하고 있는데 이곳에서 살면 큰 부자가 된다고 한다. -후미고개 : 고개가 험하고 후미져서 예전에는 도적들이 많았고, 고개 밑에 작은 원이 있어 행인들이 쉬어 갔다고 한다. -향나무골 : 큰 향나무와 정자가 있었는데 지금은 사라졌다. -정자터 : 초가로 이은 둥그런 정자가 20년 전까지 있었는데, 관리가 어렵고 비가 새고 돌보는 이가 없어 허물어 버렸다. -서낭당 : 예전에 서낭이 있었는데 지금은 그 흔적이 없다. -부엉바위 : 이 바위에 부엉이가 앉아 울어서 동네에서 그렇게 부른다. -고무태봉(胎封) : 소사리 북쪽에 있는 산으로 고려 때 왕실의 태를 묻었다고 한다. ※ 태봉(胎封)이란 왕실의 태가 묻힌 곳을 말하며, 왕실이란 임금의 집안을 말한다. -곰직이고개 : 미소리고개라고도 한다. 소사리에서 풍세면 미죽리 곰직이로 넘어가는 고개이다. -굴머리 : 소식골의 서쪽 방향에 있는 들머리에 있는 마을, 원당마을과 소식골마을의 중간에 있다. -굴머리내(川) : 소식골 동남쪽 고려성에서 발원하여 굴머리마을 동쪽을 지나 맹곡천으로 들어가는 내이다. -대골 : 소사리 위쪽에 있는 골짜기로 큰골이다. -띳골 : 부처당 밑에 있는 골짜기로 띠가 많았다고 한다. -부처댕이 : 소사리 북쪽에 있는 골짜기인데 부처가 있었다. -원당리(院堂里) : 행인과 객들이 쉬어가던 원(院)이 있었다. -한티고개 : 소식골 동쪽 성남면 한티로 넘어가는 고개이다. -살찬지(殺簒地) : 교리 박자응과 헌납 심치청이 말을 세우고 언덕에서 쉬고 있을 때 한 호한이 말을 몰아 앞을 지나가는데 극히 무례하였다. 종자가 꾸짖어 말하기를 달관(達官)이 여기에 계신데 무례함이 이와 같으냐? 라고 하자 이에 말이 놀라 항곡에 떨어져 죽으니 사람들이 그 자리를 살찬지라고 이름하였다. 소사리 입구에 있다. -소식골 : 죽었던 사람이 살아났다 하여 소식(蘇息)골이라고 한다. -범바위 : 범이 나타나 바위 위에 걸터앉아 있는 모습을 지나가던 사람이 보았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여수(여우)나무골 : 여우가 많이 살고 있던 곳(죽은 어린아이들의 무덤인 애장에 여우가 나타나 모두 파헤쳐 붙여진 이름)이다. -주막거리(지금 목천휴게소 자리) : 예전에는 이곳에 주막이 있어 주막거리라고 했는데 지금은 목천휴게소가 들어서서 주막을 대신하고 있으니 이름이 맞아떨어진 셈이다. 옛 어른들의 선견지명은 참으로 알 수 없고, 그저 감탄할 뿐이다. ▲남화리(南化里) 남화리는 목천군 읍내면 남동과 북동이 1914년 행정 구역 통폐합에 따라 이루어진 마을인데, 속칭이 남벌이다. -고양이바위 : 남화리 동구 밖 백호지점 부근에 있던 바위다. 고양이가 입을 벌리고 있는 형상으로 이에 얽힌 전설은 다음과 같다. 예전에 홍장자라는 부자가 이 마을에 살고 있었는데 어떻게 잘못하여 종을 죽였다. 이를 본 종의 아들은 복수할 것을 결심하고 이를 갈며 이 집에서 도망쳐 나와 먼 곳으로 가서 지술(地術)을 배운 뒤 이 동네를 찾아왔다. 어릴 때에 떠난 관계로 알아보는 사람이 없었다. 홍장자라는 부잣집에는 불평 많은 며느리가 있었다. 잘 살기 때문에 손님이 자주 찾아오므로 손에서 물마를 사이가 없어 손가락 사이에 진물이 날 정도라 불평이 많았던 것이다. 이때 종한테서 동네에 용한 점술(占術)과 지술(地術)을 보는 사람이 나타나 사람들이 앞을 다투어 모여든다는 말을 듣고 식구들 몰래 종과 같이 그 사람을 찾았다. 점술쟁이는 아무리 부자라도 손에 물이 마를 사이가 없으니 팔자가 기구하다고 하면서 손에 물을 묻히지 않고도 잘 살게 될 방도가 있다고 말했다. 홍장자 며느리는 혹하여 그 방도를 알려 달라고 청하였다. 점술사는 이곳 남벌의 뒤에 있는 노적봉(露積峯)이 삼태기에 고무래로 곡식을 담아 쌓은 형이라 앞의 산들이 성난 쥐와 같아서 곡식을 훔쳐 먹으러 들어오려고 하다가도 입구에 고양이가 입을 벌리고 있어 잡혀 먹힐까 두려워 못 들어오기 때문에 홍장자가 부자로 잘 산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고양이 바위만 없애면 홍장자가 망할게 분명하여 사실과 반대로 바꾸어 말하여 주었다. 지금 늙은 쥐가 뒷산에 가득하여 곡식을 자꾸 파먹으므로 손에 물 안 묻히는 부자가 되려고 해도 안 된다고 하면서 고양이바위를 부숴버리라고 한 것이다. 늙은 쥐들이 나가려 해도 고양이 때문에 못 나가니까 고양이만 없으면 쥐들이 다 나가 버려 손에 물을 안 묻히고도 부자로 살 수 있는 소원이 성취될 수 있을 것이라고 하면서 남에게 이야기하거나 상의하지 말고 속히 없애는 게 상책이라고 덧붙였다. 이 말을 들은 홍장자 며느리는 집에 와서 종과 아랫것들을 모아놓고 밤사이 고양이바위를 없애도록 시키고, 집안 어른들에게는 일절 말하여서는 안 되며 발설하는 자는 엄히 문책하겠다고 하였다. 하인들이 밤새껏 바위를 부쉈는데 새벽에서야 바위를 완전히 없앨 수 있었다. 그 후에는 홍장자는 망해 어디론가 떠나버리고 동네에도 돌림병이 돌아 장정들이 죽어 나가는 일이 벌어졌다. 동민들이 돌을 모아 다시 고양이 형상같이 만들어 놓자 비로소 동네가 평안해졌다고 한다. 모아놓은 돌이 자주 무너져 근래는 시멘트로 발라 놓았는데 독립기념관이 생기면서 완전히 없어졌다. -남동(南洞) : 남화리 남쪽에 있던 마을로 동민(洞民)들은 아랫말이라고 하였다. 독립기념관 상징탑 앞에 방죽이 있었다. -북동(北洞) : 남화리 북쪽에 있던 마을로 동민들은 윗말이라고 하였다. -상정승펀던 : 통미 서쪽에 있는 아늑한 골인데 명종 때 정승 상진(尙震)이 이곳에서 잠시 살았다는 설이 있다. (산 20번지) -정승봉 : 상정승펀던 뒷산이 정승봉인데 독립기념관이 들어서면서 없어졌다. -잿가마터 : 남화리 입구에 있었던 기와가마터인데 독립기념관이 들어선 후에 어디인지 분간할 수 없게 되었다. -통미 : 남벌 뒤 흑성산 아래에 볼록 솟아 있는 봉우리다. 그 밑에 현재 독립기념관 추모(追慕)의 자리가 있다. -고무래봉 : 독립기념관 상징탑 맞은편에 있는 자그마한 봉우리 이름이다. -장승배기 : 독립기념관과 주차장 사이인데 옛날에 장승이 서 있었다고 한다. -토성 : 백제 때 토성으로 독립기념관 주차장 옆 그리고 목천중.고등학교 앞에 있었다. 주차장 공사로 없어지고 흔적만 남아 있다. (전설) 옛날 이 토성 부근에 토성안이라는 곳이 있었다. 이곳에 큰 동네가 있는데 사람이 꽤 많이 살았다고 한다. 어느 날 아버지와 아들이 뒷동산으로 나무를 하러 갔다. 나무가 울창하고 커서 밑에서는 가지를 쳐낼 수가 없으므로 아들이 나무에 올라가 도끼로 나뭇가지를 잘랐다. 아버지는 밑에서 아들이 잘라 내린 나뭇가지를 차곡차곡 전을 치고 있었다. 그런데 나무 위에서 나뭇가지를 자르던 아들의 도끼 날이 그만 자루에서 빠져 아버지의 머리 정수리에 떨어지고 말았다. 아버지는 그 자리에서 즉사하였다. 나라에서는 고의, 과실 여부를 불문하고 아버지를 죽인 자가 이 고을에서 태어났다고 하여 이 고을을 폐하고 전의현(全義縣)에 붙였다. 그리고 동네는 폐동(廢洞)시켰다고 한다. ▣북면(北面) 본래 목천군의 동북쪽이 되므로 북면이라 하여 회촌(檜村), 운암(雲岩), 호덕(好德), 비룡(飛龍), 내룡(內龍), 장항(獐項), 역촌(驛村),동지(東芝), 채동(蔡洞), 은석(銀石), 대산(垈山), 소평(小坪), 대야(大冶), 곡간(曲干), 매당(梅堂), 송정(松亭), 운계(雲溪), 구항(拘項),와곡(瓦谷), 오동(梧桐), 상량(上梁), 만지(晩止), 동곡(東谷), 문현(門峴), 변정(卞正), 양곡(陽谷), 전곡(田谷), 내명덕(內命德), 외명덕(外命德), 구동(龜洞), 사창(社倉), 상사(上沙), 사담(沙潭), 삼용(三龍),군단(軍蛋), 심곡(深谷), 납안(納安), 도촌(道村)을 관할하다가 1914년 군면 통폐합에 따라 천안군에 편입되어 오곡, 연춘, 상동, 은지, 용암, 매송, 명덕, 사담, 양곡, 전곡, 납안, 운용 대평등 13개리로 개편되어 천안군 북면이 되었었다. 동쪽은 병천면, 남쪽은 성남면, 북쪽은 입장면과 경기도, 충청북도, 서쪽은 목천면에 접하고 있다. ▲연춘리(延春里) 목천군 북면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으로 내룡리, 장항리, 역촌 일부가 병합하여 역촌의 연춘역 이름을 따서 연춘리라 하고 북면에 편입되었다. -연춘역자리 : 지금 아파트를 짓고 있는 서쪽 냇가에 있었는데 이곳을 마우당 걸이라 하며 선정비 밑 송덕비가 여러 개 있었는데 현재는 없어지고, 역촌 사람들이 당제를 지내던 당집도 있었으나 농지정리로 논으로 변해 버렸다. -내룡 : 내룡리라고도 하는데 안마을이다. -장항 : 놀미기라고도 하는데 노루목처럼 생겼다고 한다. 놀미기라고 하는 마을이 있다. -면사무소 터 : 역촌 서쪽으로 국도 위 산 밑인데 1914년 당시 면사무소가 있었다. -복구정주점 : 임진왜란 후 재정난으로 원을 폐하고 주점을 둘 때 이곳에도 복구정 주점이 있었는데 주점이 번창하였다 한다. -복구정 : 내룡 동쪽 길옆에 있는 정자 큰 바위가 거북이가 엎드려 있는 것처럼 생겼는데 그 옆에 정자를 지었다. 선조 때 강릉김씨 김구년(金九淵)이 세웠는데 수석이 매우 아름다우므로 영조 때 문장 신광수, 죽동 이인실, 만화 유진한, 구정 이세희 등이 모여서 시를 지으며 놀았다. 그 후 큰 장마로 없어졌는데 1964년 강릉 김씨 종중에서 다시 세웠으며, 바위 옆면에 숙종 때 학자 도암 이재(陶庵 李縡)의 시가 새겨져 있다. 로목 유고의 (老木 有古意) 노목은 옛 스런 정취를 지녔고 청천 류불정 (淸川 流不停) 맑은 냇 물은 쉼 없이 흐르네 추양 무한사 (秋陽 無限思) 가을 볏 아래 끝없는 생각에 독상 복귀정 (獨上 伏龜亭) 홀로 복구정에 오르노라 라 각자되어 있다. 향토사 연구가 김종식이 탁본하고 권선길 선생께서 번역하였다. -도룡굴 : 내룡 북쪽에 있는 골, 마을이 있었다. ▲상동리(上東里) 목천군 북면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으로 상량리, 만지리, 동곡리, 문현리 병합하여 상량리의 상자와 동곡리의 동자를 따서 상동리라 하고 북면에 편입되었다. -장터갱변 : 상동리 서남쪽으로 냇가의 지명인데 북면에서 내려오는 병천천과 목천에서 흘러오는 산방천이 합류되는 지점으로, 옛날에 이곳에서 장이 서 냇가에서 이루어졌으므로, 장터 갱변이라 하는데 원래의 아내 장터의 근원지가 이곳이라 한다. (전설) 해가 지면 쉬어가라는 뜻인데 옛날에 이곳에서 등 너머 병천 가전리 용연이라는 곳에 큰 연못이 있고 이무기가 살았는데, 해가 넘어가면 인가를 해치므로 희생자가 많이 생겨, 관에서 행인을 보호하기 위하여 이곳에 원을 두고 해가지면 통제하여 사람을 이곳에 수용하기 위하여 원을 설치했다고 전해오고 있다. -문다라니 : 문달안, 문현이라고도 하며 갈미봉 밑에 있는 아늑한 마을. 옛날에 진장자 남매가 이곳에 살면서 고개턱에 문을 달고 행인이 여닫고 다니게 하였다고 한다. 이 고개를 문달안이 고개라 한다. -상량골 : 돌데미 동쪽 들 가운데 있던 마을인데 마을이 없어지고 농지 정리가 되어 있다. -돌데미 : 석담이라고 하는데 국도변에 있으며 돌담이라 하나 돌은 없고 산양부리에 큰 돌이 박혀 있다. -비석거리 : 비석동 돌데미 옆에 있는 마을. 선정비가 많이 서 있었는데 현재는 많이 없어지고 한개만 남아 있다. 6.25 직후 목천면사무로 이전했다. -동곡 : 돌데미 동쪽 산 밑에 있는 마을. -남매방죽 : 문다라니 앞에 방죽 위아래 두 개가 있는데 예전에 진장자 남매가 파서 그 아래 들녘에 물을 댔다 한다. -불탄내 : 큰 샘이 하나 있어 물이 매우 많이 솟아 그 아래 들이 이 물로 농사를 지었다. 농지정리로 없어졌다. (전설) 이 부근에 큰 동네가 있어 이 샘물을 먹고 살았는데 정유재란 때 왜군이 직산 전투에서 크게 패하고 이곳으로 해서 청주 쪽으로 도망가면서 불을 놓아 동네가 다 타버렸다. 불길이 하늘을 찔렀다 하며 마을은 없어지고 우물은 넘쳐 내같이 흐르므로 불탄 내라고 한다. -돌탄거리 : 탄돌이 많이 뒹굴어 다니므로 돌탄거리라 한다. 농지정리로 없어졌다. ▲은지리(銀芝里) 목천군 북면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으로 동지동, 채동, 은석리가 통합하여 은석리의 은자와 동지동의 동자를 따서 은지리라 하고 북면에 편입되었다. -박문수(朴文秀)묘 : 영성군묘. 은석사 뒤에 있는 영조 때의 암행어사로 유명한 박문수 묘소가 은석산 정상부근에 있다. (전설) 묘가 은석산 거의 상봉에 있는데 현재 위치에서 병천 장이 내려다보이며, 박문수의 유언에 ‘병천 장이 세 번 옮기면 나의 묘를 아래로 옮겨 달라’고 했는데, 현재 병천 시장이 두 번 옮겼다고 전한다. -박문수 묘비(朴文秀 墓碑銘) 천안시 북면 은지리 은석산 정상 남쪽에 있는 박 어사의 묘소는 50.5cm×134cm이며 1816년에 세워졌다. -은석골 : 은석리라고도 하며 은석사 밑에 있는 마을. 고종 때 참판 박봉빈(朴鳳彬)이 살았다. -채동 : 은석골 서북쪽에 있는 마을로 고려 때 이곳에 채정승이 살았다고 하며 채상유지가 채동 뒤 날근 터에 있다. -은석사 : 은석산에 있는 절. 신라 제 30대 문무왕대 원효대사가 창건했다 하며 인조 때 문장 백곡 김득신, 월봉 이극태, 학촌 권현, 사정 류지림, 도원 김만중, 송정 김대년, 백은 김면, 전은 한빈, 만호 황곡림이 이곳에 와서 은산 시사를 두고 때로 문장을 강론했으며, 영조 때 국봉 남취흥, 만화 류진한, 무경 김중산, 류도천, 어은 류철한, 황성 유도행, 김양행, 김종후 등이 또한 계속하여 시와 문학을 연마하였으므로 더욱 유명하였다. -택사샘 : 웅덩이 통미 동쪽에 있는 웅덩이. 부근에 택사가 잘되어 택사를 심었었는데 현재는 농지정리로 없어졌다. -강당골 : 은서과 채동 중간에 있는 골인데 강당이 있다. -동지갱이 : 통미 뒤에 있는 들. 옛 집터가 있었는데 구리와 주석의 광(창고)이 있었다. -통미 : 은지리와 비룡사의 들에 있는 외딴 산. 태봉이라고도 한다. 실제로 얼마 안 되는 이산의 정상에 올라 가보면 백제시절의 이전인 토기 편들이 다양하게 있으며 태를 묻은 흔적이 있었다. 이산의 주인이 집을 지으면서 전부 훼손해버려 아쉬움이 있다. 무지에서 오는 일이라 하겠다. (전설) 비룡앞 내(川)건너 은지리 지역에 있는 산을 통미라고도 하고 개금산이라고도 부르는데, 이 산이 옛날 큰 홍수 때 안성 땅에서 떠내려 오다가 이곳에 걸치어 있는 것이라 한다. 그래서 안성원이 자기네 땅이라고 매년 개금 두말을 도지로 달라하여, 목천원은 개금 두 말씩 매년 바쳤는데 이 산에서 나오는 개금이 도무지 도지 줄 것도 안 나오고, 그렇다고 보태 줄 수도 없고 매년 도지 주기도 번거로우므로 안성원님에게 도지를 못 바치겠으니, 산을 도로 가져가든지 아니면 도지를 면제해 달라고 통보하였다. 안성 쪽에서 답변이 오기를 그럴 수는 없다고 하면서 못 받치겠으면 재(타고 남은 부산물)로 새끼를 꼬아 이 산을 붙들어 매놓으면 가져가겠노라고 하였다. 목천원은 바치지 않을 수도 없고 그렇다고 재로는 도저히 새끼를 꼬아 묶어 놓을 수도 없는지라 고심을 하고 누워 있는데, 목천원의 다섯 살 된 아들이 아버지가 고심하는 것을 보고, 아버지 무엇 때문에 그렇게 고심하고 누워 있느냐고 여쭈어 보았다. 아버지 대답이 “아이들은 알 것이 못된다고 하니까” 아들의 말이 “백지장도 맞들면 낫다고 하는데 소자가 알아서는 안 됩니까” 하였다. 이 말을 들은 아버지인 원은 자초지종 내용의 이야기를 아들에게 말을 하였다. 아들은 걱정할 것 없습니다. 제가 좋은 방도가 있으니 저에게 맡겨 달라고 청하였다. 원은 어린 것이 무슨 통쾌할 방도가 있을까 하고 그냥 승낙하였다. 아들은 나가더니 동네 사람을 전부모아 놓고 집에 가서 볏짚 한 짐씩 지고오라 하였다. 볏짚을 한 짐씩 지고 동네 사람이 모이니 그 볏짚으로 동아줄을 틀라고 시켰다. 다 틀은 동아줄을 산을 몇 바퀴 돌려 묶어놓고 아버지에게 와서 이제 다 되었으니 안성원에게 산을 재로 묶어 놓았다고 가지고 가라는 통보를 하라고 하였다. 아버지가 나와 보니 재로 묶어 놓은 게 아니라 동아줄로 묶어 놓았으니 되겠느냐고 하였다. 아들의 말이 “안성 원이 오기 전에 재로 바꾸어 놓을 수 있습니다” 하였다. 원은 사람을 시켜 안성 원에게 산을 묶어 놓았으니 가져가라고 통보하였다. 안성원은 재로는 도저히 새끼를 꼴 수가 없는 게 분명한데 꼬아 묶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다가, 통보인의 말에 묶었다고 하므로 가서 보기로 하고 목천을 향하여 오는데, 안성원이 온다는 기별을 받은 목천원의 아들은 안성원이 당도할 무렵 동아 밧줄에 불을 댕겼다. 동아줄은 타서 재가 되고 그대로 있으므로 재로 새끼를 꼰 것 같이 되었다. 미리 불을 놓으면 재가 날아가기 때문에 늦게 불을 놓은 것이라 한다. 안성원 이 당도하여 현장을 보니 정말로 새끼를 재로 잘 꼬아 묶어 놓았으므로 재주를 탄복하고 이 통미 산을 목천에 주고 갔다한다.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목천 주민들은 매년 짚을 모아 동아줄을 틀어서, 북면에서 내려오는 병천천을 기준으로 하여 동서기 나누어 줄다리기를 했는데, 차차 규모가 줄어서 나중에는 목천과 북면으로 나누기도 했다가 광복될 무렵까지 이어져 왔다고 한다. -신촌말: 채동 서쪽에 새로 된 작은 마을.
