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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눈에 알아보는 천안시 정치역사 6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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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눈에 알아보는 천안시 정치역사 60년

 

창간기획특집…1대~19대 국회의원 선거 총망라


지난 4월11일 제1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천안갑 양승조 의원, 천안을 박완주 의원 등 모두 민주통합당 소속의 의원이 선출돼 두 의원이 어떤 의정활동을 펼칠 지 많은 기대가 모아지고 있다.


그럼 그동안 천안을 대표해 국회로 진출한 의원들은 누구였으며 어떤 활동을 펼쳤을까.

천안향토문화연구회(회장 김성열)가 발표한 ‘천안지역 국회의원 60년 약사’와 국회 역대선거정보시스템에 따르면 천안지역 역대 지역구 국회의원 수는 총 19명으로 이중 ▲김종철 의원(4·7·8·9·10대)이 5선으로 최다선 의원이며 이어 ▲3선에 이상돈 의원(1·5·6대), 함석재 의원(14·15·16대), 현역인 양승조 의원(17·18·19대) ▲재선에 김용화(1·2대), 한희석(3·4대), 황명수(9·11대), 이성근(9대·10대/유신정우회), 정재원(10·12대), 정선호(11·12대), 정일영(13·15대), 박상돈(17·18대) 의원 ▲초선에는 이병국(1대), 홍춘식(5대), 김종식(13대), 성무용(14대), 전용학(16대), 김호연(18대), 박완주(19대) 의원 등이 있다.


천안저널이 창간 1주년을 맞이해 기획특집으로 1대부터 19대까지 천안시 국회의원 선거의 역사를 되짚어 보는 기회를 가졌다.


제1대 제헌국회의원 이병국 등 3명 탄생


▲ 천안시 1대 국회의원. 이병국, 김용화, 이상돈 의원.

한국 헌정사상 최초의 의회라는 뜻에서 제헌의회라고도 불리는 제1대 국회에는 천안시에서 무려 3명의 국회의원이 탄생했다.


1948년 5월10일 치러진 첫 국회의원 선거에서 천안시는 10명의 후보가 출마한 가운데 대한독립촉성국민회 천안지부 이병국(李炳國·당시 66세) 위원장이 1만9590표를 얻어 한국민주당 이상돈(1만21표) 후보를 제치고 첫 국회의원에 당선된다.

이병국 의원은 1919년 강우규 의사의 사이토 총독 암살사건 협력 혐의로 서대문형무소에서 5년을 복역하는 등 독립운동가로 활동했다.

그러나 이 의원은 당선 1년도 못돼 1949년 4월8일 사망하게 되고 1949년 6월10일 보궐선거를 치렀다.


선거결과 무소속 김용화(金鏞化·46) 후보가 1만3055표로 한민당 이상돈 후보(1만2971표)를 겨우 84표 차이로 따돌리며 당선됐다.

하지만 김용화 의원은 국회출석 13일만에 공산주의자 혐의로 구속되며 국회의원 자격을 상실하게 된다.

헌데 김 의원이 공산주의자로 혐의를 받게 된 이유를 보면 다소 어이가 없다.

유세연설 중 ‘민주주의란 비빔밥과 같다’는 발언을 했는데 비빔밥은 고추장으로 비비고 빨개지게 된다는 아이러니한 이유로 이른바 ‘빨갱이’로 몰아간 것. 정치적 힘에 밀린 그의 억울함을 뒤로 하고 1949년 7월23일 재보궐선거가 치러지고 민주국민당 이상돈(李相敦·37세) 의원이 1만7960표로 국민당 류 홍 후보(1만7850표)를 110표 차이로 신승하며 세 번째 제헌국회의원으로 당선된다.


천안군 환성면 신당리 월경마을 출신인 이상돈 의원은 일본 와세다대 경제과를 졸업하고 동아일보편집국 논설부에 입사, 동아약품공업사 상무이사, 민주국민당 선전부차장, 제헌동지회 회장 등으로 활동했으며 5대 6대 국회의원을 역임하게 된다.


