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획특집] 천안의 지명유래 ㉝[천안신문] 본보는 지난 151호부터 천안 각 읍면동의 지명유래에 대한 연재를 진행중이다. 천안이라는 지명에 대한 기록은 고려 태조 13년인 930년 8월 8일 기해 일에 고려태조가 대록에 내려와 동서도솔과 탕정의 일부와 사산의 일부와 대록의 일부를 병합하여 천안이라 하고 도독부를 둔데서 유래한다. 대록은 지금의 목천이요, 사산은 직산이며, 동도솔과 서도솔은 천안의 일부이며, 탕정은 온양 탕정의 일부다. 각 지역에 내려오는 천안의 지명은 1988년부터 이원표 선생이 동부 6개 면을, 1987년도부터 오세창 선생이 천안시를 조사해 1960년경 한글학회에서 발행된 ‘한국 지명총람’을 참고로 가감 수정해 동부 6개면은 1990년 천안군에서 ‘역사의 현장’으로 출간되었으며, 천안시는 1989년 천안문화원에서 ‘천안의 지명’으로 출간하였다. 그 후 1999년 천안시 문화원에서 시와 군에서 발행된 것을 합하여 ‘천안의 땅 이름이야기’로 출간했다. 이번 연재는 이를 바탕으로 했으며, 일부 내용은 천안 향토사학자 김종식 선생이 재조사를 통해 가감하였음을 밝혀둔다. <편집자 주> ▲불당동(佛堂洞) 본래 천안군의 군서면 지역으로서 지형이 풀무(쇠를 달구는데 쓰이는 풍구)와 같이 생겼다 하여 풀무골 또는 야동(冶洞)이라고 하였으나 뒤에 불무동 불뭇골이라고 불렸다. 1914년 행정구역 변경에 따라 서당골을 합쳐서 환성면에 편입되었다가 1963년 천안시에 속하여 불당동이 되었다. -불뭇골(풀무골) : 불당동에서 가장 큰 마을. 천안시에서 가장 서쪽에 있다. 아산시와 경계를 이루고 있으며, 동리의 모습이 풍구(風具)와 같다하여 불무골이라고 하였다는 전설이 있으나, 전설과는 달리 실제로 쇠를 달구던 대장간이 많았다. 그래서 야동(冶洞)이라고도 하였다. 대동(垈洞)이라고도 하였다. -풀무곳 티 : 마을의 동쪽 은행나무가 있는 아래쪽이다. 옛날에는 매우 큰 대장간이 있었다고 하며, 수년전 옛날에 사용되었던 용구가 발견되었으나 웅덩이 속에 버렸다고 한다. 매우 큰 농기구 제작소가 있어 풀무곳이라고 하였고, ‘티’는 언덕이나 고개를 말하는 것으로 대장간이 있었던 언덕이라는 뜻이다. -북당골 : 불뭇골 마을의 서쪽에 있는 골짜기. 북당골을 경계로 아산시와 경계가 된다. 옛날 이 골짜기에 작은 사찰이 있어 불당골이라 하였으나 뒤에 북당골로 바뀌었다. 절은 지금 전하지 않는다. -각골(笠谷 : 갓골) : 불뭇골 북쪽 백석동과의 경계에 있는 골짜기. 골짜기의 생긴 모습이 머리에 쓰는 갓(笠)을 닮았다고 갓골이나 소리 나는 대로 불러서 각골이 되었다. -풍성골 : 지금은 예비군 훈련장의 사격장이 되었다. 골짜기에 물이 많이 흐르고 논밭이 농사짓기에 풍성하다고 풍성골이다. -못 건너 고개 : 백석동에서 불당동으로 넘어오는 마을 앞의 낮은 고개. 마을 앞에 큰 연못이 있고 그 연못 건너에 있는 고개라 못 건너 고개다(연못 건너고개). 또 다른 설에 의하면 마을 앞에 큰 은행나무가 있는데, 옛날 어느 부자가 은행나무의 큰 가지를 잘라 관재(棺材)로 쓰려고 마차에 싣고 고개를 넘으려 하였으나 웬일인지 수레의 바퀴가 구르지 않고 소가 걸음을 걷지 못하여 이상하게 여긴 부자는 은행나무를 내려놓고 수레를 몰았더니 잘 넘어 가는지라 동네사람들이 이때부터 넘지 못한 고개라고 하여 못 건너 고개라 하였다. -등용골(等龍谷) : 불무골 서북쪽에 있는 골짜기. 산 아래에 작은 우물이 있어 옛날에 용이 우물 속에 살았다고 전하며, 용은 비가 오는 어느 날 구름타고 하늘로 올라갔다고 등용골이다. -숲거리 : 불무골 마을 앞에 있는 낮은 구릉이다. 지금은 밭과 논으로 변했다. 옛날에 숲이 우거져서 숲거리라고 하였다. 본래는 숲거리가 아니고 숱거리다. 옛날 풀무질을 하기 위하여 많은 숱을 쌓아 두었던 곳이라 숱거리가, 최근에 와서 숲거리로 소리나는 대로 불리고 있다. -텃골 : 불무골에서 서당골로 가는 길가에 있다. 옛날에는 마을이 커서 여기까지 집이 있었고, 그 집 앞에 텃논과 텃밭이 펼쳐져 있어서 텃골이라고 하였다. -서당골(書堂谷) : 불당동에서 두 번째로 큰 동네. 매우 큰 은행나무가 있고 그 은행나무 옆에 옛날에 서당이 있어 서당골이라고 하였다(지금은 없다). 안씨와 변씨가 동리의 주성이고 동남향의 전형적인 농촌이다. 바위가 있어 부엉박골이라고 한다. 부엉새는 본시 상서로운 새로 그 울음소리가 부를 상징한다고 옛날부터 부엉새롤 닮은 바위나 산을 위하고 믿는 관습이 있었다. -강가골(姜家谷) : 서당골 남쪽에 있는 골짜기. 옛날에 강씨가 이곳에서 살다가 다른 곳으로 옮겨졌다 하여 강가골이다. -모선재(慕先齋) : 서당골 북쪽에 광주 안씨들이 조상의 승덕을 기리기 위하여 지은 제(齋)로, 고려조의 유생 안충(安沖)을 위시하여 사현(四賢)을 모신 곳이다. -영모제(永慕齋) : 마을 남쪽 산비탈에 있는 열녀 비각. 정의창(丁義昌)의 처로 1921년 성균관으로부터 부행(婦行)이 독실하여 열녀 포상을 받았다. ▲용곡동(龍谷洞) 일봉산 아래에 동서로 길게 펼쳐진 동이다. 마을 뒤쪽에는 높은 산이 가로막아 북풍을 막아주고, 앞에는 큰 내가 굽어 흘러가며 주변에는 넓은 들이 펼쳐져서 전형적인 한국농촌의 모습을 갖춘 동이다. 천안시내에서 흐르는 천안천이 이곳으로 흘러 봉강(逢江)에 합쳐지고, 남쪽으로 멀리 광덕산을 바라보면서 터지고 산과 내가 어우러진 좋은 고장이다. 1914년 행정구역 변경으로 두터골 쌍룡리 눈들 하리면의 다가리 일부를 병합하여 용곡이라 하여 환성면에 편입되었다가 1963년 천안시에 편입되었다. 용소(龍昭)의 용(龍)자와 후대골(厚垈谷)의 곡(谷)자를 따서 용곡동이라 하였다. -눈들(臥石洞:누은들) : 일봉산 남쪽 산 아래에 펼쳐진 마을이다. 일봉산의 서편 기슭에 둥글고 긴 돌 2개가 가로 누어있어 돌이 누어있다고 하여 누은돌이 변하여 눈들이 되었다. 누은돌(臥石)은 우리나라 청동기시대에 나타난 선돌(立石)이 있었을 것이나 마을이 이루어진 뒤에 모두 없어진 듯하다. -일봉산(日峰山) : 눈들 마을의 뒷산이며 천안의 명산이다. 체육시설을 갖추어 시민체육공원이 되었고, 일봉 산악회원들에 의하여 정상에 8각정이 만들어져 매일 아침이면 수백 명의 사람들이 아침 운동을 즐기고 있다. 정상부에는 언제 쌓여진 것인지 알 수 없지만 토성이 있어 천안을 수비하는 구실을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지금도 토성의 일부가 남아있고 8각정이 세워진 곳은 토성의 돈대(敦臺)로 망루(望樓)와 같은 구실을 하던 곳이다. 천안 시내를 한눈에 내려다 볼 수 있는 곳이며, 해를 맞는 산이라고 하여 일봉산이라고 했다 한다. -용곡천(눈들내) : 태조산을 수원으로 한 유량천과 노태산을 근원으로 한 봉명천이 남산 뒤에서 합류하여 용곡천에 이르러 큰 내가 된다. 우리나라 강천(江川)이 한 구비 돌때마다 한마을씩 남기는 것이 상례인데, 한 구비 도는데 눈들 부락을 형성하고 두 번 돌아 두터골을 만들고 다시 돌아 정산터를 이루었다. 내 옆으로는 범람원을 이루어 넓은 들을 형성하였고 천안을 대표하는 곡창지대를 만들었다(천안을 대표하는 하천이다). -눈들 방죽 : 1930년대에 용곡동 눈들 부락의 남쪽에 사금채취선(砂金採取船)이 들어와, 사금을 채취할 때 파놓은 웅덩이에 물이 고여서 많은 방죽을 만들어 놓았다. 1940년 초까지 약 50여개의 웅덩이가 있어 웅덩이의 군락을 이루었는데, 해방 후에 모두 메우고 농지로 활용하면서 지금은 자취를 감추었다. 한때는 천안 낚시꾼들의 낚시터로 각광을 받았다. -두터골(厚垈谷) : 일봉산 서남쪽에 남향받이의 아늑한 마을 두텃골을 한자로 표현하면 후대골(厚垈谷 또는 厚基谷)이다. 이 마을에 내려오는 설에 따르면 세 가지 이야기가 있다. 첫째는 인심이 좋고 사람 살기가 좋아서 두터골이라 하였다고 한다. 둘째는 마을의 생김새가 높고 낮은 턱이 있어 두턱이 졌다고 두턱골이 변해서 두터골이 되었다고 한다. 셋째는 옛날 이 마을이 만들어질 때 정씨(鄭氏) 두 사람이 처음으로 집터를 마련하여 살았다고 두터골(二垈谷)이 변음되어 두터골이 되었다고 전한다. 세 번째 설이 가장 알맞은 것 같다. -용소골(龍沼谷) : 눈들 마을의 동남쪽에 있는 마을. 지금은 경부선 철도변의 마을이다. 본래는 눈들 마을과 멀리 떨어져 있었으나 최근에는 마을이 커져서 눈들과 붙어 있다. 옛날 이곳에 작은 연못이 있었고, 그 연못 속에 용(龍)이 살았다고 용소 골이다. -장고개(場峙) : 용곡동의 눈들 마을에서 천안시내로 나오는 낮은 고개. 지금은 경부선 철도가 고개아래에 있고 고개의 끝 쪽은 다가동과의 경계다. 고개를 넘게 되면 바로 내를 건너게 되고, 내 건너에 있는 시장을 보러 다니기 때문에 장고개로 불렸다. -미역공장 : 사직동의 남산에서 장고개로 들어서는 곳. 마을의 일부는 다가동에 속하고 일부는 용곡동에 속한다. 1940년 초에 이곳에서 생미역을 말려서 시장에 내는 공장이 있었다고 미역공장이라고 부른다. -앞 들 : 눈들 동리 앞에 펼쳐진 들. 들이 넓어서 남쪽의 끝은 풍세면에 연속되었고 서쪽은 신방동의 신흥리에 닿았다. 1930년대부터 1940년 초까지 사금을 채취하는 사금채취선(금배)이 수십 개의 웅덩이를 파 놓았으나 1945년 해방 후에 모두 메워서 없어지고 지금은 들이 되었다. -참새골 : 일봉산 남쪽에 있는 골짜기. 지금의 수도 저수탱크가 있는 곳. 옛 부터 참새들이 무리를 지어 살았다고 참새골이다. -새말고개 : 눈들 동리에서 새말로 넘어가는 고개. 일봉산 서쪽에 있다. 옛날에는 많은 사람들이 넘나드는 고개였으나 지금은 새 도로가 마을 앞에 생기면서 한적한 고개가 되었다. -홍양호묘(洪良浩墓) : 일봉산 남쪽 8각정 아래에 있다. 홍양호는 조선 영조 때의 석학으로 1729년(경종 4)에 낳아서 1802년(순조 2) 73살에 졸했다. 자는 한사(漢師)이고 호는 이계(耳溪) 시호(謚號)는 문헌공(文獻公)이다. 본관은 풍산(豊山)으로 벼슬이 이조판서에 오르고 홍문관 대제학을 겸했다. 영조실록을 편찬하고 역상(易象), 만물원시 북한풍 토기(萬物原始 北寒風 土記) 등 여러 편의 저서가 있으며 문집 49권을 남겼다. 서예에도 뛰어나 수원 북문의 상량문을 썼다. 원래가 박학이라 영조도 의문 나는 게 있으면 모든 것을 홍양호에게 물어서 시행하였다고 한다. ▲청수동(淸水洞) 1920년 지방행정구역 변경에 의하여 읍내리 일부를 가르고 환성면 천당리의 만당골을 병합하여 만당과 이곳에 있는 수도산의 이름을 따서 청수정이라 하다가 1946년 왜식동명 변경에 따라 정을 동으로 고쳐 청수동이 되었다. 1950년대까지 작은 광산촌이었으나 지금은 주택지가 만들어져 도시가 되었다. -미륵불 : 지금의 남양유업공장이 있는 정문 앞에 있었다. 왜정 때 동우광산에서 캐낸 자연석이다. 생김새가 미륵부처 모습과 닮아서 미륵불이라 하여 광산입구였던 지금의 남양유업공장 정문이 있는 자리에 세워 오가는 길손들이 보며 다녔으나 공장이 세워질 때 없어졌다. -수도산(水道山, 水潮山) : 동국여지승람에 수조산(水潮山)으로 기록되었다. 뒷날에 보완된 책이지만 지금부터 500년 전 옛날에 편찬된 여지승람에 수조산으로 기록되어 있는 산이 왜정 때 와서 산의 정상부에 수도국(水道局)이 설치되었음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 수조산이 수도산이 된 셈이다. 참으로 조상들의 지명 짓기에 대단한 예견이 있음을 알 수 있다. 또 수도산은 오룡쟁주 지형의 남용(南龍)에 속하는 곳으로 붉은 용이다. -청수동방죽 : 청수동 남쪽 풍세가도의 길옆에 있다. 용곡동의 일부와 신방동의 일부를 몽리구역으로 하였으나 지금은 수리시설의 저수지로서의 역할이 끝났다. 방죽으로 청달골과 청수초등학교에 통한다. 한때 천안의 명물로 빙상경기장이 되었으며 한가한 태공들의 낚시터로 각광을 받았다. ▲구성동(九星洞) 천안군 군남면의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변경에 따라 고좌리(高佐里)와 복성리(福星里)를 합쳐서 구성리(九星里)라 하여 환성면에 편입되었다가 1963년 천안시에 편입되어 구성동이 되었다. 1970년대 말까지도 한가한 농촌지역이었으나 최근에 많은 아파트가 세워지면서 천안시 남부지역의 중심을 이루고 있다. -굴울 : 구성동에서 가장 큰 마을이다. 지금의 천안변전소가 있는 동쪽 마을이다. 굴울은 본시 ‘골울’이다. 골은 곡(谷)을 울은 울타리(柵)를 뜻하는 것이다. 고로 골울이 변해서 굴울이 되었다.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할 때 태조 왕건이 접전지역을 천안지방으로 예정하였다. 이는 개성에서 북상하는 후백제군과의 거리가 천안이 중앙지점에 닿기 때문이다. 936년 천안지방에 먼저 도착했던 고려군은 삼거리 방면으로부터 진격하여 올 후백제군을 막기 위하여 이곳에 울(柵, 방책)을 세웠다. 이때부터 골울이라 불렀고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굴울로 변했다. -고래울(高佐里) : 고좌리라고도 부른다. 사면이 산지로 둘러 싸여있고 마을은 비교적 높은 곳에 자리 잡고 있다. 높은 곳에 자리했다고 고좌리로 부르기도 한다. 또 다른 설에 의하면 나라 일을 돕고 높은 벼슬을 하던 이들이 은거하던 고좌리(高佐里)로 불렸다고 한다. -남원루(南院樓) : 구성동 남쪽 천안삼거리 근처에 세워졌으나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다. 고려 우왕 1년(1375)에 천안군수 임군석이 세웠다고 전한다. 여행자의 편의를 위하여 세웠으며 누각이 높고 풍수지리에 맞춰서 세워 오가는 길손들에게 칭송이 대단하였다고 한다. 우왕 3년(1377)에 세운 강호문의 기문만이 오늘에 전하고 있다. -빗돌(碑石) : 구성동 299번지 국도변 삼거리 모퉁이에 바위를 비스듬히 누운 바위를 다듬어, 전 군수 박후성옥 청덕선정 비[前 郡守 朴候成玉 淸德善政 碑] 라고 새겨 그의 선정을 기렸다. 박성옥(朴成玉)이 천안 군수로 있었던 것은 사실이나 재임하던 때를 정확히 알 수 없다. 옆에 청풍명월이라 새긴 돌도 반쯤 누어있어 아이들이 올라가 타고 놀았다. 글씨 채가 이 상당이 좋았던 것으로 기억된다. 1995년경에 도로를 확장하면서 없애버렸다. -돌모롱이(빗돌모롱이) : 지금의 변전소 입구와 진천가는 길, 대전가는 길이 갈리는 곳에 비스듬히 박힌 박성옥 군수의 비와 청풍명월이라 새긴 비가 있었고, 그 비를 끼고 돌아가는 모퉁이라 빗돌모롱이라고 하였다. -둔포재(둔폿재 : 屯浦峙) : 굴울 마을 북쪽에 있는 마을. 고재라고 하나 본래는 꽃 재다. 옛날의 삼남대로가 이곳으로 통하여 역말에 닿았다. 삼거리를 지나면서 낮은 구릉이 계속하여 있고, 이곳에 꽃이 만발하면 보기가 아름다워 길손들이 꽃 재(꽃핀고개)라고 하던 것이 변음되어 고재라고 하였다. -당재(堂山) : 고개 동북쪽에 높이 솟은 산. 산마루턱에 산신제를 지내던 산제당이 있다. 해마다 2월이 되면 지냈다고 전한다. 전설에 의하며 천안군수로 있었던 김모씨의 초상을 걸어 놓았다 하나 알 길이 없다. 고재마을에서 쌀과 돈을 거둬 지냈으며 만약 산제를 지내지 않으면 마을에 재앙이 따르고 괴질이 돈다고 하며, 제사를 지내면 상서로운 일이 생기고 아들 낳는 복이 생긴다고 전한다. -불대산(높은쟁이, 불도는 산) : 굴울 마을 뒤에 있는 산. 일제 때 이 산의 정상에 회전 탐조등대를 세워 비행기의 길을 알려주기 위하여 불빛이 돌았다고 불도는 산이라고 하였다. ▲청당동(淸堂洞) 본래 천안군 군남면의 지역을 청당골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신둔지리(新屯之里)와 거재리(巨才里)를 합쳐서 청당리(淸堂里)라 하였다. 천안군 환성면에 속했다가 1953년 청당골은 천안읍에 편입하고, 나머지는 환성면에 그대로 있다가 1963년에 천안시에 편입되었다. -거재(巨才) : 남쪽으로는 토성산, 동쪽으로는 갈미재에 둘러싸여 아늑한 마을로 청당동에서 가장 큰 마을이다. 옛 부터 거대한 인재가 배출된다고 거재라고 하였다. 본래 이 마을은 토성산(土城山)의 토성(土城)과 로적봉(露積峰)의 토성 사이에 있는 마을이다. 산성은 전투나 방어용이고 거성(居城)은 사람들이 생활하는 곳이다. 居(살거) 城(재성)의 뜻이 거재다. 거성이 변음되고 우리나라 말로 변하여 거재가 되었다. -용마부도(龍馬俯圖) : 청수동 저수지의 동쪽에서 시작된 작은 구릉이 천안삼거리로 이어지는 곳이다. 낮은 구릉의 생김새가 용이 머리를 하늘로 향하여 나르는 형상이라 용마부도 또는 용마비두라고 한다. 이곳은 옛 부터 명당이 있어 사람을 안장하면 후손이 잘된다는 풍수지리설이 있다. 한화그룹의 김승연 회장 조부 김재민공(金在民公)의 묘소가 이곳에 있다. 이곳이 도시 발전에 의해 중심가가 되어서 2005년경에 정안면으로 이장했다. 용마가 하도를 업은 형상으로 아주 명당이라 한다. -산제당(山薺堂) : 거재마을 동쪽 토성산의 북쪽 끝에 있다. 해마다 음력 10월 1일에 마을의 안녕을 위하여 이곳에서 산제를 지낸다. 최근 천안시에서 전통 민속으로 지정하여 보존되고 있다. 2005년경 거재마을 전체가 아파트 단지로 변해서 기록으로만 전하게 되었다. -우렁산 : 거재마을 남쪽에 있는 야산. 산의 서쪽에는 구룡동으로 넘어가는 소로가 있다. 산의 생김새가 우렁이 목을 길게 빼고 기는 모습과 같다고 하여 우렁산이다. -우렁소(우렁沼) : 우렁산에 있는 웅덩이다. 야산의 중간부분에 있는데 이 웅덩이에 우렁이 많이 살아서 우렁소라고 한다. -갈미재 : 거재마을에서 천안삼거리로 넘어가는 고개. 산에 칡이 많아서 갈(葛)뫼라 하였던 것이 변하여 갈미재가 되었다. -탑상골 : 갈미재 북쪽에 있는 골짜기. 옛날 이곳에 절이 있었고 탑도 있어서 탑상골이라고 전한다. 지금은 탑도 절도 없다. -원씨 열녀정문 : 거재마을 북쪽의 야산에 있다. 원씨는 이 마을에 살던 송재혁의 부인으로 남편이 죽으면서 따라 죽었다고 송씨 일가에서 세운 열녀정문이다. 지금은 관리하는 사람이 없고 열녀비각은 낡아서 쓰러져 가고 있다. 이 정려는 2005년경에 이곳이 개발되어 상가가 들어서면서 철거되었다. -시누골 : 고재마을 동쪽에 있는 골짜기. 전설에 의하면 이 마을에 시집왔던 억센 며느리가 시누이를 내쫓아 이곳에서 막을 치고 살았다고 시누이골 또는 시누골이라고 하였다 한다. 또 다른 설에 의하면 옛날에 장사들이 모여서 활을 쏘았던 곳이며 정자가 있어 시누골(矢樓谷)이라고 하였다고 전한다. -숲거리 : 마을 앞에 솔숲이 우거지고 구룡동으로 가는 길이 있다. 지금도 떡버들나무와 소나무가 우거져 있다. -샛터말(新屯地) : 새롭게 형성된 마을이라 새터말이다. 풍수설에 의하면 마을의 생김새가 거미의 모습을 닮았다고 한다. 거미는 거미줄에 걸린 먹이를 물고 다른 곳에 가서 먹기 때문에 그것을 닮아서, 마을에서 돈을 벌면 돈을 번 사람은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가야 한다고 한다. -용소골(龍沼谷) : 지금의 풍세 가는 길옆의 벽돌공장이 있는 곳이다. 이곳에 옛날에 큰 연못이 있었고 용이 연못에서 나와 하늘로 올라갔다고 용소골이다. -청당골 : 청당동에서 가장 큰 마을로 청수초등학교의 동쪽에 있다. 마을 북쪽으로는 천안삼거리로 이어진다. 도시 근교농업이 발달하였고 살기 좋은 마을이다. 천수답이 많아서 논농사가 어렵고 밭농사가 발달되었다. 옛날 이 마을에 산신당이 있어 당골이라고 하다가 청수동이 생기면서 청당골이라고 하였다.
