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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 천안의 지명유래 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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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 천안의 지명유래 ①

성환읍 신가리.성월리.복모리.어룡리.대홍리.매주리

[천안신문] 본보는 이번호(151호)부터 천안 각 읍면동의 지명유래에 대한 연재를 시작한다.
 
천안이라는 지명에 대한 기록은 고려 태조 13년인 930년 8월 8일 기해 일에 고려태조가 대록에 내려와 동서도솔과 탕정의 일부와 사산의 일부와 대록의 일부를 병합하여 천안이라 하고 도독부를 둔데서 유래한다. 대록은 지금의 목천이요, 사산은 직산이며, 동도솔과 서도솔은 천안의 일부이며, 탕정은 온양 탕정의 일부다.
 
각 지역에 내려오는 천안의 지명은 1988년부터 이원표 선생이 동부 6개 면을, 1987년도부터 오세창 선생이 천안시를 조사해 1960년경 한글학회에서 발행된 ‘한국 지명총람’을 참고로 가감 수정해 동부 6개면은 1990년 천안군에서 ‘역사의 현장’으로 출간되었으며, 천안시는 1989년 천안문화원에서 ‘천안의 지명’으로 출간하였다. 그 후 1999년 천안시 문화원에서 시와 군에서 발행된 것을 합하여 ‘천안의 땅 이름이야기’로 출간했다.
 
이번 연재는 이를 바탕으로 했으며, 일부 내용은 천안 향토사학자 김종식 선생이 재조사를 통해 가감하였음을 밝혀둔다. <편집자 주>
 
성환읍사무소 전경.jpg▲ 성환읍사무소 전경.
 
▣성환읍(成歡邑)
 
성환읍은 본래 직산군의 지역이었으며 직산읍 서쪽의 세 번째 면이 되므로 삼서면(三西面)이라하여 성환내리(成歡內里), 중리(中里), 외리(外里), 남산(南山), 농촌(農村), 와우(臥牛), 가동(佳洞), 신리(薪里), 복모(伏毛), 수포(水浦)의 11개리를 관할하다가 1914년 행정 구역 통․폐합에 따라 이서면(二西面)의 우헐(牛歇), 신대(新垈), 송덕(松德), 금곡(金谷), 매곡(梅谷), 광주(光珠), 방축(防築), 신무(新茂), 임리(林里), 각금(各今), 왕지(王池), 금신(金新), 율가(栗加), 13개리와 일서면(一西面)의 당곡(堂谷), 일부와 이북면(二北面)의 중령(中令), 하령(下令), 궁리(宮里), 안양(安陽), 지족향(知足鄕) 수천(水川), 홍경(弘慶), 대하(大下), 대정(大井), 신정(新井), 사동(巳洞), 학선(鶴仙)의 12개리, 아산군(牙山郡), 삼북면(三北面)의 중왕리(中旺里)와 평택군 동면의 와야리(瓦也里)의 일부와, 경기도 양성군(陽城郡) 영통면(令通面)의 궁리(宮里), 상리(上里)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성환도찰방(成歡道察防)의 이름을 따라 성환면(成歡面)이라 하고 천안군에 편입되면서 우신, 송덕, 매주, 신방, 왕림, 율곡, 와룡, 신가, 복모, 어룡, 성환, 성월, 수포, 양령, 안궁, 수향, 대흥, 학정 18개리로 개편되었으며, 그 후 1973년 7월 1일 대통령령 제 6543호에 의하여 읍으로 승격되었다. 1989년 1월 1일 (천원조례 제 1084호 1988. 12. 31) 도하리가 입장면에서 편입되어 19개리가 되었다. 동쪽은 입장면과 직산면, 남쪽은 직산면, 서쪽은 아산시, 둔포면과 경기도 평택시, 팽성읍, 북쪽은 평택시와 경기도, 안성시, 공도면에 인접해 있다. 1914년 지방행정구역 통폐합 때 수포리(水浦里)가 성환면에 있었는데 그 후 평택으로 편입되어 성환면에서 분리되었다.
 