-
[기획특집] 천안의 지명유래 ⑳[천안신문] 본보는 지난 151호부터 천안 각 읍면동의 지명유래에 대한 연재를 진행중이다. 천안이라는 지명에 대한 기록은 고려 태조 13년인 930년 8월 8일 기해 일에 고려태조가 대록에 내려와 동서도솔과 탕정의 일부와 사산의 일부와 대록의 일부를 병합하여 천안이라 하고 도독부를 둔데서 유래한다. 대록은 지금의 목천이요, 사산은 직산이며, 동도솔과 서도솔은 천안의 일부이며, 탕정은 온양 탕정의 일부다. 각 지역에 내려오는 천안의 지명은 1988년부터 이원표 선생이 동부 6개 면을, 1987년도부터 오세창 선생이 천안시를 조사해 1960년경 한글학회에서 발행된 ‘한국 지명총람’을 참고로 가감 수정해 동부 6개면은 1990년 천안군에서 ‘역사의 현장’으로 출간되었으며, 천안시는 1989년 천안문화원에서 ‘천안의 지명’으로 출간하였다. 그 후 1999년 천안시 문화원에서 시와 군에서 발행된 것을 합하여 ‘천안의 땅 이름이야기’로 출간했다. 이번 연재는 이를 바탕으로 했으며, 일부 내용은 천안 향토사학자 김종식 선생이 재조사를 통해 가감하였음을 밝혀둔다. <편집자 주> ▲응원리(應院里) 응원리는 목천군 서면 응곡리와 원동리가 1914년 행정 구역 통폐합에 따라 이루어진 마을인데, 마을명은 응곡리의 ‘응’자와 원동리의 ‘원’자에서 유래된 것이다. ▶응원1리(원골마을) -산신제(山神祭) : 원골마을에서 지낸다. 정월 초순 생기 복덕일(生氣福德日)에 부정이 없는 사람이 제관이 되어 이 집 내외가 주관하여 지낸다. 소 발목과 삼색 실과와 떡을 차려 놓으며, 집집마다 소지를 올려 주는데 군인 간사람, 몸이 불편한 사람은 별도로 올려 준다. 제사를 지낸 후 마을 사람들은 함께 음식을 나누어 먹는다. -큰적골 : 제사 지낼 때 쓰는 적처럼 생겼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작은적골 : 큰적골 옆의 작은 골을 말한다. -방앗골 : 이곳에서 살면 부자가 된다고 한다. 옛날에 큰 부자가 이곳에서 살다가 이사 간 후에 방앗간이 남아 있었다고 한다. -큰말림 : 동네 뒤의 큰 고랑을 말한다. -산신당(山神堂)골 : 산신당이 있는 고랑으로 취암산(鷲岩山) 중턱에 있다. -할미바위 : 앞산 중턱에 있는 바위로 할머니 허리처럼 구부정하게 생겼다. 이 바위를 위하면 오래 산다 하여 노인들이 예전에 위했었다고 한다. -미륵대기밭 : 미륵같이 생긴 돌이 이곳에 있다. -송(松)골 : 소나무가 많이 있는 골이다. -납안들고개 : 납은현, 너분들고개, 납안현이라고도 하며 응원리에서 천안으로 가는 고개다. 넓은 돌이 있었다고 하며, 예전에 목천현(木川縣)에서 이곳에서 나는 은을 진상했다고 한다. -매봉 : 응봉이라 하기도 한다. 막실 뒤에 있는 산으로 모양이 매처럼 생겼다. -원골 : 원동이라고도 하며 응원리에서 가장 큰 마을이다. 조선조(朝鮮祖)때 천안 가는 길목으로 고개가 험하여 작은 말원(末院)이 있었다. ▶응원2리(막실) -우물제(井祭) : 막실마을에는 물이 귀하여 우물을 잘 위하던 풍습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매년 정월 첫 용날 저녁 5시경에 동네 모든 사람들이 모여 지낸다. -막실 : 응곡이라고도 한다. 원골 남쪽 매봉 밑에 있는 마을로 예전에 쇳일을 하던 사람들이 막(幕)을 짓고 일을 하였다고 한다. -가장(假葬)골 : 종안말 서쪽에 있는 골짜기. 어린아이가 죽으면 이 곳에 묻었다고 하여 애장골이라고도 한다. -소죽골 : 도장리(挑長里)와 경계인데 예전 이곳에서 쇠를 녹였다고 한다. -각(角)골 : 소뿔처럼 뾰쪽하게 생겼다. -말망봉 : 못골 남서쪽에 있는 봉우리로 말이 앞발을 들고 망을 보는 형국을 하고 있다고 한다. -못골 : 나반들(납안들)고개 남쪽에 있는 골짜기로 못이 있다. -숲거리 : 원골 앞에 있는 큰 길 냇가에 숲이 있었다고 한다. -말망골 : 예전에 이곳에서 말을 길렀다고도 하고, 용마부도형의 명당(明堂)이 있다고도 한다. -당(堂)골 : 옛날 이곳에 당집이 있었다고도 하고, 철을 담금질하던 곳이라고도 한다. -불무골 : 철을 녹이기 위하여 토둑에 풀무질을 하였던 곳이라고 한다. -젖바위 : 벼랑에 젖과 같이 튀어나와 있는데 잘 위하면 아들을 낳는다고 한다. 삼신바위라고도 한다. -장터골 : 장(場) 보러 다니던 사람들이 쉬어가던 곳이라고 한다. 예전에 이곳에 장이 섰다고도 한다. ▲삼성리(三省里) 삼성리는 목천군 서면 삼층리, 도리티리, 신성리, 산곡리 일부가 1914년 행정 구역 통폐합에 따라 이루어진 마을인데, 마을명은 삼층리의 ‘삼’자와 신성리의 ‘성’자에서 유래된 것이다. ▶삼성1리 -도리티 : 회리라고도 하며 도리티고개 옆에 있는 마을이다. 지금은 몇 호만 남아 있다. 미륵사라는 절이 있다. 옛날에 마을 앞에는 술집이 있었고 아래쪽으로는 모두가 논이었는데, 지금은 앞쪽에 숙박시설 등이 들어서고 아래쪽으로 예식장, 음식점, 목재소 등 상가가 들어섰다. -장(場)고개 : 천안장을 보러 넘어 다니던 고개이다. -신도(新道) : 신성, 삼거리를 아울러 이르는 이름이다. 옛날에는 신성마을과 지금의 부영아파트 입구 앞인 국도 1호선 변 7~8호가 살던 곳(지금은 천안-논산고속도로 신설로 인하여 여섯 집이 없어짐)까지의 지역을 신도라고 하였다. -요순산.도리티고개 : 천안중리 뒷산으로 해서 이어진 높은 산으로 선비들은 요순산이라 부르며 선문대 뒷산을 공자산이라 부른다. 선문대 뒷산아래 공자의 이름인 자를 딴 중리마을이 있다. 일인들이 큰 선비가 난다하여 도로를 개설하며 산의 맥을 끊어 놓아 선비가 나지 않는다 한다. 예전에는 높은 고개였는데 도로가 개설되어 훤히 뚫렸다. 6.25 사변 당시 북괴군과 미군이 접전을 벌이던 곳이다. 이곳에서 미군 34보병연대 마틴(martin) 연대장(대령)이 북괴군과의 치열한 전투를 지휘하다가 북괴군의 포를 맞아 장렬히 전사했다. 이를 기념하는 마틴공원이 길가(천안시 삼룡동 396-13번지)에 조성되어 옛일을 전하고 있다. ※도리티고개를 일명 양오리고개라고도 한다. 즉 도리티고개 정상에서 삼층까지가 오리(2㎞), 천안 삼거리까지도 오리(2㎞)라하여 양오리고개라고 불렀다. -고릉골 : 예전에 고씨 성을 가진 사람의 큰 무덤이 있었는데 없어졌다. 응원리와의 경계다. -용정고개 : 풍세면 용정리로 넘어가는 고개이다. -그르실 : 예전에 그릇점이 있어 그릇을 만들었다 한다. -도랫말 : 도리티 고개 밑에 있는 마을이다. 몇 가구가 살았는데 지금은 번화가가 되었다. -느티나무 : 수령 300년, 둘레 3m, 높이 15m 정도이다. -효자 유후양의 묘소 : 도리티고개 마루에 있는데 부모를 잘 모셔서 정려를 받았다. 효자 증 가선대부 호조참판 유공 지묘 후양(孝子 贈 嘉善大夫 戶曹參判 兪公 之墓 後揚). 창원 사람이다. -삼거리 : 도리티 아래에 있는 마을, 세 갈래 길이 있으며, 주막과 마방(馬房)이 있었다고 한다. -대장간 모퉁이 : 도리티 아래에 있었으며 대장일을 하던 곳이다. 이 부근에 철을 채취하던 곳이 있다. -부영아파트 단지 : 부영아파트 단지와 이웃 응원리 막실은 연추형(제비집 형국)이라 부자가 되는 자리라고 예전부터 지관들이 탐냈다고 하는데, 이곳에 큰 아파트 단지가 들어선 것을 보면 모두 맞는 듯하다. ▶삼성2리 -됫골 : 동네 뒤의 작은 골을 말한다. -모시골 : 예전에 작은 원이 있어서 선비들이 말을 타고 넘나들며 쉴 때 종자들이 쉬던 곳인데 종자들이 상전을 모시고 온다 하여 모시골이라 하였다. 지금은 천안-논산간 고속도로가 신설되면서 이곳에 남천안 인터체인지가 생겼다. 옛 지명이 예사롭지 않다. -갓골 : 동네 앞산으로 갓처럼 뾰쪽하다. -큰골 : 동네에서 제일 높은 산이다. -작은골 : 큰골 옆의 작은 고랑을 말한다. -조봉골 : 동네 앞의 높은 봉우리다. -샘골 : 산 밑에 샘이 있는데 물맛이 좋다. 옻 치료에 효험이 있다고 한다. -덕골 : 덕곡이라고도 하며 매봉 밑에 있는 골짜기다. 큰 바위가 있다. -범독산 : 범이 홀로 앉아 있는 형상이라 한다. 혹자는 독수리가 호랑이를 쫓는 형상이라고도 한다. -향나무거리 : 동네 끝에 있다. 소나무, 느티나무, 향나무가 같이 서 있었는데 소나무는 죽고 향나무와 느티나무만 남아 있다. 느티나무는 수령이 250년, 둘레가 3.5m, 높이는 12m 정도이다. -진주유씨 사당 : 진주 유씨 사윤공파의 사당이다. 1998년에 새로 지었다. -매봉 : 응봉이라고도 한다. 삼층거리 앞에 있는 매처럼 생긴 산이다. -모실 : 삼층거리 아래에 있는 마을. -사봉(砂峯) : 나무가 별로 없어서 모래만 많이 보인다. -새말 : 신촌이라고도 한다. 삼성리에 새로 만든 마을이었는데 현재는 없어졌다. -삼층(三層)거리 : 삼성리에서 으뜸 되는 마을로 지형이 세 층으로 되어 있다. ▲도장리(桃長里) 도장리는 목천군 서면 관동, 진지리, 신기리, 장평리, 도전리 일부가 1914년 행정 구역 통폐합에 따라 이루어진 마을인데, 마을명은 도전리의 ‘도’자와 장평리의 ‘장’자에서 유래된 것이다. ▶도장1리 -도전 : 평리 서쪽에 있는 마을로 봄이면 붉은 복숭아꽃이 만발하였으며, 행인들이 쉬어 가는 원(院)이 있었다. -쇠점골 : 예전에 이곳에서 쇠가 많이 나왔다고 한다. -쇠죽골 : 쇠점골에서 캔 쇠를 이곳에서 녹여 물건을 만들었다고 한다. -신지 : 새로 마을을 이루어 몇 호가 산다. -진지골 : 진지골의 원명은 진주동(眞珠洞)이다. 진지골은 풍수학적으로 진주옥반형(眞珠玉盤形)이라 한다. -동고정골 : 예전에 동헌이 있었는데, 동헌 뒤의 높은 산이라 하여 동고정골이라 했다고 한다. -안작골 : 피난을 피할 수 있다 하여 안작골이라 한다. -돌고개 : 신기에서 성남면 용원리로 넘어가는 작은 고개로 목천읍과 성남면과의 경계를 이룬다. 이 고개에 서낭당이 있었다. 지나가는 행인들이 소원을 빌기 위하여 돌을 던져 놓은 돌더미가 많아 돌고개라고 하는데, 지금은 돌더미를 볼 수 없다. 현재 2차선으로 확장되어 포장된 군도 1호선이 지나가고 있다. -각골 : 동네 앞의 작은 골짜기로 소뿔처럼 뾰족하게 생겼다. -마당골 : 산의 고랑이 마당처럼 둥글고 아늑하다. -수정골 : 예전에 이곳에서 수정을 캤다고 한다. -큰골 : 마을 뒤에 있는 고랑으로 동네에서 가장 큰 골짜기다. -작은골 : 동네 뒤에 있는 작은 골짜기다. -건너골 : 옛날에 여자 혼자 움막을 짓고 외롭게 살았다 하여 건여골(乾女谷)인데 부르기 쉽게 건너골이라 한다. -장골 : 골이 길다 하여 장골이라고 부른다. -가마골 : 가마(숯)를 구웠던 곳이라 하여 가마골이라고 부른다. -윗말 : 옛날에 진지골 동쪽으로 동네(마을)가 있었는데 지금은 없어졌다. -족보바위 : 청송 심씨의 사패지기(賜牌地基)로 전해 온다. 일이 잘못되어 역적으로 몰리자 이 바위에 구멍을 파서 족보를 감추었다고 한다. 도장리 뒷산(산직골) 중턱에 있는데 청송 심씨 세장지지(靑松 沈氏 世葬之地)라고 각석되어 있다. -중드렁골 : 예전에 중이 탁발한 것을 가지고 가다가 힘이 들어서 낮잠을 잔 곳 이라고 한다. -성당터 : 일제 말에 성당이 있었는데 신도가 없어서 이사했다. -동정골 : 동학 때 이곳에 올라 관망하던 곳으로 동의정골이라고도 한다. 그 이전에는 관청의 동헌이 동정골 초입에 있었다고 한다. -귀골 : 관동(官洞)이라고도 한다. 고려 시대에 관청이 있던 곳이라 하여 관동이라 했다. -향교(鄕校)골 : 산직골, 진지골 진입로 옆 골짜기로 구 목천현의 향교가 있었다고 한다. -옥배미 : 옛 목천현의 읍치지(邑治地)이었을 당시 옥(獄)이 이곳에 있었다고 하는데, 동네 입구에 있다. -원(院)자리 : 관동(官洞)에 읍치(邑治)가 있을 당시 원(院)이 있던 자리라고 하는데, 도전 앞에 있다. -산직골 : 신기 뒤에 있는 골짜기로, 산지기 집이 있었다고 한다. -파두댓골 : 동네 밑의 작은 골로 팥을 심어도 두어 되 밖에 안 나와서 파두댓골이라고 한다. -기와집골 : 도전 앞에 있는 골짜기로, 기와집이 있었다. ▶도장2리 -웃말 : 예전에 마을이 있었는데 지금은 사람이 살던 터만 확인 할 수 있다. -치청(治政)자리 : 목천현의 치정이 이곳에 있었다고 한다. 장평마을 복판에 있다. -내 건너집 : 장평(평리)마을 뒤의 내 건너 산 아래에 있는 집. 현재 두 가구가 있는데, 얼마 전만 해도 한 집엔 은진 송씨가 살았다. -주랍골 : 평리 위쪽에 있는 골짜기다. 현재 여섯 가구가 살고 있고, 돈사 공장이 있다. -평장 : 명당자리라 하여 몰래 묘를 평장으로 썼다가 들통나서 송사를 했다고 한다. -됫골 : 동네 뒤에 있는 작은 고랑을 말한다. -만주답골 : 평리마을 안쪽에 있다. -탑상골 : 돌로 쌓은 높은 탑이 있었는데 새마을 사업으로 농로 확장시 철거되어 없어졌다. 예전에 화전민이 농사지으면서 모아 놓은 돌들이다. -법석골 : 예전에 절이 있었다고 한다. -작은앙골 : 마을 앞의 작은 고랑을 말한다. -너넝골 : 법석골 뒤를 너넝골이라고 한다. -소쿠내미 : 소쿠리처럼 둥글고 움푹하다. 예전에 소쿠리로 이곳에서 쇠를 담아냈다고 한다. 혹자는 지형이 소쿠리 형상을 하고 있어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강성재 : 강성골로 가는 고개다. -거즈당골 : 예전에 이곳에 당집이 있었다고 한다. -전주암자 : 진지골에서 한티로 넘어가는 고개 중간 지점에 있는 암자. -한티고개 : 귀골에서 성남면 한티로 넘어가는 고개. -상수몽 : 옛날 이곳에서 아이들, 어른들이 주야 미역을 감던 곳이다.
