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지평을 여는 에세이⑤] 아홉 살 그 아이 ‘반화자’

기사입력 2024.05.06 15:20 댓글수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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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영곤 / 문학평론가, 수필가, 시인.

    [천안신문] 아홉 살의 몹시 추운 겨울날이다. 언니와 고모들, 집안 어른들과 가족들은 낯선 옷을 걸친 채 안쓰러운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아무렇지 않은 듯 고무줄 위를 더 열심히 뛰었던 그날은 엄마의 상여가 나가는 날이었다. 

     

    나는 나무 인형처럼 꽁꽁 매여 누워있는 엄마가 무서워 도망치듯 그곳을 빠져나왔다. 어른들의 울음이 슬픔인지 두려움인지도 가늠할 수 없었던 어린 날의 내가 생생하게 보인다.

     

     

    엄마가 떠난 후 나는 어떤 응석도 부리지 않는 아홉 살 애어른이었다. 한 눈금씩 단계를 밟지 못하고 성장을 완전히 이루지 못한 아홉 살 꼬마는 아직도 내 속에 웅크리고 숨어있다. 

     

    불쑥 튀어나오는 불균형적인 내 여린 감성은 사소한 일에서조차 서럽다며 자주 눈물을 떨구곤 한다.

     

    친구들이 아무렇지 않게 엄마에게 해대는 것들을 나는 부러워했다. 나도 엄마가 있다면, 엄마의 따뜻한 밥상을 받아 보고 싶다. 반찬 투정 한번 해보고 싶다. 사소한 일에 짜증을 부려보고 싶다. 

     

    달그락달그락 엄마의 부엌 소리를 자장가 삼아 늦잠 한번 늘어지게 자보고 싶다. 밥 먹으라며 날 깨우는 엄마의 목소리를 들어 보고 싶다. 우리 딸 예쁘다며 잘했다고 최고라는 엄마의 칭찬을 들어 보고 싶다.

     

    아픈 날 엄마 집에 가고 싶다. 무조건 내 편인 엄마를 갖고 싶다. 내게 커다란 구멍 하나 뚫어놓고 떠나버린 사진 속의 젊은 엄마는 편안한 모습이다.

     

    ‘엄마, 배고파. 밥 줘’ 소리 지르며 급히 신발 벗어 던지고 뛰어 들어오는 아홉 살 그 아이를 오늘 밥상에 불러내 앉혀본다. 밥상에 둘러앉은 내 아이들보다 한참 어린 그 아이에게 애틋한 젓가락질을 놓지 못한다. 내 안에 엄마를 불러내 본다.

     

    ▣ 감상평

     

    드라마의 한 장면이 떠오른다. 곧 죽음을 앞둔 할머니를 아름다운 정원에 모신 가운데 일부러 파티를 벌이는 풍경이다. 

     

    벚꽃처럼 미소가 만발하는 후대들의 모습을 배경으로 할머니의 뜨거운 시선이 클로즈업된다. 그 순간 내게 파우스트의 목숨을 건 고백이 들리는 듯했다. "멈추어라, 너 정말 아름답구나."

     

    반화자 수필가의 아홉 살은 "엄마의 상여가 나가는 날"이었다. 그런데 그녀는 "아무렇지 않은 듯 고무줄 위를 더 열심히 뛰었던" 날이다. "나무 인형처럼 꽁꽁 매여 누워있는 엄마"를 아홉 살 아이가 받아들이기에는 무서웠기 때문이다. 

     

    "친구들과 팔짝팔짝 고무줄 놀이를 하며 눈치를 살피는" 그 아홉 살 아이를 배경으로 집안 어른들과 가족들의 "안쓰러운 눈"이 클로즈업된다. 

     

    설상가상으로 할머니도 돌아가시고 고모 마저 시집을 갔으니, 반화자 꼬마는 "어떤 응석도 부리지 않는 아홉 살 애어른"이 되고 말았다.

     

    그 아홉 살 꼬마가 반화자 수필가의 내면 무의식 속에 "웅크리고 숨어 있다"가 현재에도 불현듯 불쑥 튀어나오곤 한다. 슈테파니 슈탈의 표현을 빌리자면 내 안의 그 아이는 무의식 속 '내 안의 그림자 아이'다. 

     

    이 그림자 아이가 자리잡게 된 것은 어디까지나 주변 환경, 특히 어머니 상실을 통해서다. 바꾸어 말하면 결코 내탓이 아니란 것이다. 그러기에 '내면의 어른'을 자기합리화하여 웅크린 상처를 외면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프로이트가 처음 만든 '방어기제' 개념은 '불안이나 수용할 수 없는 충동을 막기 위해 현실을 왜곡하거나 부정하는 무의식적 심리 전략'을 일컫는다. 이 중에서 '안정감을 느끼기 위해 발달 초기, 즉 어린 시절로 돌아감으로써 불안감을 해소하는 방어기제를 '퇴행'이라 한다.

     

    반화자 수필가는 그림자 아이를 직시하고 위로하며 받아들일 때 '내면의 어른'이라는 방어기제적인 삶으로부터 비로소 '그림자 아이'가 '햇빛 아이'로 해방될 수 있다는 희망의 메시지를 전해주는 작가이다. "아홉 살의 내가 감당할 수 없었던, 엄마를 떠나보내던 기억이 지금 되살아나는 건 이제야 울먹이지 않고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는 말일까?"

     

    "엄마, 배고파. 밥 줘." 반화자 수필가는 가끔 엄마가 보고플 때마다 따뜻한 밥상에 마주앉는 '내 안의 아홉 살 그 아이'를 더이상 돌려보내지 않는다. 그 아이에게 "애틋한 젓가락질을 놓지" 않는 '편안한' 얼굴이다. 

     

    자신이 살고 있는 상징계(라깡)와 실재계 사이에 "커다란 구멍 하나 뚫어놓고 떠나버린 사진 속의 젊은 엄마"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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