제2대 피란국회 김용화 의원


6.25전쟁으로 대전ㆍ대구ㆍ부산 등 피란국회가 됐던 제2대 국회에는 빨갱이로 몰려 의원직을 상실했던 김용화 의원이 당선됐다.


국민당 소속으로 출마한 김용화 의원은 1950년 5월30일 무려 12명의 후보가 출사표를 던진 가운데 치러진 선거에서 1만4254표로 민주국민당 이상돈(9850표) 후보를 4404표 차이로 압승했다.

선거당시 김 후보의 선거구호 ‘억울하다 김용화’, ‘심술 궂은 이상돈’, ‘대머리 까진 정현모’, ‘땍거리 없는 한양수’, ‘나둥그러졌다 나동찬’ 등은 한 때 천안지역의 동요였을 정도로 그의 억울함은 지역주민들과 공감대를 형성한 것으로 전해진다.


함경남도 함흥 출신인 그는 일찍이 일본에 건너가 일본대학 법과를 나와 북경대학에서 정치학을 수료한 후 전문학교 교수, 만주에 건너가 외국어학교에서 중국어 교사로 활동하다 귀국 후 천안에 정착해 신부동 방죽안에서 과수원을 경영하다 정계로 투신했다.


특히 6.25전쟁 이후 부산으로 피신했던 정부가 북쪽으로 이동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1951년 11월15일 김용화 의원은 59명의 의원과 함께 대전임시 천도안을 발의했다.

이 건의안을 국회가 의결하면서 대전천도설은 급물살을 탔지만 1953년 정전협정 후 서울로 환도하면서 무산되고 말았다.

김용화 의원은 청렴한 성품으로 6.25, 5.16 등 정치적 격동기를 겪으면서 경제적 어려움을 겪은 것으로 알려졌다.


제3대~4대 한희석 의원, 자유당정권 중심인물


천안지역의 제3대 국회의원 한희석 의원은 친일파와 자유당정권 권력의 핵심인물로, 일제 말기부터 이승만 대통령과 자유당정권의 쇄락까지 정치생명을 함께 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본인의 저서 ‘자유당과 함께 걸어가련다’의 별책 ‘내가 걸어온 길, 내가 걸어갈 길’과 ‘한국혁명재판사’ 및 한국일보 등에 따르면 한희석(韓熙錫) 의원은 일제 때 조선총독부 내무국 속관(屬官), 창령군수, 동래군수, 평남 지방과장을 역임했다.

그리고 이승만 정권의 출범과 함께 내무부 행정과장, 내무부 지방국장, 상공부 공업국장, 내무부 차관 등의 요직에서 활동하는 등 탄탄대로를 걸었다.


1954년 5월20일 자유당 소속으로 출마해 3만3032표를 얻으며 국민당 이상돈(1만1401표) 후보와 무소속 박영민(1만1207표) 후보를 압도적인 표차이로 따돌리고 44세의 나이로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국회에 입성한 이후에도 국회 내무위원장과 자유당 중앙위원회 부의장 등 자유당 서열 3, 4위의 고위직에 올랐다.


특히 1960년 3월15일 정·부통령 선거를 맞이해서는 자유당 정·부통령 중앙선거대책 위원회 위원장 겸 기획위원회 위원장에 선임됐다.

그는 1954년 자유당이 이승만 대통령의 종신집권을 위해 ‘초대 대통령에 한해서는 기수의 제한을 받지 않는다’고 제안한 개헌안이 11월27일 국회표결결과 202명중 가결 135, 부결 60, 기권 7표로 부결됐다고 발표한 최순주 부의장이 불과 이틀 후인 11월29일 ‘재적의원 203명 중 3분의 2에 해당하는 135.3333은 사람을 소수점까지 나눌 수 없기 때문에 135명이 찬성한 것은 가결’이라고 번복하는 이른바 ‘4사5입’사건을 옹호하는 연설을 펼치며 사건의 중심인물로 부각된다.


