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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안 중엄리(안서동)에서 살던 민족작가 이기영 소설 “두만강”에서 천안읍내 1903년 실상을 본다.
천안읍내에 제일 먼저 들어 온 왜놈은 우편소가 생기면서 소장 원산이 와 체부 안본 이었다. 이 고을에 맨 먼저 들어 왔을 때에 읍내 사람들은 그들을 신기하게 대하였다. 그들은 경성 부산 간의 비밀 전신을 보장하는 사업을 담당하고 있었다. 정말 그들은 귀신도 모르게 비밀통신으로 서울과 동경 간의 중간 연락을 취하고 있었다.
청일전쟁(1894)을 승리한 왜놈들은 서울과 인천에다 거류민을 이주시킨 후에 그들의 보호를 빙자하고 군대를 주둔시켰다. 이렇게 한걸음씩 침략을 흉책하는 왜놈들은 마침내 조선의 우정권을 탈취하여 경성과 부산 간의 전신전화선을 가설하였다. 이에 성공하자 각처에 우편소를 설치하고 동경과의 비밀통신으로써 장래의 노일전쟁(1904)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것은 정치, 경제, 군사 등 각 방면으로 조선 실정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여 본국에로 보내게 하는 것이었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과연 그들은 현대문명의 이기로서 귀신의 조화를 부린다는 것이 결코 허황한 소문이 아니었다. 그리고 지옥사자와 같이 누런 복장을 입은 체부가 이따금 밖으로 나올 때는 가죽가방을 어깨에 메고 다니는데 그 속에는 귀신을 배송시키는 주문이 들어 있다는 것도 으스한 말이다.
그것은 한 달에 한 번씩 서울이 가까운 우편소로 그가 출장을 나가서 월말보고서의 비밀서류를 전달하고 돌아오기 때문에 왜놈의 이런 속을 읍내 사람이나 양반들이 알 턱이 없었다. 그야말로 어느 귀신이 잡아가는 줄도 모르고 그들은 여전히 태고적 생활을 꿈꾸고 있었다.
왜놈들은 전봇대를 늘어세운 뒤에 측량을 다시 하였고, 전기선이 여러 줄로 늘어가고 그 다음에는 읍내 뒤로 전봇대를 또 한 줄씩 세워 나갔다. 왜 전봇대를 쌍줄로 또 세울까? 전기선 줄을 늘이고 측량을 하고나면 또 다시 전봇대를 세우고 하였다. 그와 동시에 왜놈들이 푸떡푸떡 기어들었다.
이 고을에도 우편소가 생긴 후에 장터에서 모찌떡 장사를 시작하던 서강풍이와 재빼기에 방 한 칸을 빌어서 이발소를 낸 “가다방”이 그 뒤에 들어왔다. 한데 미구에 또 다시 도는 소문은 서울과 부산 간에 철로를 놓는다더니 과연 그게 정말이었다. 그때까지 이 고을 읍내의 호수는 불과 2백여 호였다. 그나마 대부분이 초가집이었고 주민의 대 다수는 농업에 종사하였다.
경부선 철로 공사는 1904년 11월 10일 완공되어 1905년 1월 1일 개통하고 천안역과 직산역이 영업을 개시했다. 1905년 5월 25일 오룡동우체국 자리에 천안임시우편소가 개소됐다. 그 전에는 천안군청에 임시우체담당 주사가 우편업무를 맡아 했다.
우표를 판매하고 우편물을 받고, 배달부를 두어 우편물을 배달시켰다. 1908년에는 천안역, 성환역에 전신취급소를 설치하고 일본인 전보직을 두었다. 1909년 천안, 성환우체소에서 우편, 전화, 전신을 취급하고 1910년 천안우편국으로 명칭을 바꾸고 1921년에 전화교환이 개신된다. 천안우편국은 천안 근대화 새 문명 개화의 관문이었다. 1949년 천안우체국으로 오늘의 명칭이 된다.
1903년을 기화로 천안은 새로운 문명으로 개명의 눈이 열리게 된다. 신문, 우편, 철도, 전신, 전화로 하여 귀신이 작란하는 기상천외의 놀라운 변화가 일어난다. 새로운 문명개화, 개명 근대화의 물결이 정신없이 밀려들어 온다. 우리 스스로가 아니라 힘에 밀려 어쩔 수 없이 근대화문명의 눈을 뜨게 된다. 이때 1903년 7월 6일 개화선각자 윤치호 박사가 천안 군수로 부임하여 천안을 위해 처음으로 기도한다.
“하늘의 축복이 천안에 임하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