▲신가리(新佳里)
 
직산군 삼서면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으로 가종리, 신리와 경기도 양성군 영통면 궁리 일부를 병합하여 신리의 ‘신’자와 가동리의 ‘가’자를 따서 신가리라 하여 성환면에 편입되었는데 면이 읍으로 승격되어 성환읍 신가리가 되었다.
 
-가동(佳洞)골 : 섭리(燮里) 동쪽에 있는 마을. 신가리에서 가장 큰 마을. 낮은 산이 둘러싸여 있는 속이 된다. 신리(薪里)라고도 한다.
-거먹다리 : 흑교(黑橋). 군두보(群頭洑)에 놓인 다리. 소나무로 놓았는데 썩는 것을 막기 위하여 나무를 불로 그슬러 사용했다 한다.
-군두보(沒倭洑) :문화촌 서쪽에 있는 보. 평택군 팽성읍 북쪽 평야에 물을 대기 위하여 안성천을 막아서 보를 만들었는데, 그 깊이가 두질이 넘는다고 한다. 1894년(고종 31년)에 일본 마쓰사기(まつさき 송기 松崎)대위가 일개 중대를 이끌고 청나라 군대와 싸우다가 이 보에서 전멸되었다 한다.
-문화촌 : 가동 북쪽 큰길가에 있는 마을. 1940년경에 새로 이룩된 마을 성환읍의 문화적 모범촌이 되었다.
-망건다리 : 맹간교(盲看橋)다리. 망군(亡軍). 망근다리. 평택과 경계에 있는 큰 다리. 정유재란 때 왜군이 명나라와 우리 군에게 대패한 곳이라 한다.
 
▲성월리(成月里)
 
직산군 삼서면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으로 성환내리, 성환중리, 성환남리, 이서면의 광주리 일부가 병합하여 성환과 월봉산의 이름을 따서 성월리라 하여 성환면에 편입되었다. 면이 읍으로 승격되어 성환읍 성월리가 되었다.
 
-중리(中里) : 성환 아래쪽에 있는 마을.
-서편말 : 주막거리 중리 서쪽에 있는 마을.
-내리(內里) : 송골(松谷) 성환 안쪽에 있는 마을.
-성환(成歡) : 성월리에서 으뜸이 되는 마을. 예전에 성환역 터였다.
 
▲복모리(洑母里)
 
직산군 삼서면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으로 복모리 이북면에 대정리 일부가 병합하여 복모리라 하고 성환면에 편입되었는데, 면이 읍으로 승격되어 성환면 복모리가 되었다.
 
-복모리 : 문열보, 망전보, 이붓보의 세보머리 쪽이 되므로 보머리라 하던 명칭이 복모리가 되었다고 전해 온다.
-이웃보 : 망전보 위쪽에 있는 보.
-성재 : 보머리 뒤에 있는 산. 성처럼 둘러 있다.
-문열보 : 보머리 앞에 있는 보.
-문열들 : 보머리 앞에 있는 들.
-망전보(望戰) : 문열보 위쪽에 있는 보. 청일전쟁 때 이 보에서 일본군이 청군에게 망했다 해서 불러진 이름이라 한다.
-망전들 : 문열들 위쪽에 있는 들.
-돌석재 : 보머리 북쪽에 있는 산. 돌이 많이 있으며 철로가 지나간다.
-덤벙골 : 보머리 뒤에 있는 골짜기.
 
▲어룡리(魚龍里)
 
직산군 삼서면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때 어룡리 단일부락이 그대로 어룡리의 리명으로 성환면에 편입되었으며, 면이 읍으로 승격되어 성환읍 어룡리가 되었다. 지형이 어랭이 같이 생겨 어랭이, 어룡이 하던 것이 어룡리가 되었다고 전해진다.(어랭이는 댕댕이 넝쿨로 짠 곡식을 담는 도구의 일종. 풍수비보사상에서 나온듯한 말 같기도 하다.)
 