-
[기획특집] 천안의 지명유래 ⑲[천안신문] 본보는 지난 151호부터 천안 각 읍면동의 지명유래에 대한 연재를 진행중이다. 천안이라는 지명에 대한 기록은 고려 태조 13년인 930년 8월 8일 기해 일에 고려태조가 대록에 내려와 동서도솔과 탕정의 일부와 사산의 일부와 대록의 일부를 병합하여 천안이라 하고 도독부를 둔데서 유래한다. 대록은 지금의 목천이요, 사산은 직산이며, 동도솔과 서도솔은 천안의 일부이며, 탕정은 온양 탕정의 일부다. 각 지역에 내려오는 천안의 지명은 1988년부터 이원표 선생이 동부 6개 면을, 1987년도부터 오세창 선생이 천안시를 조사해 1960년경 한글학회에서 발행된 ‘한국 지명총람’을 참고로 가감 수정해 동부 6개면은 1990년 천안군에서 ‘역사의 현장’으로 출간되었으며, 천안시는 1989년 천안문화원에서 ‘천안의 지명’으로 출간하였다. 그 후 1999년 천안시 문화원에서 시와 군에서 발행된 것을 합하여 ‘천안의 땅 이름이야기’로 출간했다. 이번 연재는 이를 바탕으로 했으며, 일부 내용은 천안 향토사학자 김종식 선생이 재조사를 통해 가감하였음을 밝혀둔다. <편집자 주> ▲송전리(松田里) 송전리는 목천군 읍내면 신대리, 서덕리, 만일동, 산방리 일부가 1914년 행정 구역 통폐합에 따라 이루어진 마을인데, 소나무가 많아 송전리라고 하였다. -삼뱅이, 산방(山芳), 잠뱅이, 잠방(蠶房) : 둥구재, 원석천, 송전 일부를 함께 일컫는 지명이다. 세 갈래 길이 있어 방향이 셋이라 삼방이인데, 그것이 변음되어 삼뱅이가 되었다고 한다. 또한 세종대왕 때 누에치는 것을 장려하여 이 곳에 잠방(蠶房)이 있었다고 하는데(아직도 나라실 산꼭대기에는 굵은 뽕나무가 많이 있다.) 그 잠방이가 변음되어 잠뱅이가 되었으며, 산이 방처럼 아늑히 모여 있어서 산방인데 삼뱅이로 변음되었다고도 한다. -임터(林宅) : 이곳에서 임씨가 부자로 살았다고 하는데 지금도 집터가 있다. -개갱주보(犬更主洑) : 옛날에 이 보(洑)의 권한을 개 한 마리와 바꾸었는데, 개로 인하여 보의 주인이 달라졌다고 개갱주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진내보(洑) : 진내들에 물을 대는 보를 말한다. -다람절터 : 월현산(月懸山)에 월현사(月懸寺) 또는 월은사(月隱寺)란 절이 있었다. 달음절이라고도 한다. 멀리서 보면 달에 매달린 것 같아 옛날 중국에서 조선(朝鮮)에는 달에 매달려 붙어 있는 절(寺)이 있다고 하여 구경하러 이곳까지 몰려왔으며, 와 보지 못한 사람은 한번 와서 구경하는 것이 소원이었다고 한다. 지금도 이곳 절터에는 디딜방아터와 우물이 있다. 디딜방아는 깊이 21cm, 폭은 18cm이고, 터는 사방 10보 내외이다. 우물은 깊이가 120cm, 폭이 60cm이고, 축대 높이는 2~3m, 길이는 25m 정도이다. ※청주 곽씨 족보에는 월현사(月懸寺)로, 언양 김씨 족보에는 월은사(月隱寺)로 기록되어 있다. [전설] 절터 우물은 그 깊이를 알 수 없는데, 명주실 몇 타래를 풀어도 바닥에 닿지 않는다고 한다. -물탕바위 : 절터 아래에 넓은 바위굴이 있는데 아무리 가물어도 항시 물이 똑똑 떨어진다 하여 물탕바위라 한다. 월은사 스님이 이곳에서 개를 잡아먹는 바람에 절이 온통 노래기로 뒤덮여 폐사(廢寺)되었다 한다. -감투바위 : 물탕바위 아래에 있는데 감투처럼 생겼다. 예전에 여인들이 위하던 바위다. 잘 위하면 아들이 큰 벼슬을 한다고 하였다. -꽃단지바위 : 나라실 입구에 있는 바위다. 옛날에 미친 여자가 꽃을 엮어서 머리에 이고 앉아 있었던 곳이라 하여 꽃단지바위라고 하였는데, 도로를 확장하는 과정에서 없어졌다. 일설에 의하면 진달래꽃, 철죽꽃 등 각종 꽃이 바위를 감싸고 있어서 꽃단지바위라고 하였다고도 한다. -귀신바위 : 송전으로 가는 도중 왼쪽에 외로이 누워 있는 작은 바위다. 지금도 달밤에 혼자 걸어가다 보면 꼭 사람이 있는 듯 섬뜩하다 하여 그렇게 불린다. -가마바위 : 동네 뒷산 신대 뒤에 있는 큰 바위다. -장성거리 : 가옥이 한 줄로 산 밑에 죽 이어져 있어 긴 성처럼 보인다고 하여 장성거리라고 한다. -주막거리(酒幕距離) : 장성거리에서 구암과 송전마을로 가는 삼거리인데, 옛날에 주막이 있었다고 한다. 서울로 과거 보러 가던 사람들이 이 곳 주막에서 쉬었다가 매일골이나 덜미기를 거쳐 성거산을 넘어 입장으로 갔다. -기와집골(瓦家谷) : 옛날에 큰 부자가 큰 기와집을 짓고 살았다고 한다. 이곳에서 지금도 기왓장이 많이 나온다. 송전마을 뒷골을 말한다. -산제당 : 기와집골 너머에 있다. 예전에 이곳에 있던 산제당(山祭堂)에서 동네 안녕을 비는 산신제를 지냈다고 한다. -연자방아터 : 송전리 부잣집 김완섭 씨 댁 안뜰에 있다. 지금은 연자매의 밑 부분만 보존되어 있다. -잠실(蠶室) : 아주 옛날에 누에를 치던 잠실이 이곳에 있었다고 한다. 지금 전화국 사무실 부근이다. 잠뱅이란 지명이 여기서 유래되었다. -언양 김씨 묘 : 송전리 뒷산 매봉산에 있다. 이곳에는 언양 김씨 사헌부 감찰 증(贈) 사복시정 정립(挺立)과 감역관 증 승정원 좌승지 절(?)과 문경현감 증 이조판서 남갑(南甲), 그리고 천안군수 규석(奎錫) 등 여러 선대의 묘소가 있다. -저도럭 : 송전 마을길 건너 저쪽 끝에 있는 도로 옆의 들녘을 말한다. -뒷동산 : 송전리 뒷산 매봉산을 송전리 사람들은 뒷동산이라고 한다. 언양 김씨의 종산(宗山)이다. -신대(新代) : 원래는 호주방골에 있던 만일동이라는 동네에서 살았는데, 산적들이 자주 출몰하여 산 아래로 이사와 마을을 이루어 이곳을 신대라고 하였다. -서낭당 : 마을 입구에 있다. 지금도 서낭제를 지내며 잘 보존되어 있다. -호주방골 : 맬골 위의 고랑으로 호수처럼 넓고 둥글게 생겼다. 예전에 산적이 살았다고 한다. -새말림 : 산을 보는 사람이 새로 바뀌어 새 말림이라고 한다. -한뺌이골 : 땅이 한 뼘밖에 안 될 정도로 작은 골인데, 일설에 의하면 왕이 하룻밤을 자고 밥을 먹고 갔다는 설로 한밤이가 즉 일야미(一夜味)라 하는데 근처에 유왕골, 위례성 등이 있는 것으로 보아 한밤이가 변음되어 한뺌이가 되었다는 설로서 설득력이 있고, 전국의 명당이라 한다. -부자마을 : 맬골 위에 있는데 옛날에 부자가 이곳에서 살았다고 한다. -에펀더기 : 맬골 뒤에 있는 펀던(펀더기)으로 햇볕이 잘 들어 아이들이 이곳에서 놀았다고 한다. -가이방골 : 맬골 가에 있는 골이다. -진주산 : 맬골 앞산이다. 산의 생김새가 진주처럼 둥글다고 하여 진주산이라고 한다. 고려 때 왕건이 유왕골에서 유숙할 때에 이곳에서부터 졸아지(도라지)고개까지 군인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는 설도 있고, 동학(東學) 때 천주교인들이 이곳에 올라 망을 보았다는 설도 있다. -안산 무당바위 : 맬골 앞산에 있는 무당이 위하던 바위다. -평(병)풍바위 : 맬골 뒤에 있는데 바위가 평(병)풍처럼 생겼다. -다람절산 : 맬골 앞산을 말한다. 옛날에 이곳에 월은사란 절이 있었다고 한다. -안산 : 맬골 앞산을 안산이라고 한다. -장자바윗골 : 옛날에 이 바위를 위하면 큰 부자가 된다 하여 동네 사람들이 위하던 바위다. -뒷동산 : 맬골 뒷산을 말한다. -선바위 : 맬골 앞산에 있는 바위다. 사람이 서 있는 모습처럼 생겨서 선바위라고 한다. -유왕골고개 : 맬골에서 유왕골로 넘어가는 고개를 말한다. -맬골고개 : 이곳을 넘으면 만일사를 거쳐 천흥으로 갈 수 있다. -빈들바위 : 만일사로 가는 도중에 있는 편편한 바위다. 맨질맨질하여 빈들바위라고 한다. -걸미골 : 신대에서 성거 문암리로 넘어가는 골짜기다. -낭떠러지기 : 신대에서 만일사로 가는 도중에 열 길도 넘는 낭떠러지가 있다. -달바위 : 달처럼 생겼다고 하여 달바위라고 한다. -작살골 : 맬골 뒤 순 돌로 된 산으로, 자갈이 많아서 자갈산 또는 작살골이라고 한다. 이곳을 넘으면 서덕골이다. -계성군 묘(桂城君墓) : 성종 대왕의 셋째 아들인 계성군 이순(桂城君 李恂)의 묘소와 성종 대왕의 여덟 번째 부인 숙의 남원하씨(淑儀 南原下氏 : 계성군의 어머니)의 묘소가 맬골 고개 위에 있다. 1971년 5월 27일 서울 신림동 서울대학교 뒷산에서 이장해 왔다. -깃대봉 : 일제때 비행기 항로를 안내하는 기를 달았던 곳이다. -양지(陽地)말 : 햇볕이 종일 들어서 양지말이라고 한다. -방앗간 : 양지말에 있는 방앗간을 말한다. -구터 : 방앗간이 있는 동네인데 오래된 동네여서 구(舊)터라고 한다. -논바위 : 양지말 위 논 가운데에 있는 큰 바위로, 열 명 정도 앉아서 놀 수 있다. -평(병)풍바위 : 양지말 앞산에 있는 바위로 병(평)풍처럼 생겼다. 이곳에다 지성을 드리면 가정이 평안하고 아들을 낳는다 한다. -매봉산 : 양지말 앞산이자 송전 뒷산으로, 매의 형상을 하고 있어서 매봉산이라고 한다. -홈거리 : 먹뱅이에서 내려오는 물을 대기 위해 나무로 홈을 파서 수로를 만들었는데 굉장히 오래된 것이다. 홍거리라고도 한다. -진설미들 : 이곳에서 나오는 곡물로 제를 올리는데 인분을 주어서도 안 되고, 농사를 지으면서 욕을 해서도 안 된다고 한다. 하천을 중심으로 잿들과 마주하고 있다. 진설미들은 송전리에 속하고 잿들은 석천리에 속한다. -삼인봉(三人峰) : 산의 생김새가 세 사람이 서 있는 모습과 같다고 한다. 동학(東學) 때 세 사람이 이 산에 올라 직산, 목천, 안성(북면 쪽)방향을 각각 맡아 관군이 오는 것을 살피던 곳이다. 목천 쪽에서 관군이 오면 직산 쪽으로 숨고, 직산 쪽에서 관군이 오면 안성 쪽으로 숨고, 안성 쪽에서 관군이 오면 목천 쪽으로 숨었다고 한다. -광덩어리(廣谷) : 논과 밭이 함께 있어서 광덩어리라고 한다. -갓골 : 골의 생김새가 갓처럼 생겼다고 한다. 먹방리 가에 있다. -터골 : 먹방리 아래에 있다. 옛날에 사람이 살았다고 하는데 지금도 축대가 남아 있다. -농바위 : 맬골과 먹방리 중간에 있으며 바위가 농같이 네모나고 크다. 전설에 의하면 이 바위 속에는 대한민국을 다 구할 수 있을 정도의 보물이 들어 있다고 하며 큰 장수만이 문을 열 수 있다고 한다. 나라가 아주 위급할 때에 보물을 사용하라고 했다고 한다. 욕심 많은 농부가 이 문을 열려고 정으로 쪼다가 벼락 맞아 죽었다고 한다. -뒷골 : 동네 뒤에 있는 골을 뒷골이라고 한다. ▲석천리(石川里) 석천리는 목천군 읍내면 사기점리, 먹방이, 산방리 일부가 1914년 행정 구역 통폐합에 따라 이루어진 마을인데, 냇물이 돌 사이로 맑게 흘러내려 간다고 하여 석천(石川)이라 하였다. -원석천리 : 석천리에 예전부터 있던 마을로 가장 오래된 마을이어 원석천리라고 한다. -감리교회 : 목천에서 최초로 생긴 교회로 흙벽돌로 지었는데 60년대에 장마로 무너졌다. 그 후 콘크리트 건물로 새로 지었으며 신도 수는 30여명 정도 된다. -산리봉(山離峰) : 산봉우리가 따로 떨어져 있어서 산리봉이라고 한다. -개미골 : 산의 형태가 개미와 같다 하여 개미골이라고 한다. -느티나무 : 동네 입구에 있는 느티나무로 수령이 약 500년쯤 되었으며, 시(市)의 보호수로 지정되어 있다. 경치가 좋아서 동네 주민들이 휴식 장소로 이용되고 있다. -큰덕골 : 큰 언덕이 있어서 큰덕골이라고 한다. -작은덕골 : 작은 언덕이 있어서 작은덕골이라고 한다. -잿들 : 이곳에서 나는 곡물로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양지말의 진설미들과 개울을 사이에 두고 마주하고 있다. -나라실, 국태봉(國室, 國太峯) : 나라실 또는 국태봉이라하는 이곳은 나라를 구할 수 있는 큰 명당에서 임금이 난다하여 신성시 했다. 이곳은 일제 강점기에 일본인들이 산의 혈을 끊어서 그 효력이 없어졌다고 한다. 일제 말에 쇳물고개 부분을 사람을 동원하여 끊었다. 나라실 산 꼭대기에 올라서면 나라만큼 넓은 평지가 있다. 일본인들이 나리실로 변음한 것이다. -나라실 절터 : 나라실 중간쯤에 절터가 있다. 지금도 기와조각을 수습할 수가 있다. 70년 초까지 기와를 주워다가 깨어 갈아서 놋그릇을 닦았다고 한다. -병신고개 : 나라실 위에서 상가마골을 넘어 다니던 고개인데 갑자기 뚝 떨어져 병신고개라 부른다. -상가마골 : 옥추개울에서 산을 하나 넘으면 나타나는 넓은 들녘이다. 임금이 태어나 가마 타고 행차하는 형상의 명당이 있다 하여 지금도 지관들이 찾아다닌다고 한다. 일본인들이 와룡산(臥龍山)과 소금재의 중간인 나라실에서 상역골로 넘어가는 쇳물고개 부분의 혈을 끊어서 그 효력이 없어졌다 한다. -옥적동(玉笛洞) : 상가마골에서 송전리 구암 옆으로 내려오는 개울이 있는데, 계곡이 맑고 물 흐르는 소리가 은쟁반에 옥구슬이 구르는 듯한 소리여서 옥적동이라 하며 옥추개울이라고도 한다. -가마바위 : 구암 뒤 옥추개울 위에 있다. -소금재(표대봉) : 일설에 요순임금이 정치를 끝내고 거문고를 켜던 곳이라 소금재(素琴宰)라 부른다고 한다. 목천읍 석천리와 서흥리, 북면 전곡리에 걸쳐 있는 산으로 아주 옛날 이곳에서 소금을 캤다고 한다. 일본인들이 이 산의 정기를 끊기 위하여 쇠를 박았다고도 한다. 국토 측량의 기본이 되는 표석(表石)도 세웠다. 일본인들은 이것을 이용하여 전국 각처에 쇠말뚝을 박았고 지금도 각처에서 제거 작업을 하고 있다. 다른 전설에 의하면 아주 예전에 이곳이 바다였을 당시 소금을 많이 실은 배가 이곳을 지나다 침몰되었다고도 하며, 또 일설에는 소금배가 이 산을 기준으로 하여 지나다녔다고도 한다. -쇳물고개 : 나라실에서 상역골로 넘어 다니던 고개인데, 예전에 소금재에서 쇠를 캐어 이곳에서 녹여 물건을 만들었다고 하는 설도 있다. -성주도씨 묘 : 석천리 뒤에 있는데 자헌대부 동지 중추부사 상(翔)과 가선대부 용량위부호군 순업(順業)의 묘가 이곳에 있다. -새터 : 구터에 살던 사람들이 새로 이사 와 살던 곳으로 방앗간 앞 동네이다. -산 배따라기 : 양지마을 앞산으로 비탈이 심한 곳에 따비를 떠 밭을 일군 곳을 말한다. -텃골 : 동네 뒤로 사람이 살던 터가 있다. -홍골산 : 양지마을 뒷산으로 흙이 붉어서 홍골산이라고 하고, 앞뜰에 물을 대는 곳을 홈 거리라고 한다. -노적봉산 : 산의 생김새가 볏섬을 쌓아 놓은 것처럼 생겼다. -언양 김씨 묘 : 아버지 묘소에서 시묘살이를 하다가 상(喪)옷을 입은 채로 묘소 앞에서 죽은 효자 남수(南粹)공과 통정대부 지국(持國)과 통덕랑 지항(持恒)의 묘소가 있다. 양지마을 뒷산으로 언양 김씨 종산(宗山)이다. -먹방리(먹뱅이 묵방리) : 성거산 밑에 있는 마을로 예전에 이곳에서 먹을 만들었다고 한다. -성거산(聖居山) : 목천읍, 성거읍, 북면에 걸쳐 있는 산으로 높이는 579.1m이다. 고려 태조가 직산현(稷山縣) 수헐원에서 이 산을 바라보니 산꼭대기에 오색 구름이 엉켜 있어 신령이 있다 하여 제사를 지내고 성거산이라 하였으며, 그 후 조선 이 태조와 세종대왕이 온양온천에 갈 때도 또한 이곳에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삼인봉 : 아주 예전에 언양 김씨의 충신인 김응상이 육진에서 싸우다 전사한 공으로 사패지기를 받을 때 세 사람이 올라 경계를 정하던 곳이라 전하며, 오른쪽 눈을 가리고 남쪽을 바라보아서 보이는 것 모두를, 북쪽으로 보아 보이는 곳 모두를 하사했는데 성거산을 중심으로 남쪽은 목천면 서흥리까지 북쪽은 성거읍 천흥리까지라 한다. 언양 김씨 문중에 구전하는 이야기이다. -고린장[고려장(高麗葬)]골 : 중간 먹방이 맞은편 골짜기이다. 옛날 이곳에다 고린장(고려장)을 했다고 하며, 70년대 초반에 도굴범들이 도굴하여 도자기와 접시, 수저 등을 도굴해 갔다고 한다. -광골[廣谷] : 먹방이 중간의 넓은 골을 말하는데 골이 넓고 깊다. -두리봉(斗利峰) : 산봉우리가 쌀을 되는 모말처럼 생겼다. -서덕골(西德谷) : 천주교인을 탄압하던 병인박해(1866년)때 패롱권 신부와 뮈델 신부, 두세 신부, 베르모델 신부 등 프랑스 신부들이 이곳에 숨어서 목회 활동을 하였다. 이곳은 직산, 목천, 북면의 경계로 숨어서 활동하기에 용이하였고, 경상도, 전라도, 내포 교인들과 연락도 하였다. 결국 중국 천진(天津)으로 탈출하는데 성공하였으나 일부는 잡혀서 처형되었다. 여기에서 북쪽으로 산을 넘으면 북면인데, 그곳에 천주교인들의 무덤인 성지(聖地)가 있다. 예전에 7가구가 살았는데 지금은 집터와 감나무만 남아 있다. -굴개미뚝 : 둑에 개미가 많아서 굴개미뚝이라고도 한다. -진밭 : 양지마을 위에 밭이 길을 따라서 길게 붙어 있다. -성적굴암 : 동학 때 천주교인들이 이곳에 숨어 있었다고 한다. 최베드로(천여 文錫), 최라자로(종여 嘉錫), 배문호. 고요셉(최베드로 며느리) 등 천주교인들이 이곳에서 잡혀 공주 감형에서 처형되었다. 동네에서는 방아굴이라고 부른다. 천주교인들이 이곳에 숨어 절구를 굴속에 들여놓고 방아를 찧으며 목회 활동을 하면서 은신하던 곳이라 전해 온다. -대문바위 : 성거산 정상에 있는데 바위 표면에는 직사각형의 문짝형의 홈이 파여 있다. 이 안에는 혼자 3년 이상 먹을 수 있는 양식이 있다고 하여 전국의 석수쟁들이 찾아와 이 문짝을 정으로 쪼으려고 하면 갑자기 하늘에 구름이 몰려들고 천둥 번개가 쳐 실패하곤 하였다는 전설이 있다. -땀봉 : 중간 먹방이 뒤에 있는 산을 말한다. 바늘구멍처럼 좁다. -제비바위(燕岩) : 성거산 밑 먹방리 뒤에 있는데 제비가 앉아 있는 모습과 같아서 제비바위라고 한다. 혹자는 이곳이 제비 혈의 명당이라고도 한다. 이 바위 밑은 나무를 10짐이나 들여쌓을 수 있을 정도로 넓다. 천주교인들이 기도를 하고 은신하던 곳이라 한다. 해방 후에도 천주교인들이 이곳에 와서 기도를 했다고 전해 온다. -한배미골 : ☞ 땅이 한 뼘밖에 안 될 정도로 작은 골이라 한배미골 이라고 하는데, 일설에 의하면 왕(王)이 하루밤을 자고 밥을 먹고 갔다는 설로 한밤이 즉 일야미(一夜味)라 하는데 근처에 유왕골, 위례성 등이 있는 것으로 보아 한밤이가 변음 되어 한뱀미가 되었다는 설도 있고, 전국의 명당이라 한다. -수돌배미 : 중간 먹뱅이 뒤에 있는 골인데, 이 고을에서 물이 처음 나는 논이라 수돌배미라고 한다. -씨앗골 : 옛날에 이곳에 굴이 있었는데 그 곳에 씨앗을 저장했다고 한다. 제비바위라고도 한다. -언양 김씨 묘 : 언양 김씨 종산(宗山)인데, 이곳에는 문학사 치진(致晉) 여석(汝錫)과 홍주목사 동연(東淵)과 효자 동몽교관 의연(義淵), 통덕랑 민채(敏采) 서채의 묘소가 있다. 큰 산소라고도 부른다. -굴바위골 : 성거산 꼭대기에 큰 바위가 있는데 날씨가 음산하면 이상한 소리가 울린다고 한다. 그래서 사람들이 이곳에서 나무하는 것을 꺼렸다. -덜매기(신석천 新石川) : 원석천 뒤에 있으므로 덜매기라 하고, 신석천과 원석천 사이의 고개가 완만하여 고갯목이 덜 되었으므로 덜목이기라고도 하며, 사기점이라고도 한다. -각골(角谷) : 소의 뿔처럼 뾰족하여 각골이라 한다. -도촌재 : 북면 도촌으로 가는 고개인데 지금은 차가 갈 수 있도록 도로를 개설했다. -큰골 : 고롱골이라고도 하는데 덜미기 뒷산의 큰골을 말한다. 이곳을 넘으면 북면이다. -작은골 : 큰골 옆의 작은 골짜기다. 사기점 : 덜미기 앞 동네를 말하는데 이곳에서 중품(中品) 그릇을 만들었다고 한다. -농천 : 사기점 뒤 먹뱅이로 넘어 다니던 곳이다. 농사가 유난히 잘 되었다고 한다. -명덕골 : 이곳을 넘으면 북면 명덕리로 갈 수 있다. -사고시고개 : 이곳을 넘으면 북면 사고시로 갈 수 있다. -논골 : 산 속에 논이 있어서 논골이라고 한다. -뒷산 : 동네 뒷산을 말한다. -골밭골 : 골 사이에 밭이 있어서 골밭골이라고 한다. -용바위 : 바위 생김새가 용처럼 생겼다고 한다. -고롱골 : 큰산을 넘으면 북면인데 고릉(高陵)이 변음되어 고롱이라고 한다. -삼생이 : 천신, 지신, 용왕신(天神, 地神, 龍王神)을 위하면 죽음을 세 번 면할 수 있다 하여 동네 사람이 위하던 곳이다. -승적골 : 성적골이라고도 한다. 아주 예전에 싸워서 이긴 곳이라는 전설만이 구전된다. 산 너머에 위례성이 있는데 온조왕이 백제의 터전을 잡은 곳이다. 아마도 백제군, 고구려군이 싸운 곳이 아닌가 추측된다. 어떤 촌로(村老)들은 임진왜란 때 왜군을 죽인 곳이라고 말한다. -샘너머 : 이 골짜기에는 현재 집 한채가 있는데, 그 집 앞마당에 샘이 있어 샘너머라고 부른다. -동구재 : 이 곳에는 옛날에 일곱 집이 살았는데, 지금은 세 집만 남아 있고 한 집은 빈 집이다. -구암 : 거북이처럼 생긴 바위가 있어 동네 이름을 구암(龜巖)이라고 부르고 있다. 옛날에는 이 바위를 동네 사람들이 위하였다고 한다. 현재 다섯 집이 살고 있다. -구암샘 : 구암 동네 앞에 샘이 하나 있는데 옛날에는 이 샘물의 맛이 좋아 동네 사람들 모두가 먹고 살았다. 그리고 샘물이 아주 차가워서 여름에는 동네 사람들이 냉장고 대용으로 이용하기도 하였다. 동네 사람들은 이 샘을 매우 위하였으나 지금은 이용하지 않는다.
