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성희 칼럼]1등만 기억하는 세상

기사입력 2012.12.18 10:56 댓글수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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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윤성희(문학평론가)


    한 개그 프로그램이 ‘일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이라는 유행어를 퍼뜨린 일이 있었다. 어떤 대기업은 ‘아무도 2등은 기억하지 않는다’는 광고 시리즈로 강한 인상을 심어주기도 했다. 실제로 로또 당청금만 보아도 일등과 이등의 거리는 셈하기 어려울 만큼 아득히 멀다. 로또가 아니라도 일등의 자리라는 게 누구나 누릴 수 있는 영광은 아니다. 일등의 유일성을 얻어내기 위해 흘린 땀방울의 가치를 생각해 보면 안다. 문제는 개그 프로그램이 던지는 메시지처럼 일등이라는 꼭짓점을 받치고 있는 밑변의 가치를 외면하는 현실이다.


    1936년 제11회 베를린올림픽대회 마라톤에 출전한 남승룡 선수는 무명의 신인이었다. 조선 마라톤의 역사나 수준으로 볼 때 남승룡을 비롯한 우리의 마라톤 선수들은 참가하는 데 의의를 둘 수밖에 없던 시절이었다. 그러던 때에 남승룡은 일장기를 가슴에 단 채 올림픽 동메달의 주인공이 되는 기적을 이루었다. 그러나 그는 조선의 영웅이 될 수 없었다. 일장기를 달아서가 아니라 또 다른 기적의 주인공의 그늘에 가렸기 때문이다. 베를린올림픽 마라톤 우승의 월계관은 양정고보 1년 후배이자 한 살 아래인 손기정 선수에게 돌아갔던 것이다.


    남승룡 선수는 손기정 선수가 받았던 세인의 조명 뒤편에서 어둠침침한 여생을 보내야 했다. 심지어 1947년 보스턴 마라톤대회에서 서윤복 선수가 우승을 차지할 때 한국 선수단 감독은 손기정이었고 코치는 남승룡이었다. 30대 후반의 남승룡 코치는 반강제로 임명되다시피 한 코치직을 버리고 현지에서 직접 선수로 뛰어 10위로 골인했다. 그러나 이때도 남승룡 선수의 의지와 도전 정신은 금메달을 차지한 서윤복 선수의 빛에 가리고 말았다. 1950년대 무렵 10여 년 간 전남대 교수로 봉직했고, 국민훈장 모란장도 제수 받았으나 금메달이 없는 남승룡 선수에게 세계는 ‘일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이었다.


    올해 한국영화 관객 1억명 돌파를 기념하는 행사가 지난 6일 충무로에서 열렸다고 한다. 영화인들이 거리에 나서 스크린쿼터 사수를 주장하며 극렬한 시위를 하던 때가 불과 7년 전이었다. 극장에서 1년에 일정한 기준 일수 이상 반드시 국산 영화를 상영하도록 한 제도가 스크린쿼터였다. 스크린쿼터 제도를 축소하면 한국영화가 죽는다고 아우성을 치던 영화인들이 떠들썩한 잔치판을 벌인 가운데 12월 관객까지 어림잡아가며 초유의 기록 갱신에 이목을 집중하고 있다. 영화계의 상전벽해 앞에 미처 격세지감을 느낄 겨를이 없을 정도이다. 참 자랑스럽고 잘한 일이다.


    이제 천만 관객을 모으는 영화가 새삼스럽지 않다. 그러나 흥행 기록의 대박 성과에도 불구하고 영화판에 드리운 또 하나의 그늘을 우려스럽게 보지 않을 수 없다. 한국영화 최초로 베니스영화제 황금사자상을 수상한 김기덕 감독의 ‘피에타’가 60만 관객에 그치고 만 것도 우리 영화계의 심각한 현실이다. 한국영화의 눈부신 발전에 긍지를 느끼는 관객조차도 더 이상 영화관에서 ‘피에타’를 볼 수 없게 되어 있는 것이다. 대기업의 상영관 독점으로 영화생태계는 지금 파괴 직전까지 와 있다. 어떤 사람들은 이런 현실을 자본의 덫에 갇힌 위기의 영화계로 진단한다. 당연히 경청할 만하다. 국민 모두가 돈이나 권력으로부터 차별받지 않아야 하듯이 영화도 자본과 문화 권력으로부터 차별받아서는 안 된다.


    자본이 문화 권력으로 대두하고 그 권력의 뒷심에 기대어 한국영화가 요동친다면 앞으로의 영화에 대한 기대는 접어야 마땅하다. 물론 영화의 흥행 여부가 전적으로 자본에 종속되어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영화계에 존재하는 자본의 현실적인 영향력은 성과주의, 일등주의에 매몰된 우리에게는 간단한 것이 아니다. 일등의 화려한 조명에만 눈이 부셔 그 그늘에 가린 저변의 가치를 외면해서는 안 된다. 마찬가지로 흥행성과의 자본 뒤에서 애처롭게 식어가고 있는 열정을 가벼이 생각해서는 영화의 앞날이 없다. 일등만이 세상의 유일한 하나는 아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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