-우물제 : 어랭이 부락에서 지내는데 정월 초사흘날에 지내고 제관은 생기 복덕을 보아 좋은 사람으로 정하고 이장과 같이 지내며 제물은 삼색실과 떡을 놓으며, 앞의 선정된 집에서 제물을 장만하여 비용은 대동회에서 정하고 호당 배분한다. 집집마다 소지를 올려주며 축문을 읽었으나 최근에는 읽지 않는다. 제사 지내기 전에 샘을 청소하고 하루는 샘물을 먹지 않으며, 동네에 들어온 사람은 그 날 하루만은 나가지 않는 것이 예의로 되어 있다. 용왕제를 지내고 밤, 대추는 우물에 집어 놓는데 먼저 꺼내 먹는 여인은 아들을 낳는다고 하여 먼저 꺼내 먹으려고 아우성이며, 이 동네 남자들은 그 밤과 대추를 자기 어머니가 먼저 꺼내 먹어서 자기를 낳은 줄 알고 있다.
-용머리샘(전설) : 마을 옆으로 내룡이 나왔는데 용미리라 하며 샘이 있었는데, 고기가 살다가 용이 되어 하늘로 올라갔다고 전하여 온다.
-몽장골 : 옛날에 이곳에 몽장군이 살았다 한다.
-덕대 모퉁이 : 옛날에 이곳에 시체를 놓아두던 곳이라 하며 사금을 채취하던 곳이라 한다.
-개삼 : 동네 안에 있는 샘인데 온 동네 사람이 이 물을 먹는다고 한다.
 
▲대홍리(大弘里)
 
직산군 이북면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으로 홍경리, 대하리, 대정리 일부가 병합되어 대정 대하리에서 ‘대’자를 홍경리에서 ‘홍’자를 따서 대흥리라 하고, 성환면에 편입되었는데 면이 읍으로 승격되어 성환읍 대흥리가 되었다.
 
-개방(開防) : 갯방죽, 한 우물(큰우물) 남서쪽에 있는 마을. 전에 방죽이 있었는데 사금(砂金) 캐느라고 없어졌다.
-대정리(大井里) : 한 우물(큰 우물). 이 우물은 길 가던 스님이 영기 있는 우물이라 하여 해마다 음력 2월 2일이면 마을 사람들이 정성을 다하여 제사를 지내던 우물로써 하나밖에 없는 우물이라 한 우물이라 한다.
-대동네 : 광해군 때 민폐를 덜기 위하여 소사(素沙)들에 대동법을 실시 한 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홍경사 앞에 세웠다. 이 민구(李敏求)가 비문을 지었다.<현재는 평택시 소사동. 평택시의 기념물>
-대하(大下) : 대흥 저수지 아래에 있는 마을.
-복병(伏兵)재 : 복병티. 뱃봉재라고도 하는데 홍경리 앞에 있는 낮은 재(고개). 정유재란 때 명나라 장수 참정(參政), 양등산(梁登山), 부총(副總), 해생(解生)이 이곳에서 숨어 있다가 왜군을 크게 쳐부수었다고 한다.
-한우물 : 대정리(大井里) 홍경리 동쪽에 있는 마을 우물이 있는데, 청일전쟁 때 일본군이 이곳에 진을 치고 싸웠다고 한다.
-홍경원(弘慶院)터 : 홍경사 앞에 있는 원(院)집터. 왕래하는 행인들의 편의를 위하여 고려 제8대 현종 때 함께 원을 두어서 출몰하는 도적의 피해를 막았다.
-홍경잇돌(弘慶院坪) : 홍경원 앞에 있는 큰 돌. 조선 제7대 세조 10년(1464) 3월 17일에 세조가 온양온천에서 돌아오는 길에 이곳에서 하룻밤을 자고 갔으며, 제14대 선조 30년 9월8일에 명나라 장수 양등산과 해성이 이곳에서 왜적을 크게 막아 왜적의 서울 진입을 막았다.
-홍경사비(弘慶寺碣碑) : 홍경사 터에 있는 비. 높이 214cm 넓이 10cm. 고려8대 현종 17년에 아버지 안종의 뜻을 받들어서 지었다 하여 봉선 홍경사라하고 한림학사 최충(崔沖)이 어명을 받아 글을 짓고 백현례(白玄禮)가 글씨를 썼는데, 홍경사의 사적을 자세히 적었으며 국보 제7호로 지정되었다.
 