-
[기획특집] 천안의 지명유래 ㉜[천안신문] 본보는 지난 151호부터 천안 각 읍면동의 지명유래에 대한 연재를 진행중이다. 천안이라는 지명에 대한 기록은 고려 태조 13년인 930년 8월 8일 기해 일에 고려태조가 대록에 내려와 동서도솔과 탕정의 일부와 사산의 일부와 대록의 일부를 병합하여 천안이라 하고 도독부를 둔데서 유래한다. 대록은 지금의 목천이요, 사산은 직산이며, 동도솔과 서도솔은 천안의 일부이며, 탕정은 온양 탕정의 일부다. 각 지역에 내려오는 천안의 지명은 1988년부터 이원표 선생이 동부 6개 면을, 1987년도부터 오세창 선생이 천안시를 조사해 1960년경 한글학회에서 발행된 ‘한국 지명총람’을 참고로 가감 수정해 동부 6개면은 1990년 천안군에서 ‘역사의 현장’으로 출간되었으며, 천안시는 1989년 천안문화원에서 ‘천안의 지명’으로 출간하였다. 그 후 1999년 천안시 문화원에서 시와 군에서 발행된 것을 합하여 ‘천안의 땅 이름이야기’로 출간했다. 이번 연재는 이를 바탕으로 했으며, 일부 내용은 천안 향토사학자 김종식 선생이 재조사를 통해 가감하였음을 밝혀둔다. <편집자 주> ▲성정동(星井洞) 하릿벌을 중심으로 발달된 동이다. 본래 천안군의 상리면의 지역이였으나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번리(樊里)와 하리면의 지정리(紙井里)와 풍천리(楓川里)를 합하여 성정리(城井里)라 하여 천안읍에 편입되어 성정동이 되었다. 두정동 쪽에서 흐르는 작은 냇물이 마을의 뒤쪽을 흐르고, 안서동 쪽에서 흐르는 천안천이 마을의 앞쪽을 흘러 섬과 같은 곳이어서 옛날에는(1940년대까지도) 물난리를 자주 겪던 곳이었으나 지금은 천안시내에서 가장 발달된 도시이며 또 발전 가능성을 지닌 동이다. -하릿벌(下里伐) : 성정동에서 가장 큰 마을. 1914년 실시했던 행정구역 통폐합 때 천안을 상리, 중리, 하리로 구분했다. 이때 하리에 있는 벌판이라는 뜻으로 하리벌이라고 하였다. 6.25때는 피난민이 형성한 시장이 일시 서서 하릿벌시장으로 유명했고, 마을 이름의 하리를 잘못 불러 화릿불로 부르는 일도 있다. -구산골(九山谷, 구상골-九相谷) : 하릿벌 북쪽에 있는 마을. 지금은 구산골로 불리 우고 있으나 구상골이 맞다. 청동기시대 선사 인류들의 서식처이며, 마을 남쪽언덕에서 1963년 9기의 고인돌이 발견되었다. 옛부터 이 마을에서 아홉 명의 재상이 나올 땅이라고 구상골(九相谷)이라고 하였다 전한다. 발견된 9기의 고인돌은 남북방 절충식으로, 거대한 뚜껑돌(개석)을 동서방향으로 놓고 지석을 4개 세웠으며 바닥은 잘고 둥근 냇돌을 깔아 시상(屍床)을 만들었다. 1963년 학계에 보고되었으나 문화재로 지정받지 못하고, 그 후 시가지 조성계획에 따라 모두 흩어지고 말았다. 구상골 마을에서는 지석묘인지는 모르고 돌 위에 떡을 해놓고 가정과 마을의 안위를 기원하는 사람도 있었다. 지석묘가 발견된 바로 이웃 마을의 개목에서 선사시대의 유물이 많이 발견된 것으로 보아 이곳에도 선사인들이 많이 살았으리라고 생각된다. -지정마을(紙井洞) : 하릿벌 동북쪽에 있는 마을. 최근에는 도시의 발전으로 성정동의 중심지가 되었다. 본래 지정마을에는 닥나무가 많이 있었고, 닥나무는 한지를 만드는 원료로 그 껍질이나 가지가 이용되었다. 한지를 만드는 데는 물도 좋아야 한다. 좋은 물에 떠내야 종이가 곱고 결이 좋다고 하여 지정마을의 우물이 가장 알맞아 많이 이용되었다고 지정(紙井)마을이다. 또 지정마을은 지정이라고도 부르며, 지정(支井)은 두정(斗井)만 못한 것에서 지정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풍천원(楓川院) : 지정마을 동쪽, 지금의 공업단지 남쪽에 있었던 원(院). 원은 공무로 지방에 가는 관리나 지방에서 서울로 가는 관리들이 여독을 풀고 쉬어가던 곳이다. 풍천원의 자리는 지금은 정확하게 알 수 없다. 이곳에서 쉬었던 길손들은 대개 지금의 두정동, 차암동을 경유하여 아산만으로 또는 평택지방으로 가는 사람이 많았고, 지금의 국도를 거쳐 직산의 수훨원으로 통했다. -양지마을(陽地村) : 최근 도시계획에 의하여 새로 이룩된 마을이다. 북쪽이 낮은 언덕이어서 종일 햇볕이 잘 들고 양지 밝아서 양지마을이다. ▲쌍룡동(雙龍洞) 본래 천안군의 군서면에 속하였으나 1914년 행정구역 변경으로 미라리(彌羅里), 쌍정리(雙井里), 용암리(龍岩里)를 합하여 쌍정과 용암의 머리 자를 따서 쌍룡리라고 하여 천안군 환성면에 속했다가 1963년 천안시에 편입되었다. 최근에는 주변에 학교가 많이 설립되고 마을이 도시화 되어 농촌의 모습이 점차 사라지고 있다. -미라골(彌羅谷 : 미륵골) : 중군산(中軍山) 밑에 형성된 마을. 동리의 북동쪽에 건립연대가 확실치 않은 사찰지가 있으나 지금은 폐허가 되었다. 전해오는 말에 의하면 이 사찰의 이름이 미륵사라 마을 이름을 미라골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쌍룡동에서는 가장 큰 마을로, 마을의 반수가 전주이씨의 집성촌이다. 이연식(李淵植)이라는 사람이 지은 미라리지(彌羅里誌)가 있어 미라골의 역사를 가늠할 수 있다. -미륵불(彌勒佛) : 미라골 동리입구 길가에 있다. 높이 1.4m의 자연석으로 흡사 석불을 닮았다. 언제 누가 세웠는지는 알 수 없다. 미륵사에 있었던 자연석불을 사찰이 폐사되면서 이곳으로 옮겼다고 하나 이것도 확실치 않다. 이 미륵불은 선사시대의 유물로 보는 것이 좋다. 선사시대에 사람들이 집단 정착하던 곳에 세워진 선돌(立石)이다. 마을과 마을은 경계를 표시하였고 때로는 신앙의 대상이기도 하였다. 대개 이와 같은 선돌이 서 있는 곳은 선돌말이라고 한다. 미륵불은 지금의 보호각을 만들어 마을에서 잘 보전하고 있으며 봄가을로 마을에서 제를 올리고 있다. 봉서중학교 부근으로 마을이 발전하여 주민들은 떠나고 뿔뿔이 흩어져 철거위기에서 어느 부인이 1995년경에 자기 밭머리에 땅을 희사하여 미륵을 옮겨 보전하다가 이곳 일대가 2013년에 주택단지로 개발되어 정원석으로 사용되었다. -가누물 고개 : 미라골에서 용암마을로 넘어가는 고개. 고개 넘어에 최근에 용화사라는 절이 세워졌다. 전설에 따르면 옛날 아산 땅에서 이곳으로 색시가 시집온지 며칠이 되지 않아 남편이 죽어 친정으로 돌아가면서 눈물을 흘린 눈물고개가 가누물 고개로 변했다고 하며, 또 다른 설에 의하면 고개 마루턱에 작은 우물이 있어서 ‘가는 우물고개’가 변음 되어 가누물 고개가 되었다고 한다. -절골(寺谷) : 미라골 마을의 서북쪽에 있는 골짜기. 지금도 절터에서 장대석이 나오고 있으며, 주초 돌이 나와 밭에 흩어져 있는 것으로 보아 사찰이 있었던 것은 확실하다. 동리 사람들의 전언에 따르면 미륵사라는 사명을 가진 사찰이 있었다고 하나 확실치 않다(여지승람이나 영성지에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아 작은 암자가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장개목 : 미라골 마을에서 봉명동 개목부락으로 넘어가는 고개. 개목부락은 옛날부터 해변의 소금과 내륙지방의 곡식이 교환되었던 곳이라 미라골 마을에서 장을 보러 넘어가는 고개라 장고개라고 하였다. -가장골 : 미라골 마을에서 천안고등학교로 통하는 골짜기. 미라골 사람들이 시내로 장보러 넘어다니는 고개라 가장골이라 하였다. -중군산(둥군산 : 中軍山) : 미라골 마을의 뒷산이다. 흔히 산의 모습이 둥글다고 둥군산이라 하나 잘못된 것이다. 중군산이 옳다. 고려태조 왕건이 후백제를 공략할 때 中軍이 주둔했다 하여 중군산이라 한다. 최근에 중군산이 변해서 둥근산이 되었다. 산의 남쪽 기슭에 최근에 쌍용사라는 사찰을 짓고 원봉산 쌍용사라고 이름 한 원봉산은 둥근봉을 한자로 한 것이다. -방축골(방죽골) : 중군봉 남쪽 기슭에 발달된 취락이다. 방죽골이 변해서 방축골이 되었다. 마을 뒤에 큰 방죽이 있어 방죽골이다. 마을에 전해오는 말에 의하면 임진왜란 때 적을 막기 위하여 축대를 쌓았다고 하여 방축골이라고 하나 사실은 아닌 것 같다. -용바위(龍岩) : 방축골 마을의 뒤에 있다. 바위의 생김새가 용을 닮아서 용바위다. -월봉산(月峰山) : 방축골 앞에 있는 산. 일봉산과 대칭을 이루고 있으며 산정상부에 토성이 있다. 언제 쌓여진 것인지 정확치 않으나 조선시대의 축성으로 보인다. -성황당 고개 : 월봉산 북쪽에 있는 고개. 불당동과 쌍용동의 경계가 되는 곳. 고개 마루턱에 큰 고목이 있었고 이곳에 서낭당이 있었으나 지금은 자취도 없고 고개 이름만이 서낭고개로 남았다. -장군바위 : 방축골에서 불당동으로 넘어가는 갱지산 비탈에 있다. 전설에 따르면 장군이 이 바위에 와서 앉아 쉬었다고 하나 어느 때 누구인지 알 수 없다. -쪽샘(藍井) : 방축골 마을 앞에 있는 우물. 우물이 맑고 많아서 하늘이 우물에 비치면 짙은 남색(쪽빛)으로 보여 쪽샘이라고 한다. 지금도 정월의 첫 번째 용날(辰日)이 되면 쪽샘에 용왕제를 지내고 있다. 1989년 천안시에서 전통 민속으로 지정하였다. 2000년경 이 일대에 대단위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면서 완전히 없어졌고, 쌍룡동 일대의 지명은 기록으로만 남게 되었다. -검은들 : 방축골에서 불당동으로 이어지는 들. 흙의 색깔이 검고 기름지어 농사가 잘 된다고 하며 주변의 흙이 검어서 검은들이다. -냉천(冷泉 : 물탕거리) : 온양 가는 큰길에서 방축골로 들어가는 길가. 삼일고아원 못미처에 있다. 물이 차고 많아서 냉천이라고 하였으며 옻(漆) 올린 사람들이 목욕하면 깨끗하게 낳는다고 옻샘으로도 불리우며, 피부병에 고생하는 사람도 이 우물에 세 번만 몸을 닦으면 낫는다고 한다. 해가 지면 목욕하는 사람들이 많아서 물탕거리라고 하였다. -갱지산 : 방축골 앞 장군바위가 있는 산. 본래 강씨의 소유라 강가산이 변해서 갱지산이 되었다. -월봉뜸 : 월봉산 동쪽에 떨어진 취락. 최근에 형성된 취락이다. 뜸은 평야지대에 형성된 취락을 말한다. -방아다리 : 나사렛대학교가 있는 아랫마을이다. 또 온양가도 옆의 조일성냥공장이 있는 마을까지다. 조일성냥공장이 있는 마을은 최근 약 50년 전부터 형성된 마을이고 원 방아다리는 철로 옆의 마을이다. 이 마을 앞에 옛날에 큰 연자방아가 두 곳이 있었고 디딜방아가 두 곳이 있었으며, 마을 앞에 작은 내가 있어 내의 다리를 넘어서 방아를 찧으러 갔다고 방아다리라고 하였다 한다. 또 다른 설에 의하면 마을의 모습이 디딜방아의 다리와 같이 꼬부라져 있어 방아다리라고 전한다. ▲다가동(多可洞) 1920년 행정구역(行政區域) 변경에 의하여 봉명리(鳳鳴里) 일부를 갈라서 산평정(山平町)이라 하다가, 일본식 동명 변경에 의하여 이곳의 원이름인 다가말의 이름을 따서 다가동이라 고쳤다. -차돌바기고개 : 다가말 서쪽에 있는 고개로 차돌이 박혀서 붙여진 이름이다. 천안에서 온양온천으로 가는 큰 길에 있다. -장고개 : 다가말 동쪽에 있는 고개로 용곡동(龍谷洞) 사람들이 천안시장(天安市場)을 보러 다녔다. -차돌고개 : 차돌바기고개 밑에 있는 마을. -천안철교(天安鐵橋) : 다가말 앞에 있는 경부선 기찻길의 다리로 길이가 200m다. -광명사(光明事) : 다가말 뒤 일봉산(日峯山 : 241m)에 있는 절. ▲신방동(新芳洞) 일봉산의 서쪽기슭과 온양가도의 동쪽에 펼쳐진 동. 본래 천안군의 군남면지역이었다.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통정리, 상신리, 중신리, 하신리, 신흥리, 방산리를 합쳐서 신리의 머리글자 자와 방산리의 머리글자를 따서 신방리라 하여 환성면에 편입되었다가 1963년 천안시에 속하면서 신방동이 되었다. -상신(上新 : 윗새말) : 새말에서 가장 북쪽에 있고 큰 마을이다. 일봉산 서쪽의 산기슭에 발달된 취락으로 마을이 아늑하고 양지바르다. 약 400년쯤 전에 김해 김씨들에 의하여 형성된 마을이며, 지금도 그들의 후손이 많이 살고 있다. 그들에 의하여 새로 이루어진 마을이라 불린 것이 새말로 되었다 한다. -중신(중새말 : 中新) : 위새말과 아래새말 사이에 펼쳐진 마을이라 중 새말이라고 하였다. 마을 뒤에는 낮은 구릉이 있어 서북풍을 막아주고 앞에 펼쳐진 들은 전형적인 도시속의 농촌형태를 이루고 있다. -하신(아래새말 : 下新) : 새말동리에서 가장 남쪽에 있다. 온양가도에서 눈들 마을로 가는 도로변이다. 가장 아래쪽에 있다고 아래새말이다. -정문(旌門)거리 : 온양가도 조일성냥공장 못미처에서 위새말로 넘어가는 낮은 고갯길. 옛날 이 고갯길에 김해김씨의 정문이 있어서 정문거리라고 하였다(누구의 정문이고 충정문인지 효정문인지 알 수가 없다), 지금은 아파트가 들어서 있다. -새말고개 : 위새말에서 두터골로 넘어가는 고개. 일봉산 서쪽의 낮은 구릉을 넘게 되었으며 눈들 마을로 연결되었다. -조씨 정문(趙氏 旌門) : 새말고개 정상에 최근에 세워진 정문이다. 김해김씨가 충주에서 이사 오면서 할머니의 열녀 정문을 이곳에 옮겨 세웠다. -왕영울 고개(往嶺) : 천안시내에서 온양으로 가는 길에서 신방동 위새말로 넘어가는 낮은 고개. 옛날에는 많은 사람들이 넘나들었으나 지금은 한적하다. 왕령(往嶺)이란 가는 고개라는 뜻으로 울은 한자의 책서 온 말이다. 본래 이 고개는 생긴 모습이 소가 누어있는 형상이라 와우령(臥牛嶺)으로 불리던 것이 소리 나는 대로 변하여 왕령고개가 되었다. -장사골 : 중새말의 산 뒤편에 있는 골짜기. 옛날 골짜기에 큰 부자가 살았다고 장자골이라고 하다 변하여 장사골이 되었다고 하며, 또 다른 설에 의하면 이곳에 힘이 센 장사가 살았다고 하여 장사골이라고 하였다 한다. 지금도 골짜기의 이곳저곳에서 옛 기와가 나오고 집을 지었던 주춧돌이 흩어져 있음을 볼 수 있다. -탑상골 : 중새말 장사골 옆에 있다. 탑이 있었다고 탑상골이라고 하였다. 터에서 나오는 와당조각으로 보아 고려 때 사찰이 있었음을 알 수 있으나 지금은 흔적을 찾을 수 없다. 탑은 후에 중새말 동네로 옮겨졌다고 전하고 있으나 탑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다. -배꼽뿌리 : 온양가도에서 아래새말로 들어가는 산모퉁이. 용주상(龍珠像)이 있는 곳에서 동쪽으로 약 550m 지점이다. 새말 뒷산이 이곳에 와서 끊어지고, 끊어진 산 모형이 어린 아이들의 배꼽처럼 뾰족하게 튀어나왔다고 배꼽뿌리다. -군수 홍탁의 선정비 : 조선조 말기(순조 때)에 부임했던 천안 군수 홍탁의 선정비 다. 그는 군수재임 시에 관아를 수축했다 하며, 선정을 베풀고 이천부사(利川府事)로 영전하였음이 영성지에 기록되어 있다. 선정비는 배꼽뿌리 산모퉁이에 현존하고 있다. 글이 마모되어 알아볼 수가 없어 문중에서 새로 작은 안내비를 세웠다. -벌명당(蜂名堂) : 배꼽뿌리 서쪽에 있는 골짜기. 온양가도의 큰길에서 보인다. 옛날 어느 지관(地官)이 이곳을 보고 하도 좋은 길지(吉地)라 묘지로 쓰면 후손이 잘된다는 말을 듣고 마을 사람이 그곳을 파보았더니 벌이 수천마리 땅속에서 날아 하늘로 오르는 것을 보고 명당임을 확인했다고 하여 벌명당이다. -지킴골(守谷) : 배꼽뿌리 서쪽에 오목하게 파여진 골짜기. 몇 년 전까지 이 골짜기에 서낭이 있었고 장승이 있어 서낭이 마을을 지켜준다고 하여 지킴골이라고 하였다. 서낭이나 장승은 없어지고 흔적만이 남아있다. -신흥리 : 새말 건너 동방초등학교 왼쪽 진방산 아래에 펼쳐진 마을. 연일정씨들에 의하여 새로 만들어진 마을이다. 새로 옮겨서 만들어진 마을이라 신흥리다. -진방산(鎭芳山) : 방산(芳山 : 소애) 마을의 진산(鎭山)이라 진방산이라고 하였다. 신흥리와 방산 마을을 감싸고 있으며, 이곳을 경계로 하여 천안군과 아산군이 나뉘었다. -방산(芳山) : 마을의 토속지명은 소애다. 마을 뒷산인 진방산이 지형지세가 소가 누어있는 모습으로 되어 있어 와우형(臥牛形)에서 따온 ‘소’와 ‘애’는 소의 등을 뜻하는 것으로, 소 등애의 준말이 소애가 되었다. 양지바르고 들이 넓어서 생활하기가 매우 좋은 곳이다. -소다리들(새말들) : 새말 동네 앞에 펼쳐진 들. 들의 북쪽은 좁고 남쪽은 점차 넓어져서 생김새가 소의 뒷다리 모습과 같아서 소다리들이라고 하였다. -안골(內谷) : 소애와 통새골 사이에 남쪽으로 깊이 들어가 있는 마을. 골짜기의 남쪽 끝은 천안군 풍세면에 인접되었다. 소애마을 안쪽에 깊이 들어가 있다고 안골이다. -청산 뜸 뫼 : 소애마을에서 눈들 마을을 바라보고 펼쳐진 들. 옛날에는 들 가운데 낮은 구릉이 있었고 구릉 위에 푸른 솔밭이 있어 청산 뜸 뫼라고 하였다. 지금은 구릉도 솔밭도 볼 수 없고 모두 밭이나 논이 되어 들로 변했다. ※ 뜸이란 산비탈이나 들 가운데 형성된 마을을 말한다. -신방제(新方堤) : 소애마을과 새말 앞으로 흐르는 천안천의 내 둑을 신방제라고 한다. -쇠바위재 : 소애앞들에 있는 작은 동산. 약 20년 전까지도 이곳에 ‘소’를 닮은 모양의 큰 바위가 있어서 쇠바위재라고 하였다. 쇠바위는 다리를 놓는 곳에 밀려와서 다리를 놓는데 이용되었다. -통새골(通井) : 풍세가도에서 소애마을로 들어가는 길가에 발달된 첫 동리다. 마을 앞들 복판에 매우 큰 우물이 있어 소가 통속의 물을 마시는 형상이라 통새골이라고 하였다. 通井보다는 桶井이 옳다고 본다. -우두산(牛頭山 : 쇠머리산) : 통새골 동남쪽에 있는 산. 소의 머리를 닮아서 우두 산이다. 소가 머리를 길게 빼고 통새골 들에 있는 우물의 물을 마시는 형상이라 마을 이름도 통생골이 뒤에 통새골로 변했다. -통샘(桶井) : 통새골 앞들에 있는 우물. 지금은 메워져서 작은 우물이 되었으나 옛날에는 대단히 큰 우물이었다. -형제봉(兄弟蜂) : 통새골 남동쪽에 두 개의 봉우리가 있다. 마을 사람들은 형제봉이라 부르고 있다. -앞구레 : 통새골 앞들. 이 들 가운데 있다. 신흥리의 앞으로 연결되어 새말들을 형성하고 있다.