-
[기획특집] 천안의 지명유래 ⑱[천안신문] 본보는 지난 151호부터 천안 각 읍면동의 지명유래에 대한 연재를 진행중이다. 천안이라는 지명에 대한 기록은 고려 태조 13년인 930년 8월 8일 기해 일에 고려태조가 대록에 내려와 동서도솔과 탕정의 일부와 사산의 일부와 대록의 일부를 병합하여 천안이라 하고 도독부를 둔데서 유래한다. 대록은 지금의 목천이요, 사산은 직산이며, 동도솔과 서도솔은 천안의 일부이며, 탕정은 온양 탕정의 일부다. 각 지역에 내려오는 천안의 지명은 1988년부터 이원표 선생이 동부 6개 면을, 1987년도부터 오세창 선생이 천안시를 조사해 1960년경 한글학회에서 발행된 ‘한국 지명총람’을 참고로 가감 수정해 동부 6개면은 1990년 천안군에서 ‘역사의 현장’으로 출간되었으며, 천안시는 1989년 천안문화원에서 ‘천안의 지명’으로 출간하였다. 그 후 1999년 천안시 문화원에서 시와 군에서 발행된 것을 합하여 ‘천안의 땅 이름이야기’로 출간했다. 이번 연재는 이를 바탕으로 했으며, 일부 내용은 천안 향토사학자 김종식 선생이 재조사를 통해 가감하였음을 밝혀둔다. <편집자 주> ▶덕전리 2리(중리, 장흥, 점말, 유왕골) -유왕골(留王谷) : 점말에서 북쪽으로 약 3~4㎞ 정도 떨어져 있는 마을로, 백제시조 온조왕이 위례성에 도읍을 정하고 봄, 여름이 되면 이곳에 와 머무르면서 농사를 지었다고 목천현지(木川縣誌)에 기록되어 있다. 또한, 고려 태조 왕건이 930년 8월 8일 기해일(己亥日)에 후삼국을 통일하기 위하여 천안의 오룡쟁주의 형세와 왕자산의 형세를 확인하기 위하여 태조산에 올라갈 적에 이곳에 머물렀는데, 후에 그것이 지명이 되었다 한다. 현재 마을 앞 정자나무 아래에 유왕골 유래비가 서 있다. -음(陰)터골 : 햇볕이 들지 않고 응달진 곳이라 음(陰)터라고 한다. 일설에 의하면 갑오경장 때 동학군을 정벌하러 왔던 관군들이 음흉한 짓을 하던 곳이라고도 한다. -괭이골 : 쟁이골이라고도 하며 옛날에 도공들이 모여 살던 곳이라고 한다. -아랫마을 : 비석 모퉁이 근처에 예전에 마을이 있었다. -꽷마을 : 점말과 유왕골 마을의 중간으로 무수막의 맞은편 골짜기를 말하는데 지금은 없어지고 집터만 볼 수 있다. -멍에둑(堤防) : 소의 멍에처럼 생겨 붙여진 이름이다. -중(僧侶)고개 : 성불사 중들이 탁발하러 넘어 오가던 고개라고 한다. -장(場)고개 : 유왕골에서 천안으로 장보러 넘어가던 고개다. -모래봉 고개(沙峰) : 장(場)고개에 이르기 전의 좀 언덕진 고개로, 흙이 벗겨져 사태(沙汰)난 곳을 말한다. -바위안 : 유왕골 마을 앞산 큰 고랑을 말하는데, 그곳에 유난히 바위가 많이 있다. -넓은골(廣谷) : 광터라고도 하며, 유왕골 초입의 넓은 골을 말한다. 옛날에 이곳에 산적이 살아서 행인을 괴롭혔다고 한다. -함박골 : 함지박 형상을 하고 있다. -엄리고개 : 유왕골에서 천안 문니미(문엄리)로 넘어가는 고개를 말한다. -산신당골 : 산신당이 있는 골짜기를 말한다. -도요지터 : 그릇을 굽던 곳을 말하는데, 5~6개의 터가 있었다고 한다. 지금도 그릇 굽던 흔적을 볼 수 있으며, 그릇 조각을 수습할 수 있다. 중품(中品)이다. -각골(角谷): 소의 뿔 모양처럼 뾰족하여 각골이라 한다. -목기장 : 일제 때에 소(牛)가 산을 해친다 하여 동네 소들을 모두 이곳에 매어 놓았다고 한다. -만일고개(晩日嶺) : 유왕골에서 맬골로 넘어가는 고개를 말한다. -신산봉 : 유왕골 마을 앞산 높은 곳을 말하는데, 옛날 이곳에 신선이 살았다고 한다. -뒷재 : 동네 뒤에 있는 작은 고개를 말한다. -무수막(무우막)골 : 옛날 화전을 일구어 무를 재배하던 곳으로 무맛이 좋아 장군평 사람들까지 와서 가져갔다고 한다. 무쇠막이라고도 한다. 옛날에 쇠를 다루던 사람들이 막을 치고 살아서 무쇠막이라고 하였는데, 무수막(무우막)으로 변음 되었다고도 한다. -빗돌(碑石) 모퉁이 : 유왕골 입구 모퉁이를 말하는데, 비석처럼 생긴 돌이 서 있는 모퉁이로 지금은 없어져서 볼 수가 없다. -지왕골(之王谷) : 유왕골 아래에서 성불사로 넘어가다 보면 작은 들녘(지금은 약 8000여 평의 답이 있음)이 나오는데 사람이 살던 흔적이 있다. 전해 오는 말에 의하면 태조 왕건이 유왕골에서 이곳을 지나 태조산에 올라갔다 하여 지왕골(之王谷)이라고 한다. 지앙골로 일본인들이 변음을 하였다. -참판공 효자 전주 최돈 묘소 : 인조 때 사람인 전주 최씨 돈(墩)은 경기전 참봉을 지냈으며 참판에 증직되었다. 직산군 삼봉면 정천리(현재 입장면 용정리)에서 태어나 효행이 극진하여 정문을 하사 받았다. 묘소가 지왕골에 있으며 정문은 천안시 입장면 용정리에 있는 12정려(旌閭)에 현판이 봉안되어 있다. -유왕골 산신제 : 목천읍 덕전2리 유왕골에서는 마을의 태평을 위해 매년 산신제를 지낸다. 마을에서 참 샘이 골이라 부르는 산에 자리 잡고 있는 산신당은 성거산 산신을 모시는 곳인데, 예전에는 초가(草家)로 매년 이엉을 새로 해 이었으나 기와집으로 개축하였다. 유왕골 마을의 산신당 터는 산신이 직접 잡아 주었다고 전하는데, 그래서 몇 번이나 자리를 옮겼다고 한다. 유왕골 마을은 한때는 37호나 되었으나 이제는 21호밖에 남아 있지 않다. 이 마을의 산신제는 정월 열 나흗날 밤에 지냈으나 그 날에 부정이 끼면 한 달 뒤로 미루고 또다시 그 날이 부정이 타면 3월까지 미루어야 했기 때문에 요즈음에는 정월 10일 안에 길일을 택하여 지낸다. 정월이 되면 마을의 유지들이 모여서 생기 복덕일(生氣福德日)을 택하여 제일(祭日)을 정하고 주민 중에서 부정이 없는 사람으로 제(祭)를 주관할 사람과 축문을 읽는 사람을 선정한다. 제일(祭日)이 정해지면 제관의 집문 앞에 황토를 펴고 부정한 사람들의 출입을 금지시킨다. 예전에는 마을의 길목마다 전부 금줄을 치고 마을에 외부 사람이 들어오면 제가 끝나기 전까지는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했으나 요즈음에는 그렇게 하지는 않고 금줄도 치지 않는다. 제일이 되면 밤, 대추, 사과, 배, 곶감 등을 차려놓고 초를 양쪽에 켜며, 미리 해 놓은 감주(甘酒) 삭힌 물로 지은 밥과 돼지고기 세 근을 한칼에 썰어서 올린다. 3년마다 한 번씩은 돼지머리를 올리고 돈이 많이 걷히면 4~5년에 한 번 통돼지 한 마리를 올리기도 한다. 유왕골 마을의 산신당은 안이 사방 8자이며 전면 벽에는 산신도가 걸려 있고, 그 앞에는 제사상이 있어서 그곳에 제물을 차려 놓는다. 제는 밤에 지내는데, 제가 끝나면 산신 소지와 동중소지 그리고 제관(祭官) 소지를 먼저 올리고, 그 다음에 연장자부터 갓 태어난 아이까지 마을 남자들의 소지를 전부 올려 준다. 언젠가 제일(祭日)에 부정이 생겨 그 해에 제를 지내지 못하자 마을에 풍파가 심하게 일어 그 후에는 날을 당겨서라도 한 해도 거르지 않고 지내왔는데, 안타깝게도 1996년부터 지내지 않고 산신당만 현재 보존되어 있다. 문화재로 지정하여 재현할 필요가 있다. ▲중리(仲里) 중리는 공자의 사상을 흠모하던 선비들이 와용산아래 단을 쌓고 제을 올리며 공자산이라 하고, 마을을 공자의 이름인 자를 따서 중니(仲尼)라 하다가 현재의 중리(仲里)가 되었다 한다. 또는 목천읍 소재지에서 마점과 유왕골의 중간에 있어 중리라 하였다 한다. 덕전리 한 복판에 위치하는 동네로, 옛날에는 외산방(外山方) 지역이었다가 현재는 덕전2리에 속하는 마을이다. -분터골 : 덕전 야영장(옛 덕전초등학교 자리) 뒤 송전리 쪽의 골짜기를 말하는데, 골짜기의 생김새가 분과 같이 오목하고 아늑하여 분터골이고 한다. 또는 옛날 부엌이나 뜰에 칠하던 찰흙이 많이 나서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한다. -정문(旌門) : 언양 김씨(彦陽 金氏)의 정문으로 영조 때 효자 동몽교관 조봉대부 김의연(金義淵)과 열녀 영인 고성 이씨의 정문이다. -학교터 : 덕전리, 송전리, 석천리 등 3개리의 국민학교 학생들은 목천국민학교까지 약 4~9㎞의 원거리를 통학하는데 매우 어려움이 있었다. 마을 주민들은 중리에 학교를 반드시 설립하여 한다는 공감대를 형성하고 1949년 11월 덕전 분교장 설립 기성회를 조직(초대 회장 : 김병찬씨 용소말거주)하여 기금 적립과 부지 확보에 최선의 노력을 기울였다. 부지 1800평을 희사 받고 당국에 호소하여 마침내 1950년 5월 1일 목천초등학교 분교장으로 개교하였다. 그후 1962년 10월 1일 본교로 승격되었으나 학생 수가 점차 감소되는 바람에 정부의 학교 통합 방침에 의하여 1991년 3월 1일자로 폐교되고, 학생들은 목천초등학교로 다시 통학하게 되었다. 현재 학교는 학생들의 야영장(수련장)으로 활용하고 있다. -기와터 : 기와를 굽던 곳으로 학교 뒤 언양 김씨 정문이 있는 분터골 초입에 있다. 지금도 기와조각이 나온다. -각골(角谷) : 학교 뒷산 골짜기로 소뿔처럼 뾰족하여 생긴 이름이다. -큰골(大谷) : 중리 뒷산 골이 가장 큰 곳을 이르며, 6.25 직후 해송나무를 심어서 해송나무골이라고도 한다. 효자 김주현의 묘소가 이곳에 있다. -대추나무골(棗木谷) : 대추나무가 유난히 많아서 주민들에게 그렇게 불렸다. 옛날에는 진상할 정도로 품질이 좋았다고 한다. -효자 김주현 묘소(金周鉉) : 효자 김주현은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 매일 아침저녁으로 성묘하여 다니는 길에 풀이 자라지 못하였다고 한다. 고조부이신 효자 김의연의 정문을 손수 중건하여 목천 읍지인 대록지(大麓誌) 효자 정려(旌閭)편에 공(公)의 행실이 기록되어 있다. -공자산(孔子山) : 중리 뒷산으로 공자의 사상을 흠모하던 선비들이 단을 쌓고 제를 올리던 곳이라 하여 공자산이라 한다. 이산의 끝은 와룡리(臥龍里)인데, 태조 왕건이 유왕골로 갈 때에 이곳에서 잠시 쉬었다고 하여 와룡리라고 했다. 또한 왕건은 와룡리 맞은편 큰 정자나무 밑에 있는 우물물을 마셨는데, 그래서 그 동네는 용연리(龍淵里)라 하고 뒷산을 와룡산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매봉산에 올라가서 보면 산의 모양새가 용이 누워 있는 모습과 같다고 하기도 한다. -윗질마재(똥도고개) : 중리와 송전리의 중간 언양 김씨 정문 뒤에 있는 고개인데 소의 길마 같다고 하여 질마재라고 하며, 송전에서 중리 쪽으로 경사가 심하여 짐을 싣고 이곳을 올라오던 소가 힘이 들어 똥을 싸서 똥도고개라고도 한다. 지금은 도로 확장으로 인하여 고개가 없어졌다. -아랫질마재 : 중리와 용연저수지 중간 지점 용소말로 갈라져 가는 고개로, 소의 길마 같다 하여 질마재라고 하며, 용소말고개라고도 한다. 지금은 도로 확장으로 인하여 고개가 없어졌다. -상수몽 : 언양 김씨 정문이 있는 뒷들 이름이다. 중리에서 물꼬가 가장 위에 있으므로 상수몽이라 한다. 옛날 이곳에는 금방앗간이 있었다고 한다. -금방앗간터 : 중리에는 금방앗간 2개소가 있었는데, 하나는 상수몽에 있었고 또 하나는 물레방앗간 자리에 있었다. -물레방앗간터 : 지금 중리의 정자나무가 있는 곳으로 할머니 경로당 앞이다. 얼마 전까지 물레를 돌려 방아를 찧었는데 지금은 없어지고 그 후 발동기를 이용하여 정미소를 운영하였는데, 전기가 들어오자 집집이 간이 정미기를 이용하므로 운영이 안 되어 헐어버려 밭으로 변하였다. -방아다리 : 옛날 중리에서 개울 건너 방앗간으로 건너가는 돌다리가 있었는데 이것을 방아다리라고 하였다. 1966년도에 다리를 놓아 사용하다가 장마에 부서져 1983년도에 다시 다리를 놓았다. 지금은 잊혀진 지명이다. -연자방아터 : 옛날에 이곳에 연자방아가 있었는데 없어지고 밑 부분만 깃대 받침으로 사용하였다. 1976년 새마을회관을 지으면서 서울의 최광수 씨가 자금을 희사하여 쇠파이프로 깃대를 다시 만들었는데, 이 과정에서 연자방아의 밑 부분은 땅에 묻혀 버렸다. 지금은 개인주택으로 변하여 깃대봉도 마을회관도 모두 없어졌다. -대장간터 : 중리 교회에서 학교 쪽으로 가다가 구부러진 곳에 있다. -뒷들 : 중리 뒤에 있는 들을 말한다. -구랫들 : 상수몽 옆 통매 앞들로 남양 홍씨의 묘소가 있다. 아무리 가물어도 물 걱정을 하지 않는 들이라 한다. -자흥, 장흥(長興) : 중리 개울 건너 마을이다. 이곳에 살면 부자가 된다고 하여 자흥 또는 장흥이라 하였으며 실제로 이곳 사람들은 전부 부자였다. 일제 때 일본인들이 임금이 날 형국이라 하여 사람을 동원하여 산의 맥을 끊어 그 맥(脈)이 끊어졌다고 한다. 현재 바깥 숯바리에서 안 숯바리로 넘어가는 길을 말한다. -매봉산 : 바깥 숯바리의 뒷산으로 매의 형상을 하여 그렇게 불린다. -바깥숯바리 : 장흥 밖 숯을 굽던 곳이다. 문화 유씨 족보에는 탄타촌(炭馱村), 언양 김씨 족보에는 탄발리(炭發里)로 기록하여 전해지는 것으로 보아 숯을 굽던 곳이 분명하다. -안숯바리 : 마당재 안골을 가리키는 말인데, 동네 안에 있어 그렇게 부르며 참나무가 많아서 숯을 굽던 곳이다. -유산 : 성남면 목골 문화 유씨의 종산(宗山)이라서 유산이라고 한다. -진무 공신 묘소 : 진무 공신 유효걸 (1594~1627년)의 묘. 자는 성백(誠白)이고 본관은 진주(晋州)인데 1624년 이괄의 난 때 좌협장으로 반란군을 진압하여 그 공으로 진양군(晋陽君)에 봉하여졌으며 좌찬성에 추증되었다. 1993년도에 이곳으로 이장하였다. -진무 공신 사당 : 진무 공신 유효걸의 영정을 모신 곳으로 마당재에 있으며, 영정은 문화재 자료 제362호로 지정되었다. -통덕랑 묘소 : 성남 목골 문화 유씨로 인조 때 사람 유번(柳蕃)의 묘. 통덕랑(通德郞)을 지냈다. 장흥 뒷산 중턱에 있다. -황산(黃山) : 성거읍 천흥리 황씨들의 종산(宗山)이라서 황산이라 하였는데, 진양 유씨들에게 팔았다. 산의 흙이 붉어서 황산이라고도 한다. -마당재(통매) : 중리에서 점말로 가는 도중의 고개인데 청주 곽씨(淸州 郭氏)의 종산(宗山)으로서 마당같이 넓어 그렇게 부른다. 옛날에 군사들이 이곳에서 훈련을 했다고 하며, 국상(國喪)시에는 이곳에서 흰 옷을 입고 북쪽을 향하여 망배를 올렸다고도 한다. 이곳에서 기우제도 지냈다. -숯바리들 : 숯바리에 있는 들녘을 말한다. -진내들 : 용연저수지에서 중리까지의 들녘인데, 들도 길고 내도 길고 하여 진내들이라고 한다. -숯바리보(洑) : 숯바리들에 물을 대는 보를 말한다. -점말(店末) : 이곳은 외유왕동(外留王洞) 지역으로, 백제시조 온조왕이 유왕골에 머물러 있을 때에 그곳에서 필요한 그릇을 만든 곳이라고 전하여 온다. 일설에서는 고려 태조 왕건이 유왕골마을에 행차할 때에 필요한 그릇을 만든 곳이라고도 한다. -꼬꼬바위 : 이 산은 참으로 이름이 많은데 덕회산, 금계산, 꼬꼬바위, 고귀암으로 불린다. 태조 왕건이 이 산을 올라보고 후삼국 통일의 대업(大業)을 구상했다고 전한다.(이 산을 유량동지역에서는 태조봉이라고 한다). [전설] 꼬꼬바위의 모습이 닭처럼 생겼는데, 그 닭의 머리는 직산을 향하고 꼬리는 목천을 향하고 있다. 