봉선 홍경사 갈기비.jpg▲ 봉선 홍경사 갈기비
 
◈봉선 홍경사 갈기(奉先弘慶寺碣記)
 
신(臣)이 삼가 살펴보니, 내전(內典)에 이르기를, 『「초제(招提)」라 하는 것은 십방(十方)의 영재(英才)와 준재(俊才)를 이끌어 불법(佛法)을 크게 천명(闡明)하고 그곳에 멈추어 거처(居處)하게 하는 곳이다.』라고 하였고, 또 장자(莊子)에는 『여관(旅館)에서 쉬면서 인(仁)과 의(義)를 살펴본다.』고 하였으며, 진서(晉書)에는 『여관(旅館; 逆旅)에서 논의하여 공(公)과 사(私)를 정한다.』고 하였으니, 지금 직산현에서 성환역으로 가는 북로(北路)에, 소 한 마리 울음소리가 들릴 만한 곳에 사원(寺院)과 사옥(舍屋)을 신설한 것이 곧 그러한 종류(種類)이다.
 
처음에 이 땅은 크고 작은 정자(亭子)하나 없었으며 사람들의 왕래가 끊어지고, 부들 따위 수초(水草)가 자라는 연못이 있을 뿐이어서 도적들의 겁탈이 빈번하게 많았다. 비록 갈림길의 요충지이나 실제 왕래하기가 어려웠으니, 마침내 막힌 채로 태평성대에 붙여 두어서는 아니 도니다. 생각하건대, 우리 성상(聖上)께서 인(仁)으로써 왕위를 지키시고 문(文)의 덕(德)을 잡으시어 모든 전쟁이 사라지고, 예법(禮法)․음악(音樂)․형법(刑法)․행정(行政)을 모두 수행(修行)하셨으니, 만약 이에 희사(喜捨)의 인연으로 추모의 사업을 선대(先代)에서 구하신다면, 지나칠 것이 없으시다.
 
일찍이, 좌우 양가 도승통 통진광교 원제홍도 대사 신 형긍(左右兩街 都僧統 通眞光敎 圓濟弘道 大師 臣 逈兢)에게 내리신 조서(詔書)에 『옛날에 아버님(皇考) 안종 헌경효의 영문대왕(安宗憲景孝懿英文大王)께서 처음에 몸을 숨기셨다가 대천세계(大千世界)에 귀명(歸命;歸依)하시어 매양 법화경의 오묘한 불설(佛說)을 읽으시고 중도(中道)의 화성(化城)을 깊이 아름답게 여기시어, 힘써 행하고자 하셨으나 훈업(勳業)을 이루지 못하셨다. 짐(朕)은 곧 그 뜻을 잘 계승하여 그 완성을 영원토록 볼 것이니, 하나는 여행하는 사람들을 구제하여 험한 곳에서 근심이 없게 하고, 또 하나는 승려(僧侶)를 불러 이끌어 법륜(法輪)에서 거느리게 하노니, 대사(大師)는 마땅히 힘써 도와서 이룩되는 것을 살피고, 몸소 친히 서로 함께 살면서 내가 글로 굳게 명령한 것에 부응하고, 그 사업을 생각하는 권한을 주재(主宰)하라.』고 하셨다.
 
형긍(逈兢)이 겨우 임금님의 말씀을 받자옵고 갑자기 경영의 시작을 꾀한 것이 비록 아홉 차례나 되었으나, 게으름이 없이 모름지기 백 개의 발이 되어 쓰러지지 아니하였다. 귀한 것은 마음을 한가지로 하여 장차 후학들과 화합한 것이니, 이에, 광리증현 대사 사자사문 신 득총(廣利證玄 大師 賜紫沙門 臣 得聰)과 정려수진 오리대덕 사자사문 신 장림(靜慮修眞 悟理大德 賜紫沙門 臣 藏琳) 등이 다투어 도와주고, 원곡(願?), 매복(枚卜), 요도(要道) 등이 무리를 지어 이곳에 오니, 실지로 우리 역사(役事)가 흥성하였다.
 