-
[기획특집] 천안의 지명유래 ㉛[천안신문] 본보는 지난 151호부터 천안 각 읍면동의 지명유래에 대한 연재를 진행중이다. 천안이라는 지명에 대한 기록은 고려 태조 13년인 930년 8월 8일 기해 일에 고려태조가 대록에 내려와 동서도솔과 탕정의 일부와 사산의 일부와 대록의 일부를 병합하여 천안이라 하고 도독부를 둔데서 유래한다. 대록은 지금의 목천이요, 사산은 직산이며, 동도솔과 서도솔은 천안의 일부이며, 탕정은 온양 탕정의 일부다. 각 지역에 내려오는 천안의 지명은 1988년부터 이원표 선생이 동부 6개 면을, 1987년도부터 오세창 선생이 천안시를 조사해 1960년경 한글학회에서 발행된 ‘한국 지명총람’을 참고로 가감 수정해 동부 6개면은 1990년 천안군에서 ‘역사의 현장’으로 출간되었으며, 천안시는 1989년 천안문화원에서 ‘천안의 지명’으로 출간하였다. 그 후 1999년 천안시 문화원에서 시와 군에서 발행된 것을 합하여 ‘천안의 땅 이름이야기’로 출간했다. 이번 연재는 이를 바탕으로 했으며, 일부 내용은 천안 향토사학자 김종식 선생이 재조사를 통해 가감하였음을 밝혀둔다. <편집자 주> ▲원성동(院城洞) 원거리 또는 원리(院里)라고도 부른다. 본래 천안군의 하리면 지역인데 남원(南院)이 있었으므로 원거리라고 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통폐합에 따라 성리(城里)를 합쳐서 천안읍 영성면에 편입되었다. 1920년 행정구역 변경으로 원성정이라고 하다가 1946년 원리의 원자와 성리의 성자를 따서 원성동으로 되었다. -성말(城村․城里) : 지금의 오룡경기장의 북쪽 왕자산 밑에 있는 마을. 지금은 태조산 체육공원의 입구가 되었다. 본래 왕자산에 왕자산성이 있었고, 여기에 이어진 천안읍성이 마을의 북쪽을 지나고 있었다. 수년전 까지도 성말로 불리었으나 최근에도 마을 이름조차 없어져 가고 있다. 오룡경기장이 세워지고 주택지가 되면서 옛 모습을 찾을 수 없다. -고려 태조묘(高麗 太祖廟) : 성말 동리에 고려태조 왕건의 사당이 있었다고 전한다. 동국여지승람의 천안의 묘단조(廟壇條)에 기록되어 있는 사실이다. 묘란 사당을 일컫는 말로, 그곳에 모신 분을 춘추로 제사 드리는 곳이다. 서기 936년 후백제를 공략하려고 이곳에 머물렀던 왕건을 위하여 세워진 것이다. 조선 말기까지도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자취도 없다. -원거리(구원거리) : 구성초등학교 아래 국도변에 있는 마을과 거리를 원거리라고 하였다. 남원이라는 휴게소와 남원루라는 누각이 있어서 원거리라고 하였다. 빗돌 모퉁이에서 남파 옆의 회 다리까지다. -짐대거리 : 짐대는 당간지주(幢竿支柱)를 말하는 것으로 절을 표시하기 위하여 사찰 앞에 돌이나 쇠를 높이 세운 것이다. 지금의 남산초등학교 동쪽에 해당되는 곳으로 옛날에 절이 있었다고 한다. 남산초등학교를 처음 세울 때 많은 유물이 나왔다고 전하고 있다. -삼선댕이(三神堂) : 성말 위쪽 왕자산 아래 있는 마을. 삼신을 모신 사당이 있었다. 삼신은 천신, 지신, 조상신을 말하고 옛날부터 아기를 낳지 못하는 여인들이 빌었던 신당으로 알려지고 있다. 태조산 체육공원 입구에 있는 마을이다. -화장터 : 농업고등학교의 동쪽마을. 옛날 천안의 화장장이 있었던 곳. 1940년대까지도 있었으나 지금은 마을이 형성되고 도심지가 되었다. -불난다리 : 교육보험 사거리에서 동쪽으로 유량동 가는 길에 있는 다리. 1984년 부산 서울간의 송유관이 터지면서 화재가 일어났던 곳으로, 물보다 가벼운 기름이 냇물을 타고 흐르면서 연소되어 대단히 큰 화재가 났다. 이 사건 후에 사람들은 불 난다리로 이름 지어 불렀다. -도수장거리 : 농촌지도소가 있는 뒤쪽이다. 수년전까지도 이곳에 도축장이 있어서 사람들은 도수장거리라고 하였다. -옥터(獄垈) : 옛날 천안관아에 예속되었던 옥이 있었던 자리다. 지금의 안식일교회가 있는 곳으로, 옛날에 죄인을 가두었던 곳이다. ▲유량동(留糧洞) 고려태조 왕건이 936년에 후백제의 신검(神劍) 양검(良劍)을 정벌하기 위하여 천안에 군사를 주둔시키면서 8만 여명분의 군량을 쌓아두었던 곳이라 하여 글자 그대로 유량동이다. 이곳에서 머물렀던 왕건은 후백제의 군사가 북상하여 올 줄 알았으나 북상하지 않고 경상도 선산(善山)지방에 포진하므로 그곳에 내려가 격전을 벌인 끝에 후백제를 멸망시켰다. 유량동은 본래 천안군의 상리(上里)에 속하였으나 1914년 행정구역 변경으로 교촌리, 당후리, 분곡리, 상평리, 하평리, 평리, 신리, 상촌리 등을 합하여 영성면에 편입되었다 1931년 천안읍에 편입되었다.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하고 국토의 재통일을 기하는 전진기지의 중심지 역할을 하던 곳이 유량동이다. -향교말(校村里:교촌리) : 전국의 향교가 있는 마을은 교촌리라고 부른다. 학교가 있는 마을이라는 뜻이다. 왕자산 서쪽에 있는 마을이다. 지금은 도시화 되었고 뒷산에 체육공원이 만들어지고 이웃에 오룡경기장이 설치되면서 도시변의 마을이 되었다. -천안향교 : 유량동 190번지 왕자산 아래에 있다. 조선왕조 500년의 통치이념이 유교였기 때문에 서울에 성균관이라는 대학기관을 두고 지방에 향교를 세워 지방양민의 자제를 교육하던 학교로, 유학을 공부하던 곳이다. 향학의 시작은 고구려의 경당에 소급하여 볼 수 있으나 그 후 고려 인종 때에 제도화되었고 1392년 조선이 건국되면서 지방교육제도를 정비할 때 세워진 것으로 본다(건립연대는 정확치 않다). 대성전(大成殿), 명륜당(明倫堂), 동묘(東廟), 서묘(西廟), 동제(東濟), 서제(西濟), 전사고(典祀庫), 삼문(三門) 등이 현존하고 있다. 개화 이후에 들어오면서 학교가 세워진 뒤에는 교육의 기능은 없어지고 다만 문묘(文廟)로서의 역할만 하고 있다. -체육공원 : 최근에 천안시가 시민의 체육활동을 위하여 설치하였다. 명칭이 태조산 체육공원으로 되었으나 잘못된 것이다. 공원이 설치된 산은 왕자산이다. 고로 왕자산 체육공원이라야 옳다. -왕자산(王字山) : 유량동 마을의 뒷산이다. 멀리 천안삼거리 쪽에서 산을 바라보면 산골짜기가 파여진 것이 왕자(王字)모양으로 되었다고 해서 왕자산이다. -태조산(太祖山) : 민방위학교와 대한교육보험 연수원이 세워진 산. 멀리에서 바라보면 둔삼각형 모양을 이루고 있으며 천안의 진산(鎭山)이다. 936년 태조 왕건이 후백제를 공략하려고 천안에 군사를 주둔할 때 태조 곁에 있었던 술사(術師) 예방(倪方)이 태조와 함께 이 산에 올라 천안의 지형지세를 살펴보고, 오룡쟁주의 형상이라고 태조에게 간했다는 산이다. 고려태조가 오른 산이라고 하여 태조산 또는 태조봉이라고 한다. -형제봉(兄弟峰) : 태조산의 줄기 민방위학교와 야영장의 북동쪽에 있는 산. 두 개의 봉우리가 나란히 서 있는 형제와 같아서 형제봉이라고 하였다. -장태산(長泰山) : 유량동 입구의 동남쪽 고속도로변에 있는 산. 고속도로에서 손에 닿을 듯 하며 경관이 아름답다. 고려태조 왕건이 이곳에 주둔할 때 장대(將台)를 설치하였다고 하여 장대산이, 오랜 세월 변하여 장태산이 되었다. -마점산(馬占山) : 장태산 뒤쪽의 높은 산. 천안의 구읍지 영성지에 마점산과 마점사의 내력이 보인다. 고려태조 왕건이 이곳에 말을 매어두고 쉬었다 하여 마점사라 하였고, 마점사가 있는 산이라 마점산이라 하였다. 일본 강점기 때 산 정상에 회전식 등대를 설치하여 항공기의 항로를 안내하였으므로 불빛이 회전한다고 불도는 산이라고 불렀다. ※마점산에 있었다는 마점사(馬占寺)는 수차례 답사하였으나 자취를 찾을 수 없었다. -담넘어(堂越) : 유량동 마을에서 남쪽으로 보이는 마을. 유량동 마을 앞에 흐르는 냇가 언덕에 옛날에 작은 신당(神堂)이 있어, 신당넘어 마을이라 당넘어라고 하던 곳이 담넘어로 변음된 것이다. 지금은 신당이 보이지 않는다. -대석골(臺石谷) : 형제봉 밑 지금의 야영장이 있는 안쪽 골짜기. 맑은 옹달샘이 있고 그 안쪽에는 약수터가 있다. 약수터 아래에 크고 넓은 바위가 대석골이라고 하였다. -조라지고개(도라지고개) : 유량동에서 천안군 목천면 덕전리 유왕골로 넘어가는 고개. 꼬불꼬불 굽어진 고개 길이 길고 험하여 넘어가는 도중에 졸음이 온다고 하여 조라지고개다. 지금은 도라지고개로 불리우고 있다. 신작로가 개설되기 이전에는 목천 지방 사람들이 이 고개를 넘어 천안에 이르렀던 대로였으나 지금은 한적한 오솔길이 되었다. -동막골(東幕谷) : 유량동 동쪽에 있는 골짜기. 지금은 몇 가호가 있으나 옛날에는 마을이 없고 농막(農幕)이 있었다고 하여 동막골이다. -벌말 : 향교 말 앞의 긴 들 속에 있는 마을이다. 벌판 속에 있는 마을이라 벌말이라고 하였다. -분토골(盆谷, 둔텃골) : 유량동 서쪽 왕자산 아래에 있는 마을. 마을의 생김새가 분(盆)과 같이 오목하고 아늑하다고 하여 분곡이라고 하였다. 조선 인조 때의 학자 이승벽(李承壁)이 이곳에 살면서 마을 이름을 따서 호를 분곡(盆谷)이라고 하였다. 또 다른 설에 의하면 옛날 시멘트가 없을 때 부엌이나 뜰을 칠하는 도료가 분토(粉土)였다. 이 분토가 많이 난다고 하여 분토골이라고 하였다고 전하며, 지금도 분토가 많이 나오고 있다. -북바위 : 옥녀봉 아래에 있는 바위. 바위의 생김새가 북(鼓)과 같이 생겼다고 하여 북바위다. -불당골(佛堂谷) : 유량동 안쪽 지금의 민방위학교가 있는 골짜기. 아홉사리 고개를 오르는 골짜기로, 옛날에 이곳에 사찰이 있었다하여 불당골이다. 지금은 사찰은 없고 절터만이 남아있어 동국여지승람에 전하는 유려왕사(留麗王寺)나 마점사(馬點寺)의 터가 아닌가 생각된다. -석벽골(石壁谷) : 유량동 동쪽 태조봉의 아래 골짜기. 대한교육보험의 아래쪽에 있는 골짜기를 말한다. 바위도 돌도 없는 골짜기이나 석벽골짜기라고 불리운다. 동리에 내려오는 전설에 의하면 옛날 이곳에 ‘석벽’이라는 장사가 살아서 석벽골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쇠목고개(牛項峙) : 유량동에서 안서동으로 넘어가는 고개(민방위학교에서 호서대학으로 넘어가는 고개). 아스팔트가 잘되어 산책하기에 매우 좋은 길이다. 태조봉을 소의 몸으로 보고 왕자산을 소의 머리로 보았을 때 지금의 고갯길은 소의 목 부분에 해당하기 때문에 쇠목고개(소목고개)라고 하였다. -승천(升川)고개 : 유량동에서 목천면 승천골로 넘어가는 고개. 매우 높고 험하다. 천안천과 병천의 분수령이다(승천천의 물은 병천에 합해져 미호천에 흐른다). -아홉사리고개(九曲峙) : 유량동에서 목천면 산뱅리(三方里)로 넘어가는 고개. 크게 아홉번 굽이쳐 온다고 아홉사리고개다. 신작로가 개설되기 이전에는 매우 큰길로 목천지방 사람들이 천안에 오려면 이 고개를 넘나들었다(국수나 새끼를 사리듯 꼬부라진 고개). -양달말(陽洞) : 분토골 동쪽에 있는 마을. 아침 햇살을 받을 때부터 저녁 해가 질 때까지 종일 햇볕을 받는 마을이라 하여 양달마을이라고 하였다. -옥녀봉(玉女峰) : 쇠목고개를 바라보아 오른쪽에 있는 뾰족한 산. 산의 모습이 아름다운 옥녀모습으로 생겼다고 하여 옥여봉이다. 마을에 전해오는 말에 의하면 여자모양의 산이라 명당이 없는 산이고, 만약에 이 산에 무덤을 만들면 후손이 잘되지 못한다고 전한다. -용제봉(龍祭峰, 선애골) : 태조산야영장이 있는 옆 산. 용제를 지내는 산이라 용제봉이라 하였다. 용제는 기우제를 말하는 것으로, 가뭄이 들고 메말라서 농사에 지장이 있으면 이 산에서 제사를 지냈다. -하마비(下馬碑) : 천안향교 앞에 세워진 비석. 어느 지방이나 향교 앞에는 모두 있다. 비문은 대소인원개하마(大小人員皆下馬)라고 썼다. 지위가 높고 낮은 모든 사람은 말에서 내려서 가라는 뜻이다. 향교에 모신 분들이 공자나 맹자이고, 모두 성현들이기 때문에 그 앞을 말을 타고 지나지 말라는 뜻으로 세워진 비이다. -한티골 : 대한교육보험 연수원이 있는 아래쪽 골짜기. 골짜기 위에 아홉사리고개가 지난다. 한티란 큰 고개를 말함이니, 큰 고개에 있는 골짜기라 한티골이라고 하였다. ▲와촌동(瓦村洞) 왜정(倭政)때 황금정(黃金町)이라 하였다가 기와막거리(기와말)의 뜻을 따라 와촌동으로 고쳤다. -온양나드리 : 기와말 서쪽에 있는 마을로서 온양으로 통하는 길가가 됨. -천안교(天安橋) : 온양나드리에 있는 천안천에 놓인 다리. ▲봉명동(鳳鳴洞) 천안군의 하리(下里)면 지역이었다. 1914년의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의항리(蟻項里)와 다가리(多可里)의 일부를 병합하여 봉서산(鳳棲山)의 이름을 따서 봉명(鳳鳴)이라 하여 영성면(寧城面)에 편입되었는데, 1920년 행정구역 변경에 의하여 영성면이 천안읍에 편입되는 동시에 본동을 둘로 갈라서 봉명정, 산평정(山平町)이라 하다가 1946년 왜식동명을 없애고 정(町)을 동(洞)으로 고치고 산평정은 다가동으로 고쳐서 각기 독립되었다. 옛 부터 닭이 천 마리면 봉황이 한 마리 있다고 하는 속담과 같이 최근 봉명동에는 병아리 부화장이 많아 세워져서 많은 병아리 속에 봉황의 새끼 한 마리쯤 태어나서 울 것 같은 느낌을 주는 동이다. -봉서산(鳳棲山, 158m) : 흔히 말하는 개목부락의 뒷산이다. 천안시가지의 서쪽을 감싸고 있는 야산으로 두정동의 노태산과 연결되어 그 남쪽은 월봉산(月峰山)에 이어지고 있다. 봉황새는 상상의 새로 봉은 수컷이고 황은 암컷이다. 다른 말로 주작(朱雀)이라고도 부른다. 고대 묘의 벽화에 많이 그려졌던 새로, 태평성대인 요순시대에 한번 지상에 왔었고 그 후 지상에 온 일이 없다고 한다. 오동나무가 아니면 깃들지 않고 죽실(竹實)이 아니면 먹지를 않으며, 서강(西江)이 아니면 목욕하지 않고 온몸이 붉은 깃털로 싸여있는 신성스러운 새로 전해지고 있다. 봉서산은 봉황새가 깃들어 살고 있는 산이라고 하여 봉서산이다(비봉귀소형 飛鳳歸巢形). -봉서산 선사유적지(先史遺蹟地) : 1965년 봉서산 중턱에 세워진 청황사(靑黃寺)의 주지 이일섭씨가 뒷산에서 단면원형(斷面圓 形)의 검은색 돌도끼를 수집하여 보고 함으로써 시작돼 1965년 10월 2일 삼불 김원용(三佛 金元龍) 박사가 발굴을 시작한 곳이다. 유물의 출토지는 낮은 산상으로 지금은 모두 밭을 일구어 파괴돼 흔적을 찾을 수 없을 정도이나 타제석기와 함께 홍도(紅陶) 줄문토기편(櫛文土器片)이 끼어 있어 신석기대 말기에서부터 청동기시대 초기까지의 선사인의 서식지로 알려지고 있다. 1986년 향토사학자들의 재조사에 의하면 비록 표면 채집이기는 하지만, 무문토기유적(無文土器遺蹟)이면서 홍도기 출토며 또 석기도 마제돌도끼 이외에 차돌타제석기(石英打製石器)와 반달모양돌칼(半月形石刀)과 같은 석기류가 수집되는 것으로 보아 흥미 있는 연구 자료가 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신석기시대와 청동기시대가 같은 장소에 시간적인 차이를 두고 공존하였음을 말해주는 귀중한 자료이며, 차돌로 만든 석기류는 앞으로 무문토기 유적에의 우리들의 새로운 주의를 환기하는 것이며, 더욱 연구하고 살펴보기 위하여 봉서산의 유적지는 잘 보존되어야 한다고 생각된다. -개목(蟻項, 개미목) : 봉명동에서 가장 북쪽에 있으며 자연부락으로는 가장 크다. 마을의 지형이 개미의 목처럼 생겼다고 개미목이라고 하였다. 또는 개목은 견항(犬項)이라고도 하여 개의 목과 같이 생겼다고도 전한다. 개목마을의 형성은 시대적으로 보아 천안시에서는 가장 오래된 것으로, 이미 선사시대에 이루어졌다(앞의 선사유적지에서 밝혔음). 옛날 아산지방의 바닷가에서 생산되는 소금과 내륙지방의 곡식이 교환되는 곳이기도 하였다. 백성동 고개 너머에 소금쟁이라는 마을이 있다. 소금쟁이는 소금장이로 염시장(鹽市場)을 말하는 것으로, 이 소금장은 개목마을과 직결되는 곳이다. 개목의 ‘개’는 ‘지(支)’와 같은 뜻으로 본(本)만 못한 것이다. 고로 개목은 지항(支項)으로 불러도 좋은 곳이다. 소금쟁이만은 못한 곳으로 작은 물물교환 장소이다. 선사시대라고 소금을 먹지 않은 것으로 생각하면 안 된다. -개목남근석(男根石) : 개목마을의 동구 앞에 있었으나 시가지 조성과 도로 확장으로 천안시청 정원으로 옮겨져 사용되다가 개목마을에 변고가 자주 발생하자 주민들의 진정으로 봉사산 정산으로 옮겨졌다. 봉서산 정상 팔각정에서 배드민턴 운동장 쪽으로 가다보면 길옆에 있다. 옛 부터 우리나라는 동구 앞에 돌을 세워 마을의 표식을 하였다. 그 표식돌은 여러 가지 형태로 되었으나 주로 많은 것은 남근석(男根石)이다. 남자의 성기를 닮아서 그것을 직립으로 해 머리가 하늘을 쳐다보게 세워졌다. 선사시대에 남아선호사상과 풍요사회를 기원하던 표식이면서, 또 한편으로는 기념비적 역할도 하였다. 개목부락은 이미 선사시대에 조성된 마을이라 이와 같은 남근석이 세워진 것으로 보인다. 우리나라 농촌마을에 ‘산돌말’이라는 곳이 많다. 이것은 입석촌(立石村)으로 선사사회의 풍습이다. 입석은 마을의 경계를 표시하기도 하였고 신앙의 대상으로 이용되어 왔던 것으로 생각된다. -부챙이(富倉里, 부창리-富昌里) : 천안고등학교를 바라보아 왼편의 골짜기를 가리킨다. 옛날에 부자들이 많이 살았고, 그들의 창고가 많이 있었다고 부창리라고 하였다고 한다. 사실은 지금부터 백 년 전까지만 해도 집이 없었던 곳이며, 미라골로 넘어가는 오솔길이 있었을 뿐이다. 일본 강점기에 일본인이 이곳에 와서 광산을 개발하고 금광을 일구었던 곳으로, 흰 복사가루가 동산과 같이 쌓여 있었다. 금광은 해방직후에 없어지고 주택들이 들어서서 옛날의 흔적은 찾을 수 없다. -병막(病幕) : 천안의료원 자리다. (도립병원) 옛날에 전염병 환자나 나환자들을 격리 수용하던 곳이라 ‘병막’이라고 하였다. 병막을 다른 말로 병마개라고도 불렀다. 일본 강점기 때까지도 병막으로 이용되었다. 지금도 도립천안의료원이 설치된 것으로 보아 옛 부터 병원과 관계가 깊었던 곳으로, 지명이 미래를 예언했다고 보아야 겠다. -씨알농장 : 1960년대 초반 우리나라 종교계와 신학계의 거성이었던 함석헌옹이 경영하던 농장으로, 그는 이곳에서 손수 농장을 경영하며 많은 논문과 저서를 남겼다. 천안의료원에서 경일주택이 들어선 부근 일대이다. -차돌고개(眞石, 直石) : 봉명동에서 가장 남쪽이다. 고개의 반대편은 다가동이고 고개 너머는 쌍룡동이다. 차돌고개는 천안에서 온양온천으로 가는 국도이며 대로이다. 도로가 확장되기 이전에는 소로였으나 교통량이 확산되면서 증폭되었다. 도로가 확장되기 이전에 양쪽 길가에 차돌이 박혀있어서 차돌박이라고 하였다.
-
[기획특집] 천안의 지명유래 ㉚[천안신문] 본보는 지난 151호부터 천안 각 읍면동의 지명유래에 대한 연재를 진행중이다. 천안이라는 지명에 대한 기록은 고려 태조 13년인 930년 8월 8일 기해 일에 고려태조가 대록에 내려와 동서도솔과 탕정의 일부와 사산의 일부와 대록의 일부를 병합하여 천안이라 하고 도독부를 둔데서 유래한다. 대록은 지금의 목천이요, 사산은 직산이며, 동도솔과 서도솔은 천안의 일부이며, 탕정은 온양 탕정의 일부다. 각 지역에 내려오는 천안의 지명은 1988년부터 이원표 선생이 동부 6개 면을, 1987년도부터 오세창 선생이 천안시를 조사해 1960년경 한글학회에서 발행된 ‘한국 지명총람’을 참고로 가감 수정해 동부 6개면은 1990년 천안군에서 ‘역사의 현장’으로 출간되었으며, 천안시는 1989년 천안문화원에서 ‘천안의 지명’으로 출간하였다. 그 후 1999년 천안시 문화원에서 시와 군에서 발행된 것을 합하여 ‘천안의 땅 이름이야기’로 출간했다. 이번 연재는 이를 바탕으로 했으며, 일부 내용은 천안 향토사학자 김종식 선생이 재조사를 통해 가감하였음을 밝혀둔다. <편집자 주> ▲대흥동(大興洞) 천안읍성(天安邑城)이 있었던 북서 외곽 지대이다. 지금의 장로교회 언덕과 중앙초등학교로 연결되는 읍성이 옛 관아를 둘러쌓았고, 그 서북쪽에는 한가한 산림지대였으나, 1904년 천안역이 설치되고 대로(大路)가 이곳으로 나면서 변화가로 변했다. 1920년 행정구역 변경으로 읍내리(邑內里)를 갈라서 본정(本町)이라고 왜식동명을 사용하다가 1946년에 대흥동(大興洞)이라고 고치면서 오늘에 이르렀다. -옛 법원터 : 지금의 세무서가 있던 곳에 법원이 있었다. 1976년 12월 새 청사를 짓고 이사 갈 때 까지 숱하게 많은 사람들의 희로애락이 엇갈렸던 곳이다. 6.25 사변 때는 태극동맹원들이 본부로 사용하여 1950년 6월부터 9월까지 치안과 질서를 담당했던 곳이기도 하다. -절터 : 지금의 아카데미 예식장과 극장의 자리에 일본 강점기 때 일인들이 경영하던 본원사(本願寺)라는 절이 있었다. 해방 후에는 한때 법원청사로 이용되었고, 길 건너 제일프라자 자리도 본원사 절터로 서쪽에 있었던 것은 서본원사(西本願寺)라 했고, 동쪽에 있었던 것은 동본원사(東本願寺)라고 하였다. 돌을 다듬은 많은 석조물이 있었으나 모두 없어졌다. -빙고(氷庫, 얼음 창고) : 지금 아카데미극장 입구의 돌다방 자리다. 이곳에 옛날에 어름창고가 있었다. 추운 겨울에 저수지나 강에서 어름을 가져다 이곳에 쌓아두고 여름철에 이용하기 위한 얼음 창고가 있었다. -군청골목 : 옛 동헌이 있었던 골목이다. 얕은 고개를 넘어서 동리로 통하는 길이 있었다. 천안군으로 있었을 때 군청이 있어서 군청골목이라고 하였다. 옛 군청터는 지금은 삼성보험이 자리하고 있다. 옛 관아가 있었던 터는 모두가 명당이라고 전한다. ▲오룡동(五龍洞) 천안읍성(邑成) 안에 있는 동으로 지금부터 백 년 전에는 천안의 행정과 문화의 중심지다. 관아와 객사 문루 등이 있어서 많은 사람이 오가는 번화가였다. 1920년 지방행정 구역변경으로 읍내리 일부를 갈라서 왜식동명으로 욱정(旭町)이라고 하였다가 1946년 해방 후에 왜식동명을 없애고 오룡쟁주(五龍爭珠)의 지형 설에 따라 오룡동이라고 하였다. -객사(客寺) : 지금 충청은행이 있는 뒤편이다. 객사는 각 고을의 관아에 예속된 관사를 말한다. 임금님의 전패를 안치하고 초하루와 보름날에 예절을 향하여 절을 하고 사신이나 관리의 숙소로 이용되었다. 한일합방 후에 무너졌던 건물을 민가로 사용하다가 시에서 헐어다가 남산공원 위에 정자를 세우고 용주정이라 하였다. -화축관(華祝館) : 지금의 중앙초등학교 정문 앞에 있었다. 임진왜란이 끝난 4년 뒤 천안군수로 있었던 노대하가 천안의 정관(正館)으로 세웠으나 세월이 흐르면서 낡고 허물어져 지금은 없어졌다. 현종 7년(1666)에 군수 조경빈이 개축하였고 현종이 자주 온양온천에 가면서 행제궁으로 지었다. 화축관을 중수(重修)한 것은 충청감사 민유중(閔維重)과 경상감사 이태연(李泰淵), 통제사 이기성(李祈聲), 충청병사 이원로(李元老), 전라병사 민진익(閔震益) 등이다. 영조 26년(1751)에 왕이 온양에 행차할 때 직산의 영소정에 머무르면서 억석감회(憶昔感懷)란 현판을 문루인 영남루에 친필로 써서 걸게하였다. 또 우암 송시열이 지은 기문이 남아있어 그 내력을 자세히 알 수 있다. -내아터(內衙垈) : 오룡동 184번지, 지금 오룡우체국이 세워진 곳이다. 동헌(東軒)의 지형이 오룡쟁주형(五龍爭珠形)이라 이곳에서 아들을 낳으면 귀인이 된다고 전한다. 1989년에 오룡우체국을 다시 지으면서 동헌자리에서 많은 주춧돌과 조선시대의 와당이 나왔다. -선화루터(宣化樓:同樂堂) : 오룡동 184번지, 지금의 오룡우체국이 세워진 곳이다. -동헌터(東軒) : 오룡동 199번지, 지금의 충청은행이 있는 바로 뒤다. 이곳은 오룡쟁주형의 황룡에 해당되는 곳이고, 황룡의 눈언저리로 서기를 발하고 통찰하는 관아의 터로는 알맞다고 전한다. 터가 세서 민가로는 알 맞는 터가 못되고 관청의 터로는 적합한 곳이라고 한다. 약 40여년 전에 천안의 어느 부자가 이 터에다 큰집을 지었으나 이사하자 곧 죽었다고 한다. -삼문터(三門) : 오룡동 188번지에 있었던 동헌의 정문 터. 대개의 동헌 정문은 세 개로 되었고 삼태극을 그려 문을 표시했다. 