한 의원은 또 1956년 5월15일 부통령 선거에서 자유당 이기붕 의장을 제치고 당선된 장 면 부통령이 연합통신 기자회견 등에서 이승만 정권을 헌법을 위배한 부패정권이라고 강력히 비판하자 국회연설을 통해 “장 부통령 자신과 그 당의 이익을 위해 나라와 국가도 없는 언동을 취했다”며 “국민과 같이 통탄을 느껴 국가와 민족의 이익을 위해 경고한다”고 비난했다.

공교롭게도 이 경고가 있은 지 한달 열흘 후인 9월28일 장 면 부통령은 민주당대회에서 저격당했다. 후에 이 사건은 자유당정권의 실력자 몇몇이 치안국장 김종원에게 사주해 저격토록 사사한 것으로 밝혀졌다.


한희석 의원은 1958년 5월2일 제4대 민의원 총선에서도 2만166표를 얻으며 민주당 홍춘식(9585표) 후보를 큰 차이로 따돌리고 무난히 재선에 성공했으며 1959년에는 국회부의장으로 피선됐다.

당시 부의장직은 이승만 대통령, 이기붕 의장, 이재학 선임 부의장 다음인 자유당 서열 4위였다.


1958년 8월11일 제4대 총선의 부정선거로 국민들과 야당의 불신에 위기감을 느낀 자유당은 제4대 대통령 선거를 위해 야당과 언론을 통제하기 위한 국가보안법 개정안을 국회에 상정한다. 야당은 이 법이 야당 탄압의 수단으로 사용될 것이라고 강력히 반대하며 투쟁했다.

그러나 자유당은 12월24일 무술 경관 300여명을 동원해 야당 의원들을 감금하고 국회의사당 정문을 폐쇄시킨 채 국가보안법과 지방자치법 개정안을 비롯해 10개 법안 27개 의안을 통과시키는 24파동을 강행했다.

당시 의장의 자격으로 의장 경호권을 발동시킨 한희석 의원은 이 사건의 중심에 서 있었다.


24파동을 책임지고 부의장직을 사퇴한 한 의원은 자유당 선거대책위원장 겸 선거대책기획위원회 위원장으로 3.15부정선거 핵심인물로 활동한다.

3.15 부정선거는 제4대 대통령, 제5대 부통령 선거에 나선 이승만 대통령과 이기붕 의장을 당선시키기 위해 자유당에서 정치깡패 이정재, 임화수 등을 동원해 부정선거 개표조작을 감행한 사건이다.

부정선거가 폭로되자 각지에서 학생들의 항의시위가 일어났고 이중 김주열 학생이 의문의 죽음을 당한 뒤 마산 앞바다에 유기되면서 후일 4.19혁명의 도화선이 된다.


이승만 정권이 몰락한 후에도 한희석 의원은 1960년 7월29일 선거에 또 출마하면서 천안지역의 1000여 학생들의 시위를 촉발하기도 했다.

한 의원은 1961년 9월20일 혁명재판소에서 자유당 간부로는 유일하게 사형을 선고 받고 12월6일 항소심에서도 사형을 선고받는다.

그러나 12월21일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은 송지역, 유지광 등과 함께 그의 형량을 무기징역으로 한단계 낮췄고 1963년 5.16기념 특사 때 15년 형으로 감형됐다가 12월16일 자유당과 이승만정권 관련자들이 모두 석방될 때 함께 석방됐다.

이후 1968년부터 사업을 시작해 진양화학공업 사장과 회장을 역임했고, 후에 동광약품 사장으로 있다 1983년 75세 나이로 사망했다.