성상(聖上)께서 계속하여 추성치리 익대공신 금자흥록대부 병부상서 지중추원사 겸 태자태부 상주국 천수현 개국남 식읍 삼백호 신 강민첨(推誠致理 翊戴功臣 金紫興祿大夫 兵部尙書 知中樞院事 兼 太子太傅 上柱國 天水縣 開國男 食邑 三百戶 臣 姜民瞻)과 중추부사 중대부 비서감 겸 태자빈객 주국 의춘현 개국남 식읍 삼백호 사자금어대 신 김맹(中樞副使 中大夫 秘書監 兼 太子賓客 柱國 宜春縣 開國男 食邑 三百戶 賜紫金魚袋 臣 金猛) 등을 별감사(別監使)로 차출하시었다. 이에 일마다 조화(調和)를 이루고 한가지로 다스리며, 비방(誹謗)을 끊고, 교만함을 펴서 무리를 다스렸다. 농사철을 빼앗기지 않게 하고 필요한 물건들은 공금에서 번거로움을 면하게 하였다. 도공(陶工)은 기와를 만들고, 목수는 눈바람 속에 톱질하고 도끼질하여 재목을 제공하였으니, 호탕한 마음을 지닌 장인(匠人)들이 벌떼처럼 모여든 것이었다. 구름처럼 많은 사람들이 가래질하고, 번개처럼 빨리 삽질하였으니, 놀고 있던 사람들의 무리가 준마(駿馬)처럼 달려왔던 것이다.
 
병진년(1016) 가을에 기공하여 신유년(1021)에 이르러 무릇 당(堂)․전(殿)․문(門)․랑(廊) 등 모두 200여 간을 지었고, 설치한바 소상(塑像)․화상(畵像)․제공덕상(諸功德像) 및 종(鐘)․경(磬)․번(幡)․개(盖)가 현재와 같이 구비하였으니, 그 수효가 이렇게 번화하였다. 이에, 칙명으로 「봉선 홍경사(奉先 弘慶寺)」라 사액(賜額)하시니, 마치 날아오는 듯한 형세로 모여드는 민심(民心)을 얻음으로 인하여 공적을 이룬 것이다.
 
불상(佛像)을 모신 전각(殿閣)과 불경(佛經)을 보관한 누각(樓閣)은 화려(華麗)하고 경이(驚異)로와, 완연히 도솔천(도率天)과 같았으며, 부종(鳧鐘)과 안탑(雁塔)은 장엄하여 멀리서도 난타(爛陀)임을 알게 되었다. 이미 삼보(三寶)가 발흥(勃興)함을 당하였으니, 진실로 천 개의 등불이 서로 이어질 것이다. 그리고, 사우(寺宇) 서쪽 한 구역(區域)에 합계 80여 간의 객관(客館)을 대립(對立)하여,「광연통화원(廣緣通化院)」이라 이름 하니, 이것 역시 따뜻한 집(溫廬)은 겨울철에 빽빽하게 재우고, 시원한 집(凉屋)은 여름철에 널찍하게 재우며, 식량과 말먹이를 비축하여 긴급할 때에 제공하고, 「옹백(擁伯)의 의장(義漿)」을 설치하여 식수(食水)를 공급하며, 누각(樓閣)에 북을 진열하여 매달아, 도적과 간악한 짓을 방비하였다.
 
무릇 이와 같이 하니, 가사(袈裟; 方袍)를 입은 승려(僧侶)의 무리가 빈(虛) 마음으로 왔다가 실(實)한 마음으로 돌아가고, 또한 걸어서 먼 길을 여행하는 무리로 하여금 밤에는 잠을 자게하고 낮에는 쉬게 하니, 마침내 진리를 증명하는 경지를 보였으며, 분탕질하는 근심이 들리지 않게 되었다. 지난날에 만약 옛 일을 짐작하여 지금에 계승하고 선황(先皇)의 홍원(弘願)을 치성(致誠)드리며, 기회를 따라 가르침을 베풀고 부처님의 묘문(妙門)에서 입은 것을 숭상하지 아니하였다면, 겸하여 그들을「인(仁)」으로 구제하는 일은 거의 하지 못 했을 것이다.
 
