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경환(1876.2.14~1909.1.10)
[천안신문] 독립기념관(관장 이준식)은 국가보훈처와 공동으로 독립운동가 조경환을 11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고 공훈을 기리는 전시회를 11월 한달간 개최한다.
조경환은 유년시절부터 꾸준히 유학에 정진하다가 전국을 돌며 조선 정국을 살폈다고 전해지며, 귀향 후에는 서당을 개설하여 구국활동을 전개하기 위한 후학을 양성한 것으로 추정된다.
1907년 8월 대한제국 군대가 강제 해산되며 일본의 국권 침탈이 본격화되자 국권수호를 위한 적극적인 활동을 결심했다. 당시 호남지역 의병전쟁을 이끌던 김준 의병장은 조경환을 찾아와 시국 현안을 논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조경환이 의병 참여를 결정했다.
▲ 1908년 12월 25일과 1909년 1월 16일자 대한매일신보로, 조경환 의진이 일본군경과 교전한 내용을 다루고 있다. 기사를 통해 조경환 의진이 장성, 광주 등지에서 활동했음을 알 수 있다.
1907년 12월 김준 의진에 합류하여 좌익장을 맡고, 호남지역에서 벌어진 수많은 전투를 주도하였다. 또한 여러 의병이 연합한 전투에서도 선봉장을 맡아 큰 활약을 펼쳤다.
1908년 4월 일본군과 교전 중에 김준 의병장이 전사하자, 흩어진 의병을 수습하여 재정비에 나섰다. 이에 전라북도에서 활동하던 전수용 의병장도 힘을 보태며, 2백여 명의 의병이 조경환을 중심으로 결사투쟁을 준비했다. 조경환 의진은 도통장 박용식, 선봉장 김원국 등으로 구성되어 전라남도 각지에서 일본 군경에 맹렬히 맞서 싸웠다.
▲ 진중일지의 조경환 관련 내용(1909년도) 진중일지는 일본군의 한반도 의병 조사와 전투에 대한 기록을 담고 있다. ‘조경환 이하 50여 명이 낮잠을 자는 중임’, ‘중앙에 돌출한 삼림 및 가옥에 각각 1명의 보초가 있음’과 같이 조경환 의진에 관한 기록을 확인할 수 있다.
한편 일본군은 어등산 일대를 수색하며 포위망을 좁혀갔고, 1909년 1월 두 시간 여 교전 끝에 조경환 의병장을 비롯한 20여 명의 의병이 전사하고 말았다. 증언에 따르면 총상을 입은 상황에서도 의병진 명단을 불사르며 의병들을 지키고 숨을 거두었다고 전해진다.
이에 정부는 조경환의 공적을 기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