제4대 김종철 의원, 대선까지 출마한 최다 의원


제4대 선거에서 을 선거구에 자유당소속으로 출마해 1만8924표를 얻으며 이상돈(1만4633표) 후보를 누르고 당선된 김종철(金鍾哲·당시 38세) 의원은 천안 직산면 상덕리에서 태어나 1942년 일본 메이지대학 상과를 졸업하고 광복 직후 우익청년단체인 대동청년단 선전부장으로 청년운동을 펼치며 사관학교 설립과 군사영어학교 재정지원에 관여하는 등 국군창설에도 한몫을 담당했다.


특히 김 의원은 한화그룹의 전신인 한국화약을 동생 종희(鍾喜)와 함께 설립해 회장직을 맡은 바 있으며 제4대 국회의원 당선 뒤 자유당 충남도당위원장 및 대한필드하키협회장 등을 지냈다.

1960년 4.19로 정치일선에서 물러났다 1967년 천안·천원에서 민주공화당의 공천을 받아 제7대 국회의원으로 당선돼 정계에 복귀했다. 이후 제8∼10대 국회의원으로 민주공화당 충남도 지부위원장·당무위원·국회경제과학분과위원장 등을 지냈다.


제5공화국의 출범과 함께 1981년 구 민주공화당계 인사들을 중심으로 한국국민당(韓國國民黨)을 창당해 총재 및 제12대 대통령후보가 됐다. 총재로 당을 이끌면서 1985년 전국구 제1번 후보로 제12대 국회의원이 됐으며, 이후 총재직을 사퇴한 뒤 고문으로 활동했다.

김 의원은 지역구에서는 5선이었지만 12대 전국구 국회입성까지 포함하면 6선 의원이다.


그의 동생인 김종희씨는 한화그룹의 창시자가 됐고 김종희 회장의 아들 김호연씨는 빙그레의 사주이자 천안 을선거구 18대 국회의원을 지냈으며, 김종철 의원의 차남 김종식씨는 13대 국회의원을 역임했다.


제5대 갑 홍춘식, 을 이상돈


▲ 홍춘식 의원.

1960년 7월29일 진행된 제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갑선거구에서 민주당 홍춘식 의원(洪椿植·37세)이 8732표를 얻어 한희식(5619표) 전 의원과 누르고 당선됐으며, 을 선거구에서는 1대 마지막 의원인 이상돈 의원이 재선에 성공한다.


제5대 국회는 참의원과 민의원을 구분하는 첫 양원제가 실시됐다. 허나 9개월만인 1961년 5.16 군사 쿠테타로 폐원된다.


홍춘식 의원은 1923년 목천에서 태어나 만주대학을 수료하고 경찰전문대 교수로 활동했다. 사사오입개헌 반대 호국동지회 후 민주당 조직에 참여하고 천안위원장에 임명된다.


제6대 이상돈 의원 3선


▲ 이상돈 의원.

1963년 11월26일 시행된 제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이상돈 의원(2민2805표)이 민정당으로 출마해 국민당 김종철 전 의원(1만9792표)과 민주공화당 홍춘식 전 의원(1만3055표)을 따돌리고 3선에 성공했다.


제6대 선거부터는 천안시-천원군 선거구로 다시 단일선거구로 치러졌으며 이상돈 의원은 초대와 5대 선거에서만 다수당으로 활동했으며 이후부터는 평생을 야당에 몸담았다.


6대에 당선된 뒤 1966년 민중당 충남위원장을 역임하고, 1968년 신민당 정무위원을 지냈으며 1973년 신민당을 탈당해 민주통일당 창당에 참여하다가 1978년 탈당, 재야에서 반유신체제운동을 펼쳤다.

1987년 평화민주당 고문의 자격으로 김대중(金大中) 대통령 후보의 선거대책위원장을 역임했으며 그 뒤 1992년부터 1994년까지 제헌동지회 회장을 역임했다.