가운데의 문은 높고 양쪽에 작은 문을 두 개 내어 일반인이 드나들도록 만들어진 문이다. -영남루터(永南樓) : 오룡동 118번지에 있었던 문루. 본래 동헌 근처에 있었으나 1919년 이후에 중앙국민학교 운동장 서쪽에 옮겨 세워졌다가 1953년 삼거리공원의 연못가에 세웠다. -동리(東里) : 지금의 오룡동지방을 일컫는 말. 천안을 동리, 중리, 서리로 나누어 부를 때 천안의 동쪽지방이라고 동리라고 하였다. ▲백석동(白石洞) 북쪽으로는 차암동, 동으로는 성정동, 봉명동, 남으로는 불당동, 서쪽으로는 아산군과 경계를 이루고 있으며 천안농공단지가 들어서면서 최근에 크게 발전되었고, 아산만으로 이어지는 도로가 마을을 관통하고 있어 전망이 밝다. 마을 이름이 백석(白石)으로 불리는 까닭은 지금의 마을 앞에(저수지 제방이 있는 곳) 흰색의 바위가 많이 있어서다. 백석동의 속명은 ‘한들’이라고 부르며, 한들은 일반적으로 ‘큰들’에서 연유되었다고 전하나 실은 ‘흰돌’에서 온 것이다. 흰돌이 변해서 한들이 된 것이다. 언뜻 생각하기에 백석동에서 불당동으로 이어지는 넓은 들 때문에 생긴 이름 같으나 본래의 마을 이름은 ‘흰돌말’이다. 1914년 행정구역 변경으로 송골 산직골 승적골을 합쳐서 백석리(白石里)라 하여 영성면에 편입되었고 1931년 천안시에 편입되어 백석동이 되었다. -호미걸이 고개 : 성정동․봉명동에서 백석동으로 넘어가는 고개다. 백석동 동리에서 바라볼 때 굽은 고갯길이 호미를 걸어 놓은 것 같은 형상이라 호미걸이 고개다. 고개위에 올라서 바라보면 천안의 시가지가 한눈에 보이고, 고개 마루턱에 용화사가 있고 왼쪽으로는 보림사가 있다. 고개가 S자 모양이다. -송골(松谷) : 호미걸이 고개를 넘어 첫 마을이다. 옛날에는 고개 양쪽에 솔밭이 우거지고 노송(老松)이 많아서 붙여진 이름이다. 아산군 음봉면으로 통하는 길가 마을로 몇 개의 주막이 있었고, 점토로 옹기그릇을 굽던 곳이나 지금은 모두 없어지고 몇 채의 집이 있을 뿐이다. -서밭댕이 : 백석동리의 앞들을 말한다. 옛날에는 가뭄에 물대기가 어려워 감자를 많이 심었다고 하여 서밭이 되었다. 또는 조나 수수를 심었다고 수수밭이라고 하여 서밭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옛날 이곳에는 당집(神堂)이 있었다. -건들(乾野) : 백석동 앞들이다. 물이 귀한 건답들이라 건들이다. 환서초등학교가 있는 교문 앞에 작은 저수지(한들 방죽)가 만들어지기 이전에는 매우 메말라서 모심기가 어려워 지어진 이름이다. -산적말(山寂洞) : 호미걸이 고개의 서남쪽에 있는 마을. 도로에서 마을이 보이지 않고 한적하여 산적마을이다. 또 마을에 내려오는 전설에 의하면 옛날에 내륙지방 사람들이 소금을 구하기 위해 아산만 쪽으로 가는 큰길가였기 때문에 도적이 살던 산채가 있었다하여 山賊마을이라고도 전한다. -승적골(勝賊谷) : 개목뒷산(鳳樓山) 넘어 서쪽의 골짜기를 말한다. 길손을 괴롭히는 산적을 무찔렀다고 승적골이라고 하였다. 마을에 내려오는 전설에 의하면 임진왜란 때 왜병들을 대파한 곳이라 승적골 이라고도 전한다. -서낭댕이(城隍堂) : 백석동에서 성성동으로 넘어가는 낮은 고개에 있다. 고개를 넘나들던 길손들이 고목나무 밑에 돌을 던져 돌무지를 만들고 서낭신으로부터 보호를 빌었던 곳이다. 지금은 아무 흔적도 없고 고목만이 우뚝 섰다. 일본 강점기 때는 금을 캐기 위해 서낭당 고개 밑에까지 광구가 설치되어 있었다 한다. -도둑골(盜賊谷) : 호미걸이 고개에서 북쪽으로 군부대가 있는 골짜기. 도둑들이 모여 살았다고 도둑골이다. 또 이곳에는 도깨비집이 있었다. 도깨비를 위하여 마을 사람들이 거적으로 움막을 지어주고 도깨비를 살게 하였으며, 초하루 보름으로 떡을 움막집에 해놓고 빌기도 하였다. ※ 백석동은 아산만에서 생산되는 소금과 내륙지방에서 생산된 곡식이 교환되는 지점으로, 옛 부터 길손이 많았고 이에 따라서 행인을 노리던 로적(路賊)이나 산적(山賊)도 많았던 것으로 생각된다. -여수물(狐井) : 농공단지와 백석동마을 사이에서 성정동 쪽으로 넘어가는 골짜기. ‘여우물’이 변하여 여수물이 되었다. 여수물 북쪽에 작은 우물이 있는데, 가뭄에도 물이 끊이지 않고 넘쳐흘러 여우들이 먹고 갔다고 전한다. -서목골(西淵谷) : 마을 뒷편 현재의 농공단지에 있는 골짜기. 서목골이라고 전하나 목골이 아니고 못(淵)골이다. 본래 이곳에는 작은 연못이 있어 서쪽에 있는 연못이라 서못골이 서모골로 변음되었다(지금도 작은 저수지가 있다). 농공단지 때문에 점차 자취가 없어져 가고 있다. -큰골(大谷) : 현재의 농공단지가 들어선 자리다. 골짜기가 커서 대곡으로 불렸고 글자 그대로 큰골이라 큰 건물이 세워졌다. -작은 노태산(魯泰山) : 백석동과 두정동 사이에 정삼각형 모양으로 된 산. 두정동에 큰 노태산이 있고 백석동에 작은 노태산이 있다. 중국의 산동지방에 있는 노나라의 태산이름을 따서 노태산이라 하였다. 산위에 작은 산신각이 있었으나 지금은 없어졌다. ▲성황동(城惶洞) 서낭댕이(성황당)가 있었던 곳이라 성황동이라고 하였다. 1920년 행정구역변경에 의하여 읍내리(邑內里)의 일부를 갈라서 영정(榮町)이라 하고 왜식 동명을 사용하다가 1945년 해방이 되면서 왜식 동명을 없애고 서낭당의 이름을 따서 성황동으로 바꾸었다. 본래 이곳은 오룡쟁주지형(五龍爭珠地形)의 북룡(北龍)에 해당되는 곳으로 지금의 천안초등학교가 있는 언덕을 가리킨다. 북룡은 흑룡으로서 오룡 중에 가장 힘이 세고 건장하여 그 기상이 씩씩하고 우람해 그에 해당되는 성황동은 앞으로 크게 발전할 것으로 기대된다. -서낭댕이(城隍堂) : 지금의 복자여자고등학교가 있는 정문 쪽에 옛날에 큰 서낭이 있었다. 1960년대까지도 우물이 있었고 큰 고목이 있어 그것을 위하는 서낭당이 있었다. 그래서 이곳을 서낭댕이 고개라고 한다. 성황신에 대한 믿음은 언제부터인지 정확하지 않으나 대체로 솟대가 세워졌던 청동기사회부터가 아닌가 생각된다. 천안의 옛길은 지금의 중앙초등학교를 통하여 북으로 이어진 것 같다. 현재 대흥동의 거리는 러일전쟁 때 일본인들에 의하여 새로 만들어진 신작로다. 길가는 나그네가 노신을 위로하고 가는 길에 평안이 따르게 하기 위하여 서낭에게 절하고 고목나무 밑에 돌을 던져 신을 깨우고 알리는 곳이다. -밤나무쟁이(栗谷) : 복자여자고등학교와 천안북중학교가 있는 사이 골짜기. 밤나무가 많아서 밤나무골 또는 밤나무쟁이라고 불렀다. 1940년대까지도 밤나무가 많이 있었다. -물레방아자리 : 서낭댕이고개 북서쪽에 있었다. 지금은 일부가 신부동에 편입되었고 주택지로 변하여 찾을 수가 없다. 복자여자고등학교의 국도변 담장이 끝나는 서쪽이다. 정미업이 발달하기 이전에 이곳에 매우 큰 물레방아간이 있었고 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거리라 물방아거리라고 하였다. -관사터 : 전신전화국이 있는 바로 남쪽이다. 일제 때 천안역에 근무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이곳에 역원 관사를 짓고 살게 하였다고 해 관사터다. 해방 후에도 계속 철도공무원의 관사로 이용되었고 지금은 도시의 복판이 되었다. ▲문화동(文化洞) 1920년 행정구역 변경에 따라 읍내리(邑內里)를 갈라서 대화정(大和町)이라 하다가, 1946년 왜식 동명 변경에 의하여 문화동으로 고쳤다. -신선동(神仙洞) : 문화동에서 으뜸가는 양지(陽地) 마을. ▲사직동(社稷洞) 사직이란 왕조의 주권을 이르는 말로 사(社)는 토신(土神)을 뜻하고 직(稷)은 곡신(穀神)을 뜻한다. 군왕이 등극할 때는 사직에 제사를 지내고 나라의 흥성을 제사지내던 곳을 사직단이라고 하였다. 1920년 지방행정구역 변경에 의하여 읍내리를 갈라서 남산정이라고 하였다가, 1946년 해방이 된 다음해에 왜식 동명을 없애는 행정에 따라 이곳에 있었던 사직단의 이름을 따서 사직동이라고 하였다. -남산(南山) : 사직동의 남쪽 천안시장(市場)의 끝에 있다. 936년 고려태조 왕건이 8만7500명의 대군을 이끌고 후백제의 신검을 토벌하기 위하여 이곳 천안에 머무를 때, 태조 곁에 있었던 술사 ‘예방’이라는 사람이 천안의 지형지세를 살펴보고 간하기를 오룡쟁주(五龍爭珠)의 지형이라고 하였다. 오룡쟁주란 다섯 마리의 용이 구술 하나를 놓고 서로 얻으려고 싸우는 지세로 이곳 남산을 구슬(여의주)로 보았다. 남산은 외떨어진 잔구로 어느 산에도 연결되지 않았고 독립되어 있는 산이다. 조선시대는 사직단이 있어 사직에 제사 지내던 곳이고, 일본 강점기 때는 그들의 신사가 세워져서 많은 시민을 강제로 참배시키던 곳이며, 해방 후에는 시민공원으로 조성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남산비석거리(碑石街) : 해방 이전까지만 해도 남산아래 도로변에 많은 비석이 있었다. 관찰사 어사 군수의 선정비나 불망비 등이다(약 20여개). 그러나 도로확장과 주택건립으로 지금은 한 개도 없다. 비석이 많이 있었던 거리라 비석거리라고 하였다. -용주정(龍珠亭) : 남산 위에 있는 정자다. 1963년 지금의 중앙초등학교 앞에 있었던 천안객사(客舍)가 낡아서 헐고 그 일부를 남산에 옮겨 세운 것이다. 본래 이곳에는 정자가 있었으나(용주정의 뒤) 없어지고 그 자리 옆에 세웠다. -수선정(水仙亭) : 지금의 사직동 15번지에 있었던 정자. 옛 천안의 동헌(東軒) 앞에 있었다. 인위적으로 큰 연못을 파고 목 가운데에 돌로 축대를 쌓아 섬을 만들고 멀리 유량천에서 물을 끌어대어 못에 물을 고이게 하고, 고였던 물은 남쪽으로 빠지게 하였다. 못가에는 수선화를 심어 꽃피게 하였다 하여 수선정이다. 수선정이 세워졌던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지만 1988년 중앙시장 앞 도로에 전화선 매설 공사를 할 때 수선정의 정자 기둥이었던 것으로 보이는 8각 돌기둥이 출토되어 구 천안문화원 마당에 보존되고 있다(영성상회 주인 이선영씨의 신고). 이 돌기둥이 출토된 곳이 수선정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지금의 중앙시장 네거리 외환은행 앞의 도로). 천안에 있었던 정자 중에서 가장 아름다웠던 정자로 알려지고 있다. ※왜정 초기에 수선정을 헐어 남산의 남쪽 기슭에 옮겨 세웠으나 그것도 없어지고 지금은 주추만 남아 있다. 이홍복의 기문이 남아 있다. -서릿말(西里) : 천안시장(市場)의 서쪽에 있는 마을이다. 수도주물공장을 중심으로 오늘날은 살기 좋은 주택지로 가꾸어지고 있다. 천안을 나누어 동리와 서리로 구분할 때 불렀던 마을 이름이다. 동리는 지금의 영성동과 원성동지역을 말하고 반대가 되는 지역을 서리라고 하였다. 일본 강점기 때는 솥을 만드는 공장이 전쟁에 사용되는 무기제조공장으로 둔갑하였고, 일본인들이 한반도에서 본국으로 쌀을 가져가기 위하여 포장용 가마니를 만드는 공장도 이곳에 있었다. 최근에는 시장이 형성되고 국도가 통과되며 경부선도로가 지나면서 급속히 발달된 마을이다. -사직단(社稷壇) : 옛날 조선조 때 토신과 곡신을 위하여 제향을 올리던 제단. 지금의 남산위에 있었으며, 토신과 곡신을 제사하였음은 국가의 번영과 왕실의 안녕을 기원한 것으로 군수가 주제하였다. 사직단은 일본에 의하여 헐어 없어지고 그 자리에 일인들의 신사가 세어졌다가 해방 후에는 용주정이 세워졌다. -온양 나드리 : 천안에서 온양으로 가는 길목을 말한다. 이 길을 통하여 서산, 당진으로 통하였고 태안반도 일대로 갈 수 있었다. 조선왕조의 왕실들도 이 길을 통하여 온양에 행차하였다. 지금은 경부선철도에 가로막혀서 지하도가 설치된 뒤로는 옛 모습을 찾아 볼 수 없다. -잿백이(작은 잣백이) : 온양 나드리 지하도에서 사직동 시장으로 넘어가는 고개. 대흥동과 사직동의 경계가 된다. 재는 峙로 고개를 뜻하는 것이고, 배기는 마루턱을 말한다. 천안의 동서 관통로로 중요한 구실을 하고 있으며, 상점이 집중되어 있어서 상권의 중심지 역할을 하고 있다. -낙천관골(樂天館谷) : 천안극장 앞 광제의원 옆에 일제 때 낙천관이라는 요리집이 있었다. 천안에서는 가장 큰 술집으로 경향각지에 이름이 나 있었다. ▲영성동(寧城洞) 천안의 옛 이름을 따서 만든 동명(洞名)이다. -영성교(寧城橋) : 영성동에서 삼거리로 통하는 다리. -세거리 : 영성교 옆에 있던 마을로 세 갈래 길이 있었다. -옥(獄)거리 : 옥터(54번지)가 있었던 마을. -서낭나무 : 세거리에 있던 서낭나무로 수백년 된 느티나무인데 홍씨(洪氏)가 그 나무를 안에 넣고 집을 지었다가 큰 해를 입었다 함.
-
[기획특집] 천안의 지명유래 ㉙[천안신문] 본보는 지난 151호부터 천안 각 읍면동의 지명유래에 대한 연재를 진행중이다. 천안이라는 지명에 대한 기록은 고려 태조 13년인 930년 8월 8일 기해 일에 고려태조가 대록에 내려와 동서도솔과 탕정의 일부와 사산의 일부와 대록의 일부를 병합하여 천안이라 하고 도독부를 둔데서 유래한다. 대록은 지금의 목천이요, 사산은 직산이며, 동도솔과 서도솔은 천안의 일부이며, 탕정은 온양 탕정의 일부다. 각 지역에 내려오는 천안의 지명은 1988년부터 이원표 선생이 동부 6개 면을, 1987년도부터 오세창 선생이 천안시를 조사해 1960년경 한글학회에서 발행된 ‘한국 지명총람’을 참고로 가감 수정해 동부 6개면은 1990년 천안군에서 ‘역사의 현장’으로 출간되었으며, 천안시는 1989년 천안문화원에서 ‘천안의 지명’으로 출간하였다. 그 후 1999년 천안시 문화원에서 시와 군에서 발행된 것을 합하여 ‘천안의 땅 이름이야기’로 출간했다. 이번 연재는 이를 바탕으로 했으며, 일부 내용은 천안 향토사학자 김종식 선생이 재조사를 통해 가감하였음을 밝혀둔다. <편집자 주> ▲장송리(長松里) 목천군 일동면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으로 하장리, 상장리, 신대리, 산북리, 송정리, 이동면의 철계리 일부가 병합하여 장보의 장자와 송자를 따서 장송리라 하고 동면에 편입되었다. -무너미 : 장송리에서 송현리로 넘어가는 고개. 고개가 낮아서 장송리의 물이 송연리로 넘어간다 하여 무너미라 하였는데, 1946년 이후로 장송리의 물을 이 고개를 넘겨 송연리 들에서 농사를 지었다. -청용골 : (전설) 청용골에 청용사란 큰 절이 있어서 밥 짓는 쌀을 씻으면 쌀뜨물이 매작까지 흘러갔으며, 이 절이 이사하여 안성 청룡사가 되었다고 한다. -시제 : 장비 북쪽에 있는 마을. 옛날에 사직(社稷)터가 있었다고 한다. -거범골 : 거범고개 밑의 마을. -거범고개 : 검엄고개라고도 하는데, 시누이골에서 문백면 계산리로 넘어가는 고개. 국사봉 밑이 되며, 전에는 이 고개에서 범이 많이 나타났다고 한다. -갈매지 : 장비 뒤에 있는 골. 갈마음수형의 명당이 있다고 한다. -비렁뱅이들 : 들판에 물이 없어서 모를 못 심어 이 들에서 농사를 짓는 사람은 비렁뱅이가 된다고 한다. -안장수 : 국사봉 밑에 있는 고랑이다. -안적골 : 승적골 옆에 있는 고랑. 골이 아늑하여 피난곳이라고 전하여온다. -승적골 : 국사봉 아래에 있는 고랑. 골이 깊고 아늑하여 피난터라고 불리어 온다. -설렁바위 : 선랑암이라고도 하는데, 초석골 앞 냇가에 있으며 내가 패여 웅덩이가 있어서 이 바위에 오르면 마음이 늘 설렁설렁 하므로 설렁바위 또는 선랑암이라 한다. (전설) 예전에 어떤 선랑(仙郞)이 대홍수 때 이 바위를 타고 진천에서 오다가 이곳에 버리고 갔다고 목천읍지에 기록되어 있다. -산딧골 : 산대, 산디, 산북이라고도 하는데 장비 북쪽에 있는 마을이다. -산우물 : 소석골 앞에 있는 우물. -새터말 : 장비앞 새로 생긴 마을. -잔미 : 국사봉 밑 장비 뒤에 있는 산. -왜가리산 : 장비 앞산, 왜가리가 살았는데 50년 전에 가고 아니온다고 한다. -조가삼 : 물조개가 많이 살았다고 전하여 온다. -하장 : 장비 아래쪽이 되는 곳. -초석골(草席, 礎石) : 송정이라고도 하며 장비 남쪽에 있는 마을. 안동김씨 중시조가 이곳에 와 살면서 풀로 자리를 많이 짰다고 한다. 또는 초석을 많이 쌓았다는 설도 있다. 마을 옆에 큰 소나무가 정자처럼 서 있었다. ▶안동 김도응공 송공비(安東 金道應公 頌功碑) 동면 장송리 초석골에 있는 안동김씨 김도응 선정비는 장송리 2구 초석골에 세워졌으며, 사각기단에 오석을 하였고 1m 정도 되는 안동김씨 김도응의 공적을 기리는 선정비이다. 현재 한마음 고등학교 정문을 지나 백 여보 정도 가면 마을에서 막다른 길 맞은편에 있는 이 선정비는 안동김씨 김도응의 선정비로 마을의 어린이들이 동면의 소재지 천둥국민학교로 배우러 다니며 고생을 하는 것이 한스러워 자신의 전답을 내 놓아 분교를 설립했고, 또한 분교에서 국민학교로 승격하는데도 지대한 공이 있어서 마을의 청년회와 학부형들이 이를 영원토록 귀감 하고자 이 비를 세웠다. 이 학교는 폐교되어 몇 해간 비어 있다가 대안학교인 한마음 고등학교로 변경되어 현재 인문계 특성화 학교로 지정되어 있다. 비문 전면에 안동 김도응공 송공비(安東 金道應公 頌功碑)라 각자 되어있고, 뒷면에는 안동김씨 종친회의 후원을 얻도록 추진함. 김도응공의 행적 본교가 분교에서 국민학교로 승격할 때까지 추진위원 한일부, 이천영, 이기표 외 학부형 일동. 서기 1977년 8월 21일 입비 추진위원회에서 건립이라 되어있다. -장비 : 장보라고도 하며 국사봉 밑 장산기슭에 있는 마을. 원래 진미라 하던 것을 장비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마을을 기리 보존한다는 뜻에서 장보(長保)라 한다. -화암동 : 꽃 바위가 있었는데 현재는 없다. -쌍보들 : 보가 두 개 있는데, 이 물을 대 농사를 짓는 들이다. -병목안 : 병의목 같이 입구는 좁고 위는 넓다. ▲수남리(壽南里) 목천군 이동면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으로 사방리, 용촌, 차여리, 수암리, 매작리, 성리, 철계리 일부를 병합하여 수남리라 하고 동면에 편입되었다. -수남리 : 차여, 수루너미라고 하는데 조씨가 부자로 살아 수레를 타고 다니었다고도 하고 수리봉 넘어 라는 말에서 온 것이라고도 한다. -나무제 : 구암 부락 중간에 큰 둥구나무(느티나무)가 있는데 마을 주민들이 이 나무에 제를 올린다. 칠월칠석날 돼지머리를 놓고 삼색실과를 놓으며, 예전에는 추석에 지냈는데 지금은 칠석으로 날을 바꾸었다. 대동계장이 제관이 되며, 생기 복덕을 보아 닫는 사람을 주당으로 삼고 동네 사람들은 풍장을 친다. 제사를 지낸 부락민이 음식을 가지고 칠석놀이 겸 하루를 즐긴다. -구암 : 거북바위라고도 하는데 거북이 같이 생겼으며, 느티나무 있는 곳 옆집 울안 뒤 곁에 있다. (전설) 국사봉 장수와 월성산 장수가 힘자랑을 했다. 국사봉 장수는 돌을 월성산으로 던지고 월성산 장수는 국사봉으로 던졌는데, 그 때 국사봉 장수가 던진 돌이 월사봉으로 날아가다가 이곳에 떨어지자 국사봉의 돌이다 하며 다투었다 한다. 그 전에서 애기돌이 몇 개 옆에 있었는데 없어졌다고 전한다. -구수동 : 수리남이 앞에 있는 마을. 옛날부터 황화구수에 결자무우, 곧 황고청이 구암 구수동에서 농사짓는 사람은 근심이 없다하며 피난 곳이라 한다. -사방리(舍方里) : 사방골이라고도 하며 수리남미 남쪽에 있는 마을. 사방에 높은 산이 둘러 있어서 마치 방안과 같다. -상하터 : 철계(鐵溪)라고도 하며 철을 생산하여 다시 다른 부품을 생산하던 곳이다. -수암(水岩) : 수리나미 동쪽에 있는 마을. 마을 옆에 큰 바위가 있는데 그 위로 물이 흘러간다고 한다. -재말(城里) : 성리라고도 하는데 거북바위 동쪽에 있는 마을 고개 밑이 된다. -용샘이골 : 제비살이에 땀띠 샘이 있는데, 목천의 원님이 몇 번 씩 와서 물을 마시고 갔다고 전한다. -진터들 : 예전에 군대가 이곳에 진을 쳤었다고 전한다. -스무들 : 이 들이 물이 풍부하여 이곳의 들은 흉, 풍 없이 농사를 잘 지었다 한다. -사기점골 : 사기점이 있으며 흔적이 남아있다. -범터골 : 철로 물건을 생산하기 위하여 틀을 만들고 쇳물을 부어 주물로 된 물건을 생산하는데, 흙으로 만드는 틀을 생산하던 곳이다. (전설) 서림산 장수와 국수봉 장수가 돌 싸움을 하였는데 국수봉 장수가 던진 돌은 차여리에 떨어졌고, 서림산 장수가 던진 돌은 산 뒤에 떨어져 서림산 장수가 이겼다고 한다. ▲행암리(杏岩里) 목천군 일동면의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으로 토복리, 하행리, 상행리, 서지동을 통합하여 살구나무와 바위가 많아서 행암리라 하고 동면에 편입되었다. -행암바위 : 낙수암 위쪽에 있는 바위. 넙적하게 부채같이 서있는데 앞면에 행암(杏岩)이란 두 글자를 새겨 놓았다. 행암바위는 비보사상에서 생긴 듯하며, 7개의 바위에 새겨 있다고 전한다. 현재까지 5개의 바위가 발견되었으며, 7개의 바위가 발견되면 동네가 전쟁이 나서 없어진다고 구전한다. 또한 낙수암이라고 글이 새겨진 곳에는 느티나무 7그루가 북두칠성 모양으로 심어져 있는데, 이 또한 비보사상에서 동네를 보호하려는 생각에 심어진 듯하다. -행암바위1 : 낙수암 바위에서 약 500m 정도 거리 논두렁에 있는데, 옛날 이곳이 길이었다고 한다. 송시열 선생의 글로 추정되며 높이 약 2m, 폭이 약 5m 정도로 상당히 큰 바위에 암각되어 있다. 글자의 크기는 약 50cm 정도로 상당히 큰 글씨이다. -행암바위2 : 낙수암 바위에서 약 2km 정도 거리의 야산 밑에, 윗말로 가는 다리 옆에 있다. 동네에서 다리를 놓을 적에 축대를 쌓으면서 묻혀 있다. -행암바위3 : 낙수암 바위에서 약 300m 정도 거리에 있었는데, 부채 모양의 바위에 ‘행암’이라 각자되어 있다. 글은 20cm 정도 된다. 동네에서는 부채바위라 부른다. -행암바위4 : 낙수암 바로 옆에 있었는데 오래전 여름장마에 돌다리를 건너던 마을주민이 떠내려가 죽어 동네 사람들이 이 바위를 부쉈다고 한다. -행암바위5 : 낙수암글씨 바로 옆 행암거사 주석영의 5언 절구 시가 새겨있는데, 이곳에 사는 주석영이 시를 지어 암각하여 놓았다. 우암의 글 옆에다 낙서를 해놓았다고 목천 유림들이 주석영의 이름을 징으로 조아 글씨를 언뜻 알기가 어렵다. 행암거사의 행암을 포함하는 이도 있다. ▶낙수암 주석영의 시 동면 행암리는 물이 좋고 경치가 아름다워 우암 송시열 선생이 명나라 임금들의 사당인 만동묘터를 구하러 다니던 중에 제자들과 이곳을 둘러보고는 ‘만인활인지지(萬人活人之地)이나 물이 모자라서 많은 사람이 살 곳은 못된다’ 하고는 괴산의 화양리에 정했다 전하며, 그때 남긴 글씨 낙수암(洛水岩) 석자는 300여년이 지난 지금도 선명히 전한다. 이 마을에 사는 주석영이라는 선비가 글을 지어 낙수암이라는 글씨 옆에다 오언시를 각자하였다. 일설에는 이 글을 새긴 후로 목천의 선비들로부터 감히 우암 선생 글 옆에 낙서를 했다하여 죽는 날까지 혼이 났다는 설이 구전하기도 한다. 현재 이 글이 새겨진 바위에 큰 느티나무가 자라면서 바위가 쪼개져 있으며, 1998년경에 ‘낙수암’이란 글이 새겨진 곳에서 어느 몰지각한 인사가 불을 피우고 고기를 구워먹어 낙수암 세 글자 중 가운데 ‘수(水)’자가 훼손됐다. 천안 고적답사회 회원들과 답사과정에서 발견해 관계당국에 신고를 했는데 문화재가 아니어서 별다른 조치가 없었다. 암간 류낙수(岩間 流落水) 바위틈에 흘러 떨어지는 물은 행하 자성촌(杏下 自成村) 살구꽃 아래에 절로 마을을 이루었네 지령 균우장(地靈 龜又仗) 대지는 영묘하여 갈라져서 호위하니 지시 별건곤(知是 別乾坤) 알겠노라! 이곳이 별천지임을 행암리의 빼어난 자연경관을 노래한 시로 바위와 물과 살구꽃과 어우러지고, 빼어난 산세와 조화를 이루고 있는 행암마을을 별천지라 자화자찬한 시이다. -행암바위6 : 행암바위 다리를 건너기 전 논에 묻혀 있었다 한다. 