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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고려 왕사(王師) 백문보(白文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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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고려 왕사(王師) 백문보(白文寶)

김성열실장.png▲ 김성열 / 천안역사문화칼럼니스트
[천안신문] 백문보는 고려 말 공민왕 때에 활약한 충신 직산 명현이다. 백문보의 본관은 직산, 자는 화부(和父)이며 사후에 충간공(忠簡公)의 시호를 받은 분이다.

생장시의 기록은 자세히 없으나 벼슬길에 발을 들여 놓은 다음부터 그의 강직하고 바른 안목은 여러 번 정치에 반영되어 고려사를 장식하였다. 그의 활약상은 고려사 충숙왕(忠肅王)때부터 우왕 때까지 여러 번 수록되어 있다.

백문보는 어려서부터 총명한데다 학문을 힘써 충숙왕 때 과거에 급제하여 검열(檢閱) 우상시(右常侍) 등 문한의 직과 왕의 측근에서 모시는 직책을 두루 역임하였으며 공민왕(恭愍王) 때 전리판서(典理判書)가 되어 왕을 보필 하였다.

전리판서는 고려 육조의 하나로 문관의 선임 공훈 봉작 등을 맡은 관청이며 판서는 이 업무를 총괄하는 장관이다. 처음은 상서이부(尙書吏部)로 명칭하다가 고려말기 직제개편 때 전리사(典理司)가 되었다. 사람을 뽑아 쓰는 관청이므로 선부(選部)라고도 하였다.

고려왕조는 4백여 년의 연륜을 거듭하는 동안 인재 등용 때 많은 폐단을 야기하였다. 더욱이 무신의 집권이후 인제 등용의 제도가 무너졌으며 몽고의 간섭을 받아 더욱 인재 등용이 문란해 있었다.

이때 인재 등용을 맡은 전리판서가 된 백문보는 유능한 인재를 바로 등용하여 조정을 바로 잡아 보겠다는 굳은 의지로 공민왕에게 여러 번 상소를 올려 인재 등용의 난백을 논하고 과거제도의 개혁을 주장하였다.

과거제도는 십과(十科)로 분리해 실시하므로 전문 관원을 뽑으며 또한 밀직사의 제학 등 요직은 반드시 과거로 뽑는 인재로 등용할 것을 제의하였다.

밀직사(密直司)는 고려시대 왕명의 출납ㆍ궁중의 숙위와 군기(軍機)를 맡은 관청으로 제학은 밀직사의 요직이었다. 왕의 측근에 중요 정책 결정에 참여하고 왕실의 안위를 맡은 궁중 호위인 숙위의 임무를 맡은 사람은 적어도 과거에 급제한 사람이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백문보는 이와 같은 주장이 모두 채택되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그가 전리판서로 있는 동안에 인재 등용이 참신해진 것은 틀림없는 일이다. 그리고 공민왕 10년(1316)에 홍건적(紅巾賊)의 난이 일어나자 왕을 모시고 몽진의 길을 떠났다. 이 난리로 개경 사국(史局)에 있던 사초(史草)와 실록(實錄)이 모두 불타 없어졌다.

이때 왕은 청주에 머물러 있으면서 공봉(供奉) 곽추(郭樞)에게 명하여 나머지 서책을 경상도 해인사에 옮기도록 명하였다. 이때 백문보는 공민왕에게 경기에 있는 국가의 중요 문건을 하향 먼 곳으로 옮기면 난리가 잘 수습되지 않는 줄 알고 민심이 흉흉해 질 터이니 중지하자고 건의하여 곧 중지케 하였다. 또한 백문보는 철저한 유학자이며 이상 정치를 실현하려고 노력한 학자이다.

고려 말의 안향(安珦) 백이정(白?正)과 한가지로 유교의 이상 정치를 주장하였다. 고려 말 문란해진 승려들의 생활과 정치 간여를 통박하여 그 폐단을 근절하도록 건의하였다.

공민왕은 백문보의 인품을 믿어 요직에 배치하였으나 불교정책과 승려 대우 문제로 차츰 멀어져 갔다. 백문보는 공민왕의 태도와는 아랑곳없이 정론으로 불교 폐단을 건백하였다.

당시 공민왕은 승려 신돈(辛旽)을 신임하여 정치를 내맡길 정도의 왕이었으니 불교를 비판하는 이를 용납할 처지가 못 되었다. 그러나 백문보의 인품이 정대하고 임금을 모시는데 지성이기 때문에 그의 건의를 무시할 수 없었다.

백문보는 승려 허가제를 실시하여 누구나 승려가 되는 길을 막았으니 조선시대 들어가서 실시한 승려도첩제(僧侶度牒制)의 시초라고 할 수 있다. 백문보가 승려 허가제를 실시한 것은 불교를 억제하고자 한 정책이 아니라 승려의 질을 향상시켜 불교의 제 자리를 찾게 하자는데 목적이 있었다는 듯하다.

고려 말 불교의 세력으로 보아 백문보의 승려 허가제가 실시에 까지 이르렀으니 그의 주장이 불교 승려도 수긍이 가거나 이론을 제기 할 수 없는 완벽한 제도였을 것으로 믿어진다.

공민왕이 홍건적을 물리치고 환도하자 환안도감(還安都監)이라는 관청을 신설하고 환도에 따른 제반 정비를 백문보에게 맡겼다. 환안도감에서 하는 일은 환도에 따른 제반 복구 작업을 맡아 안녕 질서를 되찾는 작업을 하는 관청이다.

공민왕은 환안도감의 책무를 백문보와 평양군(平陽君) 김경직(金敬直)과 같이 맡아 처리하도록 하였다. 백문보는 문한(文翰)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라 문적을 두루 정돈하였는데 이제까지 전해져 오던 전적이 모두 소실되었으므로 사관(史官)을 해인사(海印寺)로 보내어 두우통전(杜祐通典)을 가져다가 통전의 본을 따고 박충(朴忠)의 헌책을 받아 들여 새로운 의제(儀制)를 만들었다. 이 의제는 불교식 의식이 아니라 유교식 의제로 바꾼 것이다.

공민왕은 우왕(禑王)의 왕자 시절에 백문보를 사부로 삼아 훈도하게 하였다. 백문보는 강직함과 문한으로 훌륭한 왕사 재목이 분명하나 우왕은 어려서부터 왕재가 못되어 후일 폐위가 되었으며 고려를 멸망의 구렁으로 몰아넣었던 임금이다. 그것은 스승 백문보의 가르침을 제대로 받지 않았으니 참으로 딱한 노릇이다.

백문보는 왕자 우니노(?尼奴 : 우왕의 아명)를 바로 인도하려 무진 애를 썼으나 노력의 효과는 나지 않았다. 그러나 백문보가 조정에 바른 소리를 하면서 살았으나 신돈의 화를 당하지 않고 왕세자의 사부로 발탁되었으니 그의 고결한 인품과 정당한 행동은 간신도 어찌 하지 못한 것이다. 백문보가 신돈의 화를 당하지 않고 일생을 마친 것은 기적에 가까운 일이라 할 수 있다.

직산군(稷山君) 지명 봉군으로 피봉 되었다. 출생일은 기록에 없고 고려 1374(고려 공민왕 23)에 세상을 떠났다는 기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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