이상돈 의원은 언론인 출신 정당인답게 다수의 논설과 정치평론을 여러 언론매체에 발표해
‘반공·반독재·반부패 투쟁 20년’, ‘회상반세기-투쟁20년’, ‘정치와 윤리’ 등의 저서를 출간했으며, 1950년대 이승만 독재와 싸움을 시작한 이래 1960년대부터는 역대 군사독재 정권과도 타협하지 않았던 의회민주주의자로 평가받는 등 언론활동과 야당에서의 민주화를 위한 줄기찬 투쟁으로 국가에 공헌한 업적을 인정받아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받기도 했다.

이후 7대~8대는 김종철 의원이 단독 지역구 의원으로 선출된다.


제9대 김종철, 황명수, 이성근 의원


▲ 황명수 의원.

유신정권이 서면서 박정희 대통령은 정치체제 개혁을 선언하고 초헌법적인 국가긴급권을 발동해 국회를 해산하고 정치활동을 금지했다.

동시에 전국적인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1972년 11월21일 유신헌법을 확정, 1973년 2월27일 치러진 9대 국회의원 선거는 직접선거로 선거구별 다수득표자 2인을 선출하고 국회의원 정수의 3분의 1은 대통령의 제청에 따라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간접 선출하는 전국구 성격의 유신정우회(유정회) 국회의원으로 나눠 실시했다.


이렇듯 국회의원 정수의 3분의 1을 대통령이 지명함으로써 제9대 국회의원선거는 ‘반토막 선거’라는 비난을 받았고, 유신독재에 따른 정치적 자유의 위축으로 평균 경쟁률이 2.3 대 1이라는 낮은 기록을 나타냈다.


천안시, 천원군, 아산시를 한 구역으로 실시된 직접선거에서는 민주공화당 김종철 의원(1만8734표)과 신민당 황명수(黃明秀·43세) 의원(9307표)이 선출됐으며, 유정회 국회의원으로는 이성근(李聖根·36세) 의원이 선임됐다.

지역구 국회의원의 임기는 6년, 유정회 국회의원의 임기는 3년으로 이성근 의원은 재임해 지역구 의원들과 임기를 같이 했다.


아산 출신인 황명수 의원은 동국대 정치과를 졸업하고 아산인주보통학교 교사로 재직 중 정계에 입문하게 됐다.

천안에서 재선한 후 아산과 선거구가 분리된 후에도 당선되며 4선까지 성공, 김영삼 대통령의 최측근으로 활동하며 국회 국방위원장과 함께 민주산악회 회장 등을 역임하게 된다.


천안중학교를 졸업하고 연세대 정치과를 졸업한 이성근 의원은 배제대 총장, 한성대 총장, 대구예술대 총장, 명지대 총장 등을 역임하며 민주국민당 정책위의장으로 활동했다.


제10대 김종철, 정재원 의원


▲ 정재원 의원.

1978년 12월12일 치러진 제1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민주공화당 김종철 의원(1만3589표)과 신민당 정재원(鄭在原·37세) 의원(1만6378표)이 당선됐다. 그러나 제10대 국회는 박정희 대통령시해 광주민주화운동 후 신군부에 의해 1년7개월 만에 해산된다.


천안농고를 거쳐 고려대 정치학과를 졸업한 정재원 의원은 해병ROTC로 월남전에 참전 고엽제투병생활을 하게 된다.

정 의원은 유신말기 김영삼 대통령과 끈끈한 인맥을 함께 해 온 천안의 대표적 야당인으로 신민당 총재 비서와 특별보좌역, 신민당 홍보대책위를 맡은 신예 정치인이다.

부가가치세가 악법이라고 규탄하고 서민생활을 호소하는 연설로 인기를 얻으며 10대 국회에 입문한 정 의원은 11대 선거에서는 낙선한 뒤 12대에 신한민주당 소속으로 재도전에 성공하지만 이후 김영삼 대통령과 결별하면서 정치적인 입지가 약해져 16대 선거에 출마하지만 고배를 마시고 후학양성과 기업활동에 충실하고 있다.