사람 두질 정도의 바위에 ‘행암’이라 새겨져 있는데, 논 가운데 있으므로 농사짓는데 불편하여 바위 밑을 파고 묻어버렸다 한다. -행암저수지 : 사루개 저수지라고도 하며 행암리에 있는데 저수지 공사 당시 집터 같은 돌무더기에서 동전이 몇 말 나왔다고 한다. 이곳의 지명으로 보아 동전을 이곳에서 만들었을 것 같다. -토복리 : 위토골이라고 하는데, 쇠나 철을 불리는 일종의 가마 이름이다. 사루개 서쪽에 있다. 토복리, 토복이, 토둑의 이름이 있다. -윗사루개 : 사루개 위쪽에 있는 마을. -아래사루개 : 사루개 아래쪽에 있는 마을. -쇠죽골 : 서지동(西芝洞)이라고도 하며 사루개 동남쪽의 마을. 철과 관련 있는 지명. -삼성봉(三聖峯) : 사루개 남쪽에 있는 봉우리. -장승백이 : 행암리 입구에 돌로 된 장승이 두 개 세워져 있다. -바타니고개 : 사루개에서 덕성리의 바타니로 넘어가는 고개. -도까말고개 : 사루개에서 병천면 도까말로 넘어가는 고개. -말똥봉 : 가무정이 아래에 있는 봉우리로 말똥모양을 하고 있어 이곳이 명당이라 한다. -가무정이 : 광덕리의 가무정이. -낙수암 : 사루개 입구에 있는 바위. 큰 바위가 누워 있는 사이에 개울물이 폭포처럼 떨어지고 그 앞에 큰 느티나무가 서 있는데, 서쪽 바위면에 새긴 ‘낙수암(落水岩)’ 석자는 우암 송시열의 글씨라 구전한다. 그 옆에 오언절구의 시와 행암거사(杏岩居士) 주석영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양목골 : 약물이 나와 많은 사람이 먹었다 한다. ▲화덕리(花德里) 목천군 이동면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으로 화청리, 중리, 도명리, 상덕대리, 하덕대리를 통합하여 화청리의 화자와 상하덕리의 덕자를 따서 화덕리라 하고 동면에 편입되었다. -화청(花晴) : 화덕리에서 가장 큰 마을이며, 모양이 매화낙지 형이라고 한다. -중리(中里) : 도명골과 안터 중간에 있는 마을. 중리에 있는 저수지 1944년에 시설하였다고 한다. -풍계골 : 물품은 풍계가 설치되어 있었다고 한다. -위 덕티 : 상덕(上德)이라고도 하며 덕티 위쪽이 되는 마을. -안기(安基) : 안터라고도 하며 도명골 서북쪽에 있는 마을 산 안쪽이 된다. -아래 덕티 : 하덕(下德)이라고도 하며 덕티 아래쪽 마을. -덕티 : 덕대(德垈)라고도 하며 고개치(峙) 또는 지(池) 발음이 티로 변화되었다. 화청남쪽에 있는 마을 앞에 큰 못이 있었으므로 덕지(德池)라 하던 것이 변하여 덕대라 하였다고 한다. -탑골 : 전에 이골에 탑이 있었는데 어디로 갔는지 없어지고 말았다. -도명골(道明) : 도명리라고도 불렀으며 화청리 동쪽에 있다. 마을이 아늑하게 생겼으므로 두멍골이라 하던 것이 변하여 도명골이 되었다고 한다. 이곳에서 금동불상이 출토되었고 옛 집터가 많다고 한다. -후잉이 : 마을 뒤에 있어 후잉이라 했다 한다. -석물백이 : 석물이 있는 묘가 있었는데 없어졌다. ▲덕성리(德星里) 목천군의 일등면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으로 배성리, 덕현리, 신리가 통합하여 덕현리의 덕자와 배성리의 성자를 따서 덕성리라 하고 동면에 편입되었다. -질골고개 : 배타니에서 병천면 관성리로 넘어가는 고개. 산이 높고 골이 길다. -장교다리고개 : 장교티(將校峙), 장교현(將校峴)이라고도 하는데, 벌터에서 충청북도 진천군 금성으로 넘어가는 고개. 세조 10년 2월에 보은 속리산에 거동할 때 진천 길상산에서 충청도 군사 4만 여명을 모아 가지고 큰 훈련을 하는데, 목천 서쪽에 있는 각 고을의 장교들이 군사를 거느리고 이 고개에서 쉬어 갔다 한다. -장고개 : 바타니에서 충청북도 진천군 금성으로 넘어가는 고개. 바티니 사람들이 진천장을 보기 위해 이 고개를 다녔다. -단지박골 : 골의 모양이 단지같이 생겼다 한다. -잔덕재 : 덕현(德峴)이라고도 하며 덕유산 중턱에 있는데, 지금은 마을이 없어졌다고 한다. -쇳대배기 : 옛날에 이곳에 쇳대가 박혀 있었다고 하는데 벌터 아래들에 있다. -벌터 : 신리(新里) 벌판에 있는 마을. 잔덕재 사람들이 이곳에 와서 새로 마을을 이룩하였다고 한다. -배타니 : 배성(排星)이라고도 하는데 덕성리에 있는 마을. 높은 산이 사방에 둘러 있으므로 박달안이라 하던 것이 변하여 바타리가 되고 또 배성이 되었다고 한다. -매봉재 : 벌티 서쪽에 있는 산. -머귀나무골 : 장교다리 입구 쪽에 있는 골. 머구나무가 있다. -꽃봉 : 박달 아래 있는 봉우리. -박달 : 바타니 동쪽에 있는 높은 산. -동고리봉 : 벌터 북쪽에 있는 산. 산 모양이 동구리 같이 생겼다고 한다. -꽃봉재 : 채알 쳐 놓은 것 같이 생겼다고 한다. -말 무덤 : 말이 꽃봉재를 보고 달리다 다리가 부러져 죽어 묻은 말 무덤이라 전한다. -장수가 물먹던 자리 : 무릎자국 같은 것이 바위에 파여져 있는데, 장수가 물먹던 자리라 전한다. -장군바위 : 돌을 던져 올려놓으면 아들을 낳는다고 하여 옛 여인들이 위하던 곳이다. -안티모니 광산 : 안티모니 광산이 있었는데 현재는 폐광되었다. -자연동굴 : 안산에 있는데 현재는 앞이 메워져 사람들이 들어갈 수 없다. -덕유산 산제당 : 산제당이 있었는데 새마을 사업으로 철거하여 없어졌다. -범박골 : 이곳에서 주물철을 생산하는 틀을 생산하였다.
-
[기획특집] 천안의 지명유래 ㉘[천안신문] 본보는 지난 151호부터 천안 각 읍면동의 지명유래에 대한 연재를 진행중이다. 천안이라는 지명에 대한 기록은 고려 태조 13년인 930년 8월 8일 기해 일에 고려태조가 대록에 내려와 동서도솔과 탕정의 일부와 사산의 일부와 대록의 일부를 병합하여 천안이라 하고 도독부를 둔데서 유래한다. 대록은 지금의 목천이요, 사산은 직산이며, 동도솔과 서도솔은 천안의 일부이며, 탕정은 온양 탕정의 일부다. 각 지역에 내려오는 천안의 지명은 1988년부터 이원표 선생이 동부 6개 면을, 1987년도부터 오세창 선생이 천안시를 조사해 1960년경 한글학회에서 발행된 ‘한국 지명총람’을 참고로 가감 수정해 동부 6개면은 1990년 천안군에서 ‘역사의 현장’으로 출간되었으며, 천안시는 1989년 천안문화원에서 ‘천안의 지명’으로 출간하였다. 그 후 1999년 천안시 문화원에서 시와 군에서 발행된 것을 합하여 ‘천안의 땅 이름이야기’로 출간했다. 이번 연재는 이를 바탕으로 했으며, 일부 내용은 천안 향토사학자 김종식 선생이 재조사를 통해 가감하였음을 밝혀둔다. <편집자 주> ▣동면(東面) 목천군 동쪽으로 제일 멀리 있다고 하여 일원동면(一遠東面), 또는 일동면이던 반계(磻溪), 화산(花山), 능암(能岩), 사동(寺洞), 광덕(廣德), 두촌(斗村), 토복(土伏), 하행(下杏), 서지(西芝), 구룡(九龍), 상덕(尙德), 황사(黃寺), 삽교(揷橋), 동촌(東村), 모산(毛山), 대동(垈洞), 배성(排星), 덕현(德峴), 신리(新里), 일운(逸云), 소사봉(小沙峯), 초봉(抄峯), 구계(九溪),하장(下長), 상장(上長), 신대(新垈), 산북(山北), 송정(松亭)리의 28리와 목천현에서 두번째로 멀다는 이원동면(二遠東面)의 만화(晩華), 용두(龍頭), 신촌(新村), 산서(山西), 수입(水入), 보평(寶坪), 구도(求道), 구암(龜岩), 송정(松亭), 한계(閑溪), 연평(連坪), 산직(山直), 사방(舍方), 용촌(龍村), 차여(車餘), 수암(水岩), 매작(梅勺), 성리(城里), 철계(鐵溪), 화청(花淸), 중리(中里), 도명(道明), 상덕대(上德垈), 하덕대(下德垈) 24리가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으로 일원동면 이원동면이 병합하여 동면이라 하고, 천안군에 편입되어 화계, 광덕,행암, 동산, 덕성, 죽계, 장송, 용두, 구도, 송연, 수남, 화덕의 12개리로 개편되었다. 1963년 1월 1일 천안읍과 환성면이 통합하여 천안시로 승격되므로 천원군 동면이 되었었고, 1973년 7월 1일 대통령령 제6542호로 용두리를 병천면으로 넘겨주어 11개리가 되었다. 북쪽은 충청북도 진천군 백곡면, 동쪽은 문백면, 남쪽은 병천면과 충청북도 오창면, 서쪽은 병천면에 접하고 있으며 충청남북도계에 걸쳐있는 면이다. ▲구도리(求道里) 목천군 이원동면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으로 보평리, 구도리, 구암리를 병합하여 구도리라 하고 동면에 편입되었다. -구도리 : 구두실이라고도 하며, 연산군 때 문장 절의로 유명한 탁영(濯纓) 김일손(金馹孫)이 그의 처가인 이곳에 살면서 학문을 익혔고, 묘가 이곳에 있는데 찾지 못하고 있다. 김일손의 장인인 김미손(金尾孫)이 자식들을 학문에 힘쓰라고 구도실이라 하였다고 한다. -두무실고개 : 구두실에서 충청북도 청원군 오창면 두능리 두무실로 넘어가는 고개. -돌다리 : 석교. 구암리라고도 하는데 구두실 북쪽에 있는 마을. 앞 내에 돌다리를 놓고 다녔는데 대로(大路)였다 하며 거북바위가 냇가에 있었다. -탁영묘 : 김일손묘가 구두실 부근 동쪽 산 20번지에 있었다고 하는데, 탁영선생 지묘라는 비를 목천 현감으로 있던 박순인이 세웠다고 한다. 왜정 초 사방 공사할 때 계곡 축대 쌓을 때 없어졌다 하며 묘를 아는 사람은 현재 없다. -금정 : 구두실에 있는 우물. 연산군 때 학자 탁영 김일손이 쓰던 우물이라 하며 산사태로 메워지기는 했으나 지금도 남아 있다. -자라바위 : 돌다리 입구 왼쪽 산 끝에 있는데 바위 모양이 거북이와 같이 생겼다. -현고수 : 구두실 앞에 큰 은행나무가 있었는데 해방 후에 없어졌으며, 그 은행나무가 연산군 때 학자 탁영 김일손이 과거에 합격하여 이 나무에 북을 매달고 잔치를 하였다고 한다. -탑원고개 : 탑원에서 병천면으로 넘어가는 고개. -탑원 : 보평 앞 내(川)건너에 있었는데 조선조 때 원을 설치하여 여행하는 길손들의 편의를 도와주던 곳이며 탑이 있었다 한다. -연적봉 : 보평 동북쪽에 있는 산. 그 밑에 수석이 아름다우며 국도에서 가깝다. -보평 : 봇돌 보평리라고도 하는데 구두실 서쪽에 있는 마을. 앞들에 보가 있어서 농사짓기가 좋다고 한다. 동학난 때 동면의 동학 접주 한유길(韓有吉)이 이곳에서 동네 사람들에게 맞아 죽었다고 한다. -방말고개 : 방촌현이라고도 하며 구두실에서 진천 방말로 넘어가는 고개. -배시랭이 : 배씨가 많이 살았다고 한다. -소 잡아먹던 골 : 구두실 동쪽에 있는데 진천 사람들이 몰래 이곳에 와서 밀도살 하였다고 하며, 음침하고 후미져서 일본 경찰들이 몰랐다고 한다. -백정골 : 백제 때 서림산 산성 병사들이 이 곳에 주둔하고 있었다고 한다. ▲화계리(花溪里) 목천군 일동면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반계리, 화산리, 능암리 일부가 병합되어 화산리의 화자와 반계리의 계자를 따서 화계리하고 동면에 편입되었다. -노제 : 번개에서 지내는데 정월 십사일 저녁 열두시에 지낸다. 생기 복덕을 보아 닫는 사람으로 유사, 축관, 불대쟁이 세 사람이 지낸다. 비용은 부락 재정에서 쓰고 돼지머리 삼색실과를 놓으며 옛부터 지내왔다. 중간에 지내지 않은 일이 있었는데 부락에 불상사가 자주 생겨 다시 지내게 되었다고 한다. -반개 : 반계→반계리. 냉천→찬우물이라고도 하며 화계리에서 큰 마을 가운데 찬 우물이 있으므로 찬 우물 또는 냉천이라 하였다. 우암 송시열이 반계 이윤(伊尹)의 뜻을 따서 이곳에 사는 윤씨를 위하여 반계로 고쳐주었다 한다. -버들개 : 유천, 유포라고도 하며 화산리와 광덕리에 걸쳐 있는 마을. 앞 냇가에 버들이 많이 있었다. -뒷골 : 번개 뒤에 있는 골. 바위에 목포를 이루고 있는데, 그 옆에 사람이 대여섯 명 앉을 만한 바위 옆면에 시를 새겼다. 반계 윤취갑(磻溪 尹就甲), 봉암 채지홍(鳳岩 蔡之洪)이 주고받은 시가 각자되어 있었는데 1995년경에 김종식 선생이 발굴해 탁본하였다. 2010년경 이곳이 개발되면서 산 주인이 밭을 만들며 없애버려 몇 백 년의 유적이 무지함으로 없어졌다. ▶봉암 채지홍, 반계 윤취갑 시석 동면 화계리 뒷골 물탕바위에 새겨진 두 편의 한시는 눈발이 날리는 추운 겨울날 여러 번의 답사 끝에 뒷골의 글씨 바위를 물었는데, 김치를 담그다 말고 맨발에 슬리퍼를 신고 나와 안내 해준 이름 모를 화계리 아주머니 덕분에 김종식 선생이 찾아낸 것이다. 이 고장의 선비인 봉암 채지홍과 반계 윤취갑 두 선비의 글로서, 이곳의 경치가 좋아 여러 선비들이 모여 시를 짓고 글공부에 정진하며 풍류를 즐겼다 한다. ①봉암 채지홍의 시 우유예법지(優游禮法地): 유유히 땅의 이치를 정히 본받아 비폭수형회(飛瀑遂瀠洄): 날 듯 지는 폭포수 돌아 흐르네 자유연원대(自有淵源大): 본래 큰 연원이 있어 용용일야래(溶溶日夜來): 질펀하게 밤낮으로 쉬지 않네 승정 재 경신 3월 일 봉암선생영(崇禎 再 庚申三月日 鳳岩先生呤) -채지홍(숙종 9년 1683~영조 17년 1741) : 자는 군범(君範)이고 호는 봉암(鳳岩) 또는 삼환재(三患齋)이다. 본관은 인천이다. 첨지중추부사 영용(領用)의 아들이며 부여현감, 형조좌랑, 공홍도 도사를 지냈다. ②반계 윤취갑의 시 창암흘입하(倉岩吃立下): 우뚝 솟은 푸른 암벽 아래 필피폭연회(泌彼瀑沿洄): 흐르는 저 폭포 돌아 흐르네 차일반유락(此日攀遊樂): 이 날 즐거이 노니는데 춘풍장구래(春風杖屨來): 봄바람은 발자국 따라 불어오네 반계거사읊다(磻溪居士 呤) -윤취갑(1625년~) : 1622년 진사를 지냈으며 호는 반계(磻溪)이고 취부(醉夫) 결(潔)의 종증손(從曾孫)이다. 일찍이 사마시에 올랐으며 효성이 지극하였다. 우암 송시열(尤岩 宋時烈)의 제자이고 서실을 반계에 세워 후진을 양성하였으며, 우암이 지나는 길에 기실기(記室記)를 지어주었다. 효행으로 벼슬이 직장(直長)에 천거되었다. -동덕이 : 동덕리라고도 하며 동덕봉 북쪽기슭에 있는 마을. -광터골고개 : 감절에서 병천면 광터골로 넘어가는 고개. -곰바위 : 감절 옆에 있는 바위. 모양이 곰이 엎드린 것 같이 생겼다. -감절 : 능암이라고 하며 화산 북쪽에 있다. 옛날에 감절사란 절이 있었다하며, 마을 옆에 곰바위가 있으므로 웅암리라 하다가 능암이라 하였다고 한다. (전설) 이곳에 큰 둥구나무가 있었는데, 어떤 사람의 꼬임으로 부락민이 이 나무를 베고 우연히 동네가 망했다고 한다. -가장골 : 가장리라고 하며, 화산 위쪽에 있다. 직장 이기장(李箕章)이 이곳에 살면서 이씨가 잘 자라라는 뜻에서 가장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강당터 : 사교당터, 서재터, 화산에 있던 강당터. 효종 때 학자 이극태(李克泰)가 사교당을 세우고 후진들을 가르쳤다고 하는데, 화재로 인하여 없어졌다고 한다. 현재 터만 남아있다. -목천 16의사 충의비 : 번개 입구 국도변에 세워져 있는데 1728년 영조 4년에 창의하여 의병을 일으켜, 적장 안후기의 목을 베고 반란군을 격퇴시킨 공으로 양무원종공신이 되었다. 학술원 원로회원인 최호진(崔虎鎭) 박사가 건립위원장이 되어 비를 세웠다. -화산(花山) : 화산리 아래 버들개 하유천 하유동이라고도 하는데, 버들개 아래쪽에 있는 마을. 뒷산의 모양이 꽃같이 생겼다고 한다. -장자터 : 윗골에 있는 부자 터. 영조 무신년(1728) 난을 일으켰던 안후기가 살았는데 아직도 그릇 조각이 남아 있다고 하며, 그의 선조 무덤에 망수석이 쓰러져 있다 한다. -윤선생추모비 : 화산 가운데 있는 시암 윤행의(尹行義) 추모비가 30여년 전에 세워졌다. -동면 면사무소터 : 동면 면사무소가 번개 입구에 있다가 옮겨갔다. -솟대배기 : 솟대배기라는 지명이 있는데, 언제 솟대를 세웠었는지 알 수가 없다. ▲광덕리(廣德里) 목천군 일동면의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으로 광덕리, 두촌, 능암리 일부를 병합하여 마을 뒤에 있는 광덕산의 이름을 따서 광덕리라 하고 동면에 편입되었다. (전설) 상유동에 청주 이 씨가 살게 된 내력은 전장자가 상유동인 절골에 살았는데, 청주 이씨의 중시조 이하성이라는 사람이 충청감사로 있어 이곳을 순시하게 되었다. 감사가 내를 건너다보니 쌀뜨물이 많이 내려오므로 사연을 물은즉, 전장자의 집에서 오늘 일을 하므로 일꾼의 밥을 짓느라 쌀뜨물이 내려오는 것이라 하였다. 감사가 한번 들려 보고자 하여 전장자의 집을 방문하게 되었는데, 동네 여인들이 큰 구경거리가 생겨 감사가 어떻게 생겼는지 보려고 돌담에 올라가 구경을 하다가 돌담이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구경하던 사람들은 모두 도망쳐 가는데 한 여인은 그대로 서 있는지라, 감사가 보고 대담한 여인이구나 생각하며 그 처녀의 신분을 물은즉 전장자의 대답이 자기의 여식이라고 하였다. 그 후 이 감사는 전장자의 사위가 되어 이곳에 낙향하여 살게 되었다 하며, 청주 이 씨의 주거지가 되었다 한다. 전장자는 전사례(全思禮)이고 외동딸이었으므로 청주 이 씨들이 외손봉사를 하고 있다 한다. -절골 : 사동, 상유천, 위버들개라도 하며, 버들개 위쪽에 있는 마을. 옛날에 광덕사가 있었다고 하며 청주이씨 본 지지이다. -선렁바위 : 상여바위, 덕암이라고도 하며 절골 위에 있는 바위모양이 상여와 같다. -분토동 : 분터골 가장 아래에 있는데, 선조 때 이심언(李審言)과 이심행(李審行)이 살았다. -부처골 : 골산 남쪽에 있는 골. 옛날 돌부처가 있었는데 그 앞 건너로 옮겼다. -방고개 : 밤고개라고도 하며 병천면 명성골로 넘어가는 고개. 밤나무가 많았다고 한다. -오랑캐고개 : 옛날에 오랑캐가 살았다고 한다. -두촌저수지 : 두어만이에 있는 저수지. 1957년에 만들어졌다고 한다. -두어만이 : 절고 서쪽너머에 있는 마을. 두촌이라고도 하며 산이 사방에 둘러 있는데, 백제 패망시 유민이 이만이나 이곳에 머물러 있었다고 한다. 또한 임진왜란 당시에도 많은 피난민이 피난하였다고 전한다. -광덕산 : 절골 뒤에 있는 산. 예전에 광덕사(廣德寺)가 있었다. -골산 : 골미, 꽃산, 화봉이라 하는데 절골 앞에 있는 산. 모양이 꽃과 같다고 한다. -강당산 : 순조 때 학자 가암 이규운(李奎運)이 산 아래에 강당을 짓고 후진을 가르쳤다. -병목쟁이 : 고랑이 병의 목처럼 생겼다. -가무정이 : 절골 뒤에 있는 산. 한재가 심할 때 이곳에서 기우제를 지냈으며, 봄에 화류놀이할 때 이곳에서 많이 놀았다 한다. -가정 : 중촌 아래 마을이었는데 학자 이명봉이 살았다고 한다. -방죽골 : 전장자 전사예가 이곳에 거주할 때 방죽을 파고 그 안에 섬을 만들고 그 위에 정자를 지었던 곳인데 지금은 터만 남아있다. -둔터 : 군대가 이곳에 주둔하여 있었다 한다. ▲송연리(松蓮里) 목천군 이동면의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으로 송정리, 연평리, 한계리, 산직리가 병합하여 송정리의 송자 연평리의 연자를 따서 송연리라 하고 동면에 편입되었다. -삼신재(三辛齊): 삼한리에 있는 옛집. 270여년 동안 세거하던 집을 학자 윤명현(尹明鉉)이 순조 21년(1821) 신사년에 중수하고, 또 그해 아들 태성(泰成)을 낳았는데 그것을 기념하기 위해 뜰 앞에 소나무를 심었다. 그 아들 태성이 부친의 뜻에 따라 당호와 자기 호를 삼신재라 하였다. 이 집은 명종 때 학자 취부(醉夫) 윤결(尹潔)이 을사사화에 화를 당하자 그의 아우 윤혼(尹混)이 이곳에 와서 터를 닦고 이집을 지었다고 하는데, 읍에서 가장 오래된 집이다. 산직리, 산직말, 수리골, 수익동, 주리동이라 하며, 수리봉 아래에 주막과 산직집이 있었다. -수리봉 : 파악골 동쪽에 있는 산. 수리같이 생겼다 한다. -파악산 : 삼한이 동북쪽에 있는 산. 그 밑에 직장(直章) 이기장(李箕章)의 묘가 있다. -파악골 : 파악동이라고도 하며 연평이라고도 하는데, 파악산 밑에 있는 마을. 연화 부수형의 명당이 있다고 하며, 마을 입구에 직장 이기장의 기적비가 세워져 있다. -삼한(三閑) : 삼안, 삼한리, 송정이라 하기도 하는데, 송연리에서 가장 큰 마을이며 서림산 안쪽에 있으므로 산안이라 하던 것이다. 명종 때 학자 취부 윤결이 을사사화에 화를 당하고, 그 아우 윤혼(尹混)이 이곳에서 화를 피해 살면서 삼안(三安)이라 고쳤다. 효종 때 유학자 우암 송시열이 산한(山閑), 운한(雲閑), 인한(人閑)의 곳이라 하여 삼한으로 고쳤다.(윤호가 우암의 제자였다.) -거북놀이 : 이 부락에서 거북놀이를 하고 있는데, 길라잡이 거북은 2인으로 구성하고 수수 잎과 용구 새를 사용하며 밖에다 종이를 바르고 그림을 그렸다. 여러 사람이 풍장을 치고 각각 집에 다니며 음식과 돈을 얻는데, 수입된 금액은 행사자인 청소년들의 기금으로 삼는다. -사기점골 : 사기조각이 흩어져 있으며 사기 굽던 흔적이 있다. -선바위 : 바위가 서 있는 것 같이 보인다. -대보름 : 줄다리기 할 때 전에는 동아줄을 틀어 사용하였는데 요즘은 밧줄로 대신하며 행사를 두 번 한다. 한 번의 행사는 남녀의 대항이고, 또 한 번은 아래뜸 위뜸으로 나누어 시합한다. 여자들이 이겨야 풍년이 든다하여 남자들이 무조건 져준다 한다. ▲동산리(東山里) 목천군 일동면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으로 구용리, 상덕리, 황사동, 삽고리, 동천, 모산리를 병합하여 동촌의 동자와 모산리의 산자를 따서 동산리라 하고 동면에 편입되었으며 면소재지이다. -노른절 : 황사동이라고도 하며 구정말 동쪽에 있는 마을. 산 모양이 구룡 농주형이라 한다. -구렁말 : 구룡리라고도 하며 천동초등학교가 있는 마을. 산 모양이 구룡농주형이라 한다. -모산(茅山, 毛山) : 진등 북쪽에 있는 마을. 띠가 많으므로 모산이라 하였다고 하며, 또한 못이 있어 못안이라 하던 것이 변하여 모산이 되었다고도 한다. -모골 : 모산 왼쪽에 있는 골짜기. 못이 있으므로 못골이라 하던 것이 변하여 모골이 되었다. -군량들 : 군량평, 군평, 동촌이라고도 하며 삽다리 북쪽에 있는 마을. 구리성의 병사들이 이곳의 식량으로 기근을 면하였다고 하며, 옛날에 군량을 쌓았던 곳이라 한다. -삽다리 : 삽교리라고도 하는데 노른절 동쪽에 있는 마을. 섶나무로 높은 다리가 있었다. -진등 : 삽다리 동북쪽에 있는 고개. 병천면과 진천면으로 통하는데 산등성이가 매우 길다. -청고개 : 모산에서 행암리로 넘어가는 고개. -장터거리 : 삽다리 앞에 있는 길. 예전에 장이 섰던 거리라 한다. -장터봉 : 삽다리 뒤에 있는 산. 장터거리 뒤에 있으므로 부르게 된 것 같다. -태봉 : 모산 청용쪽에 있는 산. 옛날에 임금의 태를 묻었다고 하는 설이 있다. -안대장골 : 대장간이 있어 철공일을 하던 곳. -원재 : 이곳에 길손의 편의를 위하여 원이 설치되어 행인의 도움을 주었다 한다. -마방주막 : 마방이 있어 말 타고 다니던 행인의 말을 재워주고 말죽을 먹여 주던 곳이며 행인의 숙박시설도 있었다. ▲죽계리(竹溪里) 목천군 일동면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으로 일운리, 대동, 소사봉리, 초봉리, 구계리를 병합하여 대동을 죽동이라 하여 죽자와 구계리의 계자를 따서 죽계리라 하고 동면에 편입되었다. -달바위 : 피란곳이라 하며, 지나가면 퉁퉁 울려 땅속이 빈곳이라고 전하여 온다. -구계리 : 오미기 남쪽에 있는 마을. -대골 : 대동, 죽동이라고도 하며 죽계리에서 가장 큰 마을. 마을 뒤에 대가 되어 있으며 철일을 하던 곳이다. -오미기 : 초봉리라고도 하며 댓골 서쪽에 있는 마을. 지형이 오목하고 뒷산이 뱁새 같다 하여 초봉(抄峯)이라 하였다 한다. -이능골 : 일운이라 하며 대골 동쪽골에 있는 마을. -영동골 : 영동골의 골살이라 하던 무덤이 이 골에 있어서 영동골이 되었다 한다. -지장리고개 : 대골에서 충청북도 진천읍 지장리로 넘어가는 고개. -풍세골 : 풍세에서 이장해온 무덤이 있다고 하여 풍세골이라 한다. -능아골 : 절이 있었는데 여승만이 있었다 한다.