닭이 직산의 정기를 전부 먹어치워 직산은 가난해졌으나 배설물을 받는 목천은 부자가 되었다고 한다. -월현산(月懸山) : 점말 뒷산. 달에 매달려 있는 산같이 생겼다 하여 다람절산이라고도 한다. -감찰 곽유흠 묘소 : 병천면 관성리 의부동 사람으로 사헌부 감찰을 지낸 청주 곽씨의 묘소. 다람절 산 남쪽 중간에 있다. -최봉도로 : 도라지고개에 다 이르러 최씨네 산봉우리로 넘어가는 길이라 하여 최봉도로라고 한다. 혹자는 근처에서 최고 높은 봉우리라서 최봉도로라고 했다고도 한다. -너넝굴 : 탑도루 위에 있는 골짜기다. -오리나무골 : 오리나무가 많아서 오리나무골이라고 한다. -졸아지고개 : 서기 930년 고려 태조가 유왕골에서 유숙한 후 태조봉에 오를 때에 졸병, 즉 하사관급 군인들이 이곳에서 보초를 섰으므로 졸아지들이 보초를 서는 고개라는 뜻에서 졸아지고개라고 부른다. 후에 조라지고개 또는 도라지고개로 변음되었다. -졸아지고개 절터 : 졸아지고개 바로 밑에서 왼쪽으로 가면 절터가 있는데, 아주 넓으며 우물도 아주 물맛이 좋다. -졸아지집터 : 졸아지고개 못 미처 오른쪽에 집터가 있는데, 옛날에 산적이 자주 출몰하여 여기에 살던 사람들이 마점으로 이사 갔다 한다. 그 곳이 신흥리(新興里)다. -졸아지목샘 : 졸아지고개 바로 밑에 샘이 있는데, 천안에서 고개를 넘어오다가 한참 목이 마를 때 목을 축일 수 있어 목샘이라고 하였다. 천안으로 가는 교통이 좋아져 고개를 넘는 이가 없어 샘도 없어졌다. -음달졸아지 : 졸아지(도라지)고개 가는 도중의 응달진 곳을 음달졸아지라고 한다. -조롱목안 : 도라지고개 밑 옛날 절터가 있던 곳을 말하는데 조롱목처럼 매달려 있다 하여 조롱목안이라 한다. 이곳에 살면 부자가 되는데 부자가 되면 이사를 가야한다고 한다. 조롱이 무거워 끊어지기 때문이다. -명막바위(明幕岩) : 점말에서 유왕골로 가다가 천안으로 넘어가는 고개가 졸아지 고개인데, 중간쯤에 바위가 넓게 퍼져 있고 그 위로 물이 맑게 막을 지어 흘러서 생겨난 이름이다. 경치가 아주 좋다. -아들바위 : 졸아지고개로 가는 길 옆에 있는 큰 바위로 옛날 어느 여인이 이곳에 정성을 드린 후에 아들을 얻었다고 한다. 목천 사람들이 이곳을 지나갈 때에는 돌을 얹어놓고서 가정의 안녕을 빌었다. -큰 지니미 골 : 점말 뒤 큰 골을 큰 지니미 골이라고 한다. -작은 지니미 골 : 점말 뒤 작은 골을 작은 지니미 골이라고 한다. -탑 도루 : 옛날 화전을 일구어 살던 시절에 캐낸 돌을 쌓아 놓았는데 마치 탑처럼 높이 쌓여 있어 탑 도루라고 한다. -타고넉골 : 탑도루 옆의 널찍한 고랑을 말한다. -큰 바위골 : 점말 뒤 큰바위가 있는 곳인데, 옛날에 이곳에서 여인네 들이 치성(致誠)을 드렸다 한다. -큰 참나무골 : 점말 뒤 큰 참나무가 많아서 큰 참나무골이라고 한다. 근래 버섯 재배하는 사람들이 베어 가서 참나무가 많이 없어졌다. -지내너머 : 큰 지니미골에 가는 길을 말하며 점말 뒤에 있다. 점말에서 이곳을 지내너머라고 하는데, 지니미골을 지나 넘어간다고 해서 지나너머였는데 지내너머로 변음되었다. 고려태조 왕건이 유왕골로 갈 때 이곳을 지나 넘어갔다고 한다. -점터 : 서낭(민간에서 서낭신(神)이 붙어 있다는 나무) 아래로 옛날 그릇을 굽던 곳이다. 최근에도 그릇조각이 출토되었으며 밭으로 일구어 집을 지으려고 정리 작업을 한 후 그 흔적을 볼 수가 없다. -서낭골 : 큰 참나무가 서 있다. 돌을 던지면서 “귀신아! 물러가 라”하고 지나가던 곳인데, 새마을 사업으로 서낭을 헐어 버렸다. 참나무는 버섯 재배하는 사람들이 베어갔다. -벼락폭포 : 점말 앞개울에 있다. 사람 두길 정도의 높이에서 물이 떨어진다. 점말 사람들이 목욕하는 장소이다. 물이 떨어지는 소리가 꼭 벼락치는 소리와 같아서 벼락폭포라 한다. -맷돌바위 : 유왕골로 가는 도중의 왼쪽에 있는데 맷돌처럼 생겼다. 옛날 장수들이 힘 겨루기를 할 때 이 돌을 사용하기도 했다고 한다. -형제바위(兄弟岩) : 맷돌바위 위 개울 건너에 있는데 돌 두 개가 마주보고 있어서 형제바위라고 한다. 그 밑 개울의 경치가 아주 좋다. 이 바위를 위하면 형제의 우애가 좋아진다 하여 예전에 여인들이 위하던 바위이다. -귀신바위 : 점말에서 졸아지고개로 가는 도중의 길옆에 있다. 지금은 개울 중간에 있지만 옛날 오솔길일 때에는 그 앞으로 지나가게 되어 달밤에 그곳을 지나가려면 바위 그림자가 귀신이 앉아 있는 모습 같아 등골이 오싹하여 귀신바위라고 한다. -연자방아터 : 점말 느티나무 밑에 있는데, 지금은 연자방아 밑 부분만 남아 있다. 2000년까지 있었는데 없어져 아쉽다. -느티나무 : 수령 500년, 높이 12m, 둘레 3.5m 정도이다. 6.25사변 당시 사흘간 울었다는 전설이 있다. 6.25 사변 당시 폭탄을 맞아 나무가 반쯤 잘라져 있다.
-
[기획특집] 천안의 지명유래 ⑰[천안신문] 본보는 지난 151호부터 천안 각 읍면동의 지명유래에 대한 연재를 진행중이다. 천안이라는 지명에 대한 기록은 고려 태조 13년인 930년 8월 8일 기해 일에 고려태조가 대록에 내려와 동서도솔과 탕정의 일부와 사산의 일부와 대록의 일부를 병합하여 천안이라 하고 도독부를 둔데서 유래한다. 대록은 지금의 목천이요, 사산은 직산이며, 동도솔과 서도솔은 천안의 일부이며, 탕정은 온양 탕정의 일부다. 각 지역에 내려오는 천안의 지명은 1988년부터 이원표 선생이 동부 6개 면을, 1987년도부터 오세창 선생이 천안시를 조사해 1960년경 한글학회에서 발행된 ‘한국 지명총람’을 참고로 가감 수정해 동부 6개면은 1990년 천안군에서 ‘역사의 현장’으로 출간되었으며, 천안시는 1989년 천안문화원에서 ‘천안의 지명’으로 출간하였다. 그 후 1999년 천안시 문화원에서 시와 군에서 발행된 것을 합하여 ‘천안의 땅 이름이야기’로 출간했다. 이번 연재는 이를 바탕으로 했으며, 일부 내용은 천안 향토사학자 김종식 선생이 재조사를 통해 가감하였음을 밝혀둔다. <편집자 주> ▲교촌리(校村里) 교촌리는 목천군 읍내면 용연리, 후평리, 신기리가 1914년 행정 구역 통폐합에 따라 이루어진 마을로, 향교가 있는 마을이라 하여 교촌리라는 이름이 붙었다. ▶교촌1리(신후, 아랫말) -보문사 : 솟대배기 뒤 흑성산 골짜기에 있었다. 80여 년 전 지산리에 있던 승천사의 불상을 옮겨 모셨는데 독립기념관 부지로 포함됨에 따라 병천면 가전리로 옮겼다. -솟대배기 : 쇳대배기라고도 하고 신기라고도 하며, 현재는 신후라고 부른다. 철종 때 이수증(李守曾)이 과거에 합격하여 마을 앞에 솟대를 세웠다고 한다. -수레바퀴터 : 흑성산성을 쌓을 때 수레가 다녔다고 하며, 지금까지도 수레가 다녔다는 길의 자취가 남아 있다. -큰골 : 흑성산에서 제일 큰 골짜기로 교촌리와 남화리의 경계가 된다. -찬샘이 : 흑성산에 있는 샘으로 물이 매우 차며, 미군과 공군이 주둔할 때 이 물을 마셨다고 한다. -뱀날산 : 서리와 신후 사이에 있는 등성이로 가늘고 길게 뻗어 있어 뱀날산이라고 한다. 뱀날산은 풍수학적으로 신후마을 앞에 있는 부분이 뱀머리이고 흑성산 기슭 쪽이 꼬리에 해당된다고 한다. 흑성산 정상에서 내려다보면 뱀 모양으로 생겼다는 것이다. 뱀 머리 쪽에 어느 장군 묘라고 하는 큰 묘에 비석을 세우는 바람에 뱀이 죽은 형이 되어 자손들이 모두 망해 버렸다고 한다. 이 주인 없는 묘는 독립기념관이 들어설 때 동리 공동묘지로 이장되었다. 또한, 꼬리 부분에는 어떤 사람이 양계장을 짓기 위해 포크레인으로 땅을 파헤치는 바람에 꼬리도 잘려나가 결국 양계장도 망해 버려 모두 떠나고, 국립청소년수련원이 들어섬에 따라 허리 부분도 잘렸다고 한다. -팽나무골 : 신후 앞 골에 오래된 팽나무가 많이 서 있었다. -구 향교터 : 솟대배기 북쪽 수레바퀴 터 밑에 있는데 임진란(壬辰亂) 이전에 있었던 목천 향교 터이다. -후평(後坪) : 뒷들 물다리 밑에 후평리가 있었다. 그곳에 물레방아가 있었는데 현재는 마을은 없어지고 경지 정리가 되어 있다. -아랫마을 : 서리와 접경지역에 몇 년 전부터 새로 형성된 마을로 현재 8호가 있다. ▶교촌2리(향교말) -용연저수지 : 1955년 시공하여 1962년 4월 19일에 완공, 담수를 시작했다. 용연저수지 주변 경치가 아름다워 시(市)에서는 이 일대를 국민 관광단지로 조성할 계획이다. -객쟁이골 : 저수지 뒤 흑성산에 있는 큰 고랑을 말한다. 목천 향교를 지을 때 기둥이며 서까래를 이곳에서 베어와 사용했다고 한다. 향교의 대성전(大成殿)에 사용되는 나무를 다듬던 각수(刻手)들이 잠시 살던 곳이라 하여 객쟁이골로 불린다. -꼬꼬 바위 : 향교 뒤 산으로 조금 올라가면 나타난다. 바위가 뾰족뾰족하게 닭 벼슬처럼 생겼다 하여 꼬꼬바위라 부른다. 동네에서 날이 가물면 기우제를 이곳에서 지냈다고 한다. 고귀바위라고도 한다. 태조 왕건이 이곳에 머물러 있을 때 이 바위에 올라가서 사방을 두루 살펴보았다고도 한다. -승지펀덕 : 이곳에서 어떤 장수가 왜구를 크게 물리쳤다고 한다. -고만이들 : 구만들이라고도 한다. 이 들에 모(모내기)를 다 심으면 전국의 모를 다 심게 되므로 이제 그만 심어도 된다고 하여 구매들이 구만이들로 변음되었다 한다. 수리 시설이 되기 전에는 건천답(乾川沓)이었다. -앙골 : 동네 안에 있는 고랑인데 안골을 앙골로 부른다. -기와터 : 지금 향교 옆 밭이다. 예전에 향교를 지을 때 이곳에서 기와를 구워 사용했다고 한다. -새대골 : 이 골을 넘으면 쇳대배기다. -느딜미기 : 쇳대배기 가는 작은 고개를 느딜미기라고 한다. -향골 : 꼬꼬바위가 있는 고랑이다. -큰골 : 향교(鄕校)말 뒤 흑성산의 큰 고랑인데 근처에서 제일 깊고 길다. 1970년대 초에 미군부대 차가 흑성산에서 내려오다 고장 나서 이곳으로 굴러 차에 타고 있던 군인과 민간인이 모두 죽은 일이 있었다. -뒷박골 : 동네 밖의 고랑을 뒷박골이라고 한다. -긴박골 : 동네 밖의 긴 고랑을 말한다. -뒷골 : 동네 뒤 골짜기를 말한다. -용연(龍淵) : 예전 저수지 복판에 마을이 있었다. 이곳에 큰 정자나무가 있었고 그 밑에 우물이 하나 있었는데, 물맛이 충청도에서 가장 좋았다고 한다. 고려 태조 왕건이 후삼국을 통일하기 위하여 천안 지방을 전진기지로 했을 당시 이곳 우물을 자주 길어다 마셨는데 임금이 마시는 물이라고 하여 용연(龍淵)이라고 하였다 한다. -물아래, 물위 : 용연저수지가 생기기 이전 옛날부터 조상들이 현재의 저수지 제방을 기준으로 하여 위쪽은 물위, 아래쪽은 물아래라 불러 왔으며 물위 사람, 물아래 사람으로 구분하기도 하였다. 저수지가 생기고 보니 옛 어른들의 선견지명에 탄복할 따름이다. -목천 향교 : 솟대배기에 있던 향교가 임진왜란 때 소실되자 참봉 한 혁(韓赫)이 현재의 장소로 이건(移建) 하였다고 한다.(충청남도 기념물 제108호) -정문터 : 이인좌의 난 때 김진희(金晉熙)가 청주성에서 의병을 일으켜 반란군을 진압한 공으로 정문을 하사 받았다. 관 충신 효자 증 숭록대부 판중추부사 겸 의금부사 오위 도총부 도총관 숭록대부 지중추부사 용양위 부호군의 벼슬을 지냈고 시호는 충헌공이다. 정문은 향교 입구 계단 바로 옆에 있었는데 지금은 남아 있지 않다. 묘소가 목천읍 서리 목천 중.고등학교 정문 옆에 있다. ▲서흥리(西興里) 서흥리는 목천군 읍내면 일덕지리, 이덕지리, 와룡리, 상림리, 동막리가 1914년 행정 구역 통폐합에 따라 이루어진 마을인데, 동쪽은 산이고 서쪽은 들이므로 서쪽으로 마을이 발전해야 흥한다고 하여 서흥리라 하였다. ▶서흥1리(동막, 문화 마을, 남산말) -쟁이골 : 이곳은 철, 자기, 옹기를 만드는 장인들이 살았던 곳이다. -평풍(병풍)골 : 동막 안골인데 평풍(병풍)같이 생겼다. -점골 : 옹기 그릇점이 있었다. -고래실 : 동막 앞과 위가 되는데 좋은 논은 모두 이곳에 있다. 지금은 이곳에 문화마을이 새로 생겼다. -호미쇠적골 : 쇠를 생산하여 물건을 만들던 공작소가 있었다. -여단터 : 목천현(木川縣)의 여단이 이곳에 있었다. 무의탁 영혼들의 명복을 빌며 제사를 지내던 곳이다. 동막 앞에 있는데 현재 터만 남아 있다. -사지골 : 여단터 옆의 고랑으로 귀신들이 쉬어 가는 곳이라서 사지골이라 한다. -동막(東幕) : 서흥리에서 가장 큰 마을로 공인(工人)들이 막을 짓고 제품을 만들던 곳이다. -산림동(山林洞) : 동막 위에 있는 남산말로 예전에는 산림동이라 했다. -명덕고개 : 명덕현(明德峴)이라고도 하며 서흥리에서 북면 명덕으로 넘어가는 고개이다. -사부장골 : 예전에 여단에 제사를 관장하던 사부장이 살았다고 한다. -깊은골 : 남산말 뒤 골이 깊은 곳이다. -고시골 : 북면 명덕리 안고시로 넘어가는 고개이다. -모래봉 : 산이 벗겨져 모래가 많이 보인다. -느런이골 : 북면 명덕의 느러니로 가는 고랑이다. -갯뱅이 : 하천 옆에 갯뱅이라고 부르는 곳이 있다. -삼뱅이골 : 동네 뒤로 고랑을 타고 넘으면 목천 삼뱅이에 이른다. -정골 : 예전에 이곳에서 그릇을 만들었다 한다. 점골인데 사람들이 정골이라고 부른다. -고매방골 : 남산말 앞으로 예전에 물건을 쌓아 놓았던 곳이라 한다. -밤나무골 : 밤나무가 많이 있다. -오애미골 : 어떤 처자가 오라버니를 애타게 기다리다 죽었다하여 오래비골 또는 오애미골이라고 한다. -큰골 : 남산말 뒤의 큰 고랑을 말한다. -쇠죽골 : 쇠를 녹여 물건을 만들던 곳이라 한다. -방등재 : 아랫동막 뒷산으로 그리 높지는 않은데 정월 보름날에 망월하던 곳이라 방등재라 부른다. 작은 산언덕이다. -잿배기 : 동네 뒤로 고개가 심하여 잿배기라 부른다. ▶서흥2리(새터말, 음담말, 안상역골) -새터말 : 일덕지라고도 하며 본래는 덕곡이었는데 동막 사람들이 새로 마을을 이루었다. -가골 : 서흥리 옆에 있는 골짜기다. -양달산 : 양달쪽에 있으므로 양달산이라 한다. -상용(上龍) : 음담말 위쪽에 있는 마을이다. -용연(龍淵)말 : 저수지에 묻힌 마을로 용연리를 말한다. 큰 느티나무 아래 샘이 하나 있었는데 물맛이 충청도에서는 제일 좋다고 하여 고려 태조 왕건이 이곳의 물을 자주 길어다 마셨다고 한다. 임금이 마시는 물이라 용연(龍淵)이라 했다 한다. 지금도 저수지의 물이 빠지면 큰 느티나무 밑동과 샘의 흔적이 나타난다. -와룡(臥龍) : 용연저수지에 수몰되었는데 태조 왕건이 이곳에서 잠시 쉬어 갔다 하여 와룡리라 하였다고 전해 온다. -정문터 : 언양 김씨 정문으로 효자 김의연(金義淵)의 정문이 와룡리에 있었는데 1800년 봄에 불이 나서 전소되었다. 그 후에 후손 김주현(金周鉉)이 덕전리 중리에 다시 세웠다. -삼문터 : 효자 김의연이 정문(旌門)을 하사 받을 때에 홍살문이 대문 앞에 있었다고 한다. 지금도 저수지 물이 빠지면 주춧돌을 볼 수 있다. -솟대골 : 언양 김씨 김동연(金東淵)이 과거에 합격하여 이곳에 솟대를 세웠으나 저수지가 생기면서 수몰되어 그 흔적을 알 수가 없다. 김동연은 사간원 헌납, 사간원 사간, 홍주목사, 홍주진영 병마절제사, 북청부사 등을 역임했는데 이곳에서 살다가 선영이 있는 먹뱅이로 이사했다. 목천읍지(木川邑誌)에 청백리로 이름이 등재되어 있다. -하마비 : 효자 김의연의 정문 앞에 대소인원하마비(大小人員下馬碑)라고 새겨진 자그마한 비석이 있었다. 