제11대 정선호, 황명수 의원


▲ 정선호 의원.

제11대 국회는 5공 시대의 첫 국회로 야당인 민한당과 국민당은 전두환 정권이 만들어낸 어용 야당이라는 논란속에 외형만 다당제의 모습이라는 비난을 받게 된다.


특히 1981년 3월25일 실시된 제11대 국회의원 선거는 국가보위입법회의에서 제정된 ‘정치풍토 쇄신을 위한 특별조치법’ 등 각종 법적 조치에 의해 상당수 정치인들이 정치 활동을 규제받거나 정치적 이유로 처벌됨으로써 기성 정치인들은 발이 묶여 대부분의 의원이 초선인 국회가 됐다.


천안 역시 민주정의당 정선호(鄭善昊·42세) 의원(1만6388표)이 초선으로 입성했으며 황명수 의원(1만161표)이 무소속으로 출마해 재선에 성공한다. 정선호 의원은 천안농고와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후 미국 Purdue University 대학원에서 이학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아인슈타인 상대성이론을 비판하는 이론을 연구발표하기도 했다.

임기중인 1983년~1984년 제2대 체육부 차관을 지냈으며 천안에 독립기념관을 유치하는데 앞장 선 것으로 알려졌다.


제12대 국회의원 선거에는 10대 정재원 의원과 정선호 의원이 선출된다.


제13대 천안시 정일영, 천원군 김종식 의원


▲ 정일영 의원.

1988년 4월26일 천안시 단독 선거구로 처음 치러진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민주공화당 정일영 의원(鄭一永·44세)이 4만4659표 63.6%의 압도적인 지지율로 당선됐다.

천원군에서는 신민주공화당 김종식(金鍾植·46세) 의원이 2만5497표로 48.21%로 11대 정선호 의원과 정재원 의원을 물리치고 초선에 성공하게 된다.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16년 만에 소선거구제가 부활돼 지역구 224석과 전국구 75석을 합친 총 299석 중 민정당 125석(전국구 38석), 평민당 70석(전국구 16석), 민주당 59석(전국구 13석), 공화당 35석(전국구 8석), 한겨레민주당 1석(총선 직후 평민당에 입당), 무소속 9석 등 정당정치가 정착된 이래 최초로 집권여당이 과반수 의석확보에 실패하는 기록을 남기며 여소야대(與小野大)의 정국이 형성됐다.


정일영 의원은 천안농고, 서울대 농과대를 졸업하고 농장을 경영하며 천안중앙신용협동조합 이사장과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등 지역 정·재계에서 탄탄한 기반을 다지던 중 김종필씨가 이끄는 신민주공화당에 입성해 돌풍을 일으키며 국회에 입성한다.


김종철 의원의 차남인 김종식 의원은 용산고, 남가주대학교를 졸업하고 한국화약 주식회사 LA지사장과 미 한국어방송 사장 등을 역임하는 등 언론에서 활동하다 13대 국회에 입성한 후 초선의원으로 정치활동을 마감한다.


제14대 천안시 성무용, 천안군 함석재


▲ 성무용, 함석재 의원.

1992년 3월24일 실시된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천안시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한 성무용 현 천안시장이 3만5395표로 43.3%의 지지를 받고 당선됐다.

천원군은 1991년 천안군으로 명칭을 바꿨으며 민주자유당 함석재 의원이 2만4393표로 과반수(49.74%)의 지지율을 받으며 당선의 영광을 안았다.


14대 선거 방식은 13대선거와 크게 달라지지 않았지만 여당인 민자당이 이지문 중위(육군 제9사단 소속)가 ‘군부재자 투표부정’을 폭로하면서 여론이 악화되는 등 당 내분과 지방선거 연기공약에 대한 불만 등이 겹치며 과반수 확보에 실패했다.