-
[기획특집] 천안의 지명유래 ㉗[천안신문] 본보는 지난 151호부터 천안 각 읍면동의 지명유래에 대한 연재를 진행중이다. 천안이라는 지명에 대한 기록은 고려 태조 13년인 930년 8월 8일 기해 일에 고려태조가 대록에 내려와 동서도솔과 탕정의 일부와 사산의 일부와 대록의 일부를 병합하여 천안이라 하고 도독부를 둔데서 유래한다. 대록은 지금의 목천이요, 사산은 직산이며, 동도솔과 서도솔은 천안의 일부이며, 탕정은 온양 탕정의 일부다. 각 지역에 내려오는 천안의 지명은 1988년부터 이원표 선생이 동부 6개 면을, 1987년도부터 오세창 선생이 천안시를 조사해 1960년경 한글학회에서 발행된 ‘한국 지명총람’을 참고로 가감 수정해 동부 6개면은 1990년 천안군에서 ‘역사의 현장’으로 출간되었으며, 천안시는 1989년 천안문화원에서 ‘천안의 지명’으로 출간하였다. 그 후 1999년 천안시 문화원에서 시와 군에서 발행된 것을 합하여 ‘천안의 땅 이름이야기’로 출간했다. 이번 연재는 이를 바탕으로 했으며, 일부 내용은 천안 향토사학자 김종식 선생이 재조사를 통해 가감하였음을 밝혀둔다. <편집자 주> ▲매성리(梅城里) 목천군 근동면의 지역인데 1895년 지방행정 편제로 갈전면이 되고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으로 매당리, 작성리, 공심리, 명암리, 봉암리 각 일부를 병합하여 매당리의 매자와 작성리의 성자를 따서 매성리라 하여 갈전면 매성리에 편입되었다. 1942년 갈전면이 병천면으로 개칭되면서 병천면 매성리가 되었다. -봉암산 : 상여바위 뒤에 있는 산. 봉항리 봉암 앞의 산이 된다. 앞산의 바위가 봉황을 닮았다고 한다. 바위를 위하면 부자가 된다고 하여 동네 사람들이 위하던 바위이다. -매당리(梅堂) : 매성리에서 가장 큰 마을. 매화낙지형의 명당이 있다고 한다. 철의 생산지이다. -독점 : 상여바위 부근에 있는 골짜기. 예전에 옹기점이 있었다. -구억말(鵲城) : 작성이라고도 하며 작성산 밑에 있는 마을. 오래 전부터 있던 마을 같다. -교의틀봉 : 매당리 뒤에 있는 산. 산 모양이 교의 틀과 비슷하다. -공시미 : 공심리(公心里)라고도 하는데, 원적산 밑에 있는 마을. 마을이 원적산 밑에 있으므로 번뇌 잡념의 세계를 떠나 청정하고 공정한 마음으로 산다는 뜻에서 공심리, 공심이가 되었다 한다. 귀한분이 살았다고도 한다. -강당산 : 구억말 뒤에 있는 산. 예전에 강당이 있었다고 한다. -상여바위 : 공시미에서 봉항리 봉암으로 가는 중간 길가에 있는 큰 바위. 바위모양이 상여같이 생겼다. -정문거리 : 희여기 길가에 있는 이복장(李福長)과 이번(李蕃)의 2위(二位) 정문으로 인하여 생긴 지명이다. -원적골 : 공시미 서쪽에 있는 골. 예전에 원적사가 있었다. -새터말 : 구억말 동쪽에 새로 형성된 마을. -희여기 : 희역골. 백제 때 이곳에서 무술을 연마하고 기예를 닦았다고 전하여 온다. -매당골 고개 : 북면 매당골 가는 고개. -동경날 : 산날 생김이 칼날같이 생겼다. -절터안 : 예전에 절이 있었다고 하는데 펀펀한 돌에 말발자국 같이 생긴 자국이 몇 개 있다. 이것이 장수 말 발자국이라고 전해 온다. -선바위 : 바위가 서 있어서 선바위라고 한다. -맹맥이 골 : 산제비가 많이 살아 이런 이름이 생겼다. -두꺼비 혈 : 두꺼비 같이 생겨 좋은 터라 한다. -숭조단 : 수안 이씨의 숭조단이 있는데, 묘가 이북에 있기 때문에 이곳에 단을 모시고 제를 올린다. -시장터 : 구억 말에 있는데, 예전에 이곳에 시장이 섰다고 하여 마을 중간에 있다. -큰 어둔골 : 골이 응달이 지고 아늑하여 항상 어둡다. -우물제 : 매당에서 정월 보름 전날 길일을 택하여 생기 복덕을 보아 해당하는 사람으로 제관과 축관을 선정하여 지낸다. 떡, 포, 삼색실과를 제물로 먼저 물을 떠나 먹으면 재수가 있고, 행운이 그 가정에 찾아온다 하여 먼저 떠가려고 아우성이며, 언제부터 우물 제를 지내온 지는 아는 사람이 없다. 당일 샘 청소를 하고 황토를 펴며 금줄을 매고 부정을 금한다. 제관은 삼일 간 담배를 금하고 부정한 일을 삼가며 부락민도 당일에 한하여 부정한 일을 삼간다. 제 지내는 시간은 밤 10시경이다. ▲도원리(挑源里) 목천군 근동면 지역으로 처음에 도원(挑元)이라 하였는데 세마(洗馬) 김만중(金萬重)이 병자호란의 강화를 싫어하여 벼슬을 버리고 이곳에 와서 살면서 진나라 사람들이 도원에 가서 피난한 뜻에 따라 호를 도원(挑元)이라 하고 동네이름도 호를 따라 도원(挑源)으로 바꾸었다.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평기리, 도원리, 광기리, 덕신리, 가정리, 반계리, 명암리 일부를 병합하여 도원리라 하고 갈전면에 편입되었다. 1942년 갈전면이 병천면으로 개칭되므로 병천면 도원리가 되었다. -중 썩은 골 : (전설) 이곳에 사는 한 장수가 병풍바위 옆에 앉아 있는데 지나가던 중이 “우리 힘자랑 합시다. 누가 빠르고 쉽게 이 병풍바위를 오르는가?” 하고 내기를 하자는 것이었다. 만약에 지는 사람은 어떠한 벌도 달게 받기로 하고 먼저 중이 뛰어 오르는데 끝까지 오르지 못하고 떨어지고 말았다. 다음에 이곳 장수가 뛰어 오르는데 쉽게 뛰어 올랐다. 오르고 내려온 장수는 형편없는 중놈이 까분다고 하면서 등을 잡고 던져 이 골에 떨어져 죽었다. 그 후부터 이곳을 중 썩은 골이라 부른다고 한다. -노은정(老隱亭) : 검계가에 있는 정자. 큰 바위에 아담한 정자가 놓여 있고 그 아래는 냇물이 깊이 패여서 경치가 매우 아름답다. 숙종 때 학자 김상기(金相器)는 스물 네 차례 향시에 합격하여 시 장군이라는 칭호가 있었다. 이곳에 정자를 짓고 큰 바위에 ‘노은정’ 석자를 새겼으며, 벼슬에는 뜻이 없고 오르지 후학을 양성하며 노년을 보냈다. -광터골 : 광기(廣基). 광기리, 도원골 북쪽에 있는 마을. 옛날 구리성에 사람들이 살적 이곳에 관(官)을 두었으므로, 관터골이라 하던 것이 변하여 광터골 또는 광기가 되었다고 한다. -입바위 : 구암(口岩) 도원골 건너 미륵당 서쪽에 있는 바위. -칠성(七星)바위 : 입바위 아래에 있는데 큰 바위가 북두칠성 같이 놓여 있다. -수탁개울 : 노은정 왼쪽에 있는 골. 골의 물을 홈으로 흘러 내려오게 하여 사용하였다고 한다. -소반봉(小盤峯) : 울 바위 뒤쪽에 있는 봉우리 모양이 소반과 같다. -심방골 : 벌터 앞에 있는 골짜기. -섶골 : 번재울 남쪽에 있는 골. 반계(磻溪) 한응남(韓應南)의 묘가 있다. -삭성대(削成臺) : 노은정 아래에 있는 바위를 깎아서 대를 만든 듯한 바위가 냇가에 있는데, 우암 송시열이 삭성대 석자를 새겼다. 지금은 땅속에 묻혀 위치를 모른다. -벼루바위 : 벌 터 앞에 있는 큰 바위. 바위 모양이 벼루같이 생겼다고 한다. 장마에 없어졌다. -벌터 : 덕신(德新) 광터골 밖 벌판에 있는 마을. 인조 때 학자 이효범(李孝範)이 서당을 짓고 후진들을 가르쳤으며 마을 이름이 덕신이라 하였다고 한다. -번재울(磻溪) : 벌터 서북쪽 골에 있는 마을. 마을이 성처럼 둘러쌓여 있어서 높고 아늑하며, 선조 때 학자 한응기(韓應箕), 한응남(韓應南) 형제가 번재울에 살았는데, 살면서 호를 반계(磻溪)라 하였다. 그가 한응남이다. -백석탄(白石灘) : 도원골 입구 냇가에 있는 여울. 크고 흰 바위가 누워 있는데 그 바위에 백석탄 석자를 새겨 놓았다. 하천을 정비하는 과정에서 하천의 지류가 바뀌어 토사에 묻혀있다. 김종식 선생의 노력으로 1998년경에 도원팔경 조사 시에 병천면의 지원을 받아 하천을 정비하면서 20여년 만에 세상에 나오게 되었는데, 다시 토사에 묻혀있다. -봉래선경(蓬萊仙境) 글씨: 구암산 중턱에 있으며, 마을에서는 봉래선경(蓬萊仙境)이라는 글씨 바위라 부르는 바위가 있다. 대략 60cm에 90cm, 자폭은 10cm 정도로 상당히 큰 글씨로 강릉 김씨 도원 김만중이 썼다는 문중의 구전이 있다. 5m 정도의 큰 바위에 각자되어 있다. 김종식 선생이 도원팔경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여러 차례 답사하여 발굴되었다. -반계송남유허비 : 번재울 입구에 있으며 선조 때 반계(磻溪) 한응기(韓應箕), 송암(松庵) 한응남(韓應南) 형제의 사적을 적었다. -도원정(挑源亭) : 도원골 입구에 있는데 강릉 김씨 문중에서 세웠으며, 도원 김만중의 사적 및 경위가 기록되어 있다. -미륵당 : 칠성바위 아래 논가에 있는 미륵당. -면실 : 벌말, 평기(平基), 도원골 아래 벌판에 있는 마을. 숙종 때 학자 김일우(金一宇)가 처음 터를 잡아 살면서 실학에 힘쓰라는 뜻에서 면실(勉實)이라 하였다. 동학 때 접주 김고양(이 사람이 세상산 전투를 이끈 김복용이라는 설도 있고, 동경대전을 찍은 김은경이라는 설도 있다.)이 살았으며, 왜군들이 부락에 불을 놓아 전 부락이 소실되고 없었는데 새로 신축된 마을이라 한다. -도원동리비 : 도원골 입구에 있는 비. 작은 비에 도원동리 대명천하(挑源洞裡 大明天下)라 새겼고, 그 옆에 느티나무가 있으며 앞에 도원정이 있고 그 밑 냇가에 백석탄이라 새긴 흰 돌이 있다. 이 도원동리 비는 도원 김만중이 명나라가 망한 후 이곳에 들어와 살며 썼다고 한다.<강릉 김씨 한림공파 대동보> 나무가 크면서 부러진 것을 문중에서 2000년경에 새로 만들어 세웠다. 우리네 조상의 뼈아픈 역사의 흔적이 이곳에 아직 남아 있음이다. -노은정 : 가정이라고도 하며 노은정에 있는 마을. -도영암(倒影岩) : 삭성대 옆에 있는 바위. 바위가 비스듬히 서 있어 우암 송시열(宋時烈)이 도영암 석자를 새겼다고 한다. 장마에 유실되어 위치를 모른다. -강당터 : 번재울 뒤에 있는 강당 터. 한강(寒岡) 정구(鄭逑)가 처가인 한씨들의 인연으로 이곳에서 후진을 양성하였다. -다락동 : 누동(樓洞) 광터골 동쪽에 있는 골. -고무래 봉 : 입바위 북쪽에 있는 산. 모양이 고무래 같이 생겼다고 한다. -검계(儉溪) : 노은정 앞에 있는 내. 삭성대 도영암들이 있었다. -울바위 : 명암(鳴岩), 병풍바위라고도 한다. 도로 옆에 있는데 병풍처럼 생겼으며 이 곳에 석굴이 있다고 한다. -심방동 : 수안 이씨들이 살았으며 묘들이 있다. -거미중터 : 생김이 거미와 같다고 한다. -둔터고개 : 군이 주둔하였던 고개라고 전해온다. -범박골 : 주물로 물건을 만들기 위하여 틀을 질흙으로 만들어 철일을 하던 곳. 사정대는 안동 김씨 김옥(金鋈)이 활을 쏘고 무술을 연마하던 곳이라 한다. -명암(鳴岩) : 울 바위 옆에 판서 유명홍(兪命弘) 대감이 살았다. ▲병천리(並川里) 목천군 근동면 지역인데 1895년 지방행정 편제 때 갈전면이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으로 일병천리, 이병천리, 일한천리, 신촌, 서원리 일부를 병합하여 병천리라 하고 갈전면에 편입되었다. 1942년 갈전면이 병천면으로 명칭이 바뀌어 병천면 병천리가 되었다. -개목이 : 구항(拘項), 신촌(新村)이라고도 하며 개목고개 입구에 있는 마을. 조선조에 질그릇과 사기점이 있었다. -개목고개 : 서원말에서 북면 매송리로 넘어가는 고개. (전설) 옛날 어떤 사람이 봄에 자기 집 개를 데리고 술에 취해 이 고개를 넘게 되었는데, 마루턱에서 쉬다가 그만 잠이 들었다. 그 때 마침 산불이 나서 이 사람이 타 죽게 되었는데도 잠에서 깰 줄을 모르고 곤히 자므로, 따라 다니던 개가 급히 그 아래 냇가에 가서 몸을 냇물에 적셔 불 위를 뒹굴기를 수 없이 계속해 불을 끄고 주인을 살렸으나 개는 죽고 말았다고 한다. 주인이 잠에서 깨어 일어나 보니 옆에는 온통 재로 변하여 있고, 자기가 살게 된 것은 개의 도움인 것을 깨닫고 이 후로는 술을 먹지 않았다고 한다. 미물인 개가 주인을 위하여 죽었으므로 의구 시를 지어 돌에 새겨 의구비를 세워주고, 개의 장사를 잘 지내 주었다고 한다. -개목이 산신제 : 정월 길일을 택하여 생기 복덕을 보아 닫는 사람을 선정하여 제관으로 삼고 비용은 당일 모금하여 충당했다. 제관, 축관, 두 사람이 제를 올리고 부락민 중에서 탈이 없는 집들은 개별적으로 자기 집에서 시루떡을 해놓고 자기 집 평안과 일 년간 무탈하기를 빈다. -구장 벌 : 병천 앞에 있는 들. 1913년까지 이곳에 아내장이 있었다고 한다. -서원말(書院里) : 은석산 동쪽 기슭에 있는 마을. 처음에는 이곳도 개목이라 했다. 선조 때 학자 한강(寒岡) 정구(鄭逑)가 강당의 터를 닦는데, 죽립(竹林)이라 새긴 지석(誌石)이 나오므로 죽림서원이라 하였다. 인조 때 사액을 받아 도동서원(道東書院)을 세운 후부터 서원말이라 하였다 한다. -3.1운동 기념비 : 병천 뒷산 지서 앞산에 있는 기미년 3.1운동에 순국한 류관순 외 20명의 기념비. 1946년 11월에 세웠다. -병천 : 구계(九溪), 아내, 아우내라고도 하는데 시장이 있어 아내장이라 흔히 부른다. 차릿내와 병천천이 합류되므로 두물이 아울린다고 하여 아내라 하기도 하고, 구계(九溪), 아홉 내에서 온 아우내라고도 한다. -까치고개 : 작현(鵲峴), 일한천(一寒泉), 아내장터 위쪽에 있는 마을. 찬 우물이 있고 이 부근을 한천들이라 부르며, 마을 뒷산이 까치 목처럼 생겼다고도 한다. 옛날에 오리나무가 무성했는데 나뭇가지에 까치들이 많이 집을 짓고 살았다고도 한다. -세고개 : 병천 뒤에 있는 고개. 병천에서 천안으로 가는 곳인데 철의 생산지이다. -대창골 : 쟁이(工人)들이 살던 곳. 도공 철공들이 이곳에서 장이 섰다고 하며 이곳에 그릇시장이 있었던 것 같다. -신선동 : 구 장터 서쪽에 있는 마을. 새로 형성된 마을이다. -둔터골 : 예전에 군대가 주둔하고 있었다고 한다. -퉁점 : 개목이에 있는데 놋쇠 일을 하던 곳. -바위 아가리 : 바위가 입을 벌리고 있는 것 같다. -중군 모랭이 : 예전에 이곳에 중군이 주둔하고 있었다고 한다. -돼지논 : 옛날에 이곳이 병천 장터였으며, 비옥하여 돼지논이라 한다. ▲탑원리(塔院里) 목천군 근동면 지역인데 1914년 지방행정 통폐합으로 일탑원리, 이탑원리, 이한천리, 이동면 일부, 수신면 상리 일부를 병합하여 행인의 편의를 도와주던 숙박시설인 탑원이 있었던 곳이므로 탑원의 옛 이름 대로 탑원리라 하고 병천면에 편입되었다. -너분들 : 광암(廣岩), 매봉 서쪽에 있는 마을. 넓은 반석이 있다고 한다. -대수리(大樹里) : 너분들 북쪽에 있는데 큰 나무가 많이 있었으며 대장간이 있었다. -류관순 사당 : 등재 동북쪽 매봉산 밑에 있는 류관순 사당. 1973년 준공되었다. 사적 제230호로 지정되었다. -등재 : 이한천(二寒泉) 너분들 서남쪽에 있는 마을. 마을 뒷산이 성과 같이 둘러 있는데 찬 우물이 있다고 한다. (전설) 이 부락이 삼태미 형으로 생겨서 곡식이 삼태미에 채워지면 넘치므로 큰 부자는 나지 않고 작은 부자는 생긴다고 전해지고 있다 한다. -찬샘골 : 류관순 사우 뒤 찬 물이 솟는 샘이 있다. -덕산재 : 덕성(德星), 일탑원(一塔院), 탑골 북쪽에 있는 마을. -탑골 : 대수리 위 쪽에 있는 골. 예전에 있었다고 한다. -밤골 : 전곡(田谷), 창틀 북쪽에 있는 들. -창들고개 : 병목고개. 창평리, 호항령이라고도 하며 창들에서 만마루로 넘어가는 고개 2개가 높고 병목같이 생겼음. -창들 : 등재 남쪽에 있는 마을. 복치형(伏稚形)의 명당이 있다고 하며, 본래 청주목 수신면이었다가 병천면에 편입되었다. -선바위 : 탑골 서쪽 산들에 서 있는 바위. -부처당 : 절터가 있었다고 하며 기왓장이 나온다. -씨름판 골 : 옛날에 이곳에서 부락 사람들이 씨름 시합을 자주하였다고 한다. -서낭댕이 : 서낭이 있었는데 근래에 없어졌다. ▲가전리(佳田里) 목천군 근동면 지역인데 1895년 지방행정 편제 때 갈전면에 편입되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으로 상백전리, 하백전리, 용연리, 가암리, 서원리 일부를 병합하여 가암리의 가자와 백전리의 전자를 따서 가전리라 하고 갈전면에 편입되었다. 1942년 갈전면이 병천면으로 명칭이 바뀌어 병천면 가전리가 되었다. -거북바위 : 구암(龜岩), 잣밭 앞에 있는 바위. 큰 바위가 둘이 겹쳐서 거북이 모양으로 서 있고, 바위 등허리에 성혈의 흔적으로 보아 남방식 고인돌이 분명하다. 그 옆에 수백년 된 느티나무가 있는데 바위 동쪽에 김씨세거(金氏世居), 북쪽에 백전동천(栢田洞天)이라 새겼다. 명종 때 명신 김충갑(金忠甲)이 그의 장인 이성춘(李成春)의 재산을 이어 받아 이 마을에 살면서 그 호를 구암(龜岩)이라 하였다. -느티나무 : 거북바위 옆에 있는 큰 느티나무. -문달안 골: 문달안 옆 골에 있는 골짜기. -강당산 : 돌모루 앞에 있는 산. 그 밑에 도정강사(挑汀講舍)가 있었다. -개등어리 : 장승백이 북쪽에 있는 산. 산 모양이 개 등어리와 같이 생겼다고 한다. -가락부리 : 가암(佳岩)이라고도 하는데 돌모루 동쪽에 있는 마을. 마을 모양이 가락부리와 같다고도 하며, 마을 앞에 좋은 바위가 있었는데 없어지고 말았다고 한다. -강당골 : 창평 이씨 묘와 제학공의 제단이 있는데 창평 이씨는 충무공 김시민의 외조부이며 제학공은 안동 김씨의 중 시조이다. 이 자리가 갈마음수형(渴馬飮水形)이며 명나라 명사 두사총(杜師聰)이 소점인데, 말이 물을 마시는 형이라 하며 은(銀) 세말을 폐백으로 주었다고 전하여 온다. -팟자들 : 널 버덩이라고도 하며 갈마 음수 형 밑에 있는데, 넓고 말 외양간의 널과 같다고 한다. -돌모루 : 하백전(下栢田) 모퉁이에 돌산이 있어 돌모루라 하며 잣밭 아래쪽이 된다. -독바위 : 얹힌 바위. 영암(靈岩). 새말 서쪽 모퉁이 냇가에 있는 바위. 독 같은 바위가 얹혀 있는데 얹힌 자리에서 밑 바위까지 실 구멍이 통한다고 한다. -돌산 : 석산(石山). 돌모루 옆에 있는 산. 산 밑에서 봉우리까지 돌이 험하게 박혀 있다고 한다. -투구봉 : 잣밭 앞에 있는 산. 산 모양이 투구와 같다. -조골 : 장승백이 북쪽에 있는 마을. 철의 일을 했다. -충열사터(忠烈祠터) : 가전리 249번지 돌모루에 있는 충열사터. 정랑 조명, 충무공 김시민, 죽계 김계종을 배향했는데 대원군 서원철패 때인 고종 5년 1864년 철거되어 재건하지 못했다. -진등 : 잣밭 동쪽에 있는 골짜기 산등이 길다. -새말 : 용연(龍淵), 잣밭 서쪽에 새로 된 마을 앞에 용못이 있었다. 갓소 못이라고도 한다. -잣밭 : 백전(栢田), 상 백전이라고도 하는데 세성산이 농성이었을 당시 그 성에 따른 성밭(城田)에서 연유되어 재밭이 되었다. -장승백이 : 세 고개 밑에 있는 마을. 예전에 이곳에 장승이 있었다. -상장골 : 삼성동(三省洞) 잣밭 서쪽에 있는 골짜기. 인조 때 학자 황종해(黃宗海)가 그 아버지 묘를 쓰고 날마다 세 번씩 성묘하였다고 하여 삼성이라고 하고 삼생이라고도 한다. 이는 삼성(三省)이었는데 삼생(三生)이가 되었다. 아버지 묘소에서 도잠동(화성리 3구 159번지. 5산단로 317-10. 정우용씨 집 자리로 종친 황재희씨 추정 증언)의 집이 보이고 집에서 아버지 산소가 보인다 한다. -부엉바위 : 투구봉 동쪽 기슭에 있는 바위. 모양이 부엉이 같이 생겼다 한다. -말무덤 : 상장골 위에 있는 옛 무덤. 지금은 없어졌음. -사근다리 : 잣밭 동쪽에 있는 골. 산등이 길다. -배락골 : 잣밭 뒤에 있는 골짜기. -명태골 : 명태 한 코를 논 일곱마지기와 바꾸었으므로 명태골이라고 한다. -만지원고개 : 새말에서 북면 만지원으로 넘어가는 고개. -말탄돌 : 국도 변에 돌을 깎아 세워 놓았는데, 이 돌에 올라서 말을 탔으므로 말 탄돌이라고 한다. 현재는 없어졌다. -최쟁이골 : 공인(工人)들이 살던 곳. 공인을 쟁이라고 불렀기 때문에 쟁이골이라 한다.