모든 이들은 말에서 내려 지나가라는 뜻으로, 해방 전까지 있었는데 지금은 소실되어 볼 수가 없다. -어간이골 : 같은 동네 경계를 어간이라고 하고 절 입구도 어간이라 한다. 이곳을 돌아서면 절터에 갈 수 있고, 안상역골의 넓은 들녘이 나타난다. 안상역골과 바깥 상역골과의 경계이다. 철(鐵)도 났다고 한다. -대소골 : 죽림동(竹林洞)이라고도 하며 복조리 만드는 작은 대나무가 지금도 많이 있다. 일덕지다. 경주 이씨 족보에는 죽림동으로 기록되어 있다. -고시골 : 북면 명덕리 안고시로 넘어가는 골이다. 예전에 자기소가 있어서 자기를 만들었다고 한다. -동막고개 : 상역골에서 동막으로 넘어가는 고개를 말한다. -곱돌재 : 옛날에 곱돌이 많이 있었다 한다. 지금도 곱돌을 캘 수가 있다. -강당골 : 강당, 즉 글을 배우던 글방이 있던 곳이다. 상역골 입구, 지금의 버스정류장 부근이다. -쇠물고개 : 상룡에서 송전리로 넘어가는 고개인데 쇠의 일을 하던 고개이다. -이덕지(二德至) : 음담말 아래 상역골이다. -일덕지(一德至) : 위상역골에서 나라실로 넘어가는 곳과 안상역골 전부를 말한다. -절터 : 쇠물고개 밑에 절터가 있는데 부서진 탑만 현존하며 밭 주인이 대충 주어 모아놓았다. 절터의 규모로 보아 상당히 큰 절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평풍(병풍)바위 : 상역골 앞산 중턱에 있는데 평풍(병풍)처럼 생겼으며 동네 사람들이 위하던 바위이다. -좆뿌리명당 : 상역골 왜롱 모퉁이를 가리키는데, 이곳에 묘를 쓰면 자손이 번창한다고 한다. 또한 마주 보고 있는 용소말은 여자의 음부를 닮았다 하는데, 이곳에 사는 남자들은 모두 일찍 죽어 과부들만 살았다고 한다. 이는 남자의 정기를 여자들이 해치기 때문이라고 전하는데, 도로를 확장하는 과정에서 남자의 성기 부분이 잘려나가서 그 효력이 없어졌다고 한다. -됨박골 : 곱돌재 옆의 골짜기로 곡식을 재는 되를 엎어놓은 모습과 같이 생겼다. -청룡뿌리 : 저수지 무냉기 옆으로, 상역골에서 보아 청룡에 해당한다. -홍답 : 옛날에 홍씨 성을 가진 사람이 농사를 짓던 곳이라 한다. -무냉기 : 저수지가 생기면서 저수지 물이 넘어가는 곳(무넘이)을 말하는데, 옛날에 몇 가구가 살다가 저수지가 생기면서 동네가 없어졌다. 누가 마을 이름을 무냉기라 지었는지 참으로 탄복할 따름이다. -왜롱모퉁이 : 와룡리 모퉁이를 말하는데 중리와 경계이다. 아주 큰 느티나무가 있었는데 베어서 지금은 볼 수가 없다. 와룡(臥龍)이 왜롱으로 변음 되었다. -조산(趙山) : 동막 조씨(趙氏)들의 산이라 조산이라 한다. -옻샘골 : 찬물이 나서 옻 오른 사람의 치료에 아주 효험이 있으며, 약천동이라고 경주 이씨 족보(族譜)에 전한다. ▲덕전리(德田里) 덕전리는 목천군 읍내면 신흥리, 유왕동, 중리, 장흥동, 신평리, 용소말, 점말, 마점이 1914년 행정 구역 통폐합에 따라 이루어진 마을로, 덕회산(德會山) 밑에 좋은 밭이 있다고 하여 덕전리라 하였다. ▶덕전리 1리(용소말, 신평, 마점) -용소말(농소리), 용마 : 농소(農所), 용소말 또는 용마라고 하는데 목천 읍지(邑誌)에는 농소로 되어 있다. 전하여 오는 말에 의하면 태조 왕건이 이곳에 머물러있을 때 왕에게 필요한 물건을 이곳에서 만들어 비축해 놓았다고 한다. 또한, 태조 왕건이 유왕골 행차시 와룡리에서 잠시 쉴 적에 소세(梳洗)할 물을 떠간 데서 지명이 되었다고도 한다. 일설에는 고려 태조 왕건이 이곳을 행차할 시에 왕이 타는 말을 관리하던 곳이라 하여 용마(龍馬)라 했다고 한다. -용마(龍馬) : 태조 왕건이 타던 말을 관리하던 곳이라 한다. 지금의 용소말이다. -꼬꼬바위 : 이 산은 참으로 이름이 많은데, 덕회산, 금계산, 꼬꼬바위, 고귀암으로 불린다. 태조 왕건이 이 산에 올라 보고 후삼국통일의 대업을 구상했다고 한다. 고귀하신 분이 올랐다 하여 고귀암이라 하였는데, 고귀암이 변하여 꼬꼬바위가 되었다고 한다. 또 금계 포란형(抱卵形)의 대명당(大明堂)이 있고 닭의 벼슬처럼 생겼다 하여 금계산이라고도 한다. 덕회산(德會山) 밑에 좋은 밭이 많다고 하여 덕전리로 명명되었듯이 이곳 덕전리에서는 대부분 덕회산이라고 한다. -물레방아터 : 1960년대 후반까지 용소말 앞에 있었는데, 지금은 없어졌다. 물을 대던 보와 도랑은 흔적이 남아 있다. -도땅거리 : 용소말에서 신평마을로 가는 도중에 있는데 이곳에 상여(喪輿)집이 있다. -느름펀던 : 고욤들 중간에 있는 양지바르고 편편한 곳을 말한다. -벼락소 : 고욤들 중간에 도랑이 있는데 2m 정도 폭포를 이루어 벼락치는 소리처럼 물이 흐른다고 하여 부르게 된 것이며, 동네 사람들이 목욕하던 장소였다. 태조 왕건이 유왕골 행차 시에 와룡리에서 잠시 쉬었는데 그때 소세(梳洗)할 물을 이곳에서 떠갔다 하여 물탕이라고도 한다. -평풍(병풍)바위 : 고욤들 고랑 꼭대기에 바위가 마치 평(병)풍처럼 둘러쳐져 있다. -평(병)풍바위샘 : 평(병)풍바위 아래에 있는데 아무리 가뭄이 들어도 물이 줄지 않는다고 하며, 이 샘 바위에 이슬이 맺히면 비가 온다고 한다. -개구락지펀더기 : 고욤들 고랑 위에 있는데 개구리가 뛰려고 하는 모습을 하고 있는 명당이라고 한다. -뱀날 : 개구락지펀던(편더기) 위에 있다. 뱀이 개구리를 잡아먹으려고 하는 형상이라고 하는데, 뒤에서 황새가 뱀을 잡아먹으려고 노려보고 있어 뱀이 개구리를 못 잡아먹고 황새도 뱀을 못 잡아먹는다고 하여 대명당(大明堂)이라고 한다. -황새명당(明堂) : 황새가 뱀을 잡아먹으려고 내려앉은 모습이다. 또 뱀은 앞의 개구리를 잡아먹으려고 하는 모습으로 서로 견제 응시하는 바람에 아무 것도 해낼 수 없는 곳이라 하여 명당자리라고 한다. -고욤들 : 큰 고욤나무가 있어서 고욤들이라고 한다. 큰 고욤나무는 신평마을 사람이 목을 매어 자살하였기에 베어 버렸는데, 그 움이 난 것이 자라서 지금은 또 고목(古木)이 되었다. -고욤들 절터 : 고욤들 절터는 흔적이 없으며 지금은 밭으로 사용되고 있다. 기와 조각과 사기 조각이 많이 나온다. 이 계곡에서 동북쪽 방향으로 편편한 곳을 넘으면 점말 뒤 지내너머에 닿게 되는데, 고려 태조 왕건이 유왕골에 갈 적에 이곳을 거쳐 갔다고 한다. -도덕골(道德谷): 고려 태조 왕건이 이곳에 있을 때 모든 것을 잘 아는 도통사(都統使→고려 때 각 도의 군대를 통솔하기 위하여 두었던 무관 벼슬)를 데리고 다녔는데, 항상 태조 왕건을 수행하던 그 도통사가 이곳에 머물러 있었다고 한다. -매봉산 : 용소말 뒷산으로 매의 형상을 하고 있다고 한다. -뒷들 : 용연말 뒤에 있는 들판으로, 용소말 앞들을 말한다. ▶신평(新坪) 용소말 위에 있는 마을로 새로이 생겨서 신평이라고 한다. 옛날에 심씨들이 많이 살았다고 한다. -서낭당(堂) : 신평마을에서 마점마을로 가는 도중에 있는 첫 서낭이다. 신평마을 바로 위에 있는 큰 느티나무를 서낭(성황:城隍)으로 하여 1970년대 후반에도 이곳에 동리 사람까지 와서 서낭제를 올리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지금은 느티나무만 있고, 주변은 시민들의 쉼터로 조성되어 더위를 피하는 명소가 되었다. -안산 : 신평마을 앞산을 말한다. -노척골 : 이곳에 큰 절터가 있었는데 얼마 전까지만 해도 돌부처가 샘 바로 위에 있었다. 현재 돌부처는 없어지고 샘만 남아 있으며 물맛이 아주 좋다. 지금도 옛날 기와조각이 많이 나오는데 조선 초의 것으로 확인되었다. 또한 산의 생김새가 노적(볏섬)을 쌓아놓은 모습과 같다고 한다. -덜컹바위 : 신평마을에서 마점마을로 가는 도중의 개울 옆에 있었던 평평한 바위로 덜컹 소리가 난다고 하여 덜컹바위라고 하였는데, 길을 확장하는 과정에서 묻혀 버려 지금은 볼 수가 없다. -고인돌 : 고욤들 꼭대기에 있는 큰 바위로 고여 있어서 마치 고인돌처럼 보인다. 평(병)풍바위 위에 있다. -비석서낭 : 비석처럼 생긴 돌을 신성시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1970년대에 도로를 확장하는 과정에서 서낭터는 없어지고 비석 돌은 덕전국민학교 교정(지금의 덕전야영장)으로 옮겨 정원 장식으로 활용하였다. -벚나무 서낭 : 벚나무를 위하던 서낭이다. 신평마을에서 마점 마을 사이에는 다섯 개의 서낭터가 있었는데 도로 확장시에 모두 없어졌다. 근간에 모두 잊혀진 지명들이다. ▶마점(馬店) 태조 왕건이 후삼국통일의 대업을 꿈꾸며 태조봉에서 천안의 지세를 살피던 당시 군사들이 말을 이곳에 매어 두었다고 하여 마점이라고 하며, 뒷산을 마점산이라고 한다. 또 군인들이 쉬었던 곳을 마점사(馬店舍)라고 한다. 일설에는 말의 혈이 있어서 장수가 난다고 하였는데, 일제 때 일본인이 말의 혈을 끊어서 지금은 장수가 나지 않는다고 한다. 또 아홉사리고개를 넘는 모든 사람들과 우마(牛馬)가 반드시 이곳에서 쉬어 갔다고 하여 붙여진 지명이라고도 한다. -선바위 : 마점마을 앞산에 있는 바위로 마치 서 있는 사람처럼 생겼다고 하여 선바위라고 한다. -거무산(흑성산) : 높이 519.3m로 거무성 또는 흑성산이라 부른다. 이곳에서 기우제를 지냈으며 옛날 군인들이 불을 달았던 장대바위와 장군이 앉아서 지휘하던 장군바위가 있다. 장군바위는 지금도 장군의 엉덩이처럼 패어 있다고 한다. 이곳에 옛날에 성이 있었는데 둘레가 2290척 약 500칸으로 1㎞ 정도 되고, 높이는 6자(180㎝) 정도 되며, 성안에 우물이 있는데 물맛이 아주 좋아 공군과 미군부대가 주둔할 때에는 이 물을 사용하였다. 현재는 방송국의 중계탑이 서 있다. -절고개 : 절터로 가는 낮은 고개를 말한다. -절터1 : 마점과 도라지고개 사이에 마점사(馬店寺)란 절이 있었다고 하나 명문이 없으므로 확실하지 않다. 터만 확인할 수 있다. -절터2 : 지산리 못 미쳐 흑성산 밑에 옛날에 절이 있었다 한다. 지금의 생수 공장 너머에 있다. -절터3 : 집 뒤에 작은 암자가 있었다. 그곳에 집을 지어 사람이 살다가 이사 가서 다시 빈 터가 되었다. -절터4 : 흑성산 꼭대기에 절이 있었는데 허물어져 그 흔적만 남아 있다. -약수터 : 흑성산 꼭대기 절터 아래에 있는데 물맛이 아주 좋으며 위장병에 잘 듣는다고 한다. -도라지고개 : 마점에서 도라지로 넘어가는 고개를 말하기도 하고, 또 점말에서 천안 유량동으로 넘어가는 고개를 말하기도 한다. -아홉사리고개 : 마점에서 천안 유량동으로 넘어가는 고개인데 작은 산을 아홉 번 돌아가야 천안에 도착할 수 있다고 하여 아홉사리고개라고 한다. 또 고개의 모습이 국수사리 같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승척골고개 : 마점에서 지산리 승척골로 넘어가는 고개이다. 옛날 이곳에서 적군과 싸워 이겨 승척골이라고 한다. -집뒤산 : 마점 뒷산 마점산(馬店山)을 가리킨다. -윗마을 : 마점 윗동네를 말한다. -윗마을 안산(山) : 윗마을 앞산을 말한다. -서낭당 : 아홉사리고개에 있다. 옛날의 참나무가 죽고 새순이 나와 옛 서낭의 명맥을 잇고 있다. 지금도 비교적 원형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
[기획특집] 천안의 지명유래 ⑯[천안신문] 본보는 지난 151호부터 천안 각 읍면동의 지명유래에 대한 연재를 진행중이다. 천안이라는 지명에 대한 기록은 고려 태조 13년인 930년 8월 8일 기해 일에 고려태조가 대록에 내려와 동서도솔과 탕정의 일부와 사산의 일부와 대록의 일부를 병합하여 천안이라 하고 도독부를 둔데서 유래한다. 대록은 지금의 목천이요, 사산은 직산이며, 동도솔과 서도솔은 천안의 일부이며, 탕정은 온양 탕정의 일부다. 각 지역에 내려오는 천안의 지명은 1988년부터 이원표 선생이 동부 6개 면을, 1987년도부터 오세창 선생이 천안시를 조사해 1960년경 한글학회에서 발행된 ‘한국 지명총람’을 참고로 가감 수정해 동부 6개면은 1990년 천안군에서 ‘역사의 현장’으로 출간되었으며, 천안시는 1989년 천안문화원에서 ‘천안의 지명’으로 출간하였다. 그 후 1999년 천안시 문화원에서 시와 군에서 발행된 것을 합하여 ‘천안의 땅 이름이야기’로 출간했다. 이번 연재는 이를 바탕으로 했으며, 일부 내용은 천안 향토사학자 김종식 선생이 재조사를 통해 가감하였음을 밝혀둔다. <편집자 주> ▲지산리(芝山里) 지산리는 목천군 서면 상남산리, 하남산리, 양지리가 1914년 행정 구역 통폐합에 따라 이루어진 마을인데, 마을명은 양지말의 「지」자와 상남산, 하남산의 「산」자에서 유래된 것이다. ▶지산1리(양지말) -동암사 절터 : 동암사란 절이 흑성산(黑城山) 꼭대기에 있었는데 지금은 터와 절구, 맷돌 등 흔적만 남아 있다. 목천으로 이사 갔다 하나 정확한 소재를 알 수가 없다. -노적바위 : 동네 뒤에 있는 큰 바위로 노적더미처럼 생겼다. -골패바위 : 예전에 나무꾼들이 이곳에 쉬면서 골패(화투의 일종)를 했다고 한다. -평박골 : 펀던말림 위에 있는 골인데 예전에 박씨 성을 가진 사람이 살다가 이사 갔다고 한다. -펀던말림 : 조금 펀펀한 고랑이다. -장군펀던 : 예전에 장군이 앉아 지휘하던 곳이라 한다. -구멍바위 : 큰 바위에 구멍이 뚫려 있다. -큰골 : 흑성산 밑 큰 고랑을 말한다. -가는골 : 동네 뒤 큰골 옆의 작은골을 말한다. -장고개(1) : 천안장(天安場)을 보러 넘어 다니던 고개인데 지금은 그 흔적만 있다. -멧돼지골 : 예전에 산돼지들이 자주 내려와서 이름이 생겼다고 한다. -당골펀던 : 예전에 이곳에 당집이 있었다 하나 흔적조차 남아 있지 않다. -가장(假葬)골 : 종안말 서쪽에 있는 골짜기로 어린아이가 죽으면 이곳에 묻었다. 애장골 이라고도 한다. -갈미봉 : 갈모봉이라고도 하며, 승척골 서쪽에 있는 산으로 갈모처럼 생겼다. -국수봉 : 국시봉이라고도 하며, 승천사(寺) 터 뒤에 있는 산인데 봉우리가 매우 수려하다. ▶지산2리(중남산, 상남산) -뒷동산 : 동네 뒷산을 그렇게 부른다. -아홉사리고개 : 마점에서 유랑동으로 넘어가는 고개인데 작은 산을 아홉 번 돌아야 천안에 도착할 수 있다고 하여 아홉사리고개라고 한다. 또 고개의 모습이 국수사리 같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장고개(2) : 천안장(場)을 보러 넘어 다니던 고개인데 지금은 없어졌다. 현재의 남양분유공장 자리이다. -비성골 : 예전에 비석처럼 생긴 돌이 있었는데 지금은 없어졌다. -능골 : 아주 큰 묘소가 있었는데 지금은 고총(古塚, 묵은 묘소)이 되었다. -부강골 : 이곳에 묘를 쓰면 부자가 된다고 전하나 아직 못 찾았다고 한다. -절 펀던 : 예전에 이곳에 절이 있었다. -느티나무(1) : 시(市) 보호수인데 수령은 300년 정도, 둘레는 5m, 높이는 15m 정도이다. -느티나무(2) : 시(市) 보호수인데 수령은 300년 정도, 둘레는 3.5m, 높이는 12m 정도이다. -가마들 : 가마논이라고도 하는데, 주물을 녹이던 가마가 있었다. -사직박펀던 : 철을 생산하던 쇠점이 있었다. -조산펀던 : 조씨 성을 가진 사람의 산이었다. -굴바위 : 굴암이라고도 하는데, 노적바위 위쪽에 있는 큰 굴이다. 