용산고·연세대학교 상경대를 졸업하고 진왕산업 대표, 천안상공회의소 회장 등을 10년 넘게 역임하는 등 경제인으로서 탄탄한 관록을 다졌던 현 성무용 시장은 직전인 13대 선거에서 민정당 타이틀로 출마해 참패했지만 14대 선거에 무소속으로 출마해 당선하는 영예를 안는다.

하지만 15대 민자당, 16대 신한국당 공천을 받아 재도전을 하지만 당선에는 실패했으며 천안시장에 도전해 당선, 현재까지 3선 시장으로 위용을 다지고 있다.


함석재 의원은 천안시 사상 첫 법조인 출신 국회의원으로 서울법대 졸업 후 서울지검 검사, 대전지검 천안지청장 등을 거쳤으며 15대 대통령직 인수위원, 민족화해협력 범국민운동 협의회 공동의장 등을 역임하며 이후에도 15, 16대에 당선돼 3선 의원으로 남게 된다.


천안시와 천안군이 1995년 천안시로 통폐합된 후 1996년 4월11일 치러진 제15대 선거에서는 천안갑에 자유민주연합 정일영 의원, 천안 을에 같은 당 함석재 의원이 선출된다.


제16대 천안 갑 전용학, 을 함석재 의원


▲ 전용학 의원.

2000년 4월13일 치러진 제16개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천안 갑에 새천년민주당 전용학(田溶鶴·50세) 의원이 2만7668표(36.38%)를 얻으며 당선의 영예를 안았으며, 을에서는 함석재 의원이 2만6542표(40.59%)를 기록하며 3선에 성공하게 된다.


천안고를 거쳐 서울대 법대를 졸업하고 MBC 정치부 기자·세계일보 정치부 차장대우·SBS 보도본부해설위원·8시 뉴스앵커, 민주당 수석부대변인·노무현 대통령 언론특보 등을 거치며 대외활동으로 인지도를 확보한 전용학 의원은 16대 당선 이후 17대 선거에서 한나라당으로 당적을 바꿔 도전했지만 낙선 한다.

이후 18대 19대 선거에 계속 출마하지만 번번이 고배를 마시고 있다.


2003년 한나라당과 정치개혁특위위원 등을 맡았고 한나라당 제2사무부총장, 조지타운대학교 객원교수를 역임했다. 2007년 이명박 대선후보 충남선거대책위원회 총괄본부장으로 일했으며 2008년 한국조폐공사 사장으로 취임했다. 2012년 현재는 새누리당 천안시 갑 조직위원장을 맡고 있다


제17대 양승조, 박상돈 열우당 바람


▲ 양승조, 박상돈 의원.

현대정치사에서 17대 국회는 여러 가지 면에서 의미를 갖는다.

우선 최초로 후보자와 지지정당을 따로 뽑는 1인2표제 정당비례대표제를 채택했으며, 여당인 열린우리당이 과반수가 넘는 152석을 확보해 12대 국회 이래 16년만에 여대야소 국회가 탄생했다. 또 민주노동당이 10석을 얻어 국회 최초로 진보정당이 원내에 진출했으며, 여성 국회의원수의 비율도 13%(39명)를 차지해 처음으로 10%대를 넘었다.

그리고 초선이 187명으로 대폭적인 세대교체가 이뤄진 것이 특징이며 무엇보다 선거에 앞서 3월12일 한나라당이 노무현 대통령 탄핵안을 가결한 뒤 탄핵열풍이 불어 열린우리당 바람이 전국을 휩쓸게 됐다.


천안도 예외는 아니었다.

2004년 5월29일 실시된 선거에서 천안 갑 지역은 열린우리당 양승조(梁承晁·46세) 의원이 3만8675표로 45.33%의 지지율을 등에 업고 당선됐으며, 을지역에서는 박상돈(朴商敦·50세) 의원이 4만1615표로 45.51%의 지지율을 얻으며 금배지를 가슴에 달았다. 둘다 초선에 열린우리당이었다.