-
[기획특집] 천안의 지명유래 ㉖[천안신문] 본보는 지난 151호부터 천안 각 읍면동의 지명유래에 대한 연재를 진행중이다. 천안이라는 지명에 대한 기록은 고려 태조 13년인 930년 8월 8일 기해 일에 고려태조가 대록에 내려와 동서도솔과 탕정의 일부와 사산의 일부와 대록의 일부를 병합하여 천안이라 하고 도독부를 둔데서 유래한다. 대록은 지금의 목천이요, 사산은 직산이며, 동도솔과 서도솔은 천안의 일부이며, 탕정은 온양 탕정의 일부다. 각 지역에 내려오는 천안의 지명은 1988년부터 이원표 선생이 동부 6개 면을, 1987년도부터 오세창 선생이 천안시를 조사해 1960년경 한글학회에서 발행된 ‘한국 지명총람’을 참고로 가감 수정해 동부 6개면은 1990년 천안군에서 ‘역사의 현장’으로 출간되었으며, 천안시는 1989년 천안문화원에서 ‘천안의 지명’으로 출간하였다. 그 후 1999년 천안시 문화원에서 시와 군에서 발행된 것을 합하여 ‘천안의 땅 이름이야기’로 출간했다. 이번 연재는 이를 바탕으로 했으며, 일부 내용은 천안 향토사학자 김종식 선생이 재조사를 통해 가감하였음을 밝혀둔다. <편집자 주> ▣ 병천면(竝川面) 목천군 동쪽에 있는 면중에서 제일 가까우므로 근동면(近東面)이라 하다가 고종 32년 1895년 치랏골 이름의 뜻을 따라 갈전면(葛田面)으로 고쳐서 상백전(上栢田), 용연(龍淵), 가암(佳岩), 서원(書院), 일병천, 이병천, 일한천(一寒泉), 신촌(新村), 평기(平基), 도원(桃源), 광기(廣基), 덕신(德新), 가정, 반계(磻溪), 명암(鳴岩), 명성(明星), 의동(衣洞), 냉정(冷井), 의관(衣冠), 매당(梅堂),작성(鵲城), 공심(公心), 봉암(鳳岩), 소근(所斤), 삼성(三星), 석항(石項)의 27개리를 관할하여 오다가 1914년 군통폐합에 따라 이동면(二東面)의 일탑원(一塔院), 이탑원(二塔院), 이한천(二寒泉) 3개리와 수신면(修身面)의 상리(上里) 일부를 병합하여 다시 갈전면이라 하여 천안군에 편입되어 가전, 병천, 도원, 관성, 매성, 봉항, 탑원리로 개편하여 천안군 갈전면이 되었다. 1942년에 갈전면을 병천면으로 고쳐 천안군 병천면이 되었으며, 1963년 1월 1일 천안읍과 환성면이 천안시로 승격되므로 천원군 병천면이 되었다. 1973년 7월 1일 대통령령 제6542호로 수신면의 복다회리와 동면의 용두리가 편입되어 7개리였던 것이 9개리로 되었다. 동쪽은 동면, 북쪽은 충청북도 진천군 백곡면, 남쪽은 수신면, 서쪽은 북면을 접하고 있다. ▲관성리(冠星里) 목천군 근동면 지역으로 1895년 지방행정 편제때 갈전면이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으로 명성리, 의동, 냉정동, 의관동을 병합하여 의관동의 관자와 명성리의 성자를 따서 관성리라 하여 천안군 갈전면 관성리가 되었다. 1942년 갈전면이 병천면으로 되면서 병천면 관성리가 되었다. 1963년 군면이 천원군으로 개칭되므로 천원군 병천면 관성리가 되었다가 다시 환원되었다. -북달안 : 이곳에 예전에 군사가 많이 주둔하였는데, 그 당시 이곳에 북을 매달고 북을 쳤다고 한다. 김유신 장군이 쳤다고도 하고 백제 군사가 쳤다고도 한다. -만뢰산 : 관성리 뒷산 줄기로 상봉인데 전쟁에 쓰던 뢰를 만개나 쌓아 두었으므로 만뢰산이라 한다고도 하고, 만 명이 피할 곳이라 하여 만인산이라고 하기도 한다. (전설) 만뢰산에 우물을 파도 물이 나지 않아서 삼십일 기도를 드리는데, 그때 전라도 백만장자가 피난하러 가솔을 데리고 남부여대 하여 이곳에 찾아 왔는데, 이때 성스러운 구름이 서쪽으로부터 와서 비를 내리고 판 우물에서 물이 솟아 올라와 장자가 가지고 온 재물과 곡식을 나누어 주었다 한다. 이곳의 난민들은 덕을 가지고 온 장자를 축하드리기 위하여 북을 치고 기뻐하였다고 한다. 성스러운 구름이 서쪽으로부터 왔다고 하여 서운산이라 한다고 하고, 그 전에는 물을 진천 수문골에서 퍼다 먹었다고 한다. -사자골 : 냉정리(冷井里), 찬샘골이라고 하는데 독가말 동북쪽 위에 있는 마을이며 뒷산이 웅장하고 찬 우물이 있어서 약물로 쓰고, 그 위에 안사자 골이 있는데 그전에는 인가가 있었으나 현재는 없어졌다. 대원군시절 병인박해 때 이곳에서 천주교인 다수가 숨어들었고, 불란서 신부 페롱권 신부, 칼레강 신부, 리멀이 신부가 은신하고 있던 곳이라 하기도 한다. 그리고 의병다수가 이곳에 숨어살기도 했다고 전한다. -왜펀덕 : 왜병들이 이곳에 와서 의병들을 총으로 많이 죽였으므로 왜 펀덕이라고 한다. -바타니고개 : 사자골에서 동면 바타니로 넘어가는 고개. -반 고개 : 밤 고개라고도 하며 명성골에서 동면 광덕리로 넘어가는 고개. 이 고개에 밤나무가 많이 있었다고 한다. -명성골(明星) : 명성리라고도 불렀으며 관성리에서 가장 크고 구억말 동쪽에 있다. -매봉 : 응봉이라고 하는데 명성골 서남쪽에 있는 산. 모양이 매같이 무섭게 생겼다 한다. -훈련골 : 백제 때 이곳에서 병사들이 훈련하였다고 하는데, 동면과 경계지점에 있는 골이다. -독가말 : 의동(衣洞). 명성골 북쪽에 있는 마을. 그릇이 있었으며 점말이라는 곳이 있고 옹기 가마터가 밭에 있었다. -안터 : 독가말 안쪽에 있는데, 조선조 영조대왕이 스승이었던 곽시징(郭始徵)이 살았고 그의 묘가 이곳에 있다. -행암고개 : 관성리에서 동면 행암리로 넘어가는 고개. -옹갓골 : 의관동(衣冠洞)이라고도 하는데, 관성지구이며 옛날 옥이 있었다 한다. -노적봉 : 명성골 입구에 있는 산. 산 모양이 노적가리 같이 생겼다. -장자펀덕 : 옛날에 장자, 즉 큰 부자가 살았다. -정자 : 독가말에 있는데 권농정이라 하며, 이 부락민 한동수씨의 유언에 의하여 이 마을에 살고 있는 한상운(韓相雲) 형제가 건립하여 휴식처가 되고 있다. -망해암 : 이곳에서 내려다보면 중국 산동성이 보이고 일본까지도 보인다는 말이 전해오며, 임진왜란 때 동면 하유동에 살던 16세 소년 이응이 뛰어난 지략으로 피난민을 모아 설득하여 돌과 활로 왜군과 수일간 싸워 격퇴시킨 곳이다. -선바위 : 바위가 서 있는데 옻 갓골 뒤에 있다. -절골 : 절이 있었는데 돌절구가 남아 있다. -고로골 : 굴이 있는데 10여명이 들어갈 수 있다. -불무골 : 철을 녹이기 위하여 불무하던 곳. -기와탄말 : 기와조각이 많이 나오고 있다. -기름챙이골 : 명성 골에 있는데 예전에 공인(工人)들이 집단으로 살던 곳이다. ▲송정리(松亭里) 옛날에는 청주목 수신면 지역이었는데, 1895년 지방 관제 개정할 때 목천군 수신면이었다가 1914년 일제의 군․면 통합때 송정 와촌 복다이 뒷골 거무산 취락을 합하여 복다회리(卜多會里)라 하고, 일본 강점기에 천안군 수신면에 편입되었다. 1973년 7월 1일 대통령령 제 6542호로 병천면으로 편입되었다. 1995년 8월 22일 천안시 조례 제160호 일본 강점기 잔재를 청산하는 국민들의 염원에 따라 고유지명인 송정리로 환원 개정하게 되었다. -송정(松亭) : 소정이라고도 하는데 임진왜란 때 죽계 김계종(繼宗)이 이곳에 살았었는데, 선조가 의주로 파천할 때 의주까지 몸소 군량을 가지고 가서 호종한 공으로, 선무공신(宣武功臣)이 되었다. 송정의 유래는 이렇다. 죽계 김계종이 지명에 소나무송자를 붙이면 왜군이 피할 것이라고 생각하여 송정(松亭)이라 이름 짓고,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정자에서 술을 대접하고, 짚신 한 켤레와 노자를 보태주며 송정이라고 부르게 하여 마을 이름이 송정이 되었다고 전해온다. 그리하여 왜군이 들어오지 아니하여 난리 중에도 온 마을이 무사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추측하건대 명나라 이여송(李如松) 군대를 왜군들이 피할 것이라고 예측한 듯하다.<한국 지명총람 참조. 한글학회 1668 > -복다위 : 약사산(보련산) 밑에 있는 마을로 복(福)이 많은 동네라는 뜻으로 불리어 왔는데, 1914년 일인들이 측량하면서 점복자를 써서 卜多會로 잘못 불린 일이 있었다. -왜마루 : 백운산 동남쪽 기슭에 있는데 와촌(瓦村)이라고도 한다. 옛날에 기와를 구웠다고 전한다. 구한말 당상관 도정 김동년(金東年)의 생가지가 있다. -팽나무정이 : 왜마루 앞에 팽나무 정자가 있었다. 선무공신 죽계 김계종의 장손 성균진사 김대년(金大年)의 묘소가 있다. -상촌 : 송정에 새로 되 마을로 신뜸이라고도 하며 녹동천의 상류변에 있다. -청룡안산 : 선무공신 김계종의 부친 경(鏡)(이조판서)의 묘소가 있다. 기미 독립만세 때 만세운동을 주도하다가 아우내 장터에서 왜병에게 피살된 항일독립 투사 김상헌의 묘소와, 그때 왜병에게 체포되어 옥고를 겪고서 와병 중 순사한 항일 독립투사 김상훈의 묘소가 있다. -거무산 : 솔림산 덜미고개 밑에 있는 마을로, 을사조약 후에 광복단원으로 의병에 참가해 비밀결사대를 조직하여 항일투쟁을 전개한 독립 열사 유창순(庾昌淳)의 생가가 있고, 그 후록에는 열사의 묘소가 있다. -뒷골 : 옛날 마방 주막 뒤에 있는 작은 마을. -성아비 : 성압이라고도 한다. 선무공신 죽계 김계종의 장남 진사 엽(曄)의 묘소가 있다. -정거장 주막 : 조선시대에는 영남․호남으로 왕래하던 대로였는데, 과거보러 가는 선비들이 일박하고 가던 주막이었다 한다. 근래에는 청주 오창과 옥산면 사람들이 병천장을 보고 갈 때 쉬어가던 곳이다. -송당 김상철 시비(松堂 金相喆 詩碑) : 1993년 10월 대전엑스포 세계박람회에서 주최한 구제한시백일장대회에서 장원 입상한 기념비가 있다. -송정 김태진 교장 송덕비(松亭 金泰珍 校長 松德碑) : 어린이들이 수신학교로 통학의 어려움을 통감하고 송정초등학교를 설립하여 어린이들의 통학의 어려움을 덜어주었다. 송정초등학교 출신은 물론이며 주민들의 추앙과 칭송은 후대에도 빛날 것이라 하여 동문들이 세웠다. -진주 정씨 숙덕 순열 비 : 시집 온지 반년만에 남편 김상옥(金相玉)이 요절하니, 장 조카 병응(柄應)을 양자로 삼고 송죽(松竹) 같은 순열로 가통을 지키면서 평생을 고고하게 지냈으니 수가 75세이시다. -표당 김병응 효자비(杓堂 金柄應 孝子碑) : 백부(諱 相玉)에게 입양되어 홀로 계신 어머님을 지성으로 모셨으니 효심은 물론 향교 유림으로 교화계도에 힘썼으며, 또 가난한 사람에게는 남다른 면을 보였고 후덕한 인품으로 인근 주민의 사표로 존경을 받았다. -안동김씨 효부비 : 남편 오병순이 요절하여 홀로 노쇠하신 시아버지의 봉양을 넉넉지 못한 형편에도 7년간이나 정성으로 모시니, 시아버지는 혼자된 자부의 효심에 오히려 연민의 정을 느껴서 구부간의 인간애 정신은 당세뿐 아니라 후세에게도 만인의 귀감이 될 만하다. 그는 바로 한학자 김상철 옹의 고모이다. -호랑이비 : 상촌 앞 내 건너 산의 바위로, 모양이 흰 호랑이가 누워있는 것처럼 보인다. -띠우지 : 당골 남쪽에 있는 골(백운산 동쪽)로 띠가 많았다고 한다. -노고절 : 옛날에 노고사(老古寺)라는 절이 있었다고 한다. -약사절 : 약사산(일명 보련산)에 있다. -사리울들 : 미호천 상류의 한 지류인데, 천안동부 6개 면의 물이 합쳐 흐르는 큰 내로 충청북도와의 경계가 되기도 하며, 전에는 내 바닥에 철이 있어서 함지박으로 쇠를 채취하기도 했다. -덜미고개 : 충청북도와 경계가 되는 고개로 청주․오창으로 통한다. ▲용두리(龍頭里) 목천면 이원동면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 만화리, 용두리, 신촌, 산서리, 수입리가 행정구역 통폐합으로 용두리라 하여 동면에 편입되었다가 1973년 7월 1일 대통령령 제6542호로 동면에서 분리되어 병천면에 편입되었다. -용두리 : 뒷동산의 산등이 용과 똑같이 생겼고 용의 머리 부분이 되므로 용두리라 하였다고 한다. -대위 : 대위산이라고도 하는데 만마루 오른쪽에 있는 산. 이 산기슭에 선조 때 어우당(於于堂) 류몽인(柳夢寅) 유활(柳活) 고종 때 유봉석(柳鳳錫) 위패를 모시고 춘추로 제를 지낸다. -지령리(芝靈里) : 산서(山西)라고도 하며 매봉 밑에 있는 마을. 산이 둘러싸고 물이 돌아 흘러서 인걸이 많이 날 땅이라 하여 지령리라 하였는데, 영조 때 학자 유광흥이 호를 지와(芝窩)라고 하고 지령으로 고쳤다. 산이 서쪽에 병풍같이 둘러 있으므로 산서라고도 하며, 이곳에서 순국처녀 류관순이 태어났으며 그의 비와 생가가 있다. -찬우물 : 만마루에 있는 우물. 청결하고 물이 달며 수량이 많다. -창틀고개 : 창평리 호항령 만마루에서 병천면 탑원리 창들로 넘어가는 고개. 병목같이 생겼다. -장각골 : 무드리 왼쪽에 있는 골자기. 입구는 좁고 그 안쪽은 넓고 매우 아늑하다. 영조 무신난 때 만화당(晩華堂) 류진한(柳振韓)이 17세에 이곳에서 피난하면서 글을 읽었다. -용마지(龍馬池) : 만마루 강신대 위에 있는 못. 숙종 때 참판 류광익(柳光翼)이 꿈에 이 못에서 말이 나와 용으로 변하였으므로 용마지라 하며, 자손의 이름을 용마의 이름을 붙여지었고 그 자손들이 매우 번창하고 있다. -와우고개 : 와우현(臥牛峴) 무드리에서 칡 덤 말로 넘어가는 고개. 고종 때 학자 노제 류지빈의 묘소가 와우형인데 그 뒤가 된다. -삼수처사 삼강 비 : 류봉석 기념비. 고종 때 학자 류봉석 기념비를 대화산 기슭에, 1965년 10월 목천 유도회에서 그의 충효열(忠孝烈)을 기리기 위해 세웠다. -안장바위 : 말 바위 옆에 있으며 말안장처럼 생긴 바위. -영회단터(英會堂) : 강당터, 수리봉 아래에 있는 영회당터, 영조때 만화당 류진한, 지화 류광흥, 사암 김윤재가 강당을 세우고 후진 양성으로 영재를 길러냈다. -서바랭이 : 무르리 입구에 있는 버덩. -만마룻들(萬華坪) : 만마루 앞에 있는 들. -무드리 : 수입리(水入里) 지령이 동쪽에 있는 마을. 개울이 마을을 돌아 흘러간다. -백석봉 : 고등말 입구에 있는 산. 봉우리에 흰돌이 많이 있다. -부엉바위 : 부엉박골에 있는 바위. 부엉이가 살았다. -부엉박골 : 지령리 북쪽에 있는 골. 부엉바위가 있는 골. -말바위 : 지령리 북동쪽에 있는 바위. (전설) 모양이 말의 머리처럼 생기고 그 입이 동면 구도리 보평마을을 향하여 벌리고 있는데, 보평 사람들이 이 말이 보평의 양식을 먹고 대변은 지령리에서 누어서 보평은 늘 가난하고 지령리는 부하게 된다 하여 밤에 몰래 이 말 바위 혀를 잘라다 산제당에 보관하였다고 한다. -유관순 집터 : 지금 지령리에 있는 류관순의 생가 앞 논 가운데 있었는데, 3.1 운동 때 일본군들이 불을 놓아 전소되었다. 그 후에 논으로 개간되었으며 천안군청에서 지금의 자리에 생가를 지어 보존하고 있다. 1962년에 충열비를 세우고 공원을 만들었으며 교회당을 짓고 관리사를 새로 세웠다. -만마루 : 만화동, 만화촌(晩華村), 분토동, 쇳대배기, 효죽리라고도 하는데 용두 건너편에 있는 마을. 지대가 높아서 멀리보이며 흙이 분토처럼 곱다. 류광천과 남세강이 함께 등과하여 솟대를 세웠으며 문장가 유진한이 서책 만권을 갖추고 만화동이라 하였다. 호를 만화제라 하여 강당을 열어 후학을 가르치고 강회를 열었다. -수입리 산제 : 산제가 있었는데 1990년경에 교인들이 반대로 없어졌다. 옛날에는 도깨비가 많아서 도깨비장난을 없애기 위해 생겼다고 하며, 산영 밑에 주민이 거주하므로 부락의 안녕과 복을 산신에게 빌었다 한다. ▲봉항리(鳳項里) 목천군 근동면 지역인데 1895년 지방행정 편제에 따라 갈전면이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으로 소근리, 삼성리, 석항리, 봉암리 일부를 통합하여 봉암리의 봉자와 석항리의 항자를 따서 봉항리라 하고 갈전면 봉항리가 되었다. 1942년 갈전면이 병천면으로 개칭되므로 병천면 봉항리가 되었다. -산제당 : 석항부락에서 정월 초승 길일을 택하여 부락민 중에서 생기 복덕을 보아 적합한 사람을 제관으로 선정한 후 비용은 부락 기금으로 하고 5~6인이 올라가서 지낸다. 제관 축관 불대 잡이 심부름꾼이며 부인은 참석치 못한다. 언제부터 제를 올려왔는지 모르며, 옛 어른들이 지내온지라 그 뜻을 이어받아 지낸다. -비녀봉 : 돌모기 뒤에 있는 산봉우리. 이 산기슭에 선조 때 공신 죽계(竹溪) 김계종(金繼宗)의 묘가 있었는데 금차형이라 한다. -갓모봉 : 돌모기 서쪽에 있는 산. 산 모양이 갓모같이 생겼다고 한다. -삼성당이(三省) : 돌모기 서남쪽에 있는 마을. 이곳에 효자가 있어 부모 산소에 매일 세 번씩 성묘를 하여 삼성이라 하였다고 한다. -봉암(鳳岩) : 서근배미 옆에 있는 마을. 마을 뒤에 바위들이 있는데 부엉이가 살았다 한다. -서근배미 : 소금밤. 소근(所斤) 삼성 남쪽에 있는 마을. 이곳에서 석기시대 돌도끼가 나왔다고 한다. (전설) 옛날에 이곳에 밤이 하도 잘되어 한 개가 세근 반이나 되었다고 하며, 머그나미라는 곳까지 먹으며 가도 다 못 먹고 밤이 남았다고 한다. -안터 : 서근배미 서쪽에 있는 마을. -사기점터 : 만삼골에 있는 옛날의 사기점 터. 사기조각과 옥토가 남아 있다고 한다. -쉬동이 : 큰 골 옆에 있는 골짜기. -베장골고개 : 돌모기에서 북면 베장골로 넘어가는 고개. -머그나미 : 동막골 남쪽 옆에 있는 골짜기. -망해골 : 만골 봉암 뒤 망해산 망해암이 있던 골. -매봉 : 서근배미 앞에 있는 산. 매같이 생겼다. -방아잣골 : 절골 입구에 있는 골. -만삼골 : 갓모봉 동남쪽에 있는 큰 골. 만세암이 있음. -마른골 : 방아잣골 옆에 있는 골. -돌목고개 : 돌목이에서 진천군 대문리로 넘어가는 고개. -뒷방비 : 돌목이 뒤 동남쪽에 있는 골. -돌목이(石項) : 봉항리에서 가장 큰 마을. 돌이 많이 있으며 아늑하고 병천면의 맨 북쪽이다. -마른골 : 비아잣골 왼쪽에 있는 골. -김효자정문 : 봉황입구에 있는 효자 김인석의 효자 정문. -당골 : 서낭당 왼쪽에 있는 골. -고야봉 : 돌모기 서남쪽에 있는 산. -이효자 정문 : 이순학 이기응 효자정문. 시묘를 잘 살았다고 한다. -대방골 : 봉암 앞에 있는 골짜기. -텃골 : 만세암골 동쪽에 있는 골. 만세암 터가 있다. -통목골 : 만세암 남서쪽에 있는 골짜기. -큰골 : 방아잣골 왼쪽에 있는 골. -절골 : 돌목이 뒤에 있는 골. 전에 절이 있었다. -왕대 : 봉암 북쪽에 있는 마을. 백제 때 왕이 이곳에 있었다고 한다. -왕대들 : 왕대 앞에 있는 들. 쇠를 담금질 하였다고 한다. -쇠당이고개 : 봉항리에서 충북 백곡면으로 넘어가는 고개. -옥녀봉 : 비녀봉 위에 있는 봉우리. -영운암 : 절골 왼쪽에 있는 골. 영운암이 있었다 한다. -오동촌고개 : 봉암리에서 북면 오동 촌으로 넘어가는 고개. -비선골고개 : 고개 마루턱에 강릉김씨 묘비가 있다. -고닥골 : 풀무질하며 철의 일을 하였다 한다.
