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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칼럼] 벼슬 없이 선조 왕가(王駕) 모신 김계종(金繼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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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칼럼] 벼슬 없이 선조 왕가(王駕) 모신 김계종(金繼宗)

김성열실장.png▲ 천안역사문화칼럼니스트 김성열
[천안신문] 김계종은 안동이 관향이며 목천현 송정리에서 살았다. 김계종은 성품이 호방하여 작은 일에 구애 받지 않고 살았으며 호를 죽계라 하였다. 죽계는 죽림과 계곡을 말하며 청고한 생애를 보내자는 의지의 표현이다.

죽계는 가산이 부유하여 명승을 오유하면서 살아가는 중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처음에는 가족과 더불어 피난을 가려하였으나 적세가 창궐하여 임금이 의주로 몽진하였다는 소문을 듣고 “내 비록 포의의 몸이나 군주가 곤혹을 겪는데 어찌 일신의 안전을 위하여 피난이나 가리오”하고 가사를 아내에게 맡기고 의주로 향하였다.

 죽계는 의주 행재에서 임금을 알현하고 가지고간 전량으로 어수를 도왔다. 의주 행재는 군려의 양미와 조정수용의 조달이 어려워 어찬까지도 불성모양이었다. 그때의 상황을 짐작하기 위하여 당시 있었던 사실 하나를 소개하고자 한다.

당시 어찬의 수용까지 어려웠던 피난살이에 궁중비빈이나 조관들의 조석찬수가 궁핍하였다. 이때 평양도 어느 수령(守令 : 원님)이 찹쌀 몇 가마를 바쳐왔다.

이 찹쌀을 본김에 몇 말의 떡을 하여 나누어 먹고 정청(政廳)의 재상들에게 보내주었다. 재상들은 모처럼 떡을 맛보려고 막 둘러앉았는데 한재상이 들어오며 이 광경을 보고 호통을 쳤다.

지금 전선에서 군졸이 굶주리고 있는데 재상이 떡을 먹고 있으면 되겠느냐고 힐난하였다. 떡을 먹으려던 재상들이 무안하여 얼굴을 돌렸고 이 말을 전해들은 선조임금이 떡을 진어(進御)한 자신을 부끄럽게 여겼다.

죽계는 백의호종하며 이런 사정을 지실하고 위험한 전선을 뚫고 향리로 돌아와 은자를 마련하여 행재에 바치었다. 당시 대동강 이남은 적이 창궐하였으며 평안도 일부에서 조달하는 군량미는 매우 적었다.

압록강 건너 중국 땅에서는 물자조달이 가능했으나 이를 구입하려면 은자가 필요하였다. 그래서 죽계가 바친 은자는 요긴하게 쓰였다. 당시는 난중이라 기록이 소루하여 삼차나 분문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을 따름이다. 자세한 기록이 있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생긴다.

난후 논공행상 때 죽계를 발탁하여 안악군수를 제수하였다. 죽계는 안악군수로 부임하여 많은 선정을 베풀었다. 죽계가 안악군수로 부임했을 때는 난 후라 백성이 피폐할 때로 피폐한 때이다. 그래서 세공을 바치는데 큰 어려움을 겪었다.

죽계는 고향에 사람을 보내어 재원을 조달하다가 일군의 세공을 대납해 주었다. 세공을 수납할 때 수탈하는 수령이 허다하게 많은데 죽계는 대납까지 해주니 가난한 백성은 어버이 섬기듯 하였다. 죽계는 가세가 부유했으나 일군의 조곡을 대납해 주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아마도 공물을 대납한 게 아닌가 생각된다.

당시 공물은 지방특산물이어서 지방에서 서울로 운반하기에는 매우 어려워 전곡으로 거두어 서울에서 구매하여 바치는 곳이 많았다. 죽계가 자기 가산에서 전곡을 마련하여 서울에서 구매 대납한 게 아닌가 생각한다. 안악에는 선정 타루비(墮淚碑)가 세워져 있다. 죽계는 많은 재산을 조정에 헌납하고 또 백성을 위하여 썼으니  돈을 가장 잘 쓴 사람으로 기록하여 마땅할 것이다.

죽계는 안악군수를 마친 후 향리로 돌아와 유유자적하며 여생을 마친 듯하다. 죽계의 묘소는 천안시 병천면 봉항리 남향지원에 있으며, 그 후손들이 번성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죽계는 사후에 이조참판에 증직되었다.


천안신문 후원.p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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