아! 일의 권여(權輿)에는 조금씩 나아가며 아버님의 뜻을 이어받아 훼손(毁損)함이 없이 상세(詳細)하게 진술(陳述)하시고, 아버님께서 이룩하신 일을 이미 잘 이어받으신 공(功)이 있으시며, 봉행(奉行)하시는 도리(道理)가 또한 넓으시어, 선(善)과 미(美)를 다하시겠다는 생각을 항상 몸에 지니셨다. 이제, 유생(儒生)에게 신칙하여 성대한 사업을 기록하라 명하시니, 신(臣)은 생각이 더디어 입술이 타고, 학문이 얕아서 근육만 씹고 있었다. 비록 사마상여(司馬相如)와 같은 문장으로 능히 할 수 없거늘, 소자(小子)가 비연(斐然)한 작문에서 표절(剽竊)하고 감히 모방(模倣)하여, 일의 처음과 끝을 약술하였으니, 애오라지 실록(實錄)에서 보충한 것이다.
 
때는 성상(聖上; 高麗顯宗)께서 등극하신지 18년이요, 태평기력(太平記曆) 6년(1026) 여름 4월 일에 삼가 기록하였다.
 
한림학사 선의랑 내사사인 지제곡 겸 사관 수찬관 사자 금어대 신 최충(翰林學士 宣議郞 內史舍人 知制誥 兼 史館 修撰官 賜紫 金魚袋 臣 崔沖)은 하교를 받들어 글을 짓고(奉敎撰), 봉의랑 국자승 신 백현례(奉議郞 國子丞 臣 白玄禮)는 하교를 받들어 글씨를 쓰고(奉敎書) 아울러 전서하다(幷篆)<김백선. 권선길 번역. 김종식 정리>
 
-전설 : 비의 갓 위에 돌 세 개를 던져 올려놓으면 아들을 낳는다고 하여 아들 없는 여인들이 돌을 던져서 비 갓 위에 올려놓으려고 돌을 많이 던져 비의 갓이 많이 훼손되었다.
-홍경사터(봉선홍경사터) : 큰길가의 홍경사 터. 고려 제8대 현종이 그 아버지의 뜻을 받들어 현종 7년(1016)에 이곳에다 큰절을 짓기 시작하여 200여 칸의 절을 완성했으며 봉선홍경사라 하고 승려들을 많이 모아 불법을 수행(修行)하게 하였으며, 행인들을 도적으로부터 보호하였는데 공주 명학소의 천민인 망이 망소이 난 때 불타서 소실되었다고 한다.
 
▲매주리(梅珠里)
 
직산군 이서면의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으로 매곡리, 광주리, 일부가 병합하여 매곡리의 ‘매’자와 광주리의 ‘주’자를 따서 매주리라 하고 성환면에 편입되었는데, 면이 읍으로 승격되어 성환읍 매주리가 되었다.
 
-광주(光珠)말 : 매곡 북쪽에 있는 마을. 오룡쟁주(五龍爭珠)형의 명당이 있다고 전해 온다.
-가는골(細谷) : 망경사 앞에 있는 골짜기.
-돌물뿌리 : 매곡 서북쪽에 있는 산 부리. 물이 돌아 흘러간다고 한다.
-대저거리 : 매곡 동남쪽에 있는 골. 절이 있었으며 철 일을 하던 대장간이 있었다.
-망경사(望鏡寺) : 성산에 있는 절. 1927년에 건립되었다고 한다.
-매곡(梅谷) : 매주리에서 가장 큰 마을. 지형이 매화낙지형(梅花落地形)이라 한다. 철 생산지였다.
-박셋들 : 매곡 앞에 있는 들. 논이 별로 좋지 못하다고 한다.
-새터말 : 대저 거리 아래쪽에 새로 된 마을.
-세프니 : 진중 신촌(新村) 광주리 서쪽 길 등성이에 새로 생긴 마을. 이 일대가 사금이 많이 나온다.
-점골 : 매곡 동쪽에 있는 골짜기. 옹기점이 있었다.
-오얏골 : 점골 옆에 잇는 골짜기.
-탑골 : 망경옆에 있는 골. 옛 탑이 있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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