-
[기획특집] 천안의 지명유래 ㉕[천안신문] 본보는 지난 151호부터 천안 각 읍면동의 지명유래에 대한 연재를 진행중이다. 천안이라는 지명에 대한 기록은 고려 태조 13년인 930년 8월 8일 기해 일에 고려태조가 대록에 내려와 동서도솔과 탕정의 일부와 사산의 일부와 대록의 일부를 병합하여 천안이라 하고 도독부를 둔데서 유래한다. 대록은 지금의 목천이요, 사산은 직산이며, 동도솔과 서도솔은 천안의 일부이며, 탕정은 온양 탕정의 일부다. 각 지역에 내려오는 천안의 지명은 1988년부터 이원표 선생이 동부 6개 면을, 1987년도부터 오세창 선생이 천안시를 조사해 1960년경 한글학회에서 발행된 ‘한국 지명총람’을 참고로 가감 수정해 동부 6개면은 1990년 천안군에서 ‘역사의 현장’으로 출간되었으며, 천안시는 1989년 천안문화원에서 ‘천안의 지명’으로 출간하였다. 그 후 1999년 천안시 문화원에서 시와 군에서 발행된 것을 합하여 ‘천안의 땅 이름이야기’로 출간했다. 이번 연재는 이를 바탕으로 했으며, 일부 내용은 천안 향토사학자 김종식 선생이 재조사를 통해 가감하였음을 밝혀둔다. <편집자 주> ▣수신면(修身面) 본래 충청북도 청주목 지역인데 고종 32년(1895) 지방관제 개정할때 목천군에 편입되었는데 편입되기 전에는 기장동(其壯洞), 발산(髮山), 한신(閑身), 원귀(元龜), 증자동(曾子洞), 제곡(濟谷), 오미정(五美亭), 엄정(嚴亭), 비봉(飛鳳), 송정(松亭), 능우(陵隅), 신평(新坪), 속계(速溪), 사창(社倉), 장명(長命), 송내(松內), 구미(九美), 송죽(松竹), 남산(南山), 복다회(福多會), 신복(新福) 21개리를 관할했었는데 목천군에 편입되면서 대해(大海), 엄정(嚴亭), 오동(梧桐), 봉서(鳳棲), 속계(速溪), 사창(社倉), 백인(百忍), 전촌(田村), 증자동(曾子洞), 한신(閑身), 상발(上鉢), 중발(中鉢), 하발(下鉢), 상지장(上地庄), 하지장(下地庄), 풍정(豊亭), 현암(玄岩), 신평(新坪), 장명(長命), 남산(南山), 상리(上里), 복다회(卜多會)의 22개리로 개편하고 1914년 군면 통폐합시 천안군에 편입되어 해정, 속창, 백자, 발산, 신풍, 장산, 복다회, 7개리로 개편되고 일부는 성남, 병천에 편입되기로 했다. 1973년 7월 1일 대통령령 제6542호로 복다회를 병천면에 편입시켜 현재 6개리를 관할하고 있으며 서쪽은 성남면, 남쪽은 청원군 옥산면과 연기군 전동면, 동쪽은 충청북도 오창면, 북쪽은 병천면과 성남을 접하고 있으며 충청남북도계이기도 하다. ▲신풍리(新風里) 청주목 수신면의 지역으로 1895년 목천군 수신면이 되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으로 풍정리, 현암리, 신평리 각 일부를 병합하여 신평리의 신자와 풍정리의 풍자를 따서 신풍리라고 하고 수신면에 편입되었다. -장군바위 : 둥그렇게 생겼는데 장군이 무릎을 꿇어 무릎 자국이 있다고 한다. -군량들 : 옛날에 이곳에 군량을 쌓았다고 전한다. -화전고개 : 감절에서 성남면 화전으로 넘어가는 고개. -풍수정이 : 풍정, 풍수정이라고도 하는데 감절 남쪽에 있는 마을. 앞뒤로 느티나무 정자가 줄지어 있었다고 한다. -장고개 : 감절에서 병천장에 다니는 고개. -방아다리고개 : 감절에서 성남면 화성리, 방아다리로 넘어다니는 고개. -장터골 : 예전에 이곳에서 장이 섰다고 전해오는 곳이다. -곽가터 : 예전에 이곳에 곽씨들이 살았다 한다. -밤모퉁이 : 풍수정이 서쪽 모퉁이에 있는 마을. 밤나무가 많이 있었다고 한다. ▲해정리(海亭里) 청주목 수신면의 지역인데 1895년 행정구역 변경으로 목천군 수신면이 되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으로 대해리, 엄정리, 오동리, 붕서리 일부를 병합하여 대해리의 해자와 엄정리의 엄자를 따서 해정리라 하고 수신면에 편입되었다. -엄정말 : (전설) 느티나무 잎이 한꺼번에 활짝 잘 피면 모를 일제히 잘 심고, 아래가 먼저 피면 아래들이 먼저 모를 심고, 나무 위 잎이 먼저 피면 위들이 모를 먼저 심게 된다고 하는 말이 예전부터 이 부락에 내려오는 구전이다. -느티나무제 : 전설이 있는 이 나무를 엄정마을에서는 나무에 제를 올린다. 고령자로써 복이 많고 탈이 없는 자를 제주로 하고 정월대보름날과 칠월칠석 두 번 지내는데, 돼지 머리를 놓고 풍장을 치며 부락민도 하루를 축제로 지낸다. 이 나무를 위함으로 동네에 복이 많이 들어오고 무사하다고 믿고 있고, 큰 일이 부락에 있을 때에는 이 나무에 고한다. 수령은 500년 정도이다. -오래대들 : 들이 넓은데 겨울에 오리 떼가 많이 날아오므로 오리 떼 들이라고 한다. -가마소 : 엄정이 북쪽에 있는 큰 소. 현재 논이 되었는데 이곳에서 철이 많이 출토되었다. -배삼골 : 엄정이 남쪽에 있는 들. -고마청 : 엄정 남쪽 1㎞ 지점에 있는데, 조선조 때 이곳에 고마청을 두고 말을 많이 먹여 생산된 말을 정부에 바쳤다고 한다. -말꼴비알 : 고마청을 두고 말을 기를 때 이곳에서도 말을 길렀다 하며 약간 비탈이다. -마루들 : 이곳도 말을 먹이던 들이라 한다. -개삼골 : 엄정이 남쪽에 있는 들. 이곳에 인삼을 심었다고 한다. -엄정이내 : 엄정천이라고도 하는데, 백자리 남쪽 망경산에서 발원하여 북쪽으로 흘러 엄정이 들을 지나 승천천으로 들어가는데, 망경산에 산삼이 있으므로 이 내에 잉어가 오르지 않는다고 한다. -엄정 : 해정리에서 가장 큰 마을. 고종 때 참판 홍재봉(洪在鳳)이 살았고 큰 느티나무가 중앙에 있다. -양달비조재 : 비조재의 양달쪽의 마을. 응달 비조재는 성남면 봉양리에 걸쳐 있는 마을. 성남면 봉양리로 넘어가는 비좁은 재가 있는데 비봉귀소형의 명당이 있다고 한다. 본래는 수신면 지역인데 일부가 성남면으로 편입되어 나누어진 마을. -한바다 : 대해라고도 한다. -곱돌부리 : 곱돌이 나오므로 곱돌부리라 한다. ▲백자리(百子里) 청주목 수신면의 지역으로 1895년 행정구역 변경때 목천군 수신면이었다.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으로 백인동, 전촌, 증자동, 한신리, 발산리 일부를 병합하여 백인동의 백자와 증자동의 자자를 따서 백자리라 하고 수신면에 편입되었다. -한신 : 백자리에서 가장 큰 마을. 큰 산 밑이 되는데, 예전에 이곳에 한신부곡(閑身部曲)이 있었다. 부곡은 전쟁포로나 이에 준하는 사람을 별도로 집단으로 수용하고 행정체계를 따로 관리하던 곳이다. -산신제 : 백인동에서 지내는데 음력 유월 생기 복덕을 보아 닫는 사람을 제주로 삼고, 제수가 된 사람은 삼일 간 비린내 나는 음식을 먹지 못하며, 외인이 이 부락에 들어오면 삼일 간 나가지 못한다. 옛날에 나쁜 병이 돌아 부락의 인명 피해가 크므로 갑자기 날을 잡아 지내게 되어 유월에 지내게 되었다고 하며, 그 날을 지금까지 지내온다고 한다. -한 버들 : 전촌이라고도 하는데, 증자 동북쪽에 있는 마을인데 큰 버드나무가 많으며 전 씨가 많이 살았다고 한다. -증자동 : 증자골이라고도 하는데, 증자 같은 효자가 났다고 한다. 효종 때 이동표(李東標)란 유명한 효자이며 경주 이씨다. 시묘살이 하는 것을 어사가 보고 감탄하였다고 한다. 1990년 중반에 후손들이 사당과 정문을 지었다. -소실들 : 한 버들 앞에 있는 들. 소씨가 많이 살았는데 어느 날 불이 나서 동네가 모두 망했다고 한다. -섭다리 : 뱅이골 앞에 있는 다리. 섭다리가 있다. -뱅이골 : 백인이라고도 하는데 증자골 서쪽에 있는 마을. 옛날 이곳에 말을 놓아 먹였으며 수신면 면사무소가 있다가 1914년 속창리로 옮겼다고 한다. -농바위 : 농암이라고도 하는데 사모바위 아래쪽에 있는 큰 바위 (전설) 농처럼 생겼는데, 망경산에 성을 쌓을 때 장사가 이 바위를 메고 가다가 밧줄이 끊어져서 이 자리에 놓고 간 것이라고 한다. -고시재 고개 : 백자리에서 연기군 전동면 봉대리 고시로 넘어가는 고개. -은천골 : 구룡사가 있는 골. 망경산에 있다. -사모바위 : 망경산 위에 있는 바위. 모양이 사모처럼 생겼다. 일명 사모암이라 한다. -한벌펀덕 : 아이들이 공을 치며 놀던 펀덕. ▲속창리(涑倉里) 청주목 수신면이었는데 1895년 지방행정구역 편제 때 목천군 수신면으로 있다가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으로 속계리, 사창리 일부가 병합하여 속계리의 속자와 사창리의 창자를 따서 속창리라 하고 수신면에 편입되었다. -능초퉁이 : 능우리라고도 하는데 한명회 묘 옆 모퉁이에 있는 마을. -사창 : 속새말 동쪽에 있는 마을. 마을 앞에 조선조 때 사창이 있었는데 논이 되었다. -한명회(韓明澮) 묘 : 사창골 뒤에 세조 때의 개국공신인 한명회 묘가 있다. 묘 앞에 비각을 한 신도비와 장명등 그리고 사당 등이 있다. 한명회의 본관은 청주. 자는 자준(子濬), 호는 압구정(狎鷗亭)·사우당(四友堂)이다. 할아버지는 예문관제학 상질(尙質)이고, 아버지는 증 영의정(贈領議政) 기(起)이며, 어머니는 예문관대제학 이적의 딸이다. 딸이 예종비 장순왕후와 성종비 공혜왕후이다. 일찍 부모를 여의고 어린 시절을 불우하게 보냈다. 여러 번 과거를 보았으나 합격하지 못하고 권람(權擥)과 더불어 산천을 주유했다. 수양이 나이 어린 조카를 죽이고 임금이 된 후에 1등공신이 네 번, 다섯 차례의 영의정, 두 딸을 황후로 만들고 30여년을 무소불위의 권력으로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인물을 죽이면서 권력을 유지하려 하다가, 죽은 후에 1504년 연산군 10년에 갑자사화 때 연산군의 모친 윤비(尹妃)의 폐사사건에 연루되어 부관참시(시신을 들어내어 목을 자르는 일) 되었다. 왕위를 찬탈하는 공을 세운 시대의 난신적자(亂臣賊者)이며 기회주의자요,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갈림길에서 논쟁의 인물임에는 틀림없으나, 그 많은 충신들을 죽인 당시의 인물로서 한 시대를 풍미한 정쟁에서 승자 인듯하나 조선의 많은 사람들이 난신적자로 기억하는 인물이다. -속새말 : 속계라고도 하며 속창리에서 가장 큰 마을. 수신면 면소재지가 된다. -솔안고개 : 속창리에서 장산 솔 안으로 넘어가는 고개. -자우실 : 한명회 묘를 쓰기 전 이곳에 가묘가 있었다. ▲장산리(長山里) 청주목 수신면이었는데 1895년 지방행정 편제에 따라 목천군 수신면으로 있다가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으로 장명리, 남산리, 상리, 사창리 각 일부를 병합하여 장명리의 장자와 남산리의 산자를 따서 장산리라 하고 수신면에 편입되었다. (전설) 장명에 예전 간성읍이 있었는데 간성읍 원님의 마음이 변하여 딸을 간통하려 하므로, 딸이 견디다 못하여 아버지에게 제가 시키는 대로 하면 아버지 뜻에 따르겠노라 하니, 아버지가 무엇이냐고 하고 물었다. 딸의 대답이 개목에 가서 개소리하고 쇠목에 가서 쇠소리를 하고 오면 뜻에 따르겠다고 하였다. 아버지가 개목이 가서 개소리 지르고 쇠목이 가서 쇠소리를 하고 돌아와 보니 딸이 목메어 죽어 있었다고 한다. 이 소문이 밖으로 퍼져서 간성읍이 폐읍되었다고 한다. -장명 : 장산리에서 으뜸 되는 마을. 조선조 때 성환도 찰방에 속하는 장명역이 있었으며, 청주에서 제일 살기 좋은 곳이라고 한다. 전국에서 살기 좋은 다섯 곳 중의 한곳이며 흉년이 없는 마을이었다고 한다. -구미들 : 구미평 상리라고도 하며 솔 안 동북쪽에 있는 마을. 장산리 맨 위쪽이 되며 병천과 경계이다. (전설) 거북이 꽁지가 되며 알을 일곱 개 낳았다고 칠성바위가 흩어져 있다. -점말 : 점촌이라고도 하는데 현재도 옹기를 굽고 있다. 이사금의 아버지가 토기를 처음 굽기 시작하여 점촌이 되었다고 한다. -질구마루 : 장명 동북쪽 병천천 건너에 있는데 진흙 버덕으로 되었으며 옥녀탄금형의 명당이 있다고 한다. -창들 : 창평이라고도 하는데 병천 탑원리의 창들. -남산 : 장명 동쪽에 있는 마을. (전설) 앞산이 너무 가까워서 큰 인물이 못나고 300석 이상의 큰 부자는 생기지 않는다고 한다. -사갑들 : 장명 동북쪽에 있는 큰 들. 사갑보의 물을 댔다. -솔안 : 사갑들 북쪽에 있는 마을. 삿갓소 안쪽이 되며 송내 솔안이라고도 한다. -아내벌 : 질구마루 서북쪽에 있는 큰 들. 전에 병천면의 아내장터. -쇠죽골 : 우죽골 서지동이라고도 하며 질구마루 북동쪽에 있는 골. 와우형의 명당이 있다고 한다. 철의 생산지이기도 하다. -삿갓소 : 삿갓둠벙. 사갑들에 있는 소. 삿갓처럼 생겼었다. -우각골(牛角洞) : 솔안 서쪽의 마을. 쇠뿔같이 생겼다고도 한다. -정문 : 효자 경주 이씨 춘영 효자 정문. 2000년 이곳에 홍대용 기념관이 생기면서 광터골로 옮겼다. -미륵 : (전설) 코를 갈아 먹으면 아들을 낳는다고 하여 코를 깎아가 코가 없어졌다. 이 미륵은 장명 부락 북쪽 끝에 있는데, 장명 솔 안 부락민이 공동으로 위하던 미륵이며 장명역 촌민의 신앙의 대상이었던 불상이다. 기단은 원형에 가까운 4각형으로 가운데 부분을 파서 세웠다. 이 사각의 판형 가운데를 오목하게 파내고 석불을 세웠는데, 오른쪽에는 송내리 향도(松內里 香徒)라 각자 되어 있고, 가운데는 목주(또는 목천) 미타 향도 O미 9월 초 1일이라는 각자가 있고, 왼쪽에는 장명리 향도(長命里 香徒)라 각자 되어 있어, 목천과 수신의 송내와 장명마을의 향도들이 모여 불상을 세운 것을 기록한 것인지, 아니면 세 동네 연합 계를 기념하기 위하여 기록한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귀중한 사료임에는 분명하다. -홍대용 생가지 : 조선시대 실학자 홍대용의 생가가 보존되어 있으며 묘소가 생가에서 가까운 곳에 있다. -홍대용 묘: 실학자 홍대용의 묘가 병천가는 큰길 옆에 있다. ▲발산리(鉢山里)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상발산리, 중발산리, 하발산리, 상지장리, 하지장리, 사창리 각 일부를 병합하여 발산리라 하고 수신면에 편입되었다. -바리미 : 발산리라고도 하는데 지형이 바릿대처럼 생겼다고 한다. 고종 때 궁내부 대신으로 있다가 명성황후와 같이 살해된 이경직의 출생지와 집터가 마을 복판에 있다. -거북바위 : (전설) 거북이 같이 자연적으로 생겼는데 한신에 가서 밥을 얻어먹고 잠을 자고 바리미에 와서 똥을 누므로 한신은 망하고 바리미는 부자가 된다고 하여 한신 사람들이 와서 목을 잘라버렸다고 한다. -석불제 : 지장골 사람들이 지내는데 석불이 사람같이 생겼고, 정초에 택일을 하며 생기 복덕을 보아 제주를 정한다. 제를 지내는 사람은 삼일 간 출타를 금하며 비린 것을 먹어서도 안 되고 제사를 정중히 지내는데, 제에 참석치 안는 주민은 풍물을 치며 시간을 보낸다. 한때는 부락에서 제사를 지내지 않아 충북 어느 중이 가져 간 다음 이 부락의 이장이 죽어 동네 청년들이 저녁에 강제로 뺏어 와서 다시 지내게 되었다. -할미바위 : (전설) 할머니가 웅크리고 앉은 것 같이 생겼는데, 옛날 어느 장수가 양손을 잡고 이 바위에서 일어나 양손 자국이 생겼다고 한다. -지장골 : 지장동이라고도 하는데 바리미 동남쪽 골에 있는 마을. 예전에 지장을 많이 심었다 하며 골이 매우 길다.(지장 : 기장의 사투리) -아래 지장골 : 지장골 아래쪽 마을. -자명골 고개 : 지장골에서 충북 청원군 옥산면 장동리 자명골로 넘어가는 고개. -한신고개 : 지장골에서 백자리의 한신으로 넘어가는 고개. -소라봉 : 바리미 동북쪽 큰 냇가에 있는 산. 높이 168M 소라처럼 생겼다. -사정리 고개 : 지장골에서 충북 청원군 옥산면 사정리로 넘어가는 고개. -진등 : 내룡이 길어 한신까지 뻗어 있다. -재공 : 쟁이골. 옛날에 쟁이들이 살았다. -평전들 : 장수가 적을 물리치고 전쟁에 이겨 나라를 평정하였다고 한다. -장군묘 : 전주 이씨 묘가 있는데, 이장군 묘라 부른다. -비선골 : 비석과 망두석이 서 있었는데 지금은 없어졌다.
-
태안군의회 상임위 발족 반대여론 높아[태안=충지협]본지가 지난 4일자로 보도한 '도지사 시장 군수 각 지방 의원 주민소환제'는 직권남용, 직무유기, 독주, 무능 등의 문제시 주민소환법에 의해 주민투표 했을때 (특별시장·광역시장·도지사는 해당 지방자치단체의 주민소환투표 청구권자 총수의 10% 이상의 서명을 받아야 하고, 시장·군수와 자치구의 구청장은 15% 이상, 지역선거구 시·도의회 의원 및 지역선거구 자치구 시·군 의회 의원은 20% 이상의 서명을 받아 관할 선거관리위원회에 청구할 수 있다. 주민소환 투표가 실시돼 해당 지방자치단체 유권자 총수의 3분의 1 이상이 투표하고, 유효투표 총수의 과반수가 찬성하면 확정된다.) 서명 받아 결과에 따라 해임 할 수 있다는 보도이후 의정회, 종교, 교육계, 사회단체인사와 지역주민들의 격려와 더 많은 정보를 요청해 주민소환제 법률과 군민의 여론을 함께 보도한다. 지난달 11일 군의회 상임위 신설에 강한유감을 논의하는 자리에 참석한 ㅊ씨는 "선출직공직자들이 주권자인 군민을 등한시하고 군정발전을 소홀히할 때 태안군의 주권자인 군민이 직접 나서 주민소환제를 실시해 비정상을 정상화할 때"라고 발언해 참석자들과 의견을 같이했다. 이원면 A모(58) 단체장은 "군 의원들이 의미 없는 일을 한 것이다. 전문성 필요에 상임위를 신설했다는데 직책이 중복돼 전문성과 공정성이 없어졌다. 더욱 이해가 안되는 건 작은 마을회관 노후 수리도 개발위원회를 거쳐 주민총회에 상정해 다수결의 절차에 따라 모든 것을 결정한다"며 "풀뿌리정치의 표본이 돼야할 군 의회에서 6만3천여 군민과의 간담회 및 공청회 한번 하지 않고 거침없이 상임위를 설치해 어쩌자는 것인지 의문스럽다"고 말했다. 소원면 B모(67) 단체장은 "요즘 군의회 모 의원이 태안군의회를 좌지우지한다는 말을 듣는데 의원은 각자가 독립된 기관이고 군민을 대표하는 선출직 위원인데 어느 한사람의 방향으로 흐른다면 당연히 주민소환제 대상이 되지 않겠는가"라며 "군민 주권자가 선출한 의원을 오라 가라 하며 월권을 하는 것 같다는데 있을 수 없는 일이며, 해서도 안 된다"는 의견을 꼭 기사화해줄 것을 당부했다. 남면의 C모(58) 단체장은 "전문성을 지향할때 위원회의 필요성을 인정한다. 지금부터는 위원회 별로 운영이 이뤄진다고 볼때 작은 수의 의원들이 심의할 때는 다수 의원보다는 효율이 떨어진다"며 "위원회 책임제를 도입해 끝까지 소속의원들이 책임지는 조례 제정 같은 보안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근흥면 D모(59) 단체장은 "세비 몇천만원 늘어나는 것이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전문화를 위한 것이라 주장하나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군의원이 8명인데 상임위가 3곳이면 직책이 중복이 될 것이다. 본인들 안건이 의원총회 상정돼 심의할 때 누가 반대하겠는가. 본인 것을 본인이 심의하게 될때 큰 문제가 발생된다"며 "종전처럼 8명 의원이 함께 심의해 찬성과 반대가 공전할때 합리적인 결과가 표출될텐데 그 점이 아쉽다"고 전했다. 태안읍 E모(66) 단체장은 "상임위 신설로 인하여 공무원 증원과 세비 등 군민의 혈세를 사용치 않는다는 태안군의회 조례를 제정해 군민을 안심시켜야 할 것을 지적했다."
많이본뉴스
많이 본 뉴스
- 1 [교통통제]천안 남부대로 임시우회도로, 21일부터 통행속도 제한
- 2 국내외 재즈 뮤지션 총출동…천안국제재즈스트리트, 18~19일 개최
- 3 천안홍대용과학관, '도심 속 이동천문대 별빛충전소' 운영
- 4 병천면 행복키움, 취약계층에 오이김치 나눔
- 5 직산읍 새마을부녀회, 가정의 달 맞이 열무김치 나눔
- 6 쿠첸, 입장면 취약계층에 주방가전 기부
- 7 지역 12개 대학과 함께한 ‘유니브시티 페스티벌’, 큰 호응 얻은 가운데 마쳐
- 8 [현장영상] 꼼수 국외출장 "논란거리 아니다"는 박경귀 아산시장에게 물었더니...'잉'
- 9 [단독] 일봉산사거리 '유관순 동상' 이전 검토…마땅한 장소는?
- 10 민주당 시의원들, 일본·북유럽 방문 박경귀 아산시장 ‘꼼수 출장’ 규탄
- 11[단독] [단독] 시민들은 수일을 대기해야하는 현수막 게시, 정당들은 ‘논스톱?’
- 12 아산시의회 제248회 임시회 폐회, 새해 첫 추경안 본회의 문턱 넘어
- 13 천안상고 박현석 학생, 상지대 총장배 태권도대회서 ‘금빛 발차기’
- 14 [독자기고] 국가 경제의 동맥인 송유관 절도를 보며
- 15 천안신문 발전위원회 5월 월례회 개최
- 16 순천향대천안병원 석면환경보건센터, 환경부 사업 재지정
- 17 용화사, 목천읍 취약계층 위한 후원금 200만 원 기탁
- 18 청년 문화예술 활성화 위한 '안서 유니버스' 서포터즈 발대
- 19 천안시, 노후경유차 조기 폐차 지원금 2차 지원…700여 대 접수
- 20 [영상] 중앙아시아 방문 김태흠 충남지사, 우즈벡 총리 깜짝 접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