성균관대 법대와 단국대 정책경영대학원 특수법무학과를 졸업하고 변호사로 활동하던 양승조 의원은 선문대 법행정학과 겸임교수는 물론 천안·아산환경운동연합 감사와 천안시민포험 운영위원장 등 시민운동에 중점을 두다 17대 당선과 함께 정계에 입문하게 됐으며 각종 국회평가기관을 통해 우수의원상을 다수 받는 등 성실한 의정활동을 인정받으며 18대, 19대까지 3선에 성공한 상태다.


반면 박상돈 의원은 운명이 기구해졌다.

국회입성과정부터 남다르다. 박 의원은 당초 제3대 지방선거에서 후보자로 등록했지만 결격사유로 중도하차 해야 했다.

육군사관학교·서울대 행정대학원 석사과정을 마치고 아산군수, 서산시장, 충남도 기획정보실장, 청와대 대통령 비서실 행정관 등을 역임한 정통 행정전문가로 천안발전연구소장으로 활동하며 텃밭을 갈아 오던 중 열린우리당 입당과 함께 당선된다.


허나 박 의원은 자유선진당으로 당적을 바꾸고 2008년 18대 선거에서 재선에 성공했지만 지방선거에 도지사 출마를 결심, 도지사에 떨어진 후 19대 선거에서 다시 도전하지만 당선에 실패한다.


18대 천안 을 보궐선거 김호연 의원


▲ 김호연 의원.

2008년 4월9일 실시된 제18대 국회의원 선거결과 17대와 마찬가지로 갑은 민주당 양승조 의원이, 을은 자유선진당 박상돈 의원이 당선됐다. 하지만 박상돈 의원은 2010년 6월2일 지방선거에 도지사로 출마했다 현재 안희정 도지사를 넘지 못하고 고배를 마셔야 했다.


박 의원의 자리를 메우기 위해 2010년 7월28일 치러진 천안을지역 보궐선거에서 한나라당 김호연 (金昊淵·55세) 의원이 여의도에 입성한다.


천안 최다의원인 김종철 의원의 조카이기도 한 김호연 의원은 서강대 경영학 박사와 연세대 행정대학원 외교안보 석사, 충남도새마을 회장, 김구재단 이사장 등으로 활동하며 한국의 경영자상 은탑산업훈장, 국민훈장 동백장, 보훈문화상 등을 수상한 바 있다.


특히 빙그레 대표인 김호연 의원은 자산만 2104억원으로 18대 국회에서 정몽준 의원에 이어 국내에서 2번째로 재산이 많은 국회의원이었으며 충남에서는 최고 자산가로 이름을 날리기도 했다.


19대 선거 갑 양승조, 을 박완주 민주당석권


▲ 박완주 의원.

2012년 4월11일 열린 19대 총선에서는 앞서 밝힌 바와 같이 갑지역은 양승조 의원이 을지역은 박완주 의원이 선출되면서 양 선거구를 모두 민주통합당이 가져갔다.


양승조 의원은 3만6058표(50.8%)로 과반수 득표하며 새누리당 전용학 후보(2만8793)를 제치고 세 번 모두 이기며 3선 의원 기록을 달성했다.


18대 총선 도전포함 4년 동안 세 번이나 출마한 박완주 의원은 4만1945표(41.9%)를 득표하며 새누리당 김호연 전 의원(4만48표)를 1,9%차이로 따돌리며 당선의 영광을 누렸다.


성균관대 한국철학과를 졸업한 박완주 의원은 안희정 충남도지사 후보 대변인, 나사렛대 객원교수, 민주당 천안 을 지역위원장 등 지역정가에 젊은 일꾼을 표방해왔으며, 왕성한 활동을 기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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