비가 올 때 30명이 은신하여 비를 피할 수 있을 정도이다. -상남산 : 양지말 서북쪽에 있는 마을이다. -노적바위 : 노적암이라고도 하며 동안골에 있는 바위다. 모양이 노적더미같이 생겼다. -돈치기고개 : 사직박 펀던에서 부적골로 넘어가는 평평한 고개다. 나무꾼들이 이곳에서 돈치기를 하였다고 한다. -동암골 : 동이안굴 이라고도 하며 사직박골 북쪽에 있는 골짜기다. -평[병]풍암 : 평(병)풍바위로, 병풍을 쳐놓은 것 같이 생겼다. -부적골 : 동안골 남쪽 너머에 있는 골짜기다. -승적(勝敵)골 : 사직박펀던 위쪽에 있는 골짜기, 흑성산(黑城山) 서쪽 밑으로 매우 아늑하여 피난터라고 하며, 왜구를 물리친 곳이라고도 한다. -승천사(昇天寺)터 : 절펀던에 승천사란 절이 있었다. 옛날 이곳에서 도통한 스님이 도를 얻었다 하여 승천(昇天)이란 이름이 생겼다고 한다. -양지말(陽地) : 양달말, 양지리라고도 하는데 승척골 뒤 양지쪽에 있는 마을이다. -유량동고개 : 상남산 마을에서 천안 유량동으로 가는 고개, 유량현(峴)이라고도 한다. -장(場)고개 : 지산리에서 천안 구성동으로 넘어가는 고개, 천안장(天安場)을 보러 다니던 고개이다. -호랑이굴 : 동안굴 중턱 바위에 있는 굴, 예전에 승척골 부인들이 나물을 캐러 이곳에 왔다가 호랑이 새끼가 여러 마리 있는 것을 보았다. 부인들이 귀엽게 생겼다고 어루만지면서 좋아하였다. 한 부인이 무엇이 귀여우냐고 하자 어미 호랑이가 별안간 소리를 지르는 바람에 모두 혼비백산하여 달아났다. 밤중에 호랑이는 모든 부인의 나물바구니를 각각 그들의 집에 가져다주었으나 무엇이 귀여우냐고 한 부인의 것은 갈기갈기 찢어 버렸다고 한다. -중안말 : 중남산, 상남산마을과 양지말 중간에 있는 마을이다. -줄바위 : 바위가 줄을 지어 서 있다. ▲교천리(交川里) 교천리는 목천군 서면 교항리, 일승천리, 이승천리가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이루어진 마을인데, 마을명은 교항리의『교』자와 승천리의 『천』자에서 유래된 것이다. -교항(交項) : 돌마루, 교항리라고도 한다. 승천 서북쪽에 있는 마을로 지형이 돌아가는 목이다. 임란(壬亂) 후 경제가 황폐화 되었을 당시 물물교환을 하던 장이 이곳에 있었다고 한다. -아래침 : 아랫동네를 말한다. -위침 : 윗동네를 사람들이 그렇게 부른다. -사청말 : 예전에 물물교환을 하던 장이 있었을 때 이것을 관장하던 관청이 있었다고 한다. -참새펀던(펀더기) : 따뜻하여 겨울에 참새가 많이 날아온다고 하여 생긴 이름이다. -부엉더미 : 부엉새들이 이곳에 앉아 운다고 하여 생긴 이름이다. -상하터 : 아랫동네와 윗동네 사람들이 나무하러 다니다 만나던 곳이다. -납작골 : 예전에 쇠를 담금질하여 물건을 만들던 곳이다. -두루봉 : 이곳에 오르면 두루 다 보인다고 하여 두루봉이라 한다. -명막골 : 예전에 장인들이 움막을 짓고 살면서 물건을 만드느라고 밤새 불을 밝혀 명막(明幕)골이 되었다. -돌마루 : 사람들이 산에서 나무를 해 오다 힘이 들어서 쉬던 평평한 바위이다. -초막골 : 초막동, 이승천리, 승척골 남동쪽에 있는 마을로 일승천리 아랫동네이다. 철공인들이 초막을 짓고 살았다고 한다. -중골 : 예전에 이곳에 절이 있었다 한다. 혹자는 장인들이 물건을 만든 곳이었다고도 한다. -각골 : 밭 50평이 뿔처럼 뾰족하다 하여 각골이라고 불렀다. -날음터 : 예전에 장인들이 만든 물건을 나르고 숫자를 확인하던 곳이다. -용지봉 : 이곳에서 용이 승천하였다고 한다. 일설에는 용이 지붕을 지고 있는 형상으로 명당(明堂)이라고 한다. -갈음매기 : 아래, 윗동네의 길이 이곳에서 갈라진다. 논에 대는 물도 이곳에서 갈라진다. -구렁고개 : 안터에서 초막골로 넘어오는 고개다. 큰 구렁처럼 생겨서 고개가 험하므로 혼자 넘는 것을 꺼렸다고 한다. -모이골 : 예전에 장인들이 물건을 만들어 모아놓았던 곳이다. -됫골 : 동네 뒷산의 작은 고랑을 말한다. -느티나무1 : 수령은 200년, 둘레는 3m, 높이는 15m 정도이다. -느티나무2 : 수령은 200년, 둘레는 3m, 높이는 15m 정도이다. -무생잇골 : 승척골 앞에 있는 골짜기로 철과 관계되는 일을 했던 곳이다. 철을 분리하고 버린 부산물들이 산에 흩어져 있다. -뱀날 : 텃골 아래에 있는 산으로 모양이 뱀처럼 길게 생겼다. -승척골 : 승천골, 일승천리라고도 한다. 교천리에서 가장 큰 마을이며, 흑성산(黑城山) 밑에 있다. -열녀 청주한씨 비 : 뱀날 끝에 있는 열녀 청주한씨 비는 1922년 2월에 세워졌다. -장(場)고개 : 승척골에서 천안장으로 가는 고개를 말한다 -취암산골 : 취암산 동쪽 밑에 있는 골짜기다. -텃골 : 승척골 아래쪽에 있는 골짜기다. 옛 집터가 있는데 창원 황씨들이 처음 이곳에 와 살았다고 한다. ▲신계리(新溪里) 신계리는 목천군 서면 신흥리, 농계리, 주막거리가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이루어진 마을인데, 마을명은 신흥리의 『신』자와 농계리의 『계』자에서 유래된 것이다. ▶신계1리(안터, 송말) -장자울 : 장우동, 송말, 신흥리라고도 하며, 안터와 남화리 사이 흑성산 밑 골짜기 마을이다. 예전에 큰 부자가 마을을 이룩하였다고 한다. -안터 구레 : 농사에 필요한 물이 항상 있는 안터 앞 논을 안터 구레라 한다. -뒤루박골 : 교회 뒤 큰 고랑인데 예전에 쇠가 나왔다고 한다. -지마골 : 한약으로 쓰는 고삼이 많이 있었다고 한다. 고삼을 호마 또는 지마라고도 한다(虎麻, 芝麻) -됫골 : 동네 뒤 고랑을 말한다. -강당골 : 흑성산 밑 매골 옆인데, 예전에 이곳에 글을 가르치던 강당(서당)이 있었다고 한다. -매골 : 마을 뒤 고랑인데 매의 형상을 하고 있다 한다. -송납산 : 동네 뒤 높은 봉우리. 흑성산에서 한 맥이 남으로 뻗어 작은 산을 이루었는데 송납산이라 한다. -수녹골 : 구전에 의하면 쇠를 녹이던 곳이라 전하나 흔적이 없다. -속대골 : 강대골. 옛날에 솟대를 세웠다고 하나 어느 때인지 알 수가 없다. -농계리(農溪里) : 안터의 옛 지명이다. 승천 동북쪽 안에 있는 마을이다. -송말 : 장자울이라고도 하며, 예전의 신흥리(新興里)다. 예전에 큰 부자가 살았다고 한다. 독립기념관이 생기면서 폐촌 되었다. -진고개 : 승천에서 송말 앞으로 이어지는 고개로 높이는 낮으나 매우 긴 편이다. -범박골 : 주물을 부어 물건을 만들 때 사용하던 틀을 만들던 곳이다. -진남이골 : 이곳에 진남사(寺)란 절이 있었다. -떼골 : 떼가 유달리 잘 자라 동네 초상이 나면 이곳의 떼를 가지고 묘소를 만들었다고 한다. -감나무골 : 큰 감나무가 있었는데 지금은 없다. -큰욕골 : 흑성산에서 내려오는 계곡물로 동네 사람들이 목욕을 하던 곳이다. 큰 욕골에서는 주로 남자들이 목욕을 하였다. -작은욕골 : 큰욕골 옆에 있는 골로 여자들이 목욕을 하던 곳이다. 작은 욕골에는 남자들이 절대 갈 수 없었다. -중골 : 예전에 절이 있어서 중이 탁발하러 다니던 곳이다. 장인이 물건을 만들던 곳이라는 설도 있다. -높은행길 : 마을 앞의 한길을 말한다. -다리실(橋項) : 안다리실과 바깥다리실이 있다. 이곳에 마을이 있었는데 없어졌다고 하며, 경부고속도로가 뚫리고 목천 인터체인지가 생겨 그 위로 다리가 놓여졌다. 이곳은 성남면 용원리, 목천읍 천정리, 신계리 경계 지점으로 옛날 누가 다리실(橋項)이라고 명명했는지 탄복할 따름이다. -계피골 : 예전의 피난처로 아주 후미져서 몸을 감추기가 좋다고 한다. -호롱골 : 혼령이 사는 곳이라 하여 사람들이 가기를 꺼려하였다고 한다. -장고개 : 예전에 목천장을 보러 넘어 다니던 고개이다. -큰 학골 : 예전에 목천이 낳은 학자 후천 황종해(黃宗海)가 이곳에서 태어났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작은 학골 : 큰 학골의 옆에 있는 골을 말한다. ▶신계2리(승천, 주막거리) -승천 : 예전에 어떤 사람이 도(道)를 얻었다 하여 승천(升天)이란 지명이 생겼다고 한다. -주막거리 : 지금의 버스 정류장 부근으로 예전에 주막이 길게 이어져 있었다 한다. 천안에서 넘어오는 사람, 목천에서 천안으로 가는 사람, 삼남에서 올라오는 사람들이 모두 이곳을 지나가게 되어 잠시 쉬어 가는 주막이 길 옆에 많이 있었다고 한다. -당집 : 지금의 오피스델 자리인데 당집이 있어서 동네 평안을 빌었다고 한다. -장승거리 : 신계2리(성남면 분기점) 큰길 양쪽에 큰 미루나무가 있었고 거기에 장승을 세워 길가의 안녕과 동네 평안을 비는 노제를 지냈다. 도로 확 포장 사업으로 큰 미루나무를 베어낸 후부터 노제를 지내지 않는다. -염장골 : 사람이 죽으면 염하던 사람이 살던 곳이라 한다. 천민이 하던 일이라 일반인은 하지 않았다고 한다. 혹자들은 사람이 죽으면 며칠 이곳에 묻어 놓았다가 장사를 지냈다고 전한다. 신계1리 입구 맞은편인데 아파트를 지으면서 없어졌다. -어지미 골 : 염장골 옆인데 아파트를 지으면서 없어졌다. -호령골 : 동성휴게소 앞 고랑인데 예전에 혼령이 사는 곳이라 하여 사람들이 나무하는 것을 꺼려하였다고 한다. 지금 아파트 공사로 없어졌다. -왕자봉 : 촌로(村老)들의 증언에 의하면 예전에 왕자의 태를 묻은 곳이라 하며, 혹자들은 근동의 모든 산들이 이 산을 향하여 절을 하고 있는 안산조배(案山朝拜)의 형상을 하고 있다고 한다. 또는 산의 생김새가 왕자(王字) 모양을 하고 있어서 생긴 이름이라고도 한다. 일제 때 도로를 개설하면서 우물 목 고개의 허리를 잘라 왕자(王字) 형세가 훼손되었다고 한다. -승천 노제 : 일제 말에 일본인들이 미신 타파란 명목으로 없앴다고 한다. 해방 후 젊은이들이 역시 미신이라 하여 미루나무를 베고 축문과 동네 계문서를 불살랐다고 한다. 지금 성남면 분기점 부근 길 양옆에 있었다. 노제 축문에 승천 지명이 승천(勝川)으로 되어 있었다고 촌로(村老)들은 기억하고 있다. -가르마기 : 승천 서북쪽에 있는 골짜기다. -김자점(金自點) 묘터 : 우물목고개 남쪽 등성이에 있었던 묘 터. 인조 때 김자점 조상의 묘인데 김자점이 역적으로 몰린 뒤에 묘를 파서 부관참시를 하여 시신이 흩어져 있었다고 한다. 고속도로 공사로 없어졌다. -우물목고개 : 승천마을에서 응원리로 넘어가는 고개로 이곳에 조선조 때 정항원(井項院)이 있었다. 고갯마루에 좋은 물이 나는 샘이 있어 오고가는 사람이 쉬어 갔다. 과거 보러 가는 나그네도 많이 쉬어 갔는데 김자점이 역적으로 몰린 뒤 역적의 묘 밑에 있는 물을 마시면 재수가 없고, 그 물을 마시고 가면 과거에 합격되더라도 역적이 된다는 소문이 퍼져 원과 주점이 모두 폐쇄되었다고 전한다. 이 우물마저 고속도로 공사로 없어졌다. -윤민교 묘소 : 목천 현감(木川縣監)을 지낸 윤민교(尹敏敎)의 묘소가 신계리 뒷산에 있다. ▲천정리(泉亭里) 천정리는 목천군 서면 한천리와 괴정리가 1914년 행정 구역 통폐합에 따라 이루어진 마을인데, 마을명은 한천리의 『천』자와 괴정리의 『정』자에서 유래된 것이다. ▶천정1리(덤불미, 한천) -산신제(山神祭) : 한천마을에서는 시월 초순에 생기복덕일을 택하여 산신제를 지낸다. 그 날 일진에 따라 초저녁 행사는 일곱 시경, 새벽 행사는 한 시에 지내는데 부정이 없는 사람 세 사람을 제관, 주당, 참관인으로 선정한다. 제물로 통돼지를 잡아 머리와 발은 산제당 나무에 매달고, 삼색 실과 쌀을 스물한 번 씻고 스물 한번 체로 쳐서 만든 떡은 산신제를 지낸 후 동네 사람이 모여 나누어 먹는다. -대골 : 옛날에 대나무가 많이 있었다. 큰골을 말한다. -엉구렁 : 덤불이 엉글엉글 많이 있어서 엉구렁이라 하는데 산 밑이다. -용천굴 : 예전에 용이 살다가 승천했다는 굴이다. -다리장골 : 다리실 안의 골짜기를 이르는데 아주 예전에 이곳에 장(場)이 섰다고 하나 확실치가 않다. -왕자산 : 이 산은 조사가 더 필요한 산이다. 촌로들의 증언에 의하면 예전에 왕자(王子)의 태를 묻은 곳이라고 한다. 혹자들은 근동의 모든 산들이 이 산을 향하여 절을 하고 있는 안산조배(案山朝拜)의 형상을 하고 있다고 한다. 또는 산의 생김새가 왕자(王字) 모양을 하고 있어서 생긴 이름이라고도 한다. 일제 때 도로를 개설하면서 우물목고개의 허리를 잘라 왕자(王字) 형세가 훼손되었다고 한다. -동적골 : 예전에 동학군(東學軍)들이 이곳에 숨어 지내다가 세성산(細城山)으로 갔다고 한다. -청패 : 예전에 청나라 군인들이 이곳에서 패했다 한다. -학골(鶴谷) : 학의 다리처럼 길게 생겼다. 혹자들은 학이 무리 지어 왕자산(王字山)을 향하여 절을 한다는 군학조배(群鶴朝拜) 형상이요, 또는 학이 알을 품고 그 산을 향하여 절을 하고 있다는 학난조배(鶴卵朝拜) 형상을 하여 왕자산 아래 길지(吉地)가 있다고 전한다. -모래봉(沙峯) : 모래가 많이 섞여 있는 산인데, 예전에 이곳에서 도자기를 만들었다고 한다. -큰찬샘이골 : 동네 뒤 큰 샘이 있는데 물이 아주 차고 시원하다. 옻 오른 사람의 치료에 아주 효험이 있다 하여 동네 주민들이 위하던 곳이다. -작은찬샘이골 : 큰 찬샘이 골 옆 작은 샘이 있는 골이다. -덤불미 : 한천 또는 덤불미라 하며 천정리에서 가장 큰 마을이다. 사방에 덤불이 많았으며 마을 가운데 차고 큰 우물이 있었다. 한천이란 지명이 이것에서 유래한다. -찬샘이골 : 다리실 서쪽에 있는 골짜기기로 찬 샘이 있다. -사장골 : 안골 너머에 있는 골짜기로 산제당(山祭堂)과 곱돌광산이 있었다. -안골 : 용척골 남쪽에 있는 골짜기다. -용산고개 : 덤불미에서 성남면(城南面) 용산으로 넘어가는 고개이다. -용척골 : 용추골이라고도 한다. 덤불미 서쪽 왕자봉 밑에 있는 골짜기로 용추가 있었다고 한다. ▶천정2리(괴정골) -옻샘 : 예전에 샘이 있어서 과거 보러 다니던 선비들이 이곳에서 목을 축였다 하나 지금은 그 흔적이 없다. -동정골 : 예전에 천주교인들이 이곳에 숨어 있다가 목천 삼뱅이로 옮겨갔다 한다. 산너머 도장리 고랑에 성당 터가 있었다. 천주교회에서는 순교자들을 동정(童貞)님이라고 한다. -됫골 : 동네 뒷산 고랑을 말한다. -저건너 : 동네 앞으로 작은 도랑 건너를 말한다. -욕곡 : 예전에 원이 있었을 적에 이곳에 옥이 있었다고 한다. -갈월 : 괴정, 노동이라 부르며, 덤불미 남쪽에 있는 마을이다. 갈대가 많았고 느티나무 정자가 있었다고 한다. 고려 때 이곳에 갈원이라는 원이 있었다. -다리실(橋項) : 안 다리실, 바깥 다리실이 있다. 이곳에 마을이 있었는데 없어졌다고 한다. 경부고속도로가 뚫리고 목천 인터체인지가 생겨 그 위로 다리가 놓여졌다. 옛날 누가 다리실(橋項)이라고 명명했는지 탄복할 따름이다. -미곡종합처리장 : 지방도 691호의 신계리 분기점과 고속도로 지하도와의 중간 정도 위치에 있다. -종돈AI센타(돼지 인공 수정소) : 갈월마을 뒷산 너머에 있다.
-
[기획특집] 천안의 지명유래 ⑮[천안신문] 본보는 지난 151호부터 천안 각 읍면동의 지명유래에 대한 연재를 진행중이다. 천안이라는 지명에 대한 기록은 고려 태조 13년인 930년 8월 8일 기해 일에 고려태조가 대록에 내려와 동서도솔과 탕정의 일부와 사산의 일부와 대록의 일부를 병합하여 천안이라 하고 도독부를 둔데서 유래한다. 대록은 지금의 목천이요, 사산은 직산이며, 동도솔과 서도솔은 천안의 일부이며, 탕정은 온양 탕정의 일부다. 각 지역에 내려오는 천안의 지명은 1988년부터 이원표 선생이 동부 6개 면을, 1987년도부터 오세창 선생이 천안시를 조사해 1960년경 한글학회에서 발행된 ‘한국 지명총람’을 참고로 가감 수정해 동부 6개면은 1990년 천안군에서 ‘역사의 현장’으로 출간되었으며, 천안시는 1989년 천안문화원에서 ‘천안의 지명’으로 출간하였다. 그 후 1999년 천안시 문화원에서 시와 군에서 발행된 것을 합하여 ‘천안의 땅 이름이야기’로 출간했다. 이번 연재는 이를 바탕으로 했으며, 일부 내용은 천안 향토사학자 김종식 선생이 재조사를 통해 가감하였음을 밝혀둔다. <편집자 주> ▣ 목천읍(木川邑) 목천군의 군청 소재지였으며 읍내가 있다고 하여 읍내(邑內)면과 군의 서쪽에 위치하여 있다고 서(西)면이라 부르던 2개면이 1914년 3월 1일 부령 111호에 의해 통합되어 목천군이 해체되므로 그 면을 그대로 이어받아 목천면이라 명하고 천안군의 1면이 되었다. 1963년 1월 1일 천안읍이 시로 승격됨에 따라 군명이 개칭되어 천안군 목천면이 되었었다. 읍내면 관할구역은 동평(東坪), 중보(中洑), 교촌(校村), 용연(龍淵), 후평(後坪), 신기(新基), 동리(東里), 역동(驛洞), 서지(西祉). 서당(書堂), 일덕지(一德至), 이덕지(二德至), 상와룡(上臥龍), 서흥(西興), 상림(上林), 남화(南化), 사기점(沙器店), 묵방(墨方), 석천(石川), 산방(山方), 신흥(新興), 유왕(留王), 중리(中里), 장흥(長興), 덕전(德田), 신평(新坪), 마점(馬店), 송전(松田), 신대(新垈), 서덕(西德), 만일(晩日), 31개리를 관할하다가 폐합되었고, 서면은 일운전(一云田), 의식(衣食), 소사(所士), 산곡(山谷), 도전(挑田), 응곡(應谷), 원동(院洞), 상남산(上南山), 하남산(下南山), 양지(陽芝), 도리티(道里峙), 신성(新省), 삼층(三層), 진지(眞芝), 관동(官洞), 신기(新基), 장평(長坪), 괴정(槐亭), 한천(寒泉), 신흥(新興), 농계(農溪), 주막(酒幕), 일승천(一升天), 이승천(二升天), 교항(交項), 세성면(細城面)의 노원(蘆院), 용산(龍山), 봉명리(鳳鳴里)의 각 일부와 북면(北面)의 역촌(驛村)일부, 천안군의 소동면(小東面) 소시리(所柴里)와 전의군 역리(驛里)일부를 병합하여 서(西)면이 되었고, 읍내면과 서면이 병합됨으로 각리가 해체되고 다시 리단위가 규모가 크게 둘 또는 세개 부락이 1개리로 형성되었다. 1914년 3월 1일 이후 목천면의 리명은 동평, 교촌, 동리, 서리, 서흥, 남화, 석천, 덕전, 송전, 운전, 소사, 응원, 지산, 삼성, 도장, 천장, 교천, 신계, 용원 19개리를 관할하여 오다가 1917년 용원리를 성남면에 넘겨주어 18개리가 되었다. 동쪽은 북면 서쪽은 천안시와 풍세면 남쪽은 연기군과 성남면 북쪽은 성거면과 입장면에 경계를 하고 있다. 1991년1월1일 본군 찿기운동에 의하여 천안군 목천면이 되었고 1995년5월10일 시군 통합으로 천안시 목천면이 되었으며 2002년 1월1일 목천읍으로 승격되었다. ▲서리(西里) 서리는 목천군 읍내면 서지리, 서당리, 중보리 일부가 1914년 행정 구역 통폐합에 따라 이루어진 마을로, 목천군 읍내면의 서쪽에 위치하여 서리라고 하였다. -성아래 : 서리 뒤에 있는 골짜기로 흑성산성(黑城山城) 아래 골짜기라 생긴 지명이다. -외딴말 : 읍내 남쪽에 외따로 떨어져 있는 마을 조선시대에 버들가지로 만드는 그릇을 생산한 곳이었다. -돌다리 : 외딴말 동쪽 부리에서 용화사(龍華寺) 가는 길에 장명교(橋)라는 돌다리가 있었는데 현재는 없어지고 다리 흔적만 남아 있다. -똘다리 : 똘뒷거리라고도 한다. 목천파출소 뒤 목천초등학교 동쪽에 있었다. 동리 쪽으로 똘을 건너다니게 만든 다리다. 똘둑을 길로 삼고 다녔는데 지금은 복개되어 길이 되었다. 이 똘에서 옛날에는 빨래를 했는데 빨랫돌을 확인해 보니 목천현감(木川縣監)의 선정비(善政碑)다. 이원표 씨가 현 읍사무소 앞으로 옮겨 놓았다. -무학당(武學堂) : 사마소 동쪽, 목천초등학교 서쪽 마을로 조선조 때 무술(武術)을 연마하는 수련장이 있었다. -사마소(司馬所) : 조선조 때 사마 생원들이 계(契)를 구성하여 이곳에서 학술을 토론하고 친목을 도모하였다. -서당(書堂)골 : 글을 배우는 서당이 있었다. -서지리(西地里) : 서지동이라고도 하는데 서리 뒷말이다. -읍내(邑內) : 목천군 시절 군방(軍房)이 있었고, 동리와 서리를 통칭하여 부르던 칭호이다. -중보(中洑) : 파출소 동남쪽에 있던 마을에 있었다. -핑계골[빙고골] : 사마소 뒤에 있는 골짜기. 남화리(南化里)로 넘어가는 곳인데, 겨울에 얼음을 저장했다가 여름에 사용하기 위해 만든 창고인 빙고가 이곳에 70년대 후반까지 원형대로 있었는데 산 주인이 밭을 일구면서 없애 버렸다. -사직단(社稷壇) : 핑계골과 남화리 경계에 있었다. 현재도 터가 남아 있다. 토신(土神)과 곡신(穀神)에게 풍요를 빌었다. -홍문골[紅門谷] : 목천군(木川郡) 관아(官衙)로 들어가는 입구, 우체국과 목천 파출소 사이에 홍살문이 있었다. 현재도 홍문거리라고 한다. -동헌(東軒)터 : 현재의 목천초등학교 자리이며, 객사터 동쪽에 있었다. -객사(客舍)터 : 현 목천초등학교 교사(校舍) 자리에 있었다. -정원정(情遠亭)터 : 현 목천초등학교 교장 사택 자리에 있었다. 연못이 가운데 있었으며, 여름에는 군수가 이곳을 동헌(東軒)으로 사용하였다. -팔모정 : 읍내에서 신후마을로 가는 곳에 있었다. 팔모의 정자로 행인(行人)들이 쉬어 갔다고 한다. -금반(金盤)형 : 서리 뒷산이 금소반을 놓고 밥을 먹는 형(形)이라서 큰 부자나 관청이 들어서야 할 터라고 하였다. 그래서 동헌이 산 밑에 위치하면 밥상 밑으로 들어가는 샘이 되므로 냇가 쪽에 있었다고 전하여 온다. -이범석(李範奭) 유허지 : 서리 뒷산 밑에 있는데, 이 집에서 청산리전투의 영웅 광복군 대장 철기 이범석 장군이 성장하였던 곳이다. 1990년 대 소유자가 헐어 버렸다. -김진희(金晉熙)묘 : 이인좌 난 때 청주성에서 의병을 일으켜 반란군을 진압한 공으로 정문(旌門)을 하사 받았으며, 묘소가 목천 중 고등학교 교문 옆에 있다. 정문(旌門)은 교촌리 향교말에 있었는데 없어졌다. -목천기미독립만세운동 기념비 : 1919년 3월 14일 목천보통학교 전교생 171명이 비폭력, 평화적으로 만세를 부른지 70주년을 맞이하여 비건립위원장 김재홍이 비문을 짓고 무림 김영기가 화강암에 조각하여 1989년 3월 14일 건립하였다. -이장녕(李章寧) 생가지 : 사마소 마을에 있다. 김좌진 휘하 광복군의 참모장으로 철기 이범석 장군과 함께 청산리(靑山里) 전투에서 큰 공을 세웠다. 그 후 일본 정부의 지시에 의하여 1932년 낭인에 의해 피살된 이장녕이 1881년 이곳에서 출생하여 자랐다고 한다. 이동녕(李東寧) 선생과 6촌 지간이다. -신사(神社)터 : 일제 때 일본인들이 세운 신사(神社)가 목천초등학교에 있었는데 해방 후에 헐어 버렸다. 계단이 1970년 후반까지 남아 있어 후학들에게 교훈이 있었으나 1989년 없애 버렸다. ▲동리(東里) 동리는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역동이 병합된 마을로, 목천군 읍내의 동쪽에 위치하여 동리라 하였다. -고동말 : 동리 위쪽에 있는 마을로 동네가 일자로 곧게 들어서 있다. -후평 : 교촌리, 서흥리 경계에 있으며 예전에는 여러 집이 살았는데 모두 떠나고 한 집만 남아 있다가 1990년대 말에 그 집도 이사 가서 동네가 폐촌 되었다. -강시랑(姜侍郞)골 : 미륵당 동쪽에 있는 골짜기다. 고려 때 강시랑(姜侍郞)이 살았다고 하며 위로 더 올라가면 석실묘가 있었는데 다 파손되고 없어졌다. -미륵당 미륵 : 현재 용화사(龍華寺) 안에 미륵이 2기 있는데 용화사 석조여래입상이라 한다.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58호로 고려의 불상이라 한다. 하나는 북쪽 등성이 너머 안적골에서 옮겨 온 것이고 미소 짓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반월산(半月山) : 호덕골과 전조골 사이 한집 모랭이에 있는 산인데 반달처럼 생겼다. -비룡고개 : 미륵당에서 북면(北面) 비룡으로 넘어가는 고개이다. (전설) : 이 고개 부근에 아홉 재상이 날 대지가 있다고 하여 전국의 지관들이 모여드는 곳이다. 재상이 나더라도 크게 빛을 보지는 못할 것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산밑말 : 중구봉 산 밑에 있는 마을이다. -영락정(永樂亭) : 자가 사홍(士弘)이고 호는 율계(栗溪)인 김현제가 1920년에 지었다. 그는 1855년 3월 20일 경기도 이천에서 출생하였는데, 이곳에 영락정(永樂亭)을 짓고 책 읽는 것을 낙으로 살았다. 봄과 가을에 이곳에서 시연(詩宴)을 열었다. 묘소가 운봉산 선적동에 있다. -중[僧侶] 술 먹던 골 : 동리 동북쪽 은밤산 밑에 있다. 매우 으슥하여 탁발하러 다니던 중이 이곳에서 남몰래 술을 마시었다고 한다. 지금 공동묘지 앞의 골짜기이다. -범말[坪村] : 평촌이라고도 하며 산밑말 서쪽 들 가운데에 있다. -여기숫보[麗妓水洑] : 열에섯보라고도 하는데 전적골 입구에 있으며 물이 맑고 깊다. 경치가 좋고 정자도 있다. 고려(高麗) 때 이곳에서 기생이 놀다가 빠져 죽었다고 하여 여기숫보라고 전한다. -전조골, 전적골(錢造谷, 典籍谷) : 옛날 이곳에서 엽전을 만들었다고 하여 전조골이라 한다. 또한 현(縣)에서 필요한 책도 이곳에서 만들었다. 청주(淸州) 곽씨(郭氏) 족보에는 전적(典籍)동으로 기록되어 있다. -호덕골 : 북면 호덕으로 넘어가는 골짜기다. -역말(驛村) : 용화사(龍華寺) 입구에 있는 들이다. 임진난 전에 연춘역이 있던 곳이라 역골이라 한다. 1970년대 초까지도 마을이 있었다. -이동녕(李東寧) 생가지 : 1869년 10월 6일(음력 9월 2일) 목천(木川) 동리(東里)에서 태어났다. 1940년 3월 13일 중국에서 72세 나이로 서거하였다.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총리와 군무총장(軍務總長)을 역임하였다. 생가지는 동리 고동말 중구봉 밑에 있다. 충청남도 기념물 제72호로 지정되었다. 많이 개축하여 옛 모습을 볼 수가 없다. 이장녕(李章寧)과 6촌지 간이다. -조경호(趙慶鎬) 우거지 : 본관이 임천(林川)이며, 참판 기진(基晉)의 아들이자 흥선 대원군(興宣大院君)의 사위로 고종 황제(高宗皇帝)의 매부이다. 성균관대사성, 예조 참판, 이조 참판, 형조 판서를 지냈다. 말년에 향저에서 살다가 활빈당이 못 살게 굴자 천안 군서리로 이사한 후 행적을 알 수가 없다. 이동녕 선생이 떠난 뒤 그 집에서 살았다. -정인보(鄭寅普) 우거지 : 위당 정인보 선생이 이동녕 선생 생가지 아랫집에서 살았다. -조병호 우거지 : 조경호의 형이다. 고종 2년에 형제가 나란히 문과에 급제했다. 한말 마지막 정승이자 의정대신으로 말년에 낙향하여 산밑 말에서 살다가 왜병들의 탄압에 못 이겨 자살하였다고 한다. -탑상골 : 70년대까지 3층짜리 석탑이 있었는데 천안교육청에서 가져간 뒤로 행방을 알 수 없다. 예전에 절이 있었다 한다. ▲동평리(東坪里) 동평리는 목천군 읍내면 장군평, 샘모랭이, 중모리, 동리일부가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이루어진 마을인데, 마을명은 동리의 『동』자와 장군평의 『평』자에서 유래된 것이다. 독립기념관 건립으로 말미암아 1983년 관남마을이 새로 생겼다. -사자골 : 장군평(將軍坪) 왼쪽에 있는 골짜기. 사직단(社稷壇)이 있었다고 전한다. -샘모랭이 : 장군평 남쪽에 있는 마을로 산모퉁이에 샘이 있었다고 한다. -옥(獄)터 : 오까골이라고도 하는데 장군평 서쪽에 있다. 예전 목천현(木川縣)의 옥터였다고 한다. -장군평(將軍坪) : 마을 이름이다. 앞은 들로 장군바다라고 한다. 고려 충렬왕 때 합단(合丹)의 난이 일어나 원군과 고려군(高麗軍)이 이곳에서 진을 쳤으므로 장군들이 많이 모였던 들이라 장군(將軍)들, 또는 장군 바다라고 하였으며, 전의(全義) 정좌산에서 난군을 크게 이겨 섬멸시켰다. -마당들 : 합단의 난 때 이곳에 말(馬)을 많이 매어 두었다고 전한다. 마군(馬軍)이 진을 치고 있었던 곳이라고도 한다. -관남(館南)마을 : 남화리와 신계1리가 독립기념관 부지로 선정됨에 따라 2개 마을의 이주민들이 집단으로 이주하여 살고 있다. 독립기념관 남쪽에 있다 하여 관남(館南)마을이라 했다. -중보(中洑) : 장군평(將軍坪) 북쪽에 있던 마을로 지금은 없어졌다. ▲운전리(云田里) 운전리는 목천군 읍내면 의식동, 북면의 역촌 일부, 운파, 뱅골이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이루어진 마을인데, 마을명은 운파산에서 유래된 것이다. ▶운전1리(운파, 통미, 샘모랭이) -사당골 : 예전에 이곳에 사당이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남아있지 않다. -백운산 : 운전리 뒷산으로 신계리와 성남면 신사리에 걸쳐 있으며, 운파산을 가리킨다. 예전에 목천현의 안산이었다. 산의 높이는 225.2m이다. -양지편 : 햇볕이 종일 드는 곳으로 양달말이라고도 한다. -됫곡 : 동네 뒤의 고랑을 뒷곡이라 한다. -안산 : 동네 앞산을 말한다. -개갱주[犬更主]들 : 예전에 들을 관리하는 권한이 새로 바뀌어서 개갱주들이라고 한다. 일설에는 들을 관리하는 권한을 개와 바꾸어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한다. -말 무덤 : 이천 도호부사를 지낸 언양 김경채(金絅采)의 묘소 아래에 있으며, 공께서 돌아가시자 타시던 말도 갑자기 죽어 함께 장사지냈다고 한다. 동네 뒤에 있다. -밤나무골 : 밤나무가 많이 있다. -마당매 : 고려 때 군인들이 이곳에 주둔했다고 하며, 훈련도 이곳에서 했다고 전한다. 운전리 앞의 넓은 들녘이다. -여우고개 : 통미나 샘모랭이에서 성남면 신사리로 넘어가는 고개로, 고개가 으슥하여 여우가 많이 살았다고 하며, 혼자 넘어가기가 매우 무서웠다고 한다. -팽나무재 : 샘모랭이에서 운파로 넘어가는 작은 고개로 팽나무가 많이 있었다고 한다. -장자골 : 샘모랭이에서 여우고개로 가는 중간 지점 서쪽에 있는 골짜기로 예전에 큰 부자가 살았다고 한다. -용척골 : 샘이 있는데 예전에 큰 용이 승천했다고 전해 내려오는 곳이다. -차돌광 : 여우고개 밑에 있는데 예전에 부시를 치기 위하여 차돌을 캐냈으며, 목천보통학교 학생들이 3.1만세 운동을 준비할 때 이곳에서 밤에 몰래 태극기를 그렸다고 한다. -황해들 : 샘모랭이 앞들로 선조때 학자 후천(朽淺) 황종해(黃宗海)가 이곳에서 살았다고 한다. -서낭댕이 : 서낭당이 있었는데 현재는 없어졌다. -양지펀덕 : 양달편에 있으므로 양달펀덕이라 한다. -황산(黃山) : 샘모랭이 뒷산으로 나무가 없었고 황토만 있었으므로 황산이라 불리었다. -통미 : 성남면 경계뜸의 들에 외따로 산이 하나 있는데 전설에 의하면 안성에서 떠내려 왔다고 한다. -샘모랭이 : 옛날에 이곳에 300~400여 평의 큰 방죽이 있었다. 용연 저수지가 생기기 전에는 이 근방에서 가장 큰 방죽이었는데, 10여 년 전에 경지정리로 논으로 변하였다. 이 방죽 바로 옆에 산모퉁이가 있었기 때문에 마을 이름을 샘 모퉁이로 불리운 것이 샘모랭이로 변음된 것이다. ▶운전2리(뱅골) -안터 : 예전에 사람들이 살던 곳인데 지금은 살지 않는다. -막고개 : 예전에 고개 밑에 막을 짓고 살았다 한다. -덜고개 : 절고개인데 덜고개로 변음되어 불린다. -참새골 : 참샘이골인데 참새골로 변음되어 불린다. 온천을 개발하다 중단한 곳이다. -작은학골 : 학골 옆의 작은 고랑을 말한다. -백운사골 : 백운사로 가는 골짜기를 말한다. -용산고개 : 용산마을에서 전의까지 다니던 고개를 말한다. -느티나무 : 수령은 400년, 높이는 13m, 둘레는 4m 정도 되는 오래된 나무로 속이 비어 고사 직전에 있었는데, 동네 주민들이 보호에 나서 흙을 여섯 경운기 실어다가 나무속을 메워 더 이상 썩지 않도록 조치하는 등 보호에 많은 정성을 들이고 있다. -뱀골 : 백운산 밑으로 뱅골이라고도 하며 지형이 뱀처럼 생겼다. -군량(軍糧)골 : 군량곡이라고도 하며 학골 너머에 있다. 고려 때 이곳에 군량을 저장해 두었다고 한다. 일부가 골프장으로 들어갔다. -의식동 : 옥막골이라고도 하며 목천현(木川縣)의 옥(獄)이 있던 곳이다. -학골 : 선조 때 예학자 후천(朽淺) 황종해가 이곳에서 출생했다 한다. 골프장 근처인데 동네 어른들은 골프장이 잘못 들어왔고 그곳은 대학 이 들어설 자리라고 아직도 아쉬워한다. -연자방아 : 뱅골 동네 입구 왼쪽 언덕에 연자방아 터가 있다. 옛날에 부자로 살았던 김규환 군수가 단독으로 사용하였다. 지금도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다.
많이본뉴스
많이 본 뉴스
- 1 [교통통제]천안 남부대로 임시우회도로, 21일부터 통행속도 제한
- 2 국내외 재즈 뮤지션 총출동…천안국제재즈스트리트, 18~19일 개최
- 3 천안홍대용과학관, '도심 속 이동천문대 별빛충전소' 운영
- 4 병천면 행복키움, 취약계층에 오이김치 나눔
- 5 직산읍 새마을부녀회, 가정의 달 맞이 열무김치 나눔
- 6 쿠첸, 입장면 취약계층에 주방가전 기부
- 7 지역 12개 대학과 함께한 ‘유니브시티 페스티벌’, 큰 호응 얻은 가운데 마쳐
- 8 [현장영상] 꼼수 국외출장 "논란거리 아니다"는 박경귀 아산시장에게 물었더니...'잉'
- 9 [단독] 일봉산사거리 '유관순 동상' 이전 검토…마땅한 장소는?
- 10 민주당 시의원들, 일본·북유럽 방문 박경귀 아산시장 ‘꼼수 출장’ 규탄
- 11[단독] [단독] 시민들은 수일을 대기해야하는 현수막 게시, 정당들은 ‘논스톱?’
- 12 아산시의회 제248회 임시회 폐회, 새해 첫 추경안 본회의 문턱 넘어
- 13 천안상고 박현석 학생, 상지대 총장배 태권도대회서 ‘금빛 발차기’
- 14 [독자기고] 국가 경제의 동맥인 송유관 절도를 보며
- 15 천안신문 발전위원회 5월 월례회 개최
- 16 순천향대천안병원 석면환경보건센터, 환경부 사업 재지정
- 17 용화사, 목천읍 취약계층 위한 후원금 200만 원 기탁
- 18 청년 문화예술 활성화 위한 '안서 유니버스' 서포터즈 발대
- 19 천안시, 노후경유차 조기 폐차 지원금 2차 지원…700여 대 접수
- 20 [영상] 중앙아시아 방문 김태흠 충남지사, 우즈